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 다들 아실 테죠. 유명한 이 비유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탕자의 비유 등 여러 이름이 붙여집니다. 잃었던 양을 되찾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주인(루카 15,6 참조),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부인(루카 15,9 참조)에 이어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쁨에 젖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루카 15,24 참조)의 비유가 나란히 나옵니다. 세 비유는 100분의 1(양 100마리 중에 한 마리), 10분의 1(잃었던 은전 열 닢 중에 한 닢), 2분의 1(두 아들 중에 한 아들)로 긴박함이 급상승하며, 한결같이 우리 독자로 하여금 회개하여 그 기쁨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비유를 들려주시는 동기가 다음에 나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 15,1-2) ‘탕자의 귀환’을 통하여, 우리는 작은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회개한 동생을 조건 없이 받아주시는 아버지 모습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와 인류 구원 의지를 봅니다. 회개한 친동생을 보고 ‘저 아들(그리스어 본문: 당신의 저 아들은)’이라 부르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친형에게 아버지는 ‘너의 저 아우는’이라고 부르시면서 큰아들의 빗나간 자세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이는 죄를 짓기 전에든 후에든 형과 아우, 곧 형제자매 관계는 전과 다름없이 또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가르침이 아닐까요? 200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초청 강연을 마치고, 이튿날 몇몇 자매님과 함께 부근에 있는 발달장애인 공동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오전 9시경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침 식사를 하던 이들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습니다. ‘낯선 우리를!’ … 천사들이 운영하는 천상 공동체에 들어선 느낌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 신부(Henri J. M. Nouwen, 1932~1996)님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로 지내던 중, 자신은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큰아들’이라면서 교수직을 접고 토론토의 이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분은 저서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A Story of Homecoming)」에서 말합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창조의 시작부터, 자비 가득한 축복을 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언제나 기다려주십니다. 실망 속에서도 두 팔을 내리지 않고, 언제나 당신 자녀들이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사랑 가득한 이야기를 건네시며 그들의 어깨 위에 당신의 팔을 올려 놓아주고자 하십니다. 그분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 죄인을)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96페이지) 나우웬 신부님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내가 그분을 필요로 하는 만큼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106페이지)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령의 열매는?

사도 바오로는 육의 행실(부도덕)을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갈라 5,19-20) 등 열다섯 가지나 나열합니다. 이어서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열거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여기 나오는 부도덕(악덕)을 네 종류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불륜, 더러움, 방탕 등은 우리의 사랑을 빗나가게 합니다. 둘째, 우상 숭배와 마술은 하느님 예배(경신례)를 빗나가게 합니다. 셋째, 분열과 분파 등은 사랑의 끈을 풀어 서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넷째,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 등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며 인간성을 타락시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사랑은 뒤따르는 여덟 가지 덕목의 으뜸 개념입니다. ‘육(肉)의 행실’을 나타내는 그리스말 본문은 본디 ‘육의 행실들(ta erga te-s sarkos)’로 복수로 쓰인 데 반해, 성령의 열매 ‘사랑(agape-)’은 단수로 쓰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다양하지만, 그 모든 열매는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짧게 설명해 주는 구절을 대라면 다음 둘을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24) 요한의 첫째 서간 저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한마디로 서술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훗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요한의 첫째 서간 주해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 ‘신비의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한마디로 요한의 첫째 서간은 ‘사랑(agape-)’이시라고 서술해 줍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라면 둘째가는 계명은 이웃 사랑입니다.(마르 12,29-31 참조)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쭈그러들 때는 소화력도 떨어지고 기쁨도 줄어들지만, 거꾸로 사랑이 충만해질 적에는 의욕도 생기고 기쁨도 솟아남을 느낍니다. 지난해 무더운 여름 7월과 8월을, 산골짜기 작은 농장에서 작물도 가꾸고 닭과 개 두 마리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1~2m씩 거리를 두던 닭들에게 3주 정도 지나면서, 기본 먹이 외에 씀바귀, 참비름, 상추 등 즐기는 것을 뜯어다 주었더니, 닭들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면서 부리로 손등이나 신발을 장난치듯 툭툭 건드리기도 하면서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을 주면 식물도 동물도 친근해지고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보답하는구나.’ 아울러 시편 노래가 마음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 함께 시편으로 기도드리시겠습니까?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께서도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 주리라.”(시편 85,11-13)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의 우물] 다니엘 안에 있는 거룩한 영

다니엘서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본문까지 모두 세 가지 언어로 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다니엘서 1장부터 14장까지 전체가 다 쓰여서 최종 편집된 시기는 기원전 164년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의 그리스화 정책 아래 억압당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할 무렵 부활 희망이 분명하게 등장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우리 개인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 명시적으로 나오는 구절은 다니엘서가 처음입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다니 12,2)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유다교 말살 정책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니엘이 그의 하느님께 기도와 간청을 올리는 것을 발견하였다.”(다니 6,12) 그 즉시 다니엘은 임금에게 고발당해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오히려 그를 악의로 고발한 이들이 사자 굴에 던져져 죽게 됩니다.(다니 6,15-29 참조) 그즈음 바빌론 어느 곳에 수산나라는 미모의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다니 13,1-64 참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다니 13,2-3) 그 무렵 유다 원로 둘이 부정한 마음을 품고서 수산나와 정을 통할 기회를 엿보다가, 수산나가 혼자 정원에서 목욕할 때를 알아채고, 다가가 불륜을 저지르려 합니다. 수산나가 거절하자, 원로들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수산나가 어떤 젊은이와 정을 통하려 했다고 오히려 수산나에게 자기들의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게 된 수산나는 억울함을 주님께 호소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다니 13,42-43) 주님께서는 수산나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다니 13,45) 혜성처럼 등장한 다니엘, 성령의 인도를 받은 다니엘은 사형 집행을 멈추라고 소리 지릅니다.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다니 13,48) 다니엘은 타락한 두 원로 재판관을 갈라놓고서 ‘어떤 나무 아래에서 수산나가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따로따로 묻습니다. 한 원로는 ‘유향나무 아래’라고 대답하고, 다른 원로는 ‘떡갈나무 아래’라고 다른 대답을 하는 바람에 그들의 거짓이 들통납니다. 그 결과 수산나는 무죄로 풀려나고, 두 원로는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의롭게 살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과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주변을 정화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8면

[말씀의 우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독일어 christsein)’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독일어 christwerden)’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존재론적 차원의 표현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본당 교적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된 우리는 모두 완성된 신자일까요? ‘신자인가? 비신자인가?’라는 물음, 곧 존재론적인 물음에는 ‘예, 신자입니다!’라고 마땅히 응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한 신자, 곧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참신자가 되어 ‘이제는 회개도 발전도 더는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신자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하고 응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존적 차원에서는 아직 더 배우고 더 회개하고 매일 조금씩 더 노력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보다 더 나은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 곧 나그네 살이 중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도록(christwerden) 힘껏 노력해야 할 터입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나의 성화뿐 아니라 이웃의 회개와 성화에도 기여하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뵙게 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 품 안에서 그분을 뵙고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지복직관이라 이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하느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4) 이마에 이름을 적어 놓는다는 이야기는 “인장 반지를 새기듯, 그(아론, 훗날 대사제) 위에 ‘주님께 성별된 이’라고 새겨라”(탈출 28,36)라는 전통에서 유래하죠. 베드로의 첫째 서간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멈춰있지 말고 성장하여 보다 나은 신앙인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기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1-3) 베드로의 첫째 서간 속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성장 곧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4-15)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를 받으면 그때부터 온 힘을 다해 ‘참신자’가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이제(오늘)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8면

[말씀의 우물] 마르타의 선택

길을 가시던 예수님을,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가 집으로 모십니다.(루카 10,38-42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 시중을 드느라 분주합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분 말씀을 듣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 발치(발 앞)에 앉는다’는 말은 그분을 따르려고 마음먹은 사람, 곧 그분 제자로서의 태도를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루카 8,35) 마르타가 한마디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루카 10,41-42) 의문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곁에서 말씀 경청에 몰입하는 마리아의 몫만 좋다는 말일까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모시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르타의 몫은 별 가치가 없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선택이나 시중드는 일을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시중드는 일에만 몰두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가 선택한 일 즉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몫이니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바로잡아 주실 뿐이죠. 그날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마르타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시며 축복을 가득히 내려주고 떠나가셨을 겁니다. 복음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바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도, 그분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것도 다 그분 말씀을 듣고 강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 말씀이 이미 강복이자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본당에서 구역이나 가정방문 때, 함께 나눌 대화나 필요한 성사와 미사 집전에보다는, 상대에게 무엇을 대접할까에 더욱 마음을 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마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말씀을 경청하고 나누며 그분과 하나 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루카 10,38-42 참조) 바로 앞에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루카 10,25-28 참조)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가 나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믿음에 따른 행동이 강조됩니다. ‘행동주의(Activism)’라고 일컬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행동 중심의 신앙생활도 결국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처럼 그분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과 하나 되는 ‘경건주의(Pietism)’에서 꽃을 피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개화(開花)의 절정은 바로 미사성제 안에서 영원하신 분을 모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이뤄지리라고 저는 봅니다. “그들(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하늘나라’가 공간적 개념만 나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는 진정 ‘우리 마음 안에’ 또는 ‘마음속에만’ 들어 있을까요? 이 물음에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너희 마음에’ 또는 ‘너희 마음속에’가 아니라 ‘너희에게(고대 그리스어로 너희 위에 또는 너희 둘레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시간이나 장소적 의미만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주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뜻합니다. 예수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움터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0-11) 마귀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이들이 해방되고 치유되어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서 활동 경과를 보고하자 그분께서 친히 증언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마귀(사탄)의 시대는 사그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마태 10,1) 신약성경에서 ‘더러운 영’은 악마, 마귀, 악령 등과 맞바꾸어 놓을 수 있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악령 퇴치 권한뿐 아니라, 갖가지 병자와 허약한 이들에 대한 치유 권한까지도 부여받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마르 6,12-13)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마태 12,28) 대신에, 루카는 병행 구(句)에서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루카 11,20)이라고 전해줍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기적들을 부정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 하느님의 위력을 체험한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탈출 8,15) 그와 같이 놀라운 기적들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바로 그분 손가락이, 곧 그분께서 친히 이루신 그분의 작품이라고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지침을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입니다.…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 14,17-19)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8면

[말씀의 우물] 성경에서 찾는 불면·우울증의 치유

불면증과 우울증은 전문의를 찾아 상담과 진료로 치유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오늘은 성경에 뚜렷이 등장하는 경우를 통해 그 극복의 길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저지른 권력 남용 사례를 지난 주간에 들려드렸습니다.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고 부하 장수들이 잇따라 패배하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다는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1마카 6,11)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찾아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1마카 6,12) 안티오코스는 다시는 유다 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절망에 이릅니다. 그는 친지들을 불러 진심을 털어놓습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1마카 6,10)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는 불면증 호소이며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는 우울증 호소입니다. 다른 원인에서 오는 불면증과 우울증에는 치료 방법이 따로 있겠지만, 전쟁광 안티오코스의 치료제는 ‘회개’뿐일 테죠. 그 회개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 2001년 여름 전국 신학부 교수 모임 때, 통풍으로 양쪽 발이 퉁퉁 붓고 아파서, 거실에서 불과 70여m 떨어진 모임 장소조차 걸어가지를 못해 암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저는 2003년부터 십일조 정신으로 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도, 또 우울감이 짙어 올 때도 자꾸만 은혜로운 일을 떠올립니다. 안경을 개발한 분들, 신발을 만들어 준 분들, 농어민, 자동차나 옷을 만들어 주는 분들, 의료진, 도로 건설, 건축가, 그리고 갖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 주는 분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고마운 분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면 이웃과 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부족했던 사랑과 배려에 죄송한 마음, 이제라도 아껴 주고 덮어 주고 감싸 주고 갚아드리고 싶은 마음도 차오릅니다. 그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축복을 빌어드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더군요. 이같이 은혜로운 마음이 우리 영혼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 꿀잠도 자게 되고 행복한 마음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입니다. 희년의 기본 정신이 다음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참된 회개는 자기 책망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찾을 줄 아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설령 어둠 속을 걷고 있어도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매 순간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지 묵상해 봅시다. 그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힘에 귀 기울이며 점점 익숙해져 봅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아물어 갈 터입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5-03 제3489호 18면

[말씀의 우물] 하누카의 유래

고대 유다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임금을 대라면, 흔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를 꼽을 터입니다. 도대체 재위 12년 동안 안티오코스의 업적이 어땠길래 그럴까요? 업적이라기보다는 그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겠죠. 안티오코스는 세계화(그리스화) 정책을 펼쳤고, 모든 나라 곧 그가 지배한 주변 나라는 하나같이 그리스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야훼 하느님’ 신앙을 버리고 이교도들의 풍습과 종교까지 그대로 따르도록 강요당했죠. 그리스 잡신들을 공경해야 했던 겁니다. “임금(안티오코스)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41-42) 안티오코스는 유다교 탄압에 열을 올리며, 특히 리시아스를 시켜 유다인 말살 정책을 폅니다. “이스라엘의 병력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을 없애버리고…”(1마카 3,35)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영토에 외국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땅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1마카 3,36) 그즈음에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인들의 용기를 북돋웁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자기) 백성을 파멸시키고 몰살시키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졌음을 알고는, 서로 ‘우리 백성을 폐허에서 일으키고 우리 백성과 성소를 위하여 싸우자’ 하고 말하였다.”(1마카 3,42-43) 그때 유다 군중은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싸울 준비를 하며 주님께 기도 올립니다.(1마카 3,44 참조) 기도에 힘입어 전투는 유다의 대승으로 끝납니다.(1마카 4,28-35 참조) 이와 같이 유다 마카베오는 안티오코스의 오른팔 격인 리시아스 군대를 물리치고 나서, 안티오코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와 형제들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물리쳤으니 올라가서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이어 흠 없이 율법에 충실한 사제들로 하여금 성소를 정화하고 더럽혀진 돌들도 치워버리며 더럽혀진 제단까지도 헐어버립니다.(1마카 4,42-45 참조) 유다인들은 기원전 164년 12월 14일 아침에 더럽혀진 성전을 새로 봉헌합니다.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1마카 4,53-54)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봉헌하던 그날은 에피파네스 임금이 성전 제단 위에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2마카 6,2) 히브리어로 하누카(봉헌)라고 부르는 이 봉헌 축일은 요한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오늘날의 우리도 삶에서 우리의 믿음을 꺾어놓는 시련과 적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누카를 기억하며 의지를 다지면 좋겠습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8면

[말씀의 우물] 불면증과 우울증 이야기

불면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갓난아기도 오랜 질병이나 주변 환경 때문에 뒤척이거나 잠 못 이루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부모가 큰소리로 자주 다투면 입이 무거워지고 웃음이 차츰 엷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수까지 줄고 아예 미소까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자연히 우울감이 속마음을 짓누르게 되어, 생각도 판단도, 내·외적 성장이나 발육도 더디거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실은 저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불면증을 겪으며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울증세가 스며듦을 느낍니다. 불면증을 뜻하는 라틴어 ‘인솜니아(insomnia)’는 본디 수면(睡眠)을 뜻하는 라틴어 ‘솜누스(somnus)’에서 유래합니다. 그 반대말로 접두사 ‘인(in-)’을 붙여서 불면증이 자연스레 ‘인솜니아(in-somnia)’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잠 못 이루다 보면 누구나 결국 우울한 마음에 갇혀 힘겹게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를 자주 만납니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겪은 불면증과 우울증은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 예라고 봅니다.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안티오코스는 신하들과 자기 측근을 불러 놓고 이릅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불면증)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우울증).”(1마카 6,10) 우울증을 뜻하는 영어 ‘디프레션(depression)’도 본디 ‘짓누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데프리메레(deprimere)’에서 유래합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75년부터 164년까지 12년 동안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스린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해 ‘에피파네스(신으로 나타난 자)’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부도덕함과 오만함을 보고서 ‘에피파네스’ 대신에, 뒤에서는 ‘에피마네스(Epimanes, 미쳐버린 자)’라고 부르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유다 민족을 멸망시키려던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큰 슬픔이 일어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탄식하고 처녀 총각들은 기운을 잃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져갔다. … 땅도 그 주민들 때문에 떨고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마카 1,25-28) 안티오코스는 이스라엘을 점령해 약탈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유다인들을 박해한(1마카 1,36 참조) 결과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음과 영을 맑게 해주고 축복해 주는 음악과 그림 등이, 잠을 설치게 하는 침울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다.”(1사무 16,23) 말씀의 우물을 읽으시는 여러분 중에도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실 터입니다. 그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함께 아파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잠시 숨이라도 돌리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9 제3487호 18면

[말씀의 우물] 요셉의 운명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섬세하게 펼쳐집니다.(창세 37장, 39~50장 참조) 요셉은 어느 날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 37,7) 이 꿈 이야기를 계기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창세 37,8) 요셉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9) 그럼에도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힘껏 보살펴줍니다.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창세 37,11)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은 흔히 신이 꿈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계시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어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넘겨져 그의 종으로 지내게 됩니다.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창세 39,6)는 요셉은 경호대장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창세 39,7-23 참조) 쓰라린 운명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중요한 때마다 꿈풀이를 잘한 덕분에 이집트 왕국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재상직에까지 오르는 축복을 얻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파라오 다음가는 제2인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구걸을 온 자기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내가 …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창세 45,4) 이어서 그 모든 불행과 고통스럽고 어두운 일은 주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며 형제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요셉은 영원하신 분의 섭리를 짧고 명료하게 요약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셨다’고요. 이는 구세사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이 모든 이스라엘 선조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 사실의 보도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역사를 신학적 관점에서 요약하여 정리한 설화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분께서 이끄시고 이루시는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문으로 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낯선 땅 이집트로 팔려 가 살던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자, 마음속으로 겪던 억울함과 서글픔과 그리움으로 한꺼번에 참아오던 울음을 터트립니다. “요셉은 …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창세 43,30) 그때까지 요셉이 지녔던 든든한 무기는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변함없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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