[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7) 시노달리타스 영성: 제1부(43~46항)

시노달리타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는 성령론적 차원이다. 「최종 문서」만 해도 ‘성령’이란 단어는 93회나 호명된다. 이것은 성부가 5회, 성자가 6회 호명되는 것과 비교된다. 이미 제16차 정기총회를 시작하면서 교황청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는 ‘주 성령님, 저희가 주님 앞에 있나이다(Adsumus Sancte Spiritus)'를 총회의 공식 기도문으로 배포한 바 있다. 이 기도문은 수 세기 동안 공의회, 시노드 그리고 교회의 주요 의사 결정 모임을 시작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전통적인 기도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이 기도문을 바치면서 성령의 도움을 청했다. 이 기도문은 성령께서 적극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어 우리를 이끌어 주시길 간청한다. 성령의 역할에 대한 이런 강조는 과거 서방교회가 성령의 역할을 간과하거나 그리스도와 달리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분으로 인식하던 것과 크게 대조적이다. 이미 「편람」은 시노드의 경청 과정이 단순히 사람들 상호 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 성령의 목소리를 식별하는 체험이라고 말하였고(1.1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종 문서」에 관한 공지를 통해 제16차 정기총회의 전체 시노드 과정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이 시대의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쇄신 ‘은총의 우선성’알 때만 가능 「최종 문서」는 영성적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란 무엇보다 세례자의 일상생활과 교회 사명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는 영적 태도(자세)라고 말한 바 있다.(43항) 시노달리타스는 성령의 활동에서 비롯하며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묵상하고, 침묵하고, 마음의 회심을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과 만물 안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목소리를 식별하는 법을 배우고, 성령께서 나눠 주신 다양한 선물들을 감사와 겸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으며 온 교회가 ‘함께’ 동반과 지원을 통해 걸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쇄신은 은총의 우선성을 알 때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최종 문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깊이가 부족하면 시노달리타스는 조직 운용 기술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43-44항) 따라서 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참여에 열린 기도, 공동 식별, 나눔에서 봉사로 이어지는 전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 안에서 대화’는 나름의 한계가 있지만 시노드 교회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성령의 분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복음적 분위기 속에서, 믿음의 빛으로 나눔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45항) 「최종 문서」는 ‘서문’에서 우리가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성령 안에서 대화’를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분의 현존을 느꼈다고 했고(1항), 이 길을 걷는 것은 정의의 행위이자 이 세상에서 하느님 백성의 선교 임무이며, 이 길을 계속 걷고자 하는 열망이 시노달리타스 쇄신의 열매라고 했다.(46항) 매번 다시금 물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과연 그렇게 하기를 열망하고 있는가? 글 _ 엄재중 요셉(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4면

[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6) 조화(harmony)로서 일치: 제1부(34~42항)

개인주의가 점점 더 가속화하고 서로의 차이를 차별로 연결시키는 데 익숙해진 오늘의 세계에서 시노달리타스는 상호적 관계 맺음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환기시킨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차이들은 오히려 타인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하고 풍요로운 인격적 성숙으로 초대한다. 이에 시노드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서로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관계를 꽃피우는 곳이다. 그리고 가정은 경청, 식별, 결정, 권위의 수용과 실천 등의 시노드 정신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특권적 자리가 된다. 제16차 정기총회 과정은 교회 내 다양한 은사와 직무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새롭게 자각하게 했다. 이에 따라 세례받은 모든 이는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고, 그 책임을 공동으로 완수해야 한다. 「최종 문서」는 이 지점에서 오늘의 교회 안에서 성(性), 세대,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적 조건 등에 따른 제약들이 하느님 백성의 참여를 어렵게 했음을 고백하고,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36항) 교회 안에서 개인들의 상호 관계는 교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다양한 지역 교회들은 각각의 민족과 언어, 고유한 예식과 영적 유산을 지니고 다양성 안에서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 지역 교회들은 만남과 상호 이해, 그리고 각자의 선물들을 나눔으로써 이를 자라나게 한다. 시노달리타스를 통한 교회 쇄신은 하느님의 보편적 부르심이 이뤄지는 장소들과 그 맥락들(상황)을 소중히 여긴다. 그 보편적 부르심의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의 메시지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지역 교회들은 서로에게 주어진 이 선물들을 나눔으로써 교회 전체를 풍요롭게 한다. 맥락, 문화, 다양성과 상호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의 선물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인 일치와 종교 간 대화의 영역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다양성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려는 고집을 버리고 다른 관점 역시 수용하라는 초대이다. 여기서 교회 안의 사람들은 누구나 공동의 일을 완수하는 데 특별하고 필요불가결한 기여를 하는 존재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교회의 삶과 사명을 실천하는 데서 배제되는 사람은 없다. 「최종문서」는 시노드 교회를 오케스트라에 비유한다.(42항) 시노드 여정에서 각 지역 교회는 고유한 리듬과 소리를 내는 악기(특수성과 전통)이며, 이 악기들이 서로의 소리를 경청하고, 자신의 소리를 아낌없이 나누며(은사, 경험), 전체 교회가 하나의 조화로운 음악(친교와 사명)을 연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노드적 실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문서」가 말하는 ‘조화’는 시노달리타스 안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통합하는 성령의 역동적 작용을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성과 차이는 그것이 놓인 구체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이를 더욱 꽃피울 때, 비로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치의 풍요로움을 맛보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글 _ 엄재중 요셉(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20면

[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5)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적 의미: 제1부(28~33항)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적 의미를 설명하는 이 단락들에서는 먼저 고대의 ‘시노드’ 관행에서 시작된 시노달리타스의 역사적 연원과 오늘의 의미를 말하고(28항), 시노달리타스를 살아가는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성모님에게서 발견하며(29항), 삼중적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를 다루고 있다.(30항) 더 근본적으로 시노달리타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친교’ 개념의 구체적 실현이며(31항), 복음화 사명에 그 목적이 있음을 상기시킨다.(32항) 실천적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는 교계적 권위를 이해하는 새로운 틀이며 온 교회의 회심과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33항)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는 초기부터, 곧 「예비 문서」가 발표된 시기부터 시노달리타스가 무엇인지 계속해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갔던 시노드라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최종문서」에도 지속됐는데 그만큼 시노달리타스의 의미가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이어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 시노드 막바지에서 시노달리타스 의미에 관한 수렴이 무르익었다면서 이를 여러 측면에서 정의했다. 시노달리타스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온 인류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향해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이 동행은 교회 생활의 다양한 차원에서 함께 모이는 것, 상호 경청, 대화, 공동체적 식별, 성령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동의(합의) 형성, 그리고 분화된 공동 책임성 안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통해 구체화된다. 단순한 이론 아닌 실천적 길 복음화 사명 향한 회심 촉구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실천적인 길이다. 그것은 더 참여적이고 사명 수행에 전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길, 더욱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며 모든 남녀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한 영적 쇄신과 구조 개혁의 길(28항)이다. 나아가 「최종문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조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시노달리타스는 무엇보다 교회의 삶과 사명을 특징짓는 ‘고유한 방식’인데, 이것은 교회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과 작용 방식에서 표현된다. 둘째, 시노달리타스는 신학적, 교회법적 의미에서 ‘교회 구조와 교회 절차들’이다. 셋째, 시노달리타스는 관할 권위로 그리고 교회 규율로 정해진 특정 절차에 따라서 교회가 소집되는 ‘시노드적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시노달리타스 개념은 ‘친교’와 ‘복음화 사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친교 개념, 곧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결합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이뤄지는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표현하는 친교는 이제 시노달리타스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고,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친교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일부 오해를 불식하고자 시노달리타스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화 사명을 지향한다고 확인하게 된다. 이런 시노달리타스의 역동성은 교계 직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교회의 회심을 촉구한다. 교계 직무는 하느님 백성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설하고 교회적 친교를 증진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로 제시된다. 글 _ 엄재중 요셉(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0면

[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4) 하느님 백성의 신학적·영성적 토대: 제1부(13~27항)

「최종 문서」 제1부는 부활 아침의 세 제자 곧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그리고 시몬 베드로에게서 시작한다.(요한 20,1-2 참조) 제자들은 혼자서는 온전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없다. 그들은 서로 기대고 협력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할 수 있다. 이 상호 의존을 「최종 문서」는 ‘시노달리타스의 심장’이라고 부른다.(「최종 문서」 13항) 이를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소명과 은사, 직무 사이에서의 상호 존중과 겸손이 필요하다. 시노달리타스는 개인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적 삶을 본질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구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의 백성을 이뤄 당신을 섬기도록 하셨기 때문이다.(「교회 헌장」 9항) 하느님 백성은 시노달리타스와 사명의 역사적 주체로서, 함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언한다. 세상은 사람들을 그의 지위나 역할로 구분하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세례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다. 과거에는 교회를 교황, 주교, 사제, 평신도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로 이해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서 흘러나오고(「최종 문서」 15항), 성품 직무와 교계 제도는 그 토대 위에서 이 백성에 봉사하기 위해 세워졌다. 하느님 백성은 성당의 울타리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영위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모든 민족,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복음을 증언하는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주체들이다.(17항) 그리고 그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시혜의 대상자가 아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육신을 만난다.(19항)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하게 되도록 부름받았으며, 그들을 복음화의 주역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구성원 모두 동등한 존엄 지녀 교계 제도는 봉사를 위한 토대 세례 때 받은 성령 덕분에 신자들은 복잡한 신학을 몰라도 하느님의 뜻과 진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 곧 ‘신앙 감각’을 갖는다.(22항) 하느님 백성 전체가 신앙과 도덕에 대해 동의할 때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확신은 시노달리타스의 중요한 전제다. 이것은 이번 시노드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교회의 삶에서 가능한 많은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이유가 된다.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세례에서 시작해 견진과 성체성사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입문’의 여정은 시노달리타스를 배우는 첫 번째 학교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교회의 지체들은 함께 걷는 법을 익히게 된다. 특히, 주일 성찬례는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이라는 사실을 통해 교회가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는 법을 가르친다. 「최종 문서」는 ‘성찬의 모임’과 ‘시노드 모임’이 깊이 연결돼 있다고 본다.(27항) 전례가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행위이듯, 시노드 역시 말씀을 경청하고 식별해 실천하는 행위다. 따라서 우리 본당 전례가 시노달리타스를 더 잘 표현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사목자와 신자 공동체는 함께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글 _ 엄재중 요셉(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8면

[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3) 시노드 여정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서문(1~2항)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최종문서」는 교회 생활의 모든 새로운 발걸음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으로 돌아가는 것, 곧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천명하고(1항),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을 문서 전체의 전개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파스카의 새벽에서처럼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식별하며 나아갈 때,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길을 보여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최종문서」의 ‘서문’(1~12항)은 시노드 여정의 영적 토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의 관계, 그리고 「최종문서」의 목적과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시노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교회는 세상의 고통과 상처를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고, 참회와 회심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자비로운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시노드 총회의 대의원들은 시노드가 세상과 단절된 골방에서 벌어지지 않고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상처를 통해 지금 세상에서 몰아치고 있는 전쟁과 폭력, 빈곤, 불의를 더 잘 직시한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의 고통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회 스스로도 세상의 죄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체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상처 입었음을 인정하고 참회와 회심의 길로 나서야 한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의회 가르침 실현하는 길 시노달리타스가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한 새로운 신학적 유행 아닌가 하는 우려를 의식한 듯, 서문은 이번 시노드 여정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과정임을 분명히 한다. 시노드 여정은 공의회가 가르친 ‘신비로서의 교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실현하는 것이며, 이는 공의회를 더욱 진지하게 수용하는 행위이다. 오늘의 교회는 공의회가 뿌린 그 씨앗을 세상과 교회 안에서 싹틔우고 성장시켜야 할 책임을 갖는다. 서문은 시노드 여정의 핵심 부르심이 세례성사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이 부르심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례받은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으로, 세례로 받은 공통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이에 따라 하느님 백성 전체는 복음 선포의 주체이다. 세례받은 모든 이는 선교의 주역이 되도록 부름받은 ‘선교하는 제자들’이다. 시노드 여정은 결국 우리 모두가 선교하는 제자임을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입증하는 것일 터이다. 시노드 거행을 마무리하면서 서문은 지난 3년의 여정을 돌아보며,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과 은총을 고백한다. 지역 교회, 국가, 대륙 그리고 총회로 이어진 과정에서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에 귀 기울였으며, 이를 통해 교회가 주님을 따르고 사명에 봉사하는 기쁨을 얻고 쇄신을 이루라는 부르심을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피로감, 변화에 대한 저항, 자기 생각을 앞세우려는 유혹도 있었으나, 참회와 회심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길에서 「최종문서」는 시노드의 결론을 알려주는 문서가 아니라 ‘이행 단계’를 위한 열쇠이다. 이제 각 지역 교회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시노달리타스를 위한 가시적인 회심(전환)이 이뤄지도록 노력할 것을 요청받는다. 글 _ 엄재중 요셉(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20면

[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2)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가 불러온 ‘근본적 새로움’

코로나19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며 온 인류가 감염의 공포 속에서 고립과 격리의 삶을 살아가던 시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초대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는 주교시노드 역사와 교회의 삶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분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 그 만남을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최종 문서」, 1항) 먼저, 제16차 정기총회는 시노드의 시작부터 가능한 많은 하느님 백성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경청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시노드는 처음부터 신자만이 아니라 비신자, 사회와 교회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이는 과거의 주교시노드 총회들이 주로 주교들이나 사목과 신학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에 한정된 측면이 많았다는 점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졌다. 시노드 방법론 자체도 과거와 큰 차이를 보였다. 과거에 교황청 시노드 사무처가 마련해 지역 교회에 보낸 「의제 개요」의 구체적인 질문은 제한된 답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달리 제16차 정기총회에서는 「예비 문서」를 통해 시노드적 경청과 대화 모임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특별히 성령의 현존 안에서 온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경청하고 대화하는 공동 식별 방식으로서 ‘성령 안에서 대화’를 채택했다. 또, 과거의 주교시노드는 준비에 1년, 총회 거행에 단 1개월이 걸렸다면 제16차 정기총회는 준비와 거행에 3년, 그리고 시노드 결실을 지역교회에서 이행하는 과정에 3년을 보내도록 하면서 그 깊이와 넓이를 더했다. 곧 여러 지역교회에서 경청된 수많은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는 로마의 시노드 총회를 통해 식별됐고, 이것은 다시 지역교회들에 보내졌다. 이런 역동적 순환 과정이 2023년과 2024년에 걸쳐 두 차례나 이뤄졌다. 소외된 목소리 찾아나서며 평신도·수도자에 투표권 부여 ‘하느님 백성의 의회’로 전환 제16차 정기총회에서는 ‘대륙별 단계’도 이뤄졌는데, 이 모임을 ‘주교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교회 회의’로 진행했다. 이것은 로마에서 이뤄진 시노드 총회에서도 이어져 주교들만이 아니라 다수의 사제와 평신도, 수도자가 참여했고, 그들에게 투표권까지 부여됐다는 점은 놀라운 변화였다. 시노드 과정의 결과로 2024년 10월 총회 뒤에 참석자들은 「최종문서」를 발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문서를 즉시 교황의 통상 교도권에 해당하는 문서로 추인했다. 과거의 시노드에서는 총회를 마치고 그 총회의 결실을 약 1년 뒤에 별도의 교황 후속 문서로 발표했지만, 이번 총회에서는 그 결실을 교황이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새롭고도 획기적인 변화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2028년까지 이르는 구체적인 ‘이행 단계’를 약속함으로써 「최종문서」로 수렴된 시노드의 결실이 지속적으로 실천되고 정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곧 「최종문서」는 시노드를 끝내는 문서가 아니라 시노드 여정에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는 ‘열쇠’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글 _ 엄재중 요셉(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0면

[함께 읽는 시노드 최종문서] (1) 함께 읽기를 시작하며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 친교, 참여, 사명’을 주제로 2021년 개막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가 현재 ‘이행 단계’를 보내고 있다. 이행 단계란 크게 준비와 거행 그리고 이행의 세 과정으로 구성되는 주교시노드 정기총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이것은 시노드 준비와 거행 기간에 이뤄진 결실을 전 세계 지역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기간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 본당에서 이 이행 단계를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아직도 주교시노드나 ‘시노달리타스’는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수용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가 현재 생각하는 이유는 대략 아래와 같다. 일단 신자들은 ‘Synodalitas’라는 라틴어를 여하한 번역 없이 그대로 부르는 것에서 오는 이질감이 크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번역어로 사용했던 ‘공동합의성’이 완벽한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문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교구장 사목교서 등에서는 나름대로 주교시노드나 시노달리타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자들이 살아가는 본당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을 찾기 어렵다. 이와 관련한 조사들을 봐도 현재 본당 신부의 강론이나 신앙 교육, 여러 신심단체 활동에서도 시노달리타스를 언급하는 본당이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 번째, 많은 신자가 주교시노드를 교황님이 시켜서 하는 일시적인 행사 정도로 그리고 이를 본당 차원에서 책임지고 있는 사목자들 역시 행정적인 과제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는 개인주의적 신앙생활 때문이다. 점점 더 개인화하고 원자화하는 사회적 삶 안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 역시 개인주의화 돼 있다. 곧 주일미사만 참례하고 뿔뿔이 집으로 향하는 신자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교회의 현실과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대화하는 과정 자체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의 함께 걸어가기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국의 많은 본당에서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 생활이 일반적이다. 곧, 신자들 스스로 교회 안에서 자신을 책임 있는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요인들을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목 현장에서 시노달리타스가 수용되기 어려운 문제의 원인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그 결과로 봐야 할지는 애매하다. 오히려 문제의 원인과 결과들이 뒤섞여 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첫 번째 이유를 제외하고는 시노달리타스는 어쩌면 위와 같은 원인을 해소하고자 추진됐지만, 그 질곡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노드 이행 단계의 출발점이자 기준점으로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최종문서」를 함께 읽는 이 칼럼의 첫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면 그러한 한국교회의 고유한 토양들을 감안하면서 읽어 가겠다는 나름의 의향이 있어서다. 시노드 이행 단계는 시노드를 끝내자는 게 아니라 시노드의 결실을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의 교회적 삶에서 실천하자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글 _ 엄재중 요셉(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한국교회의 시노달리타스 실현 주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