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전교 방법 100년 변천사

“입술 꼬리를 위쪽으로 올려 하얀 윗니를 드러나게 한다. 발뒤꿈치를 붙이고 윗몸을 30도 정도 숙여 5초간 인사한다.” 백화점 안내 직원 교육이 아니다. 1999년 10월 17일자 가톨릭신문에 소개된 가두선교 ‘인사법’이다. 당시 신자들은 어깨띠를 두르고 버스터미널과 상가, 아파트 주변으로 나가 행인들에게 선교 책자를 건넸다. 어떻게 인사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익힐 만큼 가두선교가 활발했다. 올해 전교 주일(10월 18일)은 제정 100주년을 맞아 더욱 뜻깊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전교 주일은 교회가 선교 사명을 되새기고 복음 선포의 열의를 새롭게 하는 계기로 자리매김했다. 가톨릭신문 창간 초기, 출판물은 중요한 전교 수단이었다. 1931년 9월 1일자에서 김후상(바오로) 신부는 교회 신문과 잡지를 열심히 읽는 데 그치지 말고, ‘새 독자를 많이 구하고 전하여’ 널리 퍼뜨릴 것을 당부했다. 1955년 11월 20일자에는 보다 구체적인 ‘문서 전교’ 사례가 등장한다. 대전교구 오기선(요셉) 신부는 가톨릭을 알리기 위해 대전문화원 도서실에 서적 20여 부와 정기간행물을 기증했다. 신문은 당시 많은 사람이 가톨릭에 잘못된 선입견을 품고 있다며, 출판물을 통한 접근을 ‘가장 효과적인 전교 방법의 하나’라고 평가했다. 대상자를 직접 찾아가는 전교도 물론 있었다. 1960년 8월 21일자에는 윤 마르타 씨가 소개됐다. 낮에는 미용실을 찾은 손님들에게 신앙을 알리고, 밤이면 예비신자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가르쳤다. 그를 통해 세례받았거나 교리를 배우던 사람이 82명에 달했다. 기존 전교 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의식도 커졌다. 1990년 10월 21일자 기사 ‘전교 정책의 현 주소’는 신자 증가세가 둔화하고 냉담자가 늘어나는 현실을 짚고 시대 상황에 맞는 정책과 문화 활동, 매스컴을 활용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1990년대에는 거리가 전교의 무대로 자리 잡았다. 1997년 10월 19일자에 따르면 전국 986개 본당 가운데 764개 본당이 선교책을 활용한 가두선교에 참여했고, 안내 책자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는 300만 부가 발행됐다. 앞서 언급한 ‘30도, 5초 인사법’은 당시 선교 열기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21세기 들어 인터넷의 빠른 보급으로 전교 방식도 달라졌다. 2000년 10월 22일자는 인터넷 선교를 ‘매우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소개했다. 이후 홈페이지와 이메일, 블로그와 SNS를 거쳐 오늘날에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까지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됐다. 전교는 반드시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직접 신앙을 권하는 방식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1956년 3월 10일자는 비신자에게 신문을 꾸준히 보내는 방법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무심코 읽더라도 신문을 계속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관심을 두게 되고, 나중에는 “이제 신문이 올 때도 되었는데…”라며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신문을 통해 서서히 신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자는 취지였다. 신앙을 설득하기에 앞서 스스로 궁금해하고, 다음 만남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 어쩌면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가장 좋은 전교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발행일 2026-10-18 제3511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7) 인간 배아 실험 둘러싼 논란 본격화

“과학기술부 산하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5월 18일 발표한 생명윤리기본법 시안이 이른바 ‘냉동 잉여 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함으로써 ‘인간의 생명은 수정과 동시에 시작된다’는 종교계의 입장에 배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천주교와 개신교 등 종교계는 5월 22일 공청회에서 이같은 입장을 전달한 데 이어 23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인간 배아 복제 및 인간 배아 실험을 중단하고 질병 치료의 다른 대체 치료책을 개발할 것’을 골자로 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또 주교회의 생명윤리연구회도 26일 열리는 긴급회의에서 법안에 대한 교회의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반면 의료계와 생명공학계는 이번 법안 시안이 지나치게 생명과학 연구를 규제함으로써 미래 산업인 생명공학의 발달을 크게 저해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생명윤리 전반을 포괄하는 지침이라 할 수 있는 ‘생명윤리기본법’ 시안은 체세포 핵이식에 의한 인간 배아 복제는 금지하되 불임치료 목적으로 체외수정에 의해 만들어진 냉동 잉여 배아를 이용한 인간 배아 연구는 한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가톨릭신문 2001년 5월 27일자) ‘복제 인간’ 탄생 우려, 생명윤리 확보 위한 법안 마련 198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는 정보통신, 신소재 그리고 생명과학 등 이른바 첨단기술을 차세대 국가 성장 동력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본격화됐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97년 영국에서 정자와 난자의 수정 과정을 거치지 않은 체세포 복제 동물인 복제 양 ‘돌리(Dolly)’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전 세계에서는 생명과학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과 더불어 이른바 ‘복제 인간’의 탄생 가능성을 두고 윤리적 논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동일한 체세포핵 DNA를 가진 개체의 생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기존의 의과학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일이었고, 이는 생명과학의 무분별한 발전을 제어하기 위한 윤리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불러왔습니다. 이에 따라 생명공학 분야에서 생명윤리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규범 마련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정부 내에서도 생명공학의 윤리와 안전 문제를 규율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보건복지부와 과학기술부가 각각 법안 마련에 착수했고, 그 결과 2001년 5월 정부 기관인 생명윤리자문위원회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생명윤리 관련 법안 시안이 발표됐습니다. 2001년 생명윤리기본법 시안, 윤리적 규제와 현실적 절충 생명윤리 관련법 입법 과정 내내 윤리적 당위성과 현실적 타협의 입장이 치열하게 대립했습니다. 즉, 배아를 인간 생명의 기원으로 보고 엄격히 보호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과, 배아 연구를 통해 난치병을 치료하고 국가 경제의 신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현실론이 격렬하게 맞부딪혔던 것이지요. 그 시발점이 된 2001년 5월 생명윤리자문위원회의 ‘생명윤리기본법(가칭)’ 시안은 생명과학의 도구적 이용으로부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배아 관련 연구를 매우 엄격하게 제한했습니다. 우선, 체세포복제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거나 출산하는 인간 개체 복제 행위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또한 이종 간 교잡, 인간 배아와 동물 배아의 융합 등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특정 성을 선택할 목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선별하거나, 연구만을 목적으로 배아를 새롭게 생성하는 행위 역시 강력히 통제했습니다. 그러나 시안은 난치병 환자들의 절박한 생존권과 생명공학계의 학문적·산업적 발전 요구라는 현실적 입장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습니다. 먼저, 배아 연구를 일률적으로 금지한 것이 아니라, 불임 치료 목적으로 인공수정 과정에서 생성되었다가 임신에 사용하고 남은 ‘잔여배아(잉여배아)’에 한해서는 한시적으로 질병 치료 및 연구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이에 대해 “시안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원칙과 생명공학 연구의 필요성이라는 두 가치 사이의 절충안을 모색하기 위한 소산으로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시안이 ‘체세포 복제 금지’라는 대원칙을 고수했다는 측면에서는 윤리적 원칙을 확고하게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법 과정의 후퇴와 2004년 생명윤리법의 제정 국내 생명산업계는 생명공학의 발전을 선점해 상업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고, 정부는 바이오산업의 성장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생명산업계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시안의 기본 입장은 이후 생명윤리법의 입법 과정에서 무시됐고, 우리나라 첫 생명윤리 관련법은 이 시안보다도 훨씬 후퇴됐습니다. 시안 발표 직후, 과학기술계와 관련 산업계는 시안이 생명공학 연구를 위축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심각하게 저해할 것이라며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관련 법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부 간의 시각차도 드러났습니다. 인간 배아 연구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과학기술부 산하 자문위원회의 입장과 달리 보건복지부는 2002년 1월 산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을 통해 질병 치료 목적의 줄기세포 및 배아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논란의 와중에 생명공학 육성을 통한 국부 창출이라는 입장이 윤리적 신중론을 압도했습니다. 결국 2004년 1월 제정되고 2005년 1월 1일자로 시행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하 생명윤리법)은 2001년 시안의 근본정신에서 크게 후퇴한 타협적 산물로 귀결됐습니다. 이 생명윤리법은 시안의 기본적인 윤리 강령들을 대부분 명문화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윤리적 쟁점이었던 ‘체세포복제배아’의 생성에 관하여 치명적인 예외 조항을 신설함으로써 사실상 규제의 빗장을 풀어버렸습니다. 시안이 전면 금지했던 체세포핵이식행위를 ‘근이영양증 등 특정 희귀·난치병의 치료를 위한 연구’라는 목적하에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건복지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경우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법은 질병 치료와 과학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연구자들에게 체세포 복제를 통한 배아줄기세포 확립을 허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법 적용 과정에서 가장 빈번하게 과학적 쟁점과 윤리적 논란이 제기되는 체세포복제배아 분야에 대해 규제망을 허술하게 구축함으로써 생명과학 분야에서 윤리적 재앙을 초래하게 됩니다. 전 세계적인 사기극으로 판명된 ‘황우석 사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발행일 2026-10-18 제3511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6)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

“새 천년기와 더불어 시작되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교회사에 귀중한 이정표가 될 순교 신심을 되살리는 새로운 도정에 오른다. 교회는 한국 천주교에 첫 번째 대규모 순교자를 안겨준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오는 2월 2일부터 2002년 2월 4일까지 1년 동안 이어지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기간’에 공식 돌입한다. 이에 맞춰 교회는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개최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순교자들의 삶을 오늘에 되살림으로써 신앙의 스승이요 모범인 순교자들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장을 마련해 나간다.”(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1일자 1면) 새 천년기를 이제 막 시작한 2001년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대규모 박해이자 4대 박해 중 하나인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복음 선포의 새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던 한국교회는 박해 2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열고,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발걸음에 힘을 더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대규모 박해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 1년) 조선 조정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전개된 최초의 대규모 천주교 박해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천주교에 대한 종교적 배척에 머물지 않고, 정조 사후의 권력 재편과 남인·시파 계열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건이었습니다. 남인 계열 관료를 중용하며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피하던 정조가 1800년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노론 벽파를 배경으로 한 정순왕후는 음력 1801년 1월 10일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오가작통법을 동원해 전국의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도록 했습니다. 박해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등이 체포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됐습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사형을 면했으나, 정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정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유배됐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4월 24일 자수해 5월 3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여성 회장 강완숙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습니다. 전주에서는 ‘호남의 사도’ 유항검을 비롯해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 동정부부 등이 순교했습니다. 한편, 서양 군함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 등이 담긴 ‘황사영 백서’가 발각되면서 조정은 천주교 신자들을 외세와 내통하는 세력으로 몰아갔습니다. 많은 신자가 처형되거나 옥사했고, 살아남은 이들도 유배와 피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신유박해의 영향과 의미 신유박해는 초기 조선 천주교회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지만, 신앙 공동체의 구성과 복음 전파 방식에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도 됐습니다. 첫째, 지식인 중심으로 출발한 교회가 서민층에 더욱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지도급 신자들이 대거 순교한 뒤에도 중인과 상민, 천민,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신자들이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박해와 가난 속에서 신앙을 지킨 이들의 삶은 교회를 지탱하는 힘이 됐습니다. 둘째, 신자들의 피난과 이주를 통해 교우촌이 형성되고 확산됐습니다.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숨어든 신자들은 옹기를 굽거나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하고, 서로 도우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신자들의 흩어짐은 오히려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셋째, 평신도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교회를 지탱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유일한 성직자였던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뒤, 1834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조선 교회는 30여 년 동안 성직자 없이 신앙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 공백 속에서 평신도 지도자들은 신자들을 모아 기도하고 교리를 가르치며 공동체를 돌봤습니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도 이어졌습니다. 평신도들의 헌신과 공동체의 결속은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행사 한국교회는 1984년 103위 시성의 기쁨을 누렸지만, 이들은 기해·병오·병인박해 순교자들로 신유박해 순교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교회의 초석을 놓은 초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재조명하고, 그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현양 사업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행사는 서울대교구가 9월 16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거행한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 신앙대회’였습니다. 이에 앞서 9월 1일에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성당에서 ‘순교자 현양의 밤’이 열렸습니다. 명동본당과 한국교회사연구소는 9월 1일부터 22일까지 토요일마다 명동대성당 문화관에서 초기 천주교회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공개 학술강좌를 마련했습니다. 네 차례에 걸쳐 두 강좌씩 총 여덟 강좌가 진행됐습니다. 전주와 청주 등 각 교구에서도 신유박해의 역사를 기리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춘천교구는 신자들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순례성당을 추가로 지정했습니다. 학술 심포지엄과 순교 관련 유물 전시 등도 이어지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초기 순교자 시복시성에 기여 교회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성과는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통합 추진 체제가 구체화됐다는 점입니다. 주교회의는 이미 1997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시복시성 작업의 통합 추진을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준비를 바탕으로 2001년 3월 22일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시복시성 청구인을 주교회의로 변경하고, 담당 교구장으로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를 선출했습니다. 같은 해 10월 18일에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첫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후 2002년 3월 7일 시복 추진 대상자 124위가 확정됐고, 조사와 심사 과정을 거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주례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으로 이어졌습니다. 124위 가운데 신유박해 순교자는 53위로 가장 많았습니다. 2001년의 기념사업은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앞서 시작된 시복시성 추진에 힘을 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발행일 2026-10-11 제3510호 12면

[Hearing the Intellectuals of the Global Church – Fr Michael Remery]

This article is released on October 4, 2026, in both print and online formats. Father Michel Remery collected the questions young people asked him after Mass into Tweeting with GOD (now Navigating with GOD). He then developed it into DeoQuest, an international youth ministry platform that combines books, apps, videos and accompaniment. He begins his ministry by listening to young people's disappointment and hurt before explaining what the Church teaches. He sees young people as companions who search for the way alongside him, not as people his ministry is aimed at. His approach takes their questions as its starting point and looks openly at a wide range of topics on faith and the Church. Q. You emphasise that youth ministry begins with listening to young people's questions. What spiritual longing did you find in their questions? And what should the Church be thinking about in order to meet young people ? Listening to young people's questions, I realised that what they lacked was not simply information. They were searching for support, for love, for God. Many also wanted to know whether it is even reasonable to believe. To answer their questions, we began to explore the relationship between science and faith and to communicate in new ways through digital media. That experience reshaped how I understand evangelisation. Evangelisation should not start with what the Church wants to say, but with the real concerns and questions people carry. Many young people feel that the Church's message does not connect with their reality. Yet within them there is still a longing for meaning and truth. Some are not content with the answers the world offers them, and in searching for something deeper they discover the Church. That is why the Church must hold fast to the unchanging essence of the faith while also working to understand the places where young people live and the language they speak. Young people look for something to lean on, not mere knowledge Their longing for meaning and truth remains Not handing out ready-made answers first What matters is searching for answers together in the Gospel Q. When young people question the Church's teaching or speak of disappointment and hurt, how can one listen with openness while still conveying that teaching honestly ? In DeoQuest, we never treat a question as unwelcome. That includes questions born of disappointment with the Church or of real hurt it has caused. Genuine listening means letting that pain be fully expressed, without rushing to defend an institution. The person, not the argument, comes first. Of course, listening does not mean staying silent about what the Church teaches. It is a process of respecting the other person and searching for the truth together. Truth must be conveyed in love, and love must also find its direction in truth. Throughout my youth ministry, I have tried to walk with young people rather than simply work for them. When that happens, the Church stops being a place where something is delivered one way. It becomes a place of encounter, where we question and learn from one another. Tweeting with GOD was also born of that process. Its questions were not invented by theologians. They were the actual questions young people asked after Mass and online. Their concerns and curiosity determined the book's content and direction. Q. Tweeting with GOD has grown into DeoQuest. Why did you feel such a variety of pastoral forms was needed to accompany young people on their journey of faith ? The reason we built a broader framework is simple. A book, however good, cannot accompany someone through every moment of their journey of faith. As young people come to know the faith, they face many questions. At times they need help, and they look for a community to walk with. They need resources to turn to when a question about faith comes up late at night. They need chances to learn, whether to prepare for a sacrament or to understand the faith more deeply. And they need a community to share their faith with. To respond to these different needs, DeoQuest has grown beyond books into apps, videos and small-group faith formation. Of course, digital content cannot replace community and encounter. Digital media is only a tool that helps young people come into contact with the faith and take their first steps. Ultimately, it must lead to encounters between people, to a relationship with Christ and into a community of believers. Q. What message did you want to give young people through your book Your Neighbour is GOD ? The book helps young people look at the issues they actually face in life from the perspective of Catholic social teaching: poverty and solidarity, the environment, justice and peace, work, politics and technology. What mattered most to me was not to pass on social teaching as mere knowledge. I wanted us to think together about how it can be put into practice in daily life. God needs us to be his hands and feet, and his mouth too. Faith is not limited to private comfort or inner peace. Our choices, how we treat the environment, how we relate to our neighbours and the responsibilities we take on in society are all ways of living our faith. When young people realise this, social teaching is no longer something remote from life. It becomes a way of putting the Gospel into practice. Meeting young people across many cultures, I have learnt that the deepest human questions are remarkably similar everywhere. Love and suffering, the meaning of life, death and the longing for God go beyond culture and language. At the heart of the answer there is always Jesus Christ and his Gospel. The way the Gospel is proclaimed may vary with local circumstances, because language, culture, social setting and the way communities take shape all differ. What matters is not to offer ready-made answers first. We should start from the questions people actually carry and search for answers together in the Gospel. Faith deepens when young people find their role in the Church Young people must take the lead in planning and hospitality for WYD Seoul Q. The Korean Church is preparing for World Youth Day (WYD) Seoul 2027. What do young people need in order to become active agents in the Church rather than mere participants ? WYD Seoul 2027 already offers a wonderful model. Countless young Koreans are volunteering and will open their homes to pilgrims during the Days in the Dioceses. They are helping to shape the event rather than simply attending it. I believe this direction will remain important in the years ahead. Young people should not be left as mere participants in events or people who receive help. From the preparation stage onwards, they should be given real responsibility for planning, welcoming, prayer and communication. When young people discover their own role in the life of the Church, their faith can grow deeper. I hope WYD Seoul will be the starting point of a journey of faith rather than a one-off event. It would be wonderful if young people could keep learning about and sharing their faith through resources such as DeoQuest. The theme, 'Take courage, I have overcome the world', is not a call to wait for the event in August 2027. I see it as an invitation to start living and sharing the faith from this very moment. Pilgrims coming to Korea will experience the hospitality and warmth of the Korean Church. I, too, was warmly welcomed when I first visited Korea some years ago, and I treasure that memory. Q. In the digital age, people encounter more information than ever, yet it has become harder to discern what matters. What role should Catholic media play ? DeoQuest also sets out to help people find trustworthy answers when they meet questions about faith. What we lack today is not information itself. We lack guides who help us understand what it means and see it rightly. We need people who help us discern what is true, what is good and what really matters in our lives. I believe this is also where the role of Catholic media lies. Its task is not to compete for more attention. It should look at the world with depth and honesty and help people discover the meaning of faith and of life. It should not keep people on a screen or on the printed page. It should be a voice that connects them, so that they meet one another and form community. Congratulations to The Catholic Times of Korea on its centenary. Through colonial rule, war and enormous change, it has kept telling the truth, proclaiming the Gospel and carrying the voices of the faithful. As the Korean Church prepares to welcome the world's young people through WYD Seoul, The Catholic Times of Korea reaches a special moment as it begins its next hundred years. May it continue to listen to people's questions, make known the true meaning of faith, and help the younger generation encounter the Church as a close and living community. God bless everyone at The Catholic Times of Korea and all its readers. ■ About Father Michel Remery Father Michel Remery is a priest of the Diocese of Rotterdam in the Netherlands. He studied architecture before entering the seminary, was ordained a priest in 2004, and later earned a doctorate on the relationship between liturgy and architecture. From 2006 to 2012, he ministered to young people and university students in Leiden, South Holland. Their questions about faith and life became the basis of Tweeting with GOD. From 2012 to 2017, he served as Deputy General Secretary of the Council of European Bishops' Conferences, where he was also secretary to its commissions for social communications and for catechesis, schools and universities. He also acted as the Holy See's contact person at the Organis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on hate crimes against Christians. In 2018, he moved to Luxembourg, where he served as National Youth Chaplain. Since 2023, he has combined pastoral ministry in the Diocese of Rotterdam with his role as Director of DeoQuest. DeoQuest is an international Catholic pastoral initiative that connects publications, apps, videos, faith-formation resources, card games, online activities and in-person encounters. His principal publications include Your Neighbour is GOD, Online with Saints and the DeoQuest Faith Course. Your Neighbour is GOD extends his earlier work on personal faith and Church teaching into Catholic social teaching. It addresses poverty, migration, labour, war, the climate crisis, the common good and the practical responsibilities of Christians. More recently, he published 26 Questions to Carlo Acutis: How Can the First Online Saint Help You in Your Daily Life?. The book explores young people's questions about faith, the purpose of life, suffering and technology through the life of St Carlo Acutis.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0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5) 사형 폐지를 위한 범종교인연합

“천주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사형 폐지 운동이 급류를 타고 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불교 조계종 등 일부 종단 관계자들이 모여 결성한 ‘사형제도폐지를 위한 범종교인 연합’은 오는 2월 26일 회의에 원불교 등 다른 종파 대표자들을 공식 초청, 그 참가 범위가 대폭 확대될 전망이다. … 여기에 최근 국회에서도 사형제도 폐지 입법을 위한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어 사형 폐지 운동은 더욱 가시권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현재 입법안에 서명한 의원은 모두 77명, 전체 의원 과반수인 137명의 서명을 받으면 입법안 제출이 가능함에 따라 앞으로 60여 명 정도의 서명만 받으면 추진이 가능하게 된다. 한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4월 중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를 구성해 이를 중심으로 전국 각 교구 교정사목위원회 및 정평위 관계자들과의 협력 아래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향으로 사형 폐지 운동을 전개할 예정이다.”(가톨릭신문 2001년 2월 11일자 1면) 우리나라의 사형 폐지 운동은 1970년대 초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활동을 기점으로 태동했고, 1989년 5월 가톨릭과 개신교 등 종교계가 주도한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의 창립을 통해, 시민사회와 종교계의 연대 형태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사형 폐지 운동은 누명을 쓴 개별 사형수들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이 주를 이루었고, 특정 종교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와 개인적 호소에 의존하는 경향을 띠었습니다. 제도적 차원에서의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아직 운동의 대중적, 입법적, 조직적 기반이 온전히 성숙하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 대희년을 전후해 사형 폐지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구조적인 전환이 이뤄지게 됩니다. 대희년을 거치며 범가톨릭 차원에서 축적된 생명 존중의 에너지가 2001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 한 해 동안 주교회의 산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대한민국 7대 종단을 아우르는 범종교적 연대 기구가 출범했습니다. 또한 155명의 국회의원들이 처음으로 사형폐지 특별법안을 발의했고,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를 위한 포럼이 개최됐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형수 구명 운동 1990년대 한국 사회는 급속한 경제 성장 이면에 팽배한 물질만능주의와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각종 흉악 강력 범죄가 빈발하던 시기였고, 국가 권력에 의한 사형 집행이 주기적이고 대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1997년 12월 30일에는 단 하루 만에 무려 23명의 사형수에 대한 대규모 교수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의 사형 폐지 운동을 상징적으로 이끌며 예언자적 목소리를 낸 인물은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었습니다. 1964년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대구대교구에서 교정사목을 담당하며 사형수 및 재소자들과 깊이 교감했던 김 추기경은, 사형제도가 실제로는 잔혹 범죄 억제 효과가 없음을 일찍부터 통찰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사형이 자칫 오판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오류를 범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제도임을 경고하고,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도행 씨, 페스키마호 선상 반란 사건의 전재천 씨, 파키스탄 국적의 외국인 사형수 무하마드 아자즈와 아미르 자밀 씨 등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할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김 추기경의 개별 사형수 구명운동은 점차 제도 폐지라는 근본적 운동으로 전환됐습니다. 2001년 사형 폐지 운동의 패러다임 전환 한국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생명의 복음」이 강조하는 정신에 따라 범세계적인 생명 수호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보편교회는 사형제도를 안락사, 낙태와 더불어 생명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죽음의 문화’로 간주하고, 전 세계 국가들을 향해 2000년 한 해 동안만이라도 모든 사형 집행을 전면 중지하자는 모라토리엄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이러한 보편교회의 흐름에 적극 호응, 1999년부터 전국적인 사형 폐지 서명운동에 돌입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형 폐지 담론은 수백만 일반 신자들과 대중들의 가슴속에 범국민적 생명 문화 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환경 역시 유리하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인권 신장을 주요 국정 지표로 삼고, 1997년 12월 이후 실질적인 사형 집행을 유보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사형 폐지 운동은 종교계의 광범위한 연대 및 법제화를 향한 조직적 움직임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2001년에 그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이하 사폐소위)였습니다. 이전까지 사형 폐지 운동은 일부 사제나 인권 변호사들이 비정규적으로 전개해 온 활동에 불과했지만, 사폐소위의 설립을 통해 사형제도 폐지가 한국교회 전체의 중대한 사목 목표로 선언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범종교인연합입니다. 사형제도 존치를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논리는 피해자에 대한 ‘국민 법 감정’과 눈에는 눈이라는 ‘응보적 정의’ 요구였습니다. 이를 넘어 용서와 사랑의 논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의 연대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공감한 국내 7개 종단 지도자는 2001년 초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범종교인연합’을 발족했습니다. 세 번째는 2001년 10월 30일 제16대 국회 155명의 의원들이 공동으로 발의한 ‘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입니다. 국회의원 재적 인원 273명의 절반(137명)을 넘는 의원들이 지지했음은 입법을 통한 완전한 사형제도 폐지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001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2001 사형폐지 아시아 포럼 - 서울’입니다. 포럼에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대만, 홍콩,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9개국 대표단과 인권운동가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아시아는 사형 집행이 가장 빈번한 곳이었습니다. 이 포럼을 통해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사형 폐지를 위한 국제적 연대가 이뤄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12월 30일의 마지막 사형 집행 이후, 천주교회와 연대 단체들의 필사적인 사형 집행 저지 노력 덕분에 2007년 12월 30일까지 만 10년간 단 한 건의 사형 집행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앰네스티는 대한민국을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했고, 2026년 9월 현재까지도 사형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국회 차원의 완전하고 비가역적인 법적 사형제도 폐지의 과제는 남아 있습니다.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2면

[세계교회 지성에게 묻다] 미헬 레메리 신부

미헬 레메리(Michel Remery) 신부는 청년들이 미사 후 남긴 물음들을 모아 「하느님과 트윗을」(가톨릭출판사, 2016년)을 펴내고, 이를 도서와 앱, 영상, 동반 활동이 어우러진 국제 청년 사목 플랫폼 ‘데오퀘스트(DeoQuest)’로 발전시켜 온 인물이다. 그는 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앞서 청년들의 실망과 상처를 듣는 것에서 사목을 시작한다. 또한 청년을 사목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길을 찾아가는 동반자로 바라보며, 청년들이 던지는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과 교회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열린 태도로 풀어가는 사목 방식을 실천해 왔다. Q. 청년 사목이 청년들의 질문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질문 속에서 발견한 그들의 영적 갈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아울러 교회는 청년들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요? 청년들의 질문을 들으며, 저는 이들에게 부족한 것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의지할 곳과 사랑, 하느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신앙을 갖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탐구하고,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은 복음화에 대한 제 이해를 바꿔놓았습니다. 복음화는 교회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품은 고민과 질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많은 청년은 교회가 전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현실과 맞닿아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여전히 의미와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답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깊은 것을 찾는 과정에서 교회를 발견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변하지 않아야 할 신앙의 본질은 지키면서도, 청년들이 살아가는 자리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한 지식보다 기댈 곳 찾는 청년들 여전히 의미와 진리에 대한 갈망 지녀 정해진 답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아닌 복음 안에서 함께 답을 찾는 과정 중요 Q. 청년들이 교회 가르침에 의문을 품거나 실망과 상처를 이야기할 때, 어떻게 열린 자세로 경청하며 가르침을 솔직히 전할 수 있을까요? 데오퀘스트에서는 어떤 질문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교회 때문에 겪은 실망이나 실제 상처에서 비롯된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경청이란 제도를 옹호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이 충분히 표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논쟁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물론 경청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대를 존중하며,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진리는 사랑 안에서 전해져야 하고, 사랑 역시 진리 안에서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청년 사목을 하면서 청년들을 ‘위해’ 일하기보다 청년들과 ‘함께’ 걸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럴 때 교회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 질문하고 배우는 만남의 자리가 됩니다. 「하느님과 트윗을」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책에 담긴 질문들은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미사 후나 온라인에서 실제로 던졌던 질문들입니다. 청년들의 고민과 호기심이 책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Q. 「하느님과 트윗을」은 데오퀘스트로 확장됐습니다. 청년들의 신앙 여정을 동반하기 위해 왜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사목이 필요하다고 보셨습니까? 더 넓은 틀을 마련하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한 사람이 신앙 안에서 걸어가는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신앙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질문을 마주하고, 때로는 도움이 필요하며, 함께 걸어갈 공동체를 찾습니다. 늦은 밤 신앙에 관한 질문이 생길 때 찾아볼 수 있는 자료, 성사를 준비하거나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배움의 기회, 그리고 함께 신앙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데오퀘스트는 이러한 청년들의 다양한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책뿐 아니라 앱과 영상, 소그룹 신앙 양성 등 여러 방식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물론 디지털 콘텐츠가 공동체와 만남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디지털은 청년들이 신앙을 접하고 첫걸음을 내딛도록 돕는 도구일 뿐,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 그리스도와의 관계, 신앙 공동체 안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Q. 저서 「청년이 알아야 할 사회교리 Q&A」(가톨릭출판사, 2025년)를 통해 청년들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책은 빈곤과 연대, 환경, 정의와 평화, 노동, 정치, 기술 등 청년들이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를 사회교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돕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회교리를 단순한 지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발, 그리고 입이 되어 줄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위로나 내면의 평화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환경을 어떻게 대하며,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사회 안에서 어떤 책임을 다하는지가 모두 신앙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청년들이 이를 깨달을 때 사회교리는 삶과 동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라 복음을 실천하는 길이 됩니다. 여러 문화권에서 청년들과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인간이 품는 근본적인 질문은 어디서나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고통, 삶의 의미, 죽음, 하느님에 대한 갈망은 문화와 언어를 넘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답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 사회적 환경, 공동체가 형성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답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품고 있는 질문에서 출발해 복음 안에서 함께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역할 찾을 때 신앙 깊어져 청년이 서울 WYD 기획과 환대 주체 돼야 Q. 한국교회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라 교회의 주체로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027 서울 WYD는 이미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한국 청년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교구대회 기간에는 자신의 집을 열어 순례자들을 맞이할 예정이며, 단순히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함께 대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을 단순히 행사의 참여자나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 머물게 하지 말고, 준비 과정에서부터 기획과 환대, 기도와 소통의 책임을 맡겨야 합니다. 청년들이 교회의 삶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발견할 때, 신앙은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서울 WYD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신앙 여정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데오퀘스트와 같은 도구를 통해 청년들이 계속해서 신앙을 배우고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대회 주제는 2027년 8월의 행사를 기다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신앙을 살아가고 나누라는 초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찾는 순례자들은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환대와 따뜻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 역시 몇 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커다란 환대를 받았고,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Q.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가톨릭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데오퀘스트가 하려는 일도 사람들이 신앙에 관한 질문을 만났을 때 신뢰할 수 있는 답을 찾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의미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입니다. 무엇이 참되고 선하며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인지 분별하도록 돕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언론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더 많은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고 정직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이 신앙과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화면이나 신문 지면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고 공동체를 이루도록 연결하는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식민 지배와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진실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신앙인들의 목소리를 전해 온 가톨릭신문의 창간 100주년을 축하합니다. 한국교회가 서울 WYD를 통해 세계의 청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지금, 가톨릭신문은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특별한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의 질문에 귀 기울이고, 신앙의 참 의미를 알리며, 젊은 세대가 교회를 가까운 공동체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언론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가톨릭신문의 모든 이들과 독자들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 미헬 레메리 신부는 네덜란드 로테르담교구 소속 사제로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건축학을 공부했으며, 2004년 사제품을 받은 뒤 전례와 건축의 관계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는 자위트홀란트주 레이던에서 청년과 대학생들을 사목했다. 이들이 신앙과 삶에 관해 던진 질문은 「하느님과 트윗을」 저술의 바탕이 됐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는 유럽주교회의연합 부사무총장을 지내며 사회홍보위원회와 교리교육·학교·대학위원회 서기를 겸했고, 유럽안보협력기구에서 그리스도인 대상 증오범죄 문제를 다루는 교황청 연락 담당자로도 활동했다. 2018년에는 룩셈부르크로 옮겨 전국 청년사목 담당 사제로 일했다. 2023년부터는 로테르담교구에서 사목하며 데오퀘스트(DeoQuest)의 책임자를 겸하고 있다. 데오퀘스트는 출판물과 앱, 영상, 신앙 양성 자료, 카드 게임, 온라인 활동, 대면 만남을 하나로 연결하는 국제 가톨릭 사목 플랫폼이다. 주요 저술로는 「청년이 알아야 할 사회교리 Q&A」, 「Online with Saints(성인들과 온라인으로 만나다, 국내 미출판)」, 「데오퀘스트 신앙 강좌(DeoQuest Faith Course, 국내 미출판)」가 있다. 그중 「청년이 알아야 할 사회교리 Q&A」는 개인의 신앙과 교회 가르침을 다뤄온 기존 작업을 가톨릭 사회교리 분야로 넓힌 책으로, 빈곤과 이주, 노동, 전쟁, 기후위기, 공동선,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책임을 다룬다. 최근에는 카를로 아쿠티스 성인의 삶을 통해 신앙과 삶의 목적, 고통, 기술에 관한 청년들의 질문을 탐구하는 「26 Questions to Carlo Acutis: How Can the First Online Saint Help You in Your Daily Life?(카를로 아쿠티스에게 묻는 26가지 질문: 최초의 온라인 성인은 여러분의 일상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국내 미출판)」를 펴냈다.

발행일 2026-10-04 제3509호 10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4) 천주교총선연대 출범

“교회 내 36개 단체들로 구성된 천주교총선연대가 공식 출범함으로써 새 천년기 한국교회의 사회 참여 향방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올바른 선거 참여와 국민 주권 회복을 위한 천주교총선연대는 2월 23일 오전 11시30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기자회견 및 발족식을 갖고 합헌적(정당한) 실천에 기반한 낙천·낙선운동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한 36개에 이르는 단체가 참여한 천주교연대는 이날 발족식에서 4·13 총선을 향한 시민단체들의 움직임을 인권 보호와 공동선을 향한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라고 평가하고, 이에 적극 동참할 뜻을 밝혔다. 천주교연대는... 사회 개혁의 최대 걸림돌이자 심판 대상이 되고 있는 낡고 부패한 정치의 일소를 위해 인적 청산 작업에 본격 나설 것임을 공식화했다.” (가톨릭신문 2000년 3월 5일자 2면) 한국교회 내 여러 단체가 참여한 ‘올바른 선거 참여와 국민 주권 회복을 위한 천주교총선연대’가 2000년 2월 23일 출범했습니다. 이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선거가 공동선을 위한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도록 교회 내 주요 단체들이 결집해 펼친 직접적인 사회 참여 행위였습니다. 부패 정치에 반대한 시민사회 운동에 결합 이는 천주교회만의 독자적인 움직임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 정치는 1997년 IMF 외환위기 극복 국면 속에서도 고질적인 지역주의, 밀실 공천, 부패 비리 전력자의 무분별한 재입후보 등 구태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1999년 말부터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2000년 총선시민연대’는 부패·무능 정치인의 공천 반대와 퇴출을 목표로 낙천·낙선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정치 개혁 흐름 속에서 교회 안에서도 복음적 정의와 사회교리의 정신을 현실 정치 영역에 구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이에 천주교 평신도·인권·사회운동 단체들은 투표 독려나 금품 선거 감시 같은 소극적 계몽 방식을 넘어, 부적격 후보를 직접 지목해 유권자의 거부를 호소하는 시민사회 연대 전선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주요 활동 천주교총선연대의 활동은 공천 심사부터 본선거 유세까지 3단계에 걸쳐 전략적으로 전개됐습니다. 1단계에서는 공천 부적격자를 조사해 공천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총선시민연대가 발표한 1·2차 부적격자 명단 중 군사독재 시절 인권 탄압이나 부패 전력이 뚜렷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각 정당에 강력한 공천 철회를 촉구했습니다. 2단계에서는 낙선 대상자를 확정하고, 교회 내 유권자들의 인식을 높여 투표를 통해 이를 실현하도록 의식화 작업을 추진했습니다. 3단계로 선거를 앞둔 4월 초부터는 전국 순회 버스 유세와 거리 퍼포먼스, 서명운동, 수도권 및 격전지 집중 유세 동참 등을 통해 올바른 주권 행사를 호소했습니다. 동시에 선거법 제87조에 대한 불복종 운동도 펼쳤습니다. 당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87조는 시민사회단체의 선거운동을 전면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총선연대는 이 조항이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침해한다고 규정하고, 평화적 시민 불복종의 일환으로 낙선 명단 공표와 거리 서명전을 강행했습니다. 교회의 공식 대응과 내부 논쟁 2000년 총선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낙선운동은 부적격 후보들의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실정법 위반 논란과 함께 교회 내부에서도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3월 8일 ‘국민이 바로 서야 정치가 바로 섭니다’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하며, 생명·진리·사랑을 올바른 투표 기준으로 제시하고 부패 정치 청산과 지역감정 타파를 강조했습니다. 다만 교회 당국의 공식 입장은 원칙과 기준 제시에 머물렀으며, 특정 정당이나 인물을 직접 낙선 대상으로 지목하는 방식과는 선을 그었습니다. 낙선운동을 지지한 사회운동 단체와 사제단, 평신도들은 신앙이 성전 안에만 갇혀서는 안 되며 불의와 부패를 묵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직무 유기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반대 측은 교회가 정쟁에 휘말려 공동체의 일치가 깨지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도 낙선운동은 신자들의 넓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전국 100여 개 본당과 제 단체를 중심으로 약 3만 명의 신자가 ‘부적격자 자진 사퇴와 선거법 개정을 위한 그리스도인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성과와 의미 낙선운동은 유권자를 동원 대상에서 주체적인 심판자로 끌어올린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이 운동은 실제 선거 결과에 큰 파급력을 가져왔습니다. 총선시민연대가 선정한 최종 86명의 낙선 대상자 중 59명(68.6%)이 낙선했고, 특히 수도권에서는 대상자 20명 중 19명이 낙선하는 이변을 낳았습니다. 영남 지역의 경우 35명 중 16명만이 낙선해 지역주의의 벽을 완전히 넘지는 못했습니다. 2000년 천주교총선연대의 활동은 1970~1980년대 군사독재 퇴진과 민주화 투쟁에 집중됐던 교회의 예언자적 사회 참여가, 절차적 민주주의 정착 국면에서 제도 정치 개혁과 유권자 시민행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교회가 당파성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복음적 가치와 사회교리(생명·인권·생태·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제시한 역사적 선례로 평가받습니다.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1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3) 가톨릭신문이 전한 순교성지 절두산 60년

2026년은 병인박해가 시작된 지 160년이 되는 해다. 오늘날 절두산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순교성지로 자리하고 있지만 60여 년 전 모습은 사뭇 달랐다. 가톨릭신문의 옛 지면을 펼치면 허허벌판 순교 터가 성당과 박물관을 갖추고 성지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1964년 9월 13일자 ‘순교성지를 찾아서-절두산’은 당시 절두산을 “잡초만 우거진 한강 변 절벽 위에 ‘가톨릭순교성지’의 기념탑이 홀로 서 있다”고 전했다. 순교자현양회가 대지를 마련하고 1962년 기념탑을 세웠지만 지금과 같은 성지의 모습은 아직 없었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앞두고 변화가 시작됐다. 1965년 10월 3일자에는 병인순교 백주년 기념사업회가 회비 모금을 위해 발행한 용지 2000매가 모두 배포됐다는 소식이 실렸다. 이어 1966년 1월 16일자 ‘절두산에 순교기념성당 착공’은 1965년 12월 31일 열린 기공식과 복자성당·기념관 건립 계획을 보도했다. 병인순교 백주년 기념사업회는 총 공사비 3000만 원을 목표로 모금에 나섰고, 당시까지 모인 돈은 150여만 원이었다. 3000만 원은 소비자물가 상승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약 12억4000만 원에 해당한다. 성당 건립에는 여러 사람의 정성이 모였다. 1967년 1월 22일자 ‘사형수의 성금 복자성당 기금으로’에는 서울교도소 사형수 조일용 씨의 이야기가 실렸다. 그는 고향 부모에게 보내려던 영치금 1000원 전액을 1월 11일 절두산 순교기념성당 건립비로 내놓았다. 안타깝게도 조 씨는 이틀 뒤 형 집행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문은 서울대교구 주교관 재경부장 경갑룡(요셉) 신부가 고인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그해 가을 마침내 성당과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1967년 10월 29일자 지면은 절두산 순교자기념성당과 복자기념박물관이 완공돼 10월 21일 윤공희(빅토리노) 주교 주례로 축복식이 거행됐다고 전했다. 불과 3년 전 기념탑만 홀로 서 있던 곳에 성당과 박물관이 들어선 것이다. 성지가 조성되자 순례자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1968년 10월 6일자에는 도림동본당 신자 600명이 9월 29일 성당에서 절두산까지 20리 길을 걸어 순례한 소식이 실렸다. 1968년 10월 3일에는 시복경축중앙위원회와 가톨릭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백일장과 사생대회가 전국 1167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1968년 10월 6일자 ‘순교정신 현양사업 어제와 오늘’ 좌담회에서는 절두산 기념관에 보관할 교회 유물을 더 수집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어 1970년 8월 23일자는 순교자 유품을 모으는 운동을 소개했다. 이 지면은 2017년 절두산순교성지 축성·봉헌 50주년 특별전에도 전시됐다. 1984년 5월 3일 한국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김포공항 환영 행사를 마친 뒤 첫 방문지로 절두산을 찾았다. 가톨릭신문은 교황이 성해실에서 순교자들의 무덤을 둘러보고 기도와 분향을 한 뒤 참석자들과 한국어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고 전했다. 이후 절두산 순교성지의 정비와 변화도 지면에 꾸준히 기록됐다. 1997년에는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가톨릭신문은 2000년 9월 3일자에 순교자 기념광장과 교회사 유물공원 등을 조성하는 ‘절두산 순교 성지 종합발전 계획’을 담았다. 2009년 9월 13일자는 전시공간을 새롭게 단장해 다시 문을 연 박물관의 모습을 전했다. 병인박해 150주년이던 2016년에는 특별전 ‘병인년 땅의 기억’을 통해 병인박해와 절두산의 역사를 다시 조명했다. 그리고 10년 뒤인 올해에는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특별전 ‘양화나루와 잠두봉 이야기’(2026년 8월 16일자)를 소개했다. 1964년 가톨릭시보가 ‘잡초만 우거진’ 곳으로 소개했던 절두산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그렇게 신문 지면에 차곡차곡 남아 있다.

발행일 2026-09-20 제3508호 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63) 「쇄신과 화해」, 한국교회 과거사 반성

“한국교회가 역사와 민족 앞에 200여 년 한국교회의 잘못에 대해 고백하고 참회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장 박정일 주교)는 12월 3일자로 한국교회의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를 발표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신앙으로 결합된 형제자매로서,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함께 고백하고 참회한다’며 ‘이러한 참회를 바탕으로 자신을 쇄신하면서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하려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로서,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주교단과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의지 표현으로 평가된다.” (가톨릭신문 2000년 12월 3일 자 1면) 주교회의, 2000년 12월 과거사 반성 문건 「쇄신과 화해」 발표 7개 항목 걸쳐 포괄적 고백 담아…참된 용서 청원·쇄신 다짐 2000년 12월 3일,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기해 주교회의는 200여 년의 한국 교회사 안에서 교회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참회 문건인 「쇄신과 화해」를 반포했습니다. 이 문건은 한국 주교단 전체 명의로 발표됐고, 각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동시에 거행된 참회 예식을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기억의 정화’ 이처럼 한국교회가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보편교회가 추진한 ‘기억의 정화’라는 신학적 쇄신 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4년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를 발표했는데, 33항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기 자녀들이 참회를 통하여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에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격려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강화하도록 도와주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교황의 권고는 2000년 3월 12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용서 청원 예식’을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교황은 종교재판과 폭력, 십자군 전쟁, 교회 분열, 유다인 박해, 여성 및 소수자 차별 등 7개 범주에 걸친 교회의 과오를 하느님과 인류 앞에 고백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식민 통치와 분단이라는 고유한 역사적 지평 안에서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성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부여받게 됐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 군부독재 시기 의문사 규명 등 과거사 진상 규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했습니다. 이는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교회는 군사 독재 시절 인권 수호에 앞장서 양심의 보루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역사적으로는 식민지 시기 일제의 군국주의 전쟁에 협력하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독립운동을 배척했던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었습니다. 특히 1909년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살인 행위’로 규정하여 단죄했던 사건은 교회가 짊어진 가장 무거운 역사적 멍에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교회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민족 화해와 평화통일 담론 형성에 소극적이었던 점, 그리고 급격한 교세 팽창 과정에서 나타난 성직자 권위주의와 중산층화 역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었습니다. 포괄적 고백 양식으로 최종 결정 이 문건은 역사학계와 신학자들의 전문 연구, 그리고 주교단의 심의 과정에서 빚어진 신학적·정치적 긴장을 수렴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1999년 1월부터 참회 문건 작성의 필요성이 본격 제기됐고, 2000년 3월 교황청의 용서 청원 예식을 기점으로 작업이 급물살을 탔습니다. 주교회의 역사신학위원회 산하 전문 소위원회가 마련한 초기 문서안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기반해 과오의 주체와 구체적인 사건명을 가감 없이 명기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초안에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 함대의 내항을 안내하거나 편승한 행위,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 안중근 의사에 대한 종부성사 집전 금지 및 살인자 규정, 3·1운동 당시 신학생들의 참여 제재, 1930년대 후반 교황청 훈령을 방패 삼은 신사참배 적극 권유와 일제 전시 동원 체제 순응, 그리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및 역대 군사독재에 대한 보신주의적 침묵 등이 구체적인 고유명사로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 10월 추계 정기총회와 11월 9~10일 주교회의 임시총회에서 주교단은 초안을 전면 재검토하여, 구체적인 역사 사건명을 삭제하고 교황의 용서 청원 양식과 같은 7개 항목의 포괄적 고백 양식으로 문건을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수정된 전문이 11월 임시총회에서 통과되어 12월 3일 최종 공개된 것입니다. 「쇄신과 화해」, 무엇을 담았나 「쇄신과 화해」는 도입부에서 대희년의 의미와 제삼천년기를 맞이하는 교회의 정화 필요성을 밝힌 뒤, 본론에서 7개 항에 걸친 과오를 고백하고 결론부에서 참된 용서 청원과 미래 쇄신의 다짐을 천명했습니다. 7개 항 중에서 앞부분의 3개 항은 박해 시대와 개항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를 역사 순으로 다뤘습니다. 1항과 2항은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수호를 구실로 외세에 의존하거나 일제 식민 통치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족적 입장에서 독립운동에 나선 신자들을 단죄한 데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의 외세 의존, 황사영 백서 사건, 안중근 의사 단죄 등이 그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3항은 분단 상황 극복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투철하지 못했던 점에 대한 반성입니다.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비극을 야기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상흔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 과정에서 복음의 메시지와 민족의 염원에 바탕을 둔 활동을 얼마나 충실히 펼쳤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았습니다. 4항부터는 분야별 성찰로 이어집니다. 4항은 사회 안에 상존하는 갈등 해소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 부족, 공동선 실현을 위한 노력이 미흡했음을 반성했습니다. 5항은 생명 경시 풍조에 맞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정 공동체의 가치를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 과오를 고백합니다. 6항은 봉사자로서의 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성으로, 특히 성직자 중심의 권위주의와 외형적·양적 성장에 치우쳤던 풍조를 깊이 성찰했습니다. 마지막 7항은 다종교·다문화 사회인 우리나라 안에서 타 종교에 대한 충분한 존중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고백했습니다. 2000년 12월 3일 반포된 「쇄신과 화해」는 식민 통치 협력, 외세 의존, 분단 상황에 대한 침묵, 성직자 권위주의 등 200년 한국 천주교 역사 속 구조적 과오를 겸허하게 고백한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구체적인 사건과 인명을 적시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자신의 과오를 공식 인정하고 ‘기억의 정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2면

[100년의 페이지, 그 안에 담은 이야기] (12) 가톨릭신문 속 그때 그 사람들

가톨릭신문은 창간 99년이라는 오랜 역사 안에서 여러 인물의 발자취도 기록해 왔다. 오늘날 교황과 주교, 사제를 양성하는 대신학교장 등으로 교회를 이끌고 있는 이들도 과거에는 한 명의 사제, 수도자, 신학생으로 가톨릭신문에 등장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이들의 ‘그때 그 시절’을 살펴본다. 레오 14세 교황은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다섯 차례 한국을 찾았다. 가톨릭신문은 2002년과 2005년 수도회 한국지부 방문, 2010년 수도회 한국 진출 25주년 기념행사 참석 당시의 소식을 알렸다. 2002년 1월 27일자는 “수도회 총장 로버트 프레보스트 신부가 내한했다”며 “한국지부의 청소년 사목·영성 상담·피정 지도 등의 사도적 활동 현장을 둘러보고 회원·재속회원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고 소개했다. 2010년 10월 10일자도 “총장 로버트 프레보스트 신부를 비롯한 각국 장상들과 회원 250여 명이 참석해 축하 인사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군종교구장 서상범(티토) 주교는 군종 사제로 동티모르에 파견돼 있던 1999년, 여러 차례 현지 상황을 전했다. 당시 서 신부는 베트남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투 병력이 해외에 파병된 상록수부대의 일원으로 동티모르에 파견됐다. 서 신부는 가톨릭신문을 통해 동티모르 현지의 어려움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독자들의 응답에 서 주교는 1999년 12월 26일자에 실린 편지로 “가톨릭신문사의 적극적인 홍보에 힘입어 동티모르 형제자매들이 성금과 구호품을 받았다”며 “옷·신발·영양제·분유·세탁비누·학용품 등 요긴한 물품들이 도착하고 있어, 우리의 기도와 사랑의 마음에 감격해하고 있다”고 감사를 표했다. 서 주교는 2000년 4월 29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21년 6개월간 해왔던 군 사목을 마무리 지을 때도 인터뷰로 소회를 밝혔다. 2012년 12월 16일자는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 때 어떤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서 주교의 말을 인용했다. 이후 서 주교는 2021년 4월 9일 제4대 군종교구장에 착좌해 군 사목으로 돌아왔다. 사제가 되기 전의 모습도 담았다. 가톨릭신문은 1994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한 민범식(안토니오) 신부의 소감을 실었다. 1994년 1월 16일자는 “권위 있고 엄숙한 신부님보다는 항상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민 신부의 포부를 전했다. 꿈꿨던 모습의 사제가 된 민 신부는 2025년 2월 18일부로 제20대 서울대교구 대신학교장에 임명됐다. 취임을 앞둔 2025년 3월 16일자 인터뷰에서 민 신부는 “앞으로는 성소자와 양성자 간의 ‘밀접 동반’으로 변화를 꾀하며 사제 양성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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