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예수 성심 호칭 기도(Litaniae Sacri Cordis Iesu)

예수회와 예수 성심의 관계는 17세기 후반 클로드 라 콜롱비에르 성인과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녀에게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1549년 성 베드로 가니시오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구원의 물을 길어 마시는 샘’으로 보았다면, 또 다른 예수회원은 예수 성심을 성모 성심과 함께 자신의 내면에 모시는 환시를 경험했다. 바로 스페인의 성 알폰소 로드리게스(Alfonso Rodriguez, 1532~1617)다. 그의 삶은 빛나는 이력, 뛰어난 학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아내와 세 아이를 연달아 잃는 불운을 겪은 뒤 예수회에 입회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고, 학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아 사제가 아닌 평수사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로드리게스는 마요르카의 몬테시온 대학에서 46년간 문지기로 살았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일하며 깊은 내적 체험을 기록하거나 구술했다. 당대 여러 자서전이 그렇듯, 성인은 이를 삼인칭으로 증언한다. “이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이러하였다. 하루는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영 안에서 성모님과 그분의 복되신 아드님께서 그에게 오셨다. 아드님은 어머니의 오른쪽에 계셨고, 그 복되신 아드님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 잡으셨다. 그리고 동정녀께서는 또 다른 마음을 가져오셔서 그의 다른 쪽에 놓으셨고, 그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하여 두 분께서는 그의 안에 함께 머무르셨다.” 미술사가 호세 가메스 마르틴은 이를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이 동시에 나타난 초기 예시라고 보며, 로드리게스 성인을 예수·성모 성심 신심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지목한다. 이런 흐름을 떠올리면,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이라는 전례적 배치도 새롭게 보인다. 17세기 인쇄 문화에서 ‘심장’과 ‘마음’의 신학이 글과 이미지로 확산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안톤 비에릭스 2세의 동판화 연작 <사랑하는 예수님께 봉헌된 마음(Cor Jesu amanti sacrum)>은 심장을 아기 예수께서 거하시는 처소로 그렸다. 예수회원 헤르만 휘호(Herman Hugo, 1588~1629)의 저서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도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영혼의 갈망과 내면의 정화를 ‘하트’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성심 신심과 친숙했던 예수회와 그와 관련된 시각 문화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예수 성심 호칭 기도’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한 사람이 만든 기도문이 아니라, 17~18세기의 여러 성심 호칭이 합쳐져 완성되었다. 그 주요한 뿌리 중 하나가 프랑스 예수회원 장 크루아제(Jean Croiset, 1656~1738)의 1691년 신심서에 수록된 호칭 기도였고, 훗날 33개 명칭으로 확장되어 1899년 레오 13세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숫자는 그리스도의 생애 33년을 기념하는 뜻도 지닌다.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 성심, 창에 찔리신 예수 성심, 모든 위로의 샘이신 예수 성심, 생명이요 부활이신 예수 성심.” 이름을 하나씩 부르다 보면, 예수 성심은 추상적인 신심의 표지를 넘어 하나의 길이 된다. 창에 찔린 성심은 상처 입은 마음이면서 위로의 샘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한 마음이자 생명과 부활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문을 여는 일

봄이 오면 꽃이 핍니다. 목련이 가장 먼저 봄의 시작을 알립니다. 3월, 초등학교 담장의 개나리가 등교하는 아이들을 반기려는 듯 고개를 내밉니다. 4월, 봄의 절정을 축하하며 벚꽃이 만발합니다. 이팝과 조팝이 하얀 눈이 내리듯 소복소복 피어납니다. 5월, 눈길이 닿는 곳마다 철쭉이 만개하고 담벼락을 감싼 넝쿨 장미가 흐드러집니다. 6월, 수국과 작약이 고봉밥처럼 그득그득 소담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길가 돌담 틈, 계단 층계, 보도블록 사이에 핀 작은 꽃들을 놓칠 순 없습니다. 미세한 틈바구니에 아주 작은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초등학생이던 카타리나와 엘리사벳은 식물도감을 펼쳐 꽃 이름 찾기 놀이를 했습니다. 꽃다지, 괭이밥, 개불알풀, 제비꽃, 봄맞이꽃, 돌단풍…. 두 아이에게서 작은 꽃들의 이름을 배웠습니다. 크고 작은 봄꽃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피어나 어느새 멋진 풍경이 됩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봄날이면, 엄마 소피아는 대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냉장고에는 보리차가 든 큰 주전자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목이 마르면 우리 집 부엌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보리차를 꺼내 마실 수 있었습니다. 놀다 보면 어느새 허기가 졌고 그 무렵 전 굽는 냄새가 나곤 했습니다. 마당의 평상에서 소피아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그날그날 감자나 호박을 썰어 전을 부쳤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집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서 평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소피아가 부쳐놓은 전을 양손으로 죽죽 찢어 잘도 먹었습니다. 소피아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이 마당에 핀 봄꽃들만큼이나 예쁘다고 했습니다. 카타리나와 엘리사벳이 어릴 적에 엄마 소피아가 그랬듯이 저, 클라라 역시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었습니다. 현관에는 금세 아이들 신발이 뒤섞였고 아이들은 “배고파요” 하며 부엌을 기웃거렸습니다. 밥에 소금과 볶은 깨, 참기름을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 아이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날그날 멸치볶음이나 김자반을 추가해 주먹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 식탁에서 주먹밥을 먹는 아이들이 아파트 화단에 핀 봄꽃들만큼이나 예뻤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혈연이라는 담장을 넘어 가족이 확장될 가능성을 말이지요. 엄마 소피아가 대문을 열어 동네 아이들을 초대했던 것처럼 저, 클라라 역시 현관문을 열어 아이들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우리 모두 한 가족이 되었으니까요.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자캐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사람들이 수군거렸음에도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날 자캐오의 집은 환대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사랑은 문을 여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숟가락 하나를 더 꺼내는 손길이며, 조금 옆으로 당겨 앉는 몸짓입니다. 봄꽃의 향기가 담장을 넘듯, 가족이 혈연이라는 담장을 훌쩍 넘기를 바랍니다. 우리 집 식탁이 자캐오의 집처럼 환대의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꽃으로 피어나는 봄날의 풍경이기를 바랍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6면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서] 리에티, 이탈리아의 중심에서 교회의 중심이 된 도시

‘옴파로스(ὀμφαλός)’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는 세상의 중심을 찾기 위해 두 마리의 독수리를 동쪽과 서쪽으로 동시에 날려 보냈습니다. 두 독수리는 그리스의 도시 델포이에서 만났고,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 몸의 중심을 뜻하는 ‘배꼽’이라는 말, 곧 옴파로스를 그 상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리에티(Rieti)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거의 중앙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배꼽’이라는 뜻의 ‘움빌리쿠스 이탈리애(Umbilicus Italia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에티의 특별함은 단지 지리적 위치에만 있지 않습니다. 리에티는 고대 로마가 탄생할 때 그 곁에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간 도시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8세기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군신 마르스는 어느 날 땅에 내려와 레아 실비아(Rhea Silvia)를 만나게 됩니다. 레아 실비아는 이후 로마를 세우게 되는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레아 실비아는 순결 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삼촌 아물리우스(Amulius)에게 벌을 받게 됩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해 리에티의 옛 지명은 레아에서 유래한 레아테(Rheate)로 전해집니다. 지금도 리에티 지역 사람들을 ‘레아티니(Reatini)’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유로 이곳 사람들은 리에티를 고대 로마의 어머니와 같은 도시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마와 리에티의 관계가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두 도시는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고, 결국 기원전 290년 로마 공화국 집정관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Manius Curius Dentatus)에 의해 리에티는 로마의 식민도시가 됩니다. 덴타투스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 이미 이가 나 있었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리에티는 로마식 도시 구조를 갖추며 로마 세계 안으로 편입됐습니다. 리에티가 그리스도교와 연결된 시기는 기원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의 제자로 여겨지는 성 프로스도치모(Prosdocimus) 주교의 도움으로 리에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리에티는 신앙과 문화가 함께 자라난 도시가 됐고, 중세에는 교황들이 머문 도시 가운데 하나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리에티가 경제적·종교적으로 번영을 누린 시기는 ‘교황들의 도시’로 불렸던 아나니와 더불어 교황들의 거처로 사용되던 때였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198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역대 교황 가운데서도 강력한 교황권을 행사한 인물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교회 안에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오노리오 3세 교황도 1219년과 1225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회칙을 인준해 준 교황으로 기억됩니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27년, 1232년, 1234년에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전 든든한 후견인이었고,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를 성인품에 올리며 새롭게 일어난 복음적 수도운동을 교회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또 클라라 성녀와도 깊은 영적 인연을 맺었습니다. 니콜라오 4세 교황은 1288년과 1289년 리에티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출신으로는 처음 교황좌에 오른 인물입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298년 리에티에 머물렀고, 1300년 교회 역사상 첫 성년을 선포한 교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교황들이 머물렀던 중심에는 리에티 주교좌 성모 승천 대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1109년부터 1225년 사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지금도 리에티 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성당 왼쪽 문 위에는 리에티의 초대 주교로 공경받는 성 프로스도치모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교황들이 머물던 교황궁은 주교좌성당 오른편에 붙어 있습니다. 1283년에 세워진 이 건물 2층에는 교황들이 리에티 시민들과 프란치스코 성인을 축복했다고 전해지는 발코니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그 발코니 앞에 서면, 한때 이 작은 도시가 교회의 중심 가까이에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에티가 누린 이 영광의 시기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이곳에 머물렀던 시기와도 겹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덕분에 리에티 일대는 오늘날 ‘거룩한 계곡’이라 불립니다. 실제 지형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평야 지대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신앙의 기억 안에서 이곳은 프란치스코의 발자취가 깊이 새겨진 영적 계곡입니다. 이곳에는 십자형으로 이어지는 네 곳의 프란치스코 성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209년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시시를 떠나 로마로 가는 길에 포조 부스토네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참된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를 통한 평화를 체험했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새롭게 확인했습니다. 1223년 11월에는 ‘프란치스코회의 시나이산’이라 불리는 폰테 콜롬보에서 회칙을 완성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베들레헴과 닮은 마을 그레초에서 처음으로 살아 있는 구유를 마련하고 성탄 밤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성탄 구유 전통의 중요한 시작으로 기억됩니다. 1225년에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리에티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라 포레스타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포도주의 기적을 통해 주님의 섭리를 드러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그곳에서 <피조물의 찬가> 일부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리에티는 이탈리아의 지리적 중심일 뿐 아니라, 중세교회가 새로워지던 시기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영성이 깊이 새겨진 자리였습니다. 무너져 가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부르심을 들었던 프란치스코에게, 리에티의 네 성지는 네 개의 기둥과도 같았습니다. 그 기둥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다음 회부터 네 차례에 걸쳐, 리에티의 거룩한 계곡에 남은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글 _ 이관술 요한 마리아 비안네(성지순례 가이드)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3면

[성미술 산책] 미켈란젤로 <피에타>

머리에 두건을 쓴 나이 지긋한 턱수염의 남성이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남성을 조심스레 부축하고, 양옆에는 두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여기 ‘S자’로 힘없이 축 늘어진 남성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 우측에서 죽은 아들을 떠받는 성모 그리고 좌측에 자그마한 체구를 한 젊은 여성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맨 뒤에 두건을 쓴 남성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니코데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그리고 유다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으로 학식 있는 종교 지도자지요. 그는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과 함께 그리스도 매장을 도운 자입니다. 서구 중세 시대부터 널리 다뤄진 ‘자비’, ‘연민’의 뜻을 가진 <피에타(pietà)>상,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1498~1499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청년 때 만든 작품으로, 성모가 무릎 위에 아들 예수를 안고 비통해하는 장면을 절제되면서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한 걸작입니다. 한편 지금 소개하는 <피에타>는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 뒤에 위치한 ‘두오모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제작하고 무려 50여 년 후 미켈란젤로가 70대 초반에서 80세까지 7~8년간 혼신을 다해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모습이 이상합니다. 상반신이 하반신보다 훨씬 비대하고 양팔이 너무 길게 표현된 반면 하반신의 다리는 너무 앙상한 것입니다. 완벽한 기술적 표현력을 가진 미켈란젤로가 인체 비례를 무시한 과장된 표현을 한 것은 이제 명줄이 끊긴 상태의 예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성모의 모습이 너무 거칠어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은 미완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의 근원, 바탕임을 드러냅니다. 거칠고 모든 것을 품는 대지입니다. 그리고 여기 숨은 감동은 바로 니코데모에 있는데, 바로 미켈란젤로 자신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깊은 신심의 소유자인 미켈란젤로는 손수 예수의 차디찬 시신을 묻어 드리고픈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이 묻힐 성당의 제단 발치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한 이 <피에타>는 그의 절절한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찬미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증오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죽기 전에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글 _ 박혜원 소피아(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장)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4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예수 성심 대축일 영성체송 〈군사 하나가 창으로〉

6월은 예수 성심 성월이다. 또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전례력에서 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전자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몸과 피를 묵상하는 날이라면, 후자는 그 몸과 피를 주신 사랑의 근원인 예수 성심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예수 성심 대축일에 부르는 영성체송 〈군사 하나가 창으로〉는 두 축일을 잇는 가교와 같다. 연결 고리는 요한복음의 십자가 장면으로, 가사 역시 이를 따른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열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4 참조) 일본 음악가 이자와 노부아키(伊澤 信昭)는 2016년 이 텍스트를 바탕으로 4성 합창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옆구리를 열었다(aperuit)”에 대한 번역과 해석은 오랜 교부 전통과 맞닿아 있다. 교부들은 창세기에서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왔듯, 교회가 새 아담, 곧 그리스도의 열린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보았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성체성사와 세례성사의 표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의 옆구리가 뚫려서 구멍이 난 것입니다. 이로써 생명의 문이 열렸습니다. 참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왔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120,2)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열린 옆구리에서 나온 물과 피가 그리스도의 사랑, 즉 예수 성심에서 왔음을 기억하게 된다. 중세로 들어서면 많은 이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상처와 함께, 그 사랑의 마음인 예수 성심을 관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케보른의 메히틸다 성녀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복음서를 권하며, 당신의 가장 온화한 성심의 상처를 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사랑의 크기를 생각하여라. 그것을 참으로 알고 싶다면 복음서보다 더 분명히 표현된 곳은 없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특별한 은총의 책」 I,22.) 성녀 대(大) 제르트루다에게도 비슷한 환시가 나타난다. 그녀는 병중에 예수님을 뵈었고, 주님께서 당신의 왼쪽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고 전한다. 그곳에서는 성심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생명이신 맑은 물의 샘이 솟구쳐 나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에서 제르트루다와 메히틸다 성녀를 “성심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 칭했고, 그들은 도상에서도 심장과 함께 묘사된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보나벤투라 성인 역시 그리스도의 성심에 대한 믿음이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과 친교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예수회 역시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성인과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녀와 함께 17세기 후반부터 예수 성심 신심 확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초창기 예수회원과 예수 성심과의 관계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예컨대 도상 연구자 캄파(Pedro F. Campa)는 예수 성심 신심이 예수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초기 예수회 문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IHS 삼문자를 수반한 ‘심장’이 예수 성심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고 언급한다. 예수회원 성 베드로 가니시오 역시 1549년 9월 4일 편지에 이렇게 적는다. “마침내 주님께서 당신의 가장 거룩하신 몸의 심장을 제게 열어주시는 듯했고, 저는 그 심장을 제 앞에서 보는 듯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 원천에서 마시라고 명하셨고, ‘오, 나의 구세주, 그분께서는 그의 샘에서 네 구원의 물을 길어 마셔라’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이처럼 중세 신비가들과 일부 초창기 예수회원에게 예수 성심은 불타는 사랑의 심장이자 생명의 원천이었다.(2편에서 계속)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가족은 곁에 있는 이름입니다

가족은 늘 곁에 있던 존재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는 가족의 기척 속에 살아갑니다. 현관문 여는 소리, 부엌에서 들리는 물소리, 늦은 밤 돌아와 “나야” 하고 말하던 목소리. 가족은 설명보다 먼저 기척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가까워 고마움을 잊고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 삶의 바탕에는 늘 그 기척이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가족의 기척이 따뜻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 가족은 가장 가까이에서 상처를 남긴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은 이미 완성된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곁에 다시 서는 관계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신앙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름의 신비를 다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멀리 계신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계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고통받는 이들 곁에 계시고, 그들의 부르짖음 안에 계시며, 역사의 한복판에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하느님은 보시는 분이고, 들으시는 분이며, 아시는 분입니다. 멀리서 관찰하듯이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삶 한가운데서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은 차가운 정의가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 “내가 네 곁에 있다”고 들려오는 응답입니다. 가족은 서로의 삶 곁에 머물며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사람들 삶의 바탕에 늘 함께하는 관계 가족도 그렇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고통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압니다. 말투가 달라진 것을 알고, 밥을 남긴 이유를 짐작하고, 문 닫는 소리로 마음의 날씨를 느낍니다. 가족은 서로를 가장 많이 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이 다치게도 하지만, 가장 오래 기억해 주기도 합니다. 가족의 사랑은 다정한 말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묻지 않고 기다리는 침묵, 식탁 위에 남겨 둔 반찬, 무심한 듯 건네는 안부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처럼 멀리 세우지 않으시고, 친구처럼 곁에 두십니다. 교회 안에서 기억되어 온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도 이 마음을 전합니다. 가난하고 두려운 사람들 곁에서 성모님의 모습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너희 곁에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멀리서 명령만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알고,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는 뜻밖에 깊이 닮아 있습니다. 가족은 서로의 삶 곁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나야” 하고 돌아오는 목소리, 말없이 차려 놓은 밥상, 끝내 잊지 않고 불러 주는 이름입니다. 가족이니까 가능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곁에 있는 일입니다. 보아 주는 일입니다. 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그렇게 계시듯,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가족이 되어 가는 중인지 모릅니다.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사랑은 스스로에게 예쁘다고 말해 주는 일

카타리나는 눈이 큽니다. 동공 크기가 보통 3에서 5밀리미터 사이라는데, 카타리나의 동공 크기는 6밀리미터가 넘습니다. 큰 눈동자에 진한 쌍꺼풀과 짙고 긴 속눈썹이 더해져 카타리나를 보는 이들은 감탄하곤 했습니다. “눈이 참 예쁘구나”라면서요. 엘리사벳은 눈이 그리 크진 않습니다. 작은 눈은 아니지만 카타리나 옆에 있으면 작아 보였습니다. 엘리사벳이 웃으면 가느다란 눈이 초승달처럼 둥글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언니는 눈이 큰데, 너는 눈이 작구나”라고요. 카타리나가 중학교 1학년이고 엘리사벳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와! 정말 예쁜 눈이야.”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카타리나의 눈에 주목했습니다. 엄마인 저, 클라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좁은 공간에 두 아이가 있는데, 한 아이에게만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 불편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특히 카타리나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엘리사벳에게 귓속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우리 엘리사벳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고요. 엘리사벳이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저도 알아요” 그 한마디에 그동안 졸였던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요! 저, 클라라는 스스로를 못났다고 여긴 적이 많았습니다. 비단 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울 속 제 모습에서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을까?’ 한숨만 나왔습니다. 얼마 전, 이제는 고등학생인 엘리사벳에게 “우리 엘리사벳,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 알지?”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고단한 고등학생에게 건네는 응원의 말이었습니다. “그럼요. 제가 엄마 닮았잖아요.” 엘리사벳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날 닮아 예쁘다고?’ 엘리사벳은 분명히 예쁘지만 저, 클라라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었기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마구 생겨났습니다. 카타리나와 엘리사벳이 뱃속에 있었을 땐 심지어 아이가 저를 닮지 않기를 바라며 구일기도를 바칠 정도였으니까요. 다시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엘리사벳처럼 예쁘게 웃어봅니다.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볼에 보조개가 파이는 모습이 엘리사벳을 꼭 닮았습니다. 하느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나의 애인이여, 그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 그대에게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아가 4,7) 오래도록 스스로를 혐오하며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불현듯 “우리 클라라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제는 저, 클라라 역시 “저도 알아요”라고 화답하고 싶습니다. 저를 만드신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엘리사벳이 제게 했던 대로 말이지요. 하루를 마무리한 후 자리에 누워 아가서 구절을 읊습니다. 오십 대 중년을 지나는 클라라에게 해주는 응원의 메시지입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아가 2,10)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클라라야, 너는 참 예쁘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는 일입니다. 부푼 가슴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글 _ 김정은 클라라 (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삼위일체 미사〉

아마 모차르트는 영화 <아마데우스>로 가장 많이 오해받은 사람이 아닐까. 스크린 속 모차르트는 하느님(Deus)께 사랑받는(amatus) 천재, 곧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경박한 웃음을 지닌 충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반면 살리에리는 그의 천재성을 질투하며, 그런 재능을 주시지 않은 신을 원망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빛과 그림자처럼 선연한 둘의 대비는 극적이지만, 모차르트에게는 지울 수 없는 편견을 남겼다. 그의 진중함, 경건함, 신앙심은 천진난만함과 방종한 이미지의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편지를 읽으면 전혀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1778년 7월 파리에서 어머니 안나 마리아가 죽음을 맞았을 때, 그는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이렇게 쓴다. “하느님께 의지해주세요. 사랑하는 어머니는 전능하신 하느님 손안에 계십니다. 그분께서 제가 바라는 대로 어머니를 우리 곁에 더 머물게 하신다면, 저는 그 은총에 감사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죠.” 사려 깊음과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겸허한 신앙이 고스란히 담긴 대목이다. 아버지에게 콘스탄체 베버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 1781년 편지에서도, 모차르트의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정체성과 윤리 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다. 스물다섯 모차르트는 “이제까지 그 어떤 여자와도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라고 고백하며, 이유를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 신심이 깊고, 둘째, 순진한 여인을 유혹할 수 없으며, 셋째, 직업여성과의 행위가 가져올 질병과 타락을 두려워한다고 말이다. 글귀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모차르트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 모차르트가 열일곱 살이던 1773년, 잘츠부르크에서 미사곡을 썼다. 제목은 Missa in honorem Sanctissimae Trinitatis, 곧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기리는 미사〉 K.167이다. 1773년 6월 초연된 이 곡은, 삼위일체 대축일에 연주되었거나, 잘츠부르크 삼위일체 성당과 연계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젊은 모차르트의 빛나는 재능만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던 잘츠부르크의 신앙을 한눈에 보여준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대주교가 세속 군주이자, 영적 지도자로 다스리던 교회 제후령이었다. 음악학자 히브(Kimberly Beck Hieb)는 2025년 단행본에서 잘츠부르크 성음악을 대주교의 권력 구조와 맞물린 ‘좋은 통치의 소리(The Sounds of Good Government)’로 설명한다. 잘츠부르크에서 음악은 신앙을 표현하는 동시에, 가톨릭적 통치 질서를 들려주는 소리였다. 〈삼위일체 미사〉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장조 역시 삼위일체의 광휘를 암시한다. 18세기 음악이론가 라모는 이 조성을 ‘환희 및 환호’와 연결 지었고, 음악가 라 보르드는 ‘엄숙하고 장중하며 위엄있는, 종교적 주제와 어울리는 음조’라고 정의했다. 트럼펫과 팀파니가 어우러진 찬란한 음향은, 축일적 성격과 삼위일체께 드리는 흠숭과 영광의 분위기를 강화한다. K.167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독창자를 배제한 전면 합창 미사라는 점이다. 이런 특성은 모차르트 미사곡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데, 하나이신 삼위일체를 형상화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나아가 이는 고용주였던 콜로레도 대주교의 보수적 성향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그는 전례음악에서 오페라 아리아 같은 과시적인 기교를 지양하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화려한 독창에 대한 절제 요구와 ‘하나이신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주제가 맞물리면서, 유례없이 밀도 높은 합창 미사가 탄생했다. 그래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독창 없이 합창만으로 구성된 이 곡을 듣는 것은 각별한 경험이다. 모든 개별 목소리가 물러나고 오직 하나의 찬미만이 남는 순간. 그것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삼위일체론」 결말부에서 끝내 마주한 신비이기도 하다. “그때는 우리도 끝없이 하나만을 이야기할 것이며 하나같이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당신 안에 우리 또한 하나 되어. 유일하신 주 하느님이시여.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여.”(성 아우구스티노, 「삼위일체론」, XV.28.51)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6면

[함께 살기, 다시 쓰는 가족] 아리고 쓰린 고개마다, 함께 부르는 노래

강원도 정선의 한 성당 벽에 예수님이 고개를 넘고 계십니다. 골고타의 길이 정선의 산길 위로 옮겨 온 듯합니다. 원주교구 정선본당은 지난 3월, 정선아리랑과 예수님의 수난을 잇는 ‘골고타 아리랑 십자가의 길’을 축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선의 산길을 오르시고, 그 길 위에 아리랑 가락이 얹힙니다. 본당 주임 이동훈(프란치스코) 신부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셨다면, 아마 아리랑을 부르셨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마음 한쪽이 젖어 듭니다. 아리랑은 흥겨운 노래이기 전에, 고개를 넘는 노래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혼자 견디기 어려운 길,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넘어야 하는 길에서 흘러나온 노래입니다. 정선아리랑에는 깊은 한이 배어 있습니다. 척박한 산골의 삶,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하는 마음이 긴 가락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랑은 절망의 노래로만 남지 않습니다. 부르는 사람의 숨을 타고, 듣는 사람의 가슴을 지나, 함께 견디는 노래가 됩니다. 아리랑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픔을 없애 주지는 못하지만, 아픔을 혼자 두지 않습니다. 아리고 쓰린 마음 곁에, 아리랑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붙입니다. ‘나’의 고통이 ‘너’에게 건너가고, ‘너’의 한숨이 ‘우리’의 노래가 됩니다. 사랑은 때로 이런 작은 합창에 가깝습니다. 복음서에도 그런 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뒤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태 26,30; 마르 14,26)고 전합니다. 배신과 죽음이 다가오는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노래하시고, 그 노래를 품고 수난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이 찬미가를 시편 136장과 연결합니다. 이 시편은 창조와 탈출, 사막과 해방의 역사를 노래하면서 절마다 같은 후렴을 붙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험한 기억에도 자비의 후렴을 붙이는 것, 그것이 신앙의 노래입니다. 가족의 시간에도 그런 후렴이 필요합니다. 가족은 아픔이 없는 자리가 아닙니다. 서로의 아림과 쓰림이 가장 가까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쉽게 서운해지고, 익숙한 얼굴 앞에서 깊이 침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평화가 아닙니다. 아픔 뒤에 다시 붙이는 후렴입니다. 실망 뒤에 다시 말을 거는 일. 상처 뒤에 다시 식탁에 앉는 일. 마음이 닫힌 밤에도 내일 아침밥을 차리는 일. 미안하다는 말이 아직 나오지 않아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를 다시 놓아주는 일. 사랑은 늘 뜨거운 감정으로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반복으로 옵니다. 같은 자리에 다시 앉고, 같은 이름을 다시 부르며, 관계의 고개마다 다시 ‘함께’라는 가락을 붙이는 일로 옵니다. 정선의 고개마다 아리랑이 흘렀듯, 우리 가족의 고개마다 어떤 노래가 흘렀는지 돌아봅니다. 기쁜 날의 노래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아프고 서러운 날에도 끝내 함께 불렀던 노래인지 모릅니다. 아리고 쓰린 생의 고개마다, 우리 가족은 아직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있는지요? 글 _ 유형선 아우구스티노(가족인문학연구소 공동운영자)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6면

[신앙 속 예술, 예술 속 신앙] 니콜로 욤멜리의 〈오소서, 창조주님〉

“성령은 삼위일체의 수줍은(shy) 위격이다.” 신학자 프레더릭 데일 브루너와 윌리엄 호든의 정의는 파격적이다.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는 성령께 ‘수줍음’이라는 수식어는 분명 낯설다. 그러나 이 표현은 성령께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신 채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교회 내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작동하게 하는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성령은 신앙 속에서 늘 현존하지만, 동시에 가장 붙잡기 어려운 분이다. 성부는 창조주로, 성자께서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반면 성령은 숨결, 바람, 물, 불, 구름과 빛, 손가락, 비둘기 같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브 콩가르 추기경은 “성령은 모습이 없다”고 지적하며, 그분은 형태로 포착되기보다 ‘선물(Donum)’처럼 선사되는 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성령에 대한 노래는 종종 청원으로 시작된다. 성령 찬미가 〈오소서, 창조주님(Veni, Creator Spiritus)〉 역시 그렇다. ‘오소서 창조주님, 성령께서 찾아오사, 창조하신 마음속에, 천상 은총 채우소서’라는 가사는 성령을 정의하기에 앞서 먼저 그분을 부른다. 니콜로 욤멜리(Niccolò Jommelli, 1714~1774)의 〈오소서, 창조주님〉는 바로 이 부름을 전아한 선율로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욤멜리는 18세기 이탈리아의 저명한 오페라 작곡가이자 나폴리악파의 주요 인물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소속의 카펠라 줄리아에서 활동하며 뛰어난 성음악도 다수 남겼다. 곡은 소프라노 독창과 4성부 합창으로 구성된다. 오페라 아리아를 연상시키는 독창의 유려함과, 그것을 받아 확장하는 합창의 응답이 작품의 주요 특징을 이룬다. 마치 개인과 교회의 목소리가 서로를 비추고 대답하는 듯한 구조는 성령의 신비를 음악 형식 안에서 드러낸다. 성령은 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오시지만, 그 은사를 개개인 안에 가두지 않고 교회의 일치, 공동체의 찬미로 확장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찬미가는 성령을 여러 호칭으로 부른다. 그중 ‘보호자(Paraclitus)’는 본래 ‘곁으로 불려 온 분’이라는 뜻을 지니며, 라틴어 ‘advocatus’, 즉 변호자이자 협조자의 의미를 함께 품는다. 노래는 이어 성령을 ‘사랑의 샘(fons vivus)’, ‘불(ignis)’, ‘사랑(cáritas)’, ‘축성기름(únctio)’으로 부르는데, 이는 성령의 활동을 놀라울 만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 수사들은 ‘일곱 은혜 베푸시고’와 이어지며 세례, 견진, 성체, 성품과 같은 교회의 주된 성사 안에서 하느님 은총을 중개하는 강력한 성령의 작용을 형상화한다. 마지막 ‘아멘’ 부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악상 지시어는 ‘알레그로 콘 스피리토(Allegro con spirito)’인데, 물론 여기서 ‘spirito’를 성령으로 읽는 것은 음악 용어를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 찬미가의 마지막 부분이 ‘활력 있게(con spirito)’라는 지시어로 전개된다는 사실은 지나치기 어렵다. 앞선 악장들이 성령을 부르고 그 호칭들을 묵상한다면, 아멘은 성령께서 인간과 교회를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는 힘을 공동체가 함께 예찬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듣는 욤멜리의 〈오소서 창조주님〉은 그래서 남다른 울림을 준다. 여기서 ‘오소서’라는 간절한 청원은 ‘아멘’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완성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7항) 그러나 그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흩어진 목소리는 교회와 공동체의 찬미가 된다. 성령은 드러나지 않음으로 은폐되는 분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글 _ 박찬이 율리아나(음악 칼럼니스트)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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