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봄꽃 속에서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볕 좋은 곳의 개나리는 벌써 노랑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려 하고 벚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꽃을 연구하는 분의 말씀에 따르면 지난겨울이 예년보다 추웠기 때문에 올봄 벚꽃의 휴면 해제 시기가 빨라진 거라고 하네요. 겨울엔 겨울나무처럼 단단하게 안으로 응집하는 힘을 키우려 기도했는데, 봄이 되니 수줍게 피어나 어느 순간 화르르 주위를 밝히는 봄꽃이 되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붓글씨 쓰시던 책상 위, 종이 뭉치 속에서 발견한 글귀입니다. 주로 한자로 붓글씨를 쓰셨기에 아버지 붓글씨 작품을 알아보려면 얇은 한문 지식으로 늘 더듬더듬 읽어야 했는데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사는 동안 꽃처럼’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엄격하고 단아한 서체를 즐겨 쓰셨는데 이 문구는 캘리그라피를 하듯 꽃처럼 날아가게 쓰셨네요. 서예대전에 출품할 목적으로 표구한 작품이 서재에 하나 걸려 있는 걸 제외하고는 아버지 쓰신 글씨는 이렇게 종이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숨결처럼 쓰다듬어 봅니다. ‘사는 동안 꽃처럼’은 아버지가 처음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붓글씨 덕분에 이 봄 매일 새기며 생각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DMZ세계문학페스타’라는 행사에 참여해 여러 작가를 만났는데요. 팔레스타인의 작가 아흘람 브샤라트는 어렵게 여러 나라를 거쳐 한국에 왔습니다. 기적처럼 죽음을 건너온 사람이 환하게 꽃처럼 웃습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 이웃의 가족이 명절에 입을 옷을 사러 가다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의 총격에 살해되었다고 해요. 뉴스를 들어도 남의 일처럼 실감 나지 않던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들으며, 도라산 전망대에서 가까운 북녘땅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절감합니다. 평화는 매일 한 걸음씩이라도 더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일임을. 사는 동안 꽃처럼. 성경에서 꽃은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자주 비유되는데, 저는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자주 새깁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마태 6,28) 솔로몬왕의 영광도 이 꽃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라는 뜻이겠지요. 하나인 세상이 분열하고 나뉘어 서로 공격하면서 전쟁의 불안이 전 세계를 덮고 있는 이때, 평소 별생각 없이 쓰던 기름이, 원재료들이 모두 유한한 자원임을, 우리가 그동안 기적처럼 서로 돕고 나누며 이어왔음을 뒤늦게 실감합니다.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아무 불안 없이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봅니다. 부는 바람에 소리 없이 떨어질 운명을 한탄하지 않고 피어 있는 꽃. 곧 사라질 영광이 이 찰나의 시간에 기입됩니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각자의 고투로 바쁘고 힘들지만, 사는 동안 꽃처럼!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슬픔, 하느님의 신비를 모두 간직한 꽃들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오늘, 주님 부활하신 빛과 함께 흐르는 이 시간, 그대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22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

기적이 뭘까요? 경이로움은 뭘까요? 우리는 언제 기적을 만날까요? 어떤 일을 마주해도 잘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깜짝이벤트는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싫어합니다. 선의로 준비한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무감각한 반응. 정연한 논리와 일관된 법칙에 익숙한 사람은 새로움 앞에서도 ‘그렇지 뭐’ 합니다. 반면 잘 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 많은 이 사람은 놀라지 않는 사람의 평안이 가끔 부럽기도 합니다. 반짝 눈을 떠 놀라다 보면 세상살이에 덜 노련한, 경험 미숙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해서 애써 무덤덤한 척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덤덤한 쪽? 잘 놀라는 쪽? 타고난 기질이 어디에 기울어 있던 우리는 순진함과 노련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나름 애쓰면서 살지요. 저는 경이로움을 잘 발견하고 잘 놀라는 편이라 매일 감사와 기쁨의 조각들을 기록하고 있어요. 나중에 돌아보면 소중한 보물이 되어요. 동시에 슬픔에도 잘 이입이 되어 마음이 자주 아파요. 그래서 마음의 추를 덤덤함으로 애써 옮기려고 하는데, 산책길의 기도는 그 평형을 잡는 좋은 안내자입니다. 어제도 어김없이 걷다가 어떤 기적을 만났어요. 활짝 핀 개나리 무리! 먼 땅에선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 그 비극이 우리에겐 코스피 지수로 환원되어 전해져 슬펐고, 이 땅에선 여러 목숨을 앗아간 화재 사건이 발생했는데, 위험에 대한 경고가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그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경고가 묵살되었다니, 세상이 왜 이럴까, 한 목숨의 무게는 한 우주와 같은데, 왜 이렇게 우리는 같은 비극을 반복할까. 이런 생각에 잠겨 걷다가 그만 넘어져 살짝 발목이 접질렸네요. 근처에 나무 벤치가 있어 앉았는데, 그 덕분에 개나리 꽃잎을 한참 바라볼 수 있었어요. 발목 통증도, 세상 시름도 잊고 활짝 웃었답니다. 봄이 참 좋아요. 김소연 시인은 봄을 두고, ‘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이라고 했지요. 겨울 동안 우리가 무얼 했든지 상관하지 않고 이렇게 어김없이 예쁘게 우리 앞에 다가오는 기적.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40일의 참회와 정화를 지나서 주님 부활로 이어지는 40일의 시간이 봄과 겹쳐 있어서, 경이를 온전히 보여주어 참 좋습니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경이로움에 대해 “앎도 아니고, 앎을 그만두는 것도 아니다”라며, 경이로움은 ‘움직이는 무덤’이라고 했네요. 이때 움직임은 추동력, 밀어 올리는 힘 같은 것. 땅 밑에서 꽃을 피워내는 힘,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힘과 비슷합니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세상에 놀라운 일을 이루신 그분의 업적을!”(시편 46,9) 시름 많은 세상에서 여전히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놀라게 하실지 기다리며 하루를 엽니다. 발을 삔 덕분에 산책길에 흘낏 지나치던 꽃 덤불 앞에서 여리고도 강인한 꽃잎들을 마주할 수 있었던 어제도 기적이었고요. 오늘은 또 어떤 경이 앞에서 눈을 뜨게 될까, 기적처럼 전쟁이 끝날까, 전선을 뚫고 평화를 전하려고 누가 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6면

늘 집으로 가는 우리

연한 봄 하늘에 홀리듯 이끌려 길을 나섰습니다. 마무리해야 하는 번역이 있어서 컴퓨터 앞에서 더 고민을 해야 했지만 하늘이 저를 밖으로 부르네요. 며칠 사이, 나무에 연두 새순이 돋아났습니다. 이리 고운 생명을 품은 나무는 그대로 신비입니다. 메마른 개나리 덤불은 연노랑 꽃순을 벌써 피워내고 있습니다. 산길을 휘돌아 걷는 길에는 사람도 많고 이야기도 많습니다. 저는 주로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합니다. 바빠서 챙기지 못한 이들의 안부도 가끔 물어보고요. 넘어져 다친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는 친구는 어머니가 아프다 하시는 걸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 하네요. 매번 화급하게 반응하는 게 맞는지, 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게 맞는지. 매일 119를 부를 수 없기에 절절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객관화를 하는 자신이 잘못된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묻습니다. 친구의 다정한 성품을 알기에 그런 것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을 지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서툰 위로자이지만,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호흡의 휴식입니다. 봄 하늘을 보며 걷다가 저는 그만 또 눈물이 났어요. 봄의 빛깔이 너무 고와서 또 아버지 생각이 났고, 투병 중이신 삼촌을 떠올리며 묵주기도를 드리던 중에는 간절함에 또 눈물이 났어요. 전쟁이 어떻게 될까,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소매로 눈물 닦으며 걷다가 문득 독일의 작가 노발리스의 말이 생각났어요.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가?”, “늘 집으로 가지.” 작가가 짧게 세상을 다녀간 후에 나온 작품집에 실린 한 대목. 그리움과 염려에 눈물 그렁그렁 차오르던 산책길에 저를 살린 건 이 말 한 마디, 그리고 봄 하늘. 오늘 연한 하늘빛은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눈을 내내 하늘에 두고 “늘 집으로 가지”를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그 집은 우리의 본향이라고. 어리석은 인간이 세상을 비참하고 어렵게 만들어가는 시절에도 다시 돌아온 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하루는 얼마나 보드라운지, 신비한 평화와 일치 안에서 저는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존재의 근원인 그 집에 이미 안겨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제의 삶과 오늘의 죽음에 절망하면 아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오늘 제게 온 말의 선물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싶어요.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에게 늘 주시는 선물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는 평안의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 평안은 내어줌과 내맡김이고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이미 주신 평화 안에서 우리는 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늘 집으로 가는 우리임을 안다면 분쟁도 전쟁도 멈추어야 할 텐데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잿빛 하늘 아래 고통받는 이들의 숨 막히는 공포에 부디 하느님이 함께하시길 빌며 평화를, 평화를 빕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29 제3484호 22면

인간이 인간에게 무얼 만들었기에

봄 학기의 강의실이 호기심으로 반짝입니다. 이번 학기에 ‘AI 시대의 영미문학’ 강의를 맡아, 첫 시간에 우리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지금 시대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온당한지. 다들 ‘AI 시대’를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그게 시대를 규정하는 말이 될 수 있는지. 전 세계 80억 인구에 더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이 있을지. 이런 질문과 함께 두루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어요. 재난과 전쟁의 시대, 기후위기의 시대, 혐오와 불안의 시대 변화의 시대, 상상의 시대 등 여러 단어가 나왔는데, 마지막에 제가 지금 시대를 ‘사랑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지 물어보니 학생들은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시를 읽으면 학생들은 대개 ‘시가 어렵다’고 난처한 표정을 합니다. 시는 구절들 사이의 틈새를 메꾸어 상상하며 읽어야 하지요. 시의 독자가 되려면 끈기가 있어야 한다며 시를 잘 읽으면 삶도, 이 세계도 잘 읽을 수 있다고 학생들을 살살 달래며 묻습니다. ‘여러분, 부자 되는 법 아세요?’ 학생들은 다시 눈을 반짝입니다. 효용가치가 적다고 여겨지는 인문학, 거기서도 좁은 영역에 있는 시를 읽는 일과 부자 되기가 무슨 상관? 뚱딴지같은 질문에 이어 말합니다. ‘시의 언어를 통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구체적인 시선을 얻으면 풍성해지지요. 통념을 거슬러 다시 생각하는 사유의 힘이 여러분을 튼튼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그렇게 읽은 첫 시에 이 구절이 있었어요. “인간이 인간에게 무얼 만들었기에.” 봄날 아침에 시인은 새소리를 듣습니다. 숲에서는 만물이 조화롭게 깨어나는 것 같은데 시인은 문득 슬픈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세상을 생각하니 이런저런 근심이 스며든 것이지요. 19세기의 시인은 산업혁명이 몰고 온 기계화에 침탈당한 농촌을 아프게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졌는데, 21세기 교실, AI 시대에 이 질문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최근 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AI에 서로 다른 답이 나오기 마련인 질문을 던졌더니, 다른 AI들이 모두 다 비슷한 대답을 했다고 해요. 확률을 앞세운 AI는 창의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지요. AI를 앞세워 손쉽게 치르는 전쟁은 죽음마저도 전략 게임으로 소비하면서 사람들의 고통을 지우고 있고요. 기술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기술적 성취의 열매는 극소수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초연결 사회에서 상처받는 개인의 고립감은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존엄성을 잃은 인간이 스스로 도구로 전락할 때 이 세계는 문명이라는 허울 좋은 포장 아래 여전한 황야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실 때 무엇을 생각하셨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마음, 연민으로 다정하게 보좌하는 그런 인간을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전장(戰場)과 안방의 거리가 사라진 이 무자비한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무얼 할 수 있나’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학기가 끝날 즈음엔 이 시대를 ‘사랑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고 긍정하는 학생이 더 늘면 좋겠다는 바람 속에 또 시를 읽습니다. 공감을 잇고 고통을 나누는 연습, 그 작은 사명에 동참하는 시간이 감사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22 제3483호 22면

아무도 원치 않는 길을 걸으셨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은 선물입니다. 아침이라는 선물 외에 다른 선물도 여럿 당도한 봄날. 제자가 노래를 하나 보내주었고, 동료 선생님은 책을 보내주셨네요. 제자는 랩을 참 잘해서 아이돌로 성공할까 싶던 아이였는데, 신학대학원에 가더니 이제는 교회에서 신앙의 길을 이끄는 사목자가 되었네요. 학생들은 가능성의 씨앗입니다. 저는 그 씨앗에 물을 주는 사람. 가능성을 믿고 정성 어린 마음으로 마주하며 나누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먼 지방에서 서울로 와서 보니 지역의 격차가 너무 크다고, 고향에 남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던 아이였습니다. 사랑 많은 그가 기도하는 어른이 되어 참 좋습니다. 그가 보내온 성가를 듣는 봄날 아침이 그대로 기도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 주님이 가신 길 아무도 원치 않는 길을 내 주님이 걸으셨네.”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에 대한 노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주님이 따르신 순종의 길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길 같아요.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래요. 자기 몸의 안위를 생각할 때는 어떤 일을 하는 동기 부여가 쉽게 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순종은 얼핏 이해가 잘되지 않지요. 타인을 구원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하지만 지금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깎아가며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계시기에, 주님 걸으신 순종의 길, 그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게 합니다. 다시 노래를 듣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조용히 지고 가신 주님은 순종하셨네 그의 몸을 버리셨네.” 몸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 지상에서 몸을 버리는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병원 중환자실에서 고통받으셨던 3일간, 이 성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고통에 몸을 비틀고 얼굴을 찡그리시는 아버지를 보며 울면서 생각했지요. ‘아버지,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셨는데, 인간됨으로 겪는 이 고통을 부디 조금만 참으세요. 아버지 조금만 더 참으세요.’ 어쩌면 참 야속할 수도 있는 딸의 기도였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다시 떠올리지만, 사실 이 길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영적인 실천을 통해 이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하실 때, 여기서 ‘날마다’는 매일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십자가의 신비를 이야기하니까요. 한편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는 그 순종의 길이 절대적인 비움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몸을 완전히 비우고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는 이제 죽음 너머에서 제게 질문하십니다. 유교의 관습으로 2대 양자의 삶을 사신 아버지는 양쪽 집안의 무게를 오롯이 지면서 사셨기에 참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묵묵히 참아가며 걸으신 그 조용한 길은 어쩌면 예수님을 닮은 작은 순종의 길이었음을, 주어진 운명을 불평 없이 따르신 아버지의 삶이 곧 믿음의 삶이었다 싶습니다. 지금 제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2면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늘 읽는 시가 있어서 올해도 어김없이 읽어봅니다. T. 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로, 220여 행에 이르는 긴 시입니다.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 바라지 않기에, 이 사람의 재능과 저 사람의 능력을 갈망하며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로 시작하는 이 시는 세속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힘을 쓰며 욕망하는 일에 대해서 서늘한 일침을 가합니다. 바라지 않는다는 말, 시인은 처음에는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라고 하고, 다음 행에는 “바라지 않기에”라고 하고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기에”라며 세 번이나 같은 말 “I do not hope”를 반복합니다. 이어지는 다음 연에서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계속 이어지네요. 이번에는 다시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엇을 알고 싶지 않을까요? 확고한 시간의 허약한 영광을 알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 여기서 확고한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시간의 허약한 영광이라니. 아마 세속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믿고 따르는 것이 바로 그 확고한 시간의 허약한 영광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생이 죽음 없이 계속되리라 믿으며 우리는 악착같이 무언가를 쫓고, 세상 사람들이 다 울어도 나는 괜찮을 것이라며 타인에게 무자비한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추구하고 따르는 수많은 염원에 대해 시인은 왜 이렇게 한사코 마다할까요? 시인은 무엇을 보기 때문에 이렇게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할까요? 그래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하루하루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쏙 빼앗는 이 수많은 진단, 현란한 숫자놀음들은 우리 각자의 세속적인 욕망에다 성실과 의무의 옷을 입혀서 근엄하게 부추깁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추운 겨울 지나고 다시 돌아온 봄, 사순 시기를 보내며 비워야 할 것들을 생각합니다. 눈꺼풀 한 겹 벗고 바라보니, 바라지 않는다는 말, 알고 싶지 않다는 말, 단념한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시인은 다시 돌아가기를 바랄 수 없기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는데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얼마나 또 허덕일까요? 얼마나 또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칠까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일, 받아들이고 단념하는 일은 그래서 시간 속의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인간됨에 대해 수긍하는 겸허한 자세입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 3,19)는 말씀은 더 이상 날 수 없는 날개는 쉬어야 한다는 시인의 말과도 통합니다.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앞으로 걷는 일, 어쩔 수 없음을 아는 일은 그래서 절망이라기보다는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걷기조차 힘들면 고요히 앉아 봅니다. 그런 수동성은 사람됨의 허약함을 긍정하는 일인 동시에 인간이기에 행할 수 있는 장한 내적 투쟁이지 싶습니다. 바라지 않는다는 말, 참 좋습니다.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고, 다시 알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기뻐하며 고요하게, 기도와 함께 지나는 시간, 사순시기의 선물입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2면

단단하고 언제든 만질 수 있는 돌멩이

조금씩 봄이 내리는 길목, 아버지 산소에 들렀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책을 읽었어요. ‘불안 속에 불안을 견디는 힘’을 지닌 소설, 새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눈과 돌멩이」라는 작품이에요. 제목이 익숙하고 다정한 ‘날 것’으로 되어 있어서 더 이끌렸던 것 같아요. 금방 녹는 연약한 눈과 단단한 돌멩이가 서로 어떻게 엮일까? 작가는 자신의 필요로 쓴 소설이라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글은 강요나 요청이 아니라 자기 필요에 의해 쓰게 될 때 절실하고 정직하고 담백한 이야기로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그렇거든요. 또박또박 어김없이 돌아오는 칼럼이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슬픔과 함께하는 지금의 제게는 꼭 필요한 의무라서, 마감 기한이 있는 이 지면이 아니었다면 지난 5주 간 저의 나날은 훨씬 더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이 소설은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예요.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남은 두 사람이 떠나는 여행을 그리는 소설에서 애도는 작품의 큰 축을 차지하네요. 애도란 것이 이론처럼 차곡차곡 순서대로 순수하게 정화되는 과정이 아니란 것을 저 또한 요즘 매일 경험하고 있는데요. 어제는 일상으로 잘 복귀한 것 같아서 ‘아, 이 회복력이란!’ 속으로 대견해하다가, 오늘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어떤 기억에 무너지는 일의 반복. 애도는 그렇게 끝없이 켜켜이 숨겨진 과거의 먼 기억을 돌아 알 수 없는 제 자신의 심연과 만나는 일이네요.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돌멩이를 생각했어요. 제게도 기억나는 돌멩이가 몇 있어요. 언젠가 성지순례를 간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서 주워 온 동글동글한 돌멩이 하나. 기도할 때 그 돌을 만지면 늘 힘이 나곤 했어요. 그리고 지난 10월, 부모님과 함께 부산 바닷가에 가족여행 갔을 때, 아버지가 주신 돌멩이 둘. 그날 아버지는 고집스레 혼자서 해안의 높은 바위에 오르셨는데요. 기우뚱하며 바위에 오르시는 아버지를 보고 동생과 제가 놀라서 따라갔는데, 아버지는 저희 손도 뿌리치시고 혼자 바위에 올라 먼바다를 응시하셨어요. 그때 아버지는 예쁜 돌멩이들을 몇 주워서 저희 네남매에게 골라 가지라고 했고, 저는 잘생긴 돌멩이 둘을 서울로 가지고 왔고, 작고 단단한 돌멩이 둘은 부모님 댁 거실에 놓아두었지요. 작가는 돌멩이를 쥐어보는 일이 글쓰기라고 했는데, 제게 돌멩이는 이제 상실을 견디는 기도가 되었네요. 사람이 떠나도 끝나지 않는 관계의 책무를 생각하게 하는 돌멩이, 단단한 돌멩이. 손에 쥐는 순간 금방 녹아내리는 눈처럼 무엇 하나 정확하게 움켜쥘 수 없는 우리의 삶, 콩콩 가벼이 두드렸을 뿐인데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부서지기 쉬운, 알 수 없는 이 세계. 여기서 우리가 기대는 것은 고작 이렇게 작고 단단한 돌멩이 정도가 아닐까. 그래도 언제든 쥐어볼 수 있는 돌멩이가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지나는 길에 귤을 건네주고 간 친구의 호의도, 잘 있느냐는 짧은 안부 인사도, 몰래 전하는 기도도 그런 돌멩이가 아닐지, 오늘도 작고 단단한 십자가 옆 돌멩이를 바라보며 이 글을 씁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22면

상처도 지쳐서 언젠가 가요

사람살이가 묘하다 싶어요. 지난가을에는 모든 일이 다 상승곡선을 탔어요. 매일 만 보씩 걸었고 아침저녁 출근길은 싱그러웠고 한동안 떨어졌던 집중력이 다시 회복되어 글도 쑥쑥 써졌어요. 골치 아픈 논문도 어째 뚝딱 썼고요. 아버지 드시던 약도 약효가 좋아서 염려했던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왔고요. “와, 우리 아부지 정말 대단하셔”, 마음으로는 호들갑에 가까운 감사가 무럭무럭 자랐고요. 겨울에 아버지께서 하늘나라 가시고는 모든 게 어려워졌어요. 처음엔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는데, 사람들 속에서 그럭저럭 장례식을 치른 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걷는 일, 웃는 일, 잠자는 일까지 다 어려워졌어요. 엄마 걱정에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요. 그러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에 금이 가면, 금 간 것을 생각하면, 계속 아파요. 그러니까 옛말에 ‘시간이 약이다’ 그러잖아요. 그 말 틀림없어요. 가장 좋은 용서는 잊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상처를 잊는 것도 좋지만 상처가 나로부터 멀어질 때가 있어요. 상처가 계속 나를 자극하고 괴롭힐 때가 있지만 상처도 지쳐서 언젠가 가요. 그것만 믿으면 돼요.” 음유 시인 같은 가수 김창완 님이 느린 말로 전해주는 메시지.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받는 상처들, 그걸 다 끌어안고 살아가는 미욱한 우리. ‘상처도 미움도 다 지나게 마련’이라는 말을 들으며, ‘상처도’ 대신에 주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어도 보았어요. 슬픔도 지쳐서 언젠가 가겠지. 지쳐서 가는 것이 감정과 마음뿐이랴, 사람도 지쳐서 가고, 모든 것이 지쳐서 다 가겠지. 지쳐서 가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지. 그리 생각하니 마음, 사람, 일, 대상, 이 세상 만물에 다 연민이 생깁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코헬 3,1)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듯이 자라며 이우는 것이 모두 세상의 이치겠지요. 다 때가 있겠지요. 그러니 슬픔도 너무 빨리 벗으려 하지 말고 천천히 갈무리해야겠지요. 사랑할 때, 미워할 때, 싸울 때, 화해할 때, 찾을 때, 잃을 때, 침묵할 때, 말할 때, 나설 때, 물러설 때, 간직할 때, 버릴 때, 아낄 때, 베풀 때, 안을 때, 내줄 때, 그때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잘 알 수 있을까요? 알고자 하는 의지보다 고요히 기다리는 마음, 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조용히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할까요? 떠나시던 아버지는 자신의 때를 아셨을까요? 작별의 순간을 알지 못하고 무심코 손을 흔드는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시간 속의 연약한 존재들. 그렇기 때문에 순간의 작은 기쁨도 소중하게 보듬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도 잘 기다릴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상처도 지쳐서 간다면, 슬픔도 지쳐서 간다면, 그렇다면 그리움도 지쳐서 가겠지요? 기억을 잊는 망각이 두렵기도 한 저는 오늘도 기다림 안에서 ‘그때’를 생각합니다. ‘그때’는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제게 오는 것일 터이니, 다가오면 잘 받아들이게 해주십사 소망하면서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22면

마음 안에는 숫자가 없다

글을 쓰거나 이야기할 때, 형용사보다 명사를 더 많이 쓰면 똑똑하고 정확해 보입니다. 형용사보다 동사를 더 많이 쓰면 뭔가 추진력이 있어 보이고요.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숫자와 통계입니다. 대화 중에 숫자를 잘 활용하는 상대를 만나면 괜히 움츠러들지 않던가요? 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아서요. 그러니 논의나 토론에서 숫자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비교 우위를 점하게 되지요. 어린 날부터 사람 이름이나 고유명사를 잘 잊어버리곤 하던 저는 선배들이 “은귀 넌 고유명사 치매가 있는 거 아니냐?” 놀리곤 했어요. 하지만 제가 강한 부분이 있으니, 저는 형용사는 남들보다 더 다채롭게 알고 잘 기억해요. 명사보다는 동사, 동사보다는 형용사. 형용사를 동원하면 대상을 더 세심하게 묘사할 수 있지요. 세상이 더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려면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런데 숫자나 셈에는 약해서 업무상 필요한 보고를 할 때는 일부러 숫자를 달달 외워야 하는데, 돌아서면 금방 까먹어요. 형용사나 동사, 속담이나 문장은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데요. 모든 게 숫자로 매겨지고 통계로 재단되는 세상. 기술정보 시대의 풍경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는 오직 숫자, 숫자만이 유일한 승자 같아요. 눈이 빨개지도록 문서의 숫자를 들여다본 지친 오후에 책을 읽다가 우연히 이런 구절을 읽었어요. “대상을 고요한 존재로 만드는 건 오직 사랑뿐이다. 마음 안에는 숫자가 없다. 언제나 하나, 그리고 하나, 그리고 하나일 뿐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분명 셈하는 법을 모를 것이다.”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글을 쓰는 프랑스의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세상의 빛」에서 만난 아름다운 구절! 아, 맞아요. 저는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노릿하게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에 숫자가 없어요. 시리도록 파란 겨울 하늘에도 숫자는 없네요. 이젠 볼 수 없는 그리운 아버지, 슬픔에 부쩍 수척해진 엄마, 내일 항암 주사를 맞으시는 삼촌, 먼 땅에서 억압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 굶주려 우는 아이, 죽음 직전까지 신성하고 맑은 마음으로 공무를 행한 어른. 이런 생각을 하는 이 순간의 기도에도, 이 마음에도 숫자는 없네요. 아, 맞아요. 하느님은 오직 하나이시고, 우리 마음이 순수하고 맑아질 때 그 안에는 숫자가 없네요. 숫자는 눈에 보이는 것, 눈앞에 증명되는 것.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것은 믿을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 오늘, 숫자 없는 세상을 그려봅니다. ‘그게 천국이 아닐지’ 생각하며. 숫자에서 해방된 저녁, 하늘에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 있고, 제가 좋아하는 은행나무는 벌거벗은 채 의연합니다. 건물을 나서며 겨울 어둠 속 싸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저는 어쩐지 투명해집니다. 이 순간, 저는 알 수 없는 사랑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신은 셈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염없이 돕고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오늘도 이 강퍅한 세상에 그런 성자들이 머물다 떠났겠지요. 때로 선(善)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며. 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우리는 그 빛을 만나 다른 빛을 다시 밝힙니다. 숫자를 잊은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오늘의 구원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22면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추운 날이 계속되고 있어요. 겨울에 하는 기도는 어떤 말이어야 할까. 추운 이들이 춥지 않게, 외로운 이들이 외롭지 않게, 고통받는 이들이 아프지 않게, 슬퍼하는 이들이 슬프지 않게 해주십사 청하다가 생각을 바꾸어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울어야 할 즐거움, 기뻐해야 할 슬픔”(10권 28절)이 겨루고 있는 삶의 나날을 묵상하면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끝없는 시련 속에 놓이는 일’이라고 했는데요. 즐거움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울어야 할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슬픔이 나쁜 것은 아니어서 기뻐해야 할 슬픔도 있다는 깨달음은 아마 삶의 시련이 주는 지혜겠지요. 그러니 추위도, 외로움도, 아픔도, 슬픔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다른 은총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겨울날 저는 정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아버지를 여읜 큰 일을 계기로, 아버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며 아버지가 쓰신 시와 묵상들을 정리하고 있고요. 학교에서는 2년 동안 해 온 보직이 끝나는 시기라서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연구실에 앉아 책으로 빈틈없이 빼곡한 책장을 바라봅니다. 첫날은 벽에 붙은 수많은 그림과 사진들을 떼어냈고, 둘째 날은 버려야 할 서류들을 솎아 냈습니다. 사무실 컴퓨터를 정리하며 많은 파일을 지웠고, 연구실 컴퓨터를 새로 포맷했고요. 청소와 정리가 이처럼 유쾌한 일이었나 생각하며 빠른 속도로, 후련하게, 버려야 할 것들에 집중합니다. 버리는 일에 늘 좀 주저했기에 쌓아두는 게 많았는데, ‘버리고 정리하고 매듭을 짓는 이 겨울은 또 다른 선물이구나, 하느님은 때맞춰 많은 것들을 예비해 주시는구나’ 싶습니다. 마침 들고 있는 시집 「그 나라 하늘빛」에서 마종기 시인이 청하는 겨울 기도를 마주합니다. 겨울날,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를 듣게 해 달라는 말,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시인이 말할 때 그 편안함은 따뜻하고 여유롭고 풍족하게 채워지는 데서 오는 편안함이 아니라, 비우고 벗고 가난해짐으로써 가능한 편안함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벌판에서 혼자 떨고 있는 나무를 보고서도 괜찮다고 합니다. 시인에게 기도는 슬픔 속의 노래입니다. ‘내가 눈물을 닦으면 / 당신은 웃고 있다’고 할 때, 시인은 인간의 눈물에서 기쁨을 여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일은 우리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징표일 것이니, 슬픔 속의 노래는 그런 공감과 연민과 연대입니다. 이 겨울에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비우고 내려놓는 일이 결국에는 다른 열림을 가능하게 함을 아는 시인의 예지 덕분이겠지요? 늘 그렇듯 바삐 움직인 하루 끝에서 저는 이 말 한마디에 그만 “아멘” 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어디 계시나요? 목메어 매달리는 애통한 기도도, 간절한 애원도, 이 말 한마디에 수굿해집니다. 편안한 하느님의 너른 품 안에서 산 자도 죽은 자도 다 함께 착한 얼굴 나직이 마주합니다.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22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