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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기자

lala@catimes.kr

“맹신 금물…AI는 비판적으로 활용해야 할 도구”

한국교회 최초로 교구 내에 ‘AI위원회’를 조직한 마산교구가 인공지능(AI)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AI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책임 있게 활용하도록 돕는 데 본격적으로 나섰다. 마산교구 AI위원회는 5월 31일 KBS 창원홀에서 ‘AI와 청소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청소년 주일에 맞춰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AI 사용이 급증하고 있는 청소년 세대에 초점을 맞춰, AI의 올바른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특히 AI에 관한 레오 14세 교황의 첫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 반포 직후에 심포지엄이 열려 교회 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심포지엄에는 교구 내 각 본당 주일학교 학생과 성지여중‧고 학생들, 예비신학생 등 청소년과 교구민 500여 명이 참석했다. 심포지엄 기조 강연은 교황청 AI 연구 그룹의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주체성 회복」 을 번역·출간해 국내에 알리고 각종 콘퍼런스에서 AI 윤리 관련 강연을 하며 한국교회 AI 전문가로 평가받는 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가 맡았다. 이 주교는 “청소년들은 고도로 복잡한 알고리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영혼은 그 복잡함 때문에 가장 소중한 마음의 평화를 너무나 쉽게 잃어버리고 만다”며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복잡한 마음을 비워 내고 복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 보다 완전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지혜를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전했다. 심포지엄 발표자들은 공통적으로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AI를 전적으로 의존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인간의 판단과 책임 아래 활용해야 할 도구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AI는 거짓말쟁이? 청소년이 꼭 알아야 할 생성 AI의 함정과 비판적 활용법’ 주제 발표에서 김민호 조교수(한국해양대학교 인공지능학부)는 “도구는 그것을 쓰는 사람을 닮아가는데, AI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면 비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더 의심하고 검증하면 더 깊이 사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서 “진실을 책임지는 것은 결국 언제나 사람의 몫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박길성 명예교수(고려대학교 사회학과)는 ‘AI시대, 청소년을 위한 시대사적 소명’ 주제 발표에서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차단이 아니라, 판단할 힘을 키워 위험은 줄이면서도 잘 쓰게 하는 능력을 키우는 이중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AI 기술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이끌어갈 윤리와 철학의 부재가 문제”라면서 “AI와 관련된 문제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기에 역기능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에 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 굉장히 어려운데, 종교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며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승언 신부(토마스 아퀴나스·마산교구 AI위원회 위원장 겸 청년사목위원장)는 ‘기술 문명 속 인간의 얼굴’ 주제 발표에서 교황 회칙 「고귀한 인류」의 핵심 내용을 전했다. 이 신부는 청소년을 위한 네 가지 실천 포인트로 ▲진리에 충실할 것 ▲교육에 투자할 것 ▲관계를 돌볼 것 ▲정의와 평화를 사랑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밖에 임경헌 교수(경북대학교 윤리교육학과)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학을 통해 본 AI’, 김상준 신부(베네딕토·부산교구 청소년사목국 부국장)의 ‘AI시대, 질문하는 존재로서의 청소년’ 주제 발표가 이어진 심포지엄은 AI 전문가와 청소년 사목 담당자들의 현장 경험이 어우러져 의미를 더했다. 교구는 이번 심포지엄 내용을 바탕으로 「청소년을 위한 AI 문해력」을 발간할 예정이다.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마산교구 명례성지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단. 굽이굽이 낙동강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진 지역이다. 푸른 강물을 보려 고개를 돌리면 넓은 강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계절 따라 온갖 꽃들이 피고 지는 곳. 옛 지명은 멱례 혹은 미례였고, ‘돌무더기 나루터’라는 뜻의 ‘뇌진(磊津)’으로도 불렸다.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편 김해로 건너가 창원, 마산까지 다녀오곤 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며 나루터는 사라졌지만,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명례마을은 여전히 남아있고, 언덕마루에 있는 ‘성모승천성당’(전 명례성당) 역시 굳건한 모습으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푸르름이 넘치는 5월, 명례성지(담당 박진우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찾았다. 복자 신석복과 강성삼 신부 ‘명례(明禮)’는 한국교회사에서 익숙한 지명이다. 1784년 하느님의 종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한국 최초의 신앙 공동체’라 불리는 모임이 열렸다. 김범우의 집은 한성(서울)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다. ‘방(坊)’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명례(明禮)’는 ‘예절을 밝힌다’는 의미로, 유교적 가치를 담아 마을에 붙인 이름이었다. 밀양의 명례는 옛 지명을 한자어로 바꾸면서 소리와 뜻을 고려해 이름 지은 것이라 알려져 있다. 한성과 밀양, 두 지역의 ‘명례’는 시대의 예법을 따르라는 이름을 붙여 관리할 만큼 중심지였다. 하지만 지명이 무색하게도, 그 예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꾸준히 나왔고 조선은 그들을 박해했다.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복자 신석복(마르코)이 태어났다. 박해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이 명례에 닿았고, 양반가 자제인 신석복에게 신앙을 전한 것이라 추측된다. 신석복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교했고, 이후 장사를 시작했다. 미사 참여, 전교, 타 지역 교우들과의 만남 등 강을 건널 일이 많았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으려 행상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석복은 붙잡혔다. 짐 보따리에서 누룩, 소금과 함께 기도서와 성물이 나오면서 그는 대구로 압송됐고, 배교를 권하는 이들에게 “풀어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라며 굳게 신앙을 고백하고, 39세 나이에 순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흐른 1887년, 마침내 명례에 공소가 생긴다. 공소는 1896년 명례본당으로 승격됐는데, 이는 마산교구 관할인 경남 지역 첫 본당이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인물도 한국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었다.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 강 신부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서품받은 한국인이었고, ‘한국 땅’에서 품을 받은 첫 사제이기도 했다. 서품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강 신부는 첫 사목지 명례본당을 마지막으로, 1903년 38세에 선종했다. 하나의 성지가 품은 두 성당 순례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라우렌시오의 집’이다. 너무 빨리 떠나버린 초대 주임 강성삼 신부를 기리는 흰색 단층 건물은 사무실과 성물방, 카페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확 트인 통창으로 고즈넉한 ‘강변 뷰’를 즐길 수 있다. 이 건물을 지나면 오르막길이 나온다. 야트막한 길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성모동산이 펼쳐진다. 초록 잔디밭에 성모상과 함께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돼 있는데, 하나씩 각 처를 밟아가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저 멀리 강으로 향한다. 강물이 각 처의 배경처럼 반짝이는 곳. 인근에서 가장 높은 언덕마루에 올랐기에, 시야를 가리는 건축물이 거의 없다는 것도 성지의 큰 장점이다. 유유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기도인지 묵상인지 모를 망중한을 즐긴다. 성모동산 맞은 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성모승천성당’이 보인다. 현재의 성당은 세 번째로 지어 올린 건물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성전 모두 태풍으로 완파됐다. 두 번째 태풍 피해를 입었을 때 파손된 성당 잔해 속에서 목각의 ‘승천성모상’이 손상 없는 상태로 발견됐고, 이를 본 당시 회장 김유인 씨는 사재를 털어 1938년 기존 성당을 축소 복원한 후 성전 제대 가장 위쪽에 승천성모상을 모셨다. 이후 지금까지 성전은 온전히 유지됐고, 남녀석이 구분돼 있는 옛 형태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한옥성당 옆으로 이어지는 너른 마당. 이곳에서부터 성지는 새로운 느낌으로 순례객을 이끈다. 고전미와 자연풍광을 즐기던 곳에서 현대 건축물을 통한 사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마산교구 이제민(에드워드) 신부가 수소문 끝에 신석복의 생가터를 찾은 건 2006년. 생가터는 교구 첫 본당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신석복이 포함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가 이어지던 시기. 그럼에도 순교자 삶의 터전은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다. 이 신부는 교구에 모든 내용을 전했고, 이 무렵부터 성지 개발을 위한 발걸음들이 시작됐다. 2009년부터 10년간 성지 담당 사제로 헌신한 이 신부는, 모든 재정비를 진두지휘하며 성지 조성을 위해 ‘녹는 소금 운동’을 펼치며 모금을 진행했다. 성지 계발이 한창이던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신석복은 복자로 선포됐고,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이 2018년 완공되면서 성지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너른 마당 커다란 제대가 놓인 자리가 바로 신석복 복자의 생가터다. 제대 맞은편으로는 계단 모양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야외 미사 봉헌 때에 신자들이 앉기도 하는 이 공간이 기념성당의 지붕을 겸한다. 경관을 방해하지 않고 언덕과 능선을 해치지 않으려 지면 아래에 성당을 둔 것이다. 눈에 띄는 건 불규칙적으로 놓여있는 12개의 사각형 구조물들. 이는 녹아 없어지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소금 영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각각의 사각형에 창이 있어 지상에 닿은 빛이 지하 성전까지 이어진다. 소금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밝히고 있는 성전에 들어섰다. 잿빛의 공간은 절제‧침묵 등의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공간에 압도된 듯 숙연해진 마음으로 제대 쪽으로 나아가면 제대 왼편에서 ‘부활경당’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신석복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세월은 150여 년. 대구에서 순교한 복자의 유해를 아들이 찾아왔지만 당시 마을 사람들이 반대해 명례에 들이지 못했고, 교우들이 머물던 장방리 노루목에 모셨다가 1975년 진영천주교공원묘지로 옮긴 후 2018년 이곳으로 다시 이장했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복자의 삶과 죽음을 기억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성지 담당 박진우 신부는 “미사도 봉헌되지 않던 한옥 성당이 지금까지도 온전히 남아있는 건 주변 신자들이 꾸준히 돌봤기 때문”이라며 “그런 정성들이 모여 긴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고, 그 시간들 끝에 순교자의 유해를 품고 성모님께 안긴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녹여내 세상을 돕는다는 ‘소금 영성’. 그 영성이 성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낡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임에도, 이곳 명례성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굳건히 위용을 갖춰가고 있었다.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간과 정성을 녹여낸 것일까. 성지를 나서는 길. ‘명례성지 기도문’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마음의 문을 열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녹아 사라지는 소금이 되겠습니다’하고 고백하며 살게 하소서.…’ ◆ 순례 길잡이 주소: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1 미사: 오전 11시(화·수·목·금요일), 토 오후 4시, 일 오전 11시 후원 계좌: 351-1067-2746-63 (재)마산교구천주교유지재단 문의: 055-391-1205 명례성지 사무실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3면

마산교구 진주 옥봉동본당 “신앙 선조들 희생으로 빚은 한 세기 축하”

‘경남 진주 지역 본당들의 어머니’ 마산교구 옥봉동본당(주임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이 설립 100주년을 맞아 5월 10일 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 주례로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미사에는 역대 주임 강영구(루치오·성사 전담), 황봉철(베드로·성사 전담), 최경식(야고보·신안동 주임 겸 진주지구장) 신부와 본당 출신 장신영(요한 마리아 비안네·국내 유학) 신부, 조규일 진주시장, 박일동 진주부시장 등 내외빈과 신자 600여 명이 참여했다. 성당에 들어오지 못한 신자와 주민들을 위해 외부 잔디밭에 대형 스크린이 설치됐으며, 미사는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이성효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한 세기라는 시간, 현대사의 굴곡을 지나오는 동안 많은 신앙 선조의 눈물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축제를 지낼 수 있는 것”이라며 “다시 새롭게 200주년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자리에 우리는 함께 머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본당 주일학교 초중고 학생들을 ‘AI 사도단’으로 선포한다”며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AI를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도단으로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자”고 말했다. 영성체 후에는 본당의 한 세기를 함께 지켜 온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감사패 전달식도 열렸다. 유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본당 출신 장신영 신부를 키워내고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양진순(다리아) 씨, 본당에 헌신한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아 대를 이어 봉사 중인 윤철지(루카) 씨, 역대 사목회장 중 최고령 정회교(바오로·95) 씨와 현재도 솔선수범하고 있는 김재권(니콜라오) 씨 등이 신자들의 환호 속에 감사패를 받았다. 이진수 신부는 “본당 출신 신부님들, 역대 주임 신부님들 그리고 수도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본당 공동체 모두를 위해서 박수 한 번 치자”며 신자들을 격려했다. 1911년 공소로 출발해 1926년 승격된 본당은 1933년 현재 모습의 붉은 벽돌 성당을 완공했다. 성당 건물은 2005년 국가지정 등록문화재 154호로 지정됐다. 본당은 해성유치원·해성학원 등 교육사업과 한센인 공동체 산청 성심원 설립, 노인 요양시설 운영 등으로 100년의 시간만큼 복음화와 지역 사회 발전에 의미 깊은 족적을 남겼다. 한편 성당에서는 ‘100주년의 선물’이라 부를 만한 성물이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100주년을 맞아 성당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김대건 성인의 것으로 여겨지는 유해가 발견된 것. ‘ANDREA KIM’(안드레아 김)이라는 글귀가 선명히 새겨진 유해함은 성전 돌 제대에 봉인돼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당은 이를 신자들에게 공개한 뒤, 교회 규정에 따라 진위 확인과 인증 절차를 밟아나갈 예정이다.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5면

1926년생 동갑내기 본당들…시련 딛고 ‘100년’ 열매 맺다

100년 전인 1926년 5월 29일.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Florian Demange·한국명 안세화·1875~1938) 주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 소속 부제 11명의 사제서품식이 거행됐다. 한국교회가 아직 넉넉지 않은 사제 수와 어려운 사목 환경 속에서 신앙 공동체의 뿌리를 넓혀 가던 때였다. 서품식 다음 날인 5월 30일, 드망즈 주교는 새 사제 11명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는 사제인사를 단행했다. 이 인사를 통해 7개 본당이 새로 세워졌다. 한날 한뜻으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100년의 시간을 지나 오늘의 공동체로 자라났다. 그 가운데 대구대교구 남산본당과 성동본당, 전주교구 부안본당, 마산교구 옥봉동본당은 오늘날까지 신앙의 맥을 이어 오며 5월 나란히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한 세기 전 사제서품과 본당 신설로 시작된 공동체의 여정은 100년의 시간을 지나 오늘, 신앙의 열매로 맺어지고 있다. ■ 기도가 끊이지 않는 공동체 ‘대구대교구 남산본당’ 대구대교구 남산본당(주임 박덕수 스테파노 신부)은 석종관(바오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1926년 5월 30일 설립됐다. 당시 정식 성당이 없어 교구청 내 평신도 교육 공간이던 ‘명도회관’을 개축해 사용했지만, 공동체의 활동은 활발했다. 1928년에는 본당 차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라틴어 그레고리오 성가와 우리말 성가 수십 곡을 담은 성가집 「공교셩가집」을 발행했다. 신자 수가 늘어나자 본당은 2대 주임 남대영(루도비코) 신부 주도로 1929년 5월 새 성당 건립 준비에 나섰다. 공동체가 합심해 현재 성당 맞은편 자리인 대명동 언덕의 토지를 매입했고, 1936년 가을 새 성당을 착공해 이듬해 10월 10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본당 소재지가 대명동으로 옮겨지면서 ‘대명동성당’으로 불렸다. 일제의 압력으로 1945년 3월 11일부터 성당을 집단수용소로 내주는 아픔도 겪었다. 대구대교구가 1952년 4월 2일 여성 고등교육 기회 제공을 위해 효성여자대학을 설립함에 따라 성당과 부지는 대학이 사용하게 됐다. 같은 해 가을 본당은 교구청 부지인 성모당 남쪽 현 위치에 새 성당을 지었고, 1953년 5월 5일 제6대 대구교구장 최덕홍(요한) 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성당이 다시 남산동으로 옮겨지면서 본당 명칭도 현재의 남산본당으로 변경됐다. 남산본당은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한 공동체이기도 하다. 본당 출신 사제만 39명에 이른다. 본당 출신 첫 사제는 제2대 마산교구장을 지낸 장병화(요셉) 주교이며, 하느님의 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도 본당 출신이다. 남산본당은 성모당과 인접해 설립 초기부터 오늘까지 기도가 끊이지 않는 공동체로 자리해 왔다. 본당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남산본당 100년사」 편찬을 비롯해 전 신자 성지순례, 100주년 기념 바자와 음악회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5월 30일 오전 10시30분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주례로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 신심 운동 매진하며 지역사회 발전 이끌다 ‘전주교구 부안본당’ 전주교구 부안본당(주임 김정훈 스테파노 신부)의 역사는 1903년경 전북 부안군 하서면 등용리 일대에 교우촌이 형성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8년 12월에는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등용리공소 경당이 봉헌됐다. 이후 본당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드망즈 주교는 1926년 5월 30일 이기수(야고보)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고,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초대 주임 이기수 신부는 등용리가 외진 곳에 있어 교세 확장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고, 1935년 옛 부안문화원이 있던 자리에 새 성당 터를 마련했다. 이후 성당 이전과 함께 4년제 소학교를 세워 지역사회 문맹 퇴치에 앞장섰고, 교리교육을 통해 교세를 넓혀 갔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1년 소학교는 강제 폐교됐지만, 당시 성당 자리는 훗날 청우실업학교로 발전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6·25전쟁 중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본당은 1957년부터 새 성당 건립을 추진했고, 1963년 8월 27일 제4대 전주교구장 한공열(베드로) 주교 주례로 새 성당 봉헌식을 거행했다. 본당은 1950년대 후반부터는 농촌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간척사업을 실시해 신자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1980년대 들어 신자들은 신심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한때는 매년 100명 이상의 새 신자가 탄생하기도 했다. 성직자와 수도자도 다수 배출했다.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본당은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을 리모델링하고 쉼터를 조성했다. 또 100주년 기도문을 함께 바치며 신자 재교육 특강, 성지순례, 성경쓰기와 성경통독, 묵주기도 봉헌 등 신심을 살찌우는 다양한 영성운동도 전개했다. 본당은 5월 17일 오전 10시30분 교구장 김선태(요한 사도) 주교 주례로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한다. 김정훈 신부는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았던 선배 신앙인들의 기도와 희생이 오늘의 본당 공동체를 세웠다”며 “다가올 100년도 더 따뜻하고 더 열린 공동체, 젊은이와 어린이들이 기쁘게 머물 수 있는 교회, 지역사회 안에서 복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본당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 28개 본당의 모본당 ‘대구대교구 성동본당’ 대구대교구 경주 성동본당(주임 김태한 바오로 신부)은 이성인(야고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1926년 5월 30일 설립됐다. 당시에는 ‘경주본당’으로 불렸다. 천년 고도(古都) 경주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공동체로 경주 11개, 포항 17개 본당의 모본당이다. 1983년 9월 1일 성건본당을 분리하면서 본당명을 성동으로 바꿨다. 본당은 1992년 4월 1일 발생한 화재로 1959년부터 사용하던 성당을 잃었다. 이후 1999년 새 성당 공사에 들어가 2001년 1월 28일 제8대 대구대교구장 이문희(바울로) 대주교 주례로 현재의 성당을 봉헌했다. 2026년 3월 현재 2514명의 신자들이 지역 복음화에 헌신하고 있는 본당은 박재수(요한) 신부를 시작으로 그동안 사제 9명, 수도자 30명을 배출했다. 본당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나눔 활동도 꾸준히 이어 왔다. 2023년 1월 부임한 제31대 주임 김태한 신부는 코로나19 이후 감소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초대해 공동체의 활력을 높이고, 100년을 이어 온 신앙 공동체에 걸맞은 영적 쇄신을 이끌고 있다. 노후화된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한편, 예술적 감각을 담은 십자가상과 성모 마리아상 등을 배치해 신자들과 지역 주민, 경주를 찾는 타 지역 신자들에게도 특별한 감흥을 전하고자 힘쓰고 있다. 본당은 5월 31일 오후 2시 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주례로 설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거행한다. 현재 전국을 순회하고 있는 ‘파티마 국제 순례 성모상’도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성당을 찾는다. 김 신부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우리 공동체를 구원의 도구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며 “복음화의 사명을 새롭게 되새기고, 지난 100년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가운데 살아 있는 신앙 정신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산청 성심원 설립 등 지역사회에 사랑 실천 ‘마산교구 옥봉동본당’ 마산교구 진주 옥봉동본당(주임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의 역사는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1년 4월 8일 대구대목구 설정 이후, 초대 대목구장으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미국교회 한 신자의 성금을 받아 진주 읍내 동북쪽, 옥봉동 산 아래 땅 120평을 구입해 공소를 마련했다. 당시 초대 회장을 맡은 이낙종(스테파노) 씨는 전교에 헌신했고, 그의 아들 이상석(가브리엘) 씨도 ‘가톨릭청년회’를 조직해 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많은 이의 정성이 모여 1923년 목조건물이 신축됐고, 정수길(요셉)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문산본당 소속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됐다. 설립 당시 본당명은 진주본당이었다. 진주·사천·삼천포·합천·의령·하동·남해 지역을 관할했다. 이후 1967년 제10대 주임으로 박정일(미카엘) 신부, 훗날 마산교구 제3대 교구장이 부임한 뒤 현재의 옥봉동본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오랜 역사만큼 본당이 지역 복음화에 미친 영향은 컸다. 현재 경남 진주 소재 12개 본당의 모본당으로 ‘진주 지역의 어머니 성당’으로 불린다. 또한 해성학원‧해성유치원 등을 운영하며 교육사업을 펼쳤고, 한센인 공동체인 산청 성심원을 설립했다. 노인 요양 시설 운영을 통해 지역사회 안에서 사랑의 실천도 이어 왔다. 이진수 신부는 “진주대로의 끝자락, 낙후된 지역에 본당이 자리 잡았기에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에 더 부합하는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며 “본당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말씀 그대로 살고자 노력해 온 공동체”라고 전했다. 본당은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친다. 2025년 대림 1주일부터 ‘본당 설립 100주년 기도’를 봉헌해 왔으며, 올해 사순 시기에는 역대 주임신부 특강을 마련했다. ‘열일곱이다’ 음악 피정(4월 19일)에 이어 5월 8일에는 기념 음악회 ‘은총의, 100년 찬미의 노래’와 기념 사진전을 열었다. 100주년 기념미사는 5월 10일 10시30분 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 주례로 봉헌한다.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9면

마산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경축미사 봉헌

마산교구는 4월 18일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죽헌로 72 현지에서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경축미사 및 교구청 봉헌식을 거행했다. 지나온 ‘60년의 시간’에 감사하며, 앞으로의 교구 역사를 쌓아나갈 ‘새 공간’을 축복한 겹경사 자리였다. 3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교구청 봉헌 기도 ▲성전 축성과 벽 도유 ▲60주년 축하식 등으로 이어진 행사 이모저모를 화보와 함께 소개한다. 지역민·내외빈 등 3000여 명 기쁨 나눠 레오 14세 교황·유흥식 추기경 축전 보내 “100년 향해 가는 희망 공동체로 도약” ◎… 마산교구의 새 교구청사 건립은 숙원 사업 중 하나였다. 교구 설립 당시인 1966년에는 별도 건물 없이 성지여고 일부를 사용했고, 1974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섹카우 교구의 지원으로 가톨릭 문화원이 건립된 이후에는 그곳을 교구청으로 이용해 왔다. 이에 따라 교구는 2014년 8월 새 교구청 부지를 매입하고 2018년 교구청 신축추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건립 비용에 대한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2021년 6월 기공식과 함께 모금 운동이 시작됐고, 그 결과 200억 원 이상이 모이면서 ‘빚 없이’ 완공된 교구청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 축복식까지의 과정 또한 녹록지 않았다. 2023년 교구청사를 완공했지만 교구장이 공석인 상황. 결국 공식 봉헌식 없이 새 교구청 건물을 사용했고, 2025년 2월 이성효(리노) 주교가 제6대 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완공 3년 만에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이 모든 과정을 언급하며 “오늘 60주년 행사와 신청사 봉헌은 우리 교구를 지탱하고 있는 정신이 무엇인지 재발견하도록 초대한다”면서 “2014년부터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도를 바치며 희생했고, 우리 스스로 주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후 이 주교는 교구민들과 함께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친 후 “마산교구라는 신앙의 배를 함께 저어오신 사제단과 수도자, 평신도에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 교구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주한 교황대사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등 한국 주교단, 교구의 초청에 흔쾌히 응답한 일본 삿포로, 히로시마, 가고시마교구 교구장 등 30여 명 주교가 행사에 참여했다. 특히 레오 14세 교황도 교황청 국무부 국무차관 앤서니 오니에무체 에크포 몬시뇰을 통해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에크포 몬시뇰은 “레오 14세 교황 성하는 마산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경축미사와 교구청 봉헌식 거행 소식에 크게 기뻐하셨다”면서 “교황님께서는 교구 공동체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살아있는 표징이 되어 주시기를 당부하시고 격려하셨다”고 전했다.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은 영상메시지를 통해 “경남 지역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온 마산교구가 새봄을 맞은 대지처럼 성숙한 성장이 계속되기를 기도드린다”며 “새로운 100년을 향해 가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 본 행사가 열리기 훨씬 전부터 교구청으로 향하는 길목에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농촌 마을 한가운데에 들어선 교구청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어려워 각 본당에서는 전세 관광버스를 이용해 행사에 참여했다. 교구에서 집계한 관광버스만 총 60여 대. 신자들은 버스에서 내리며 “성지 순례를 온 기분”이라며 들뜬 소감을 전했다. 행사 당일 비 예보로 야외 행사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기우였다. 행사 당일 오전 잠깐 비를 뿌리던 하늘은 미사 시간이 다가올수록 맑아졌고, 준비해 온 우산을 양산처럼 쓰는 신자들이 많았다. 스포츠 경기 관람석에서나 볼 법한, 신문지를 접어 만든 모자를 쓴 채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도 눈에 띄었다. ◎… 옛 교구청을 회고하는 고령의 신자부터 성소를 꿈꾸는 청소년들까지 한 목소리로 새 교구청사 봉헌의 기쁨을 함께했다. 사제를 꿈꾸고 있는 김준후(가브리엘‧14‧거제 옥포본당) 군은 “지난해 성소 주일 행사 때 새 교구청에 처음 와보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라며 “이렇게 많은 주교님과 신부님을 한 번에 보고 있으니 교구청이 더 거룩해 보인다”고 전했다. 교구청에 처음 방문한다는 김형두(미카엘‧78‧통영 대건본당) 씨는 “어린 시절 성경학교와 청년기 꾸르실료 교육 등을 받았던 옛 교구청 기억이 선명하다”며 “우뚝 서 있는 새 교구청을 보며 교구 발전을 온몸으로 느꼈고, 뒤로 산과 앞으로 밭이 펼쳐진 귀한 땅에 초대받은 감격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고 전했다. ◆ 마산교구 역사 1966년 2월 15일 부산교구에서 분리. 마산교구 설정(설립 당시 신자 2만8069명, 성직자 22명(한국인 16명, 외국인 6명), 본당 21개) 1966년 3월 5일 김수환 신부, 초대 교구장에 피명 남성동성당, 주교좌성당으로 지정 승격 5월 31일 김수환 주교 성성 및 초대 교구장 착좌 교구 초기, 교구청사가 없어 성지여중고 일부 사용 1968년 10월 30일 장병화 주교 제2대 교구장으로 착좌 1971년 9월 24일 오스트리아 그라츠 교구와 자매 결연 1974년 5월 31일 가톨릭 문화원 준공(그라츠 교구 지원) 6월 22일 가톨릭 문화원으로 교구청 이전 1978년 11월 25일 양덕동성당 준공 및 축복(그라츠 교구 지원) 1979년 4월 15일 주교좌성당을 남성동성당에서 양덕동성당으로 변경 선포 1989년 2월 21일 제3대 교구장 박정일 주교 착좌 / 제2대 교구장 장병화 주교 퇴임 1989년 7월 4일 첫 해외 선교사제 파견(정홍식 신부: 에콰도르) 2001년 1월 8일 안명옥 부교구장 주교 서품식. 교구 총대리로 임명 2002년 11월 11일 제4대 교구장 안명옥 주교 착좌식 2008년 6월 14일 마산 가톨릭 교육관 봉헌식 2014년 8월 5일 새 교구청 부지 매입 계약 2016년 6월 8일 제5대 교구장 배기현 주교 서품 및 착좌식 2016년 10월 30일 교구 설정 50주년 감사미사 2021년 6월 19일 교구청 신축 기공식 2021년 9월 25일 그라츠 자매결연 50주년 기념 행사 2022년 8월 27일 교구장 서리 신은근 신부 임명 8월 29일 제5대 교구장 배기현 주교 퇴임 2023년 3월 22~23일 신축 교구청 이전 2025년 2월 12일 제6대 교구장 이성효 주교 착좌식 2026년 4월 18일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 경축 미사 및 교구청 봉헌식 거행(신자 18만2824명(2025년 12월 기준), 성직자 178, 본당 75개)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2면

아픔과 무관심의 자리 찾아 부활 기쁨·희망 나누다

한국교회는 성주간과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며 죽음과 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한 마음으로 경축했다. 동시에 교회는 부활의 기쁨이 성당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웃들에게도 전해지도록 거리와 삶의 현장으로 나아갔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권력자나 강한 이들이 아니라 눈물 흘리던 이들과 약한 이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듯,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와 노동사목위원회 등 5개 단체는 4월 5일 서울역에서 ‘동자동 쪽방촌 공공주택 촉구를 위한 주님부활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미사에는 빈민사목위원장 오주열(안드레아) 신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박상훈(알렉산데르) 신부를 비롯해 동자동 사랑방 주민과 사제·수도자·활동가 등 100여 명이 참례했다. 이들은 공공주택 사업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주민들을 위로하며, 부활의 기쁨이 동자동 쪽방촌에도 깃들기를 기도했다. 박상훈 신부는 강론에서 “부활 신앙은 곧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초대”라며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삶의 새로움이 허망한 것으로 남지 않게 하려면, 다른 형제자매들이 머물 ‘지붕’을 염려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려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부족했는지 고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자동 쪽방촌은 2021년 국토교통부에 의해 공공주택 사업지구로 선정됐으나, 주택 소유주들이 민간 재개발을 요구하며 갈등이 빚어져 5년째 재개발이 멈춰있는 상황이다. 사실상 사업이 중단되면서 5년 새 150명이 넘는 주민이 비좁은 단칸방에서 열악한 환경과 씨름하다 세상을 떠났다. 동자동 사랑방 대표 차재설 씨는 “씻는 것마저 불편한 공간에서 재개발이라는 ‘봄’을 기다리며 살던 한 할아버지가 ‘나도 살아생전 평온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라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 서울대교구 총대리 구요비(욥) 주교는 4월 5일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영유아 거주시설 ‘디딤자리’에서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시설에 선물을 전달했다. 구 주교는 이날 “디딤자리 어린이들의 영혼에는 사랑을 향한 의지가 담겨 있다”며 “디딤자리가 아이들이 사랑 안에서 애벌레에서 찬란한 나비로 자라나 희망을 전할 수 있도록 돕는 하느님의 집이 되길 기원한다”고 전했다. 이어 “교회가 지닌 교육·의료 시설 등을 바탕으로 장애 아동의 전인적 구원을 돕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2005년 개원한 디딤자리는 장애로 인해 가정 내 보호가 어렵거나 입양이 보류된 만 0~6세의 장애 영유아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가정공동체 형식의 소규모 거주시설이다. 현재 디딤자리는 전원해야 하는 아이들이 자립생활을 경험하고 훈련할 수 있는 ‘체험홈’ 마련이 과제로 남아 있다. 만 12세까지의 아동도 수용할 수 있지만, 공간이 부족하고 건물 증축도 어려워 외부 공간이 필수적인 상황이다. 디딤자리는 이를 위한 도움의 손길과 함께, 입소가 필요한 장애 영유아를 기다리고 있다. ※ 후원계좌 국민 487101-01-246065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디딤자리 ※ 문의 02-987-6009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디딤자리 ◎ 수원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4월 5일 수원시 이목동에 자리한 지적장애인 거주시설 ‘바다의 별’을 찾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했다.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가 2003년 문을 연 바다의 별에는 현재 공동생활가정 몬띠의 집, 마르따의 집, 바르나바의 집 등에서 50여 명의 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다. 이용훈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장애를 지닌 분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수도회는 물론이고 이용자 가족들과 지역사회가 함께 관심을 갖고 시작된 이곳은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눈부시게 빛나는 공동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바다의 별을 이용하는 분들과 봉사자, 직원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이미 충분히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 모두의 삶 안에 따뜻하게 머물길 빈다”고 전했다. ◎ 제주교구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인 4월 3일 제주시 한림읍 성 이시돌 새미 은총의 동산 야외 십자가의 길에서 ‘4·3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봉헌했다. 교구는 올해 성금요일이 ‘제78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과 겹침에 따라 “나를 위해 울지 마라”(루카 23,28)를 이번 행사의 주제 성구로 정하고, 4·3이 단지 아픔과 슬픔에 머무는 기억이 아니라 희망과 생명으로 나아가야 할 여정임을 묵상하며 십자가의 길을 봉헌했다. 14처 기도를 마친 후 신자들은 새미소 대형 십자가 아래 모여 물과 피를 상징하는 대형 천을 들고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봉헌했다. 교구장 문창우(비오) 주교는 성체 강복을 하며 십자가의 길을 마무리했다. 앞서 교구는 4월 2일 서귀포시 강정천에서 교구장 문창우(비오) 주교 주례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했다. 문 주교는 강론에서 “갈등과 힘의 논리로 갈라진 공동체를 치유하는 길은 예수님처럼 서로의 발을 씻어 주고 보듬는 사랑, 빵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생명을 선택하고 평화를 이루는 삶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생명과 평화의 순례라고 전했다. 미사 중에는 발씻김 예식도 열렸다. 마산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도 4월 2일 경남 함안의 지적장애인 생활시설 ‘로사의 집’을 찾아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하고, 시설 생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며 주님 만찬의 의미를 되새겼다.

발행일 2026-04-12 제3486호 11면

[위령기도를] 마산교구 정하권 몬시뇰

‘교회론의 대가’, ‘학자 중의 학자’로 불린 정하권 몬시뇰(플로리아노‧마산교구 성사전담)이 3월 29일 선종했다. 향년 99세. 고인의 장례미사는 3월 31일 마산교구 주교좌양덕동성당에서 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 주례로 봉헌됐으며, 유해는 경남 고성군 이화공원묘원 성직자 묘원에 안장됐다. 장례미사 강론에서 이 주교는 “작년 교구장 착좌 이후 가장 먼저 찾아뵌 사제가 정하권 몬시뇰이었다”면서 “누구보다 사제를 사랑하신 몬시뇰의 성품을 기억하고, 많은 제자가 몬시뇰과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주교는 또 “병문안 때 기도와 강복 직후 미동도 없던 몬시뇰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고 함께 기도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며 “몬시뇰님은 자신의 서품 성구 ‘하느님의 모상대로’를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이제 천상 제단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린다”고 말했다. 정 몬시뇰은 1927년 대구 군위에서 태어나 1951년 사제품을 받았다.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과 함께 사제품을 받은 ‘유일한 동기 사제’다. 서품 직후 창녕본당 주임을 역임하고, 스위스 프리부르그대학교, 프랑스 파리대학교 등에서 유학했다. 유학기간 동안 국내 교계제도가 설정되면서, 그가 사목했던 창녕본당이 대구대목구에서 부산대목구로 소속이 바뀌어 정 몬시뇰 또한 부산대목구 사제가 됐다가, 유학이 끝날 무렵에 마산교구가 생기면서 마산교구 사제로 소속이 한 번 더 바뀌었다. 이후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부임했고, 대구대목구에서 시작한 ‘동기 사제’의 인연이 마산교구로 이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1966년 귀국한 정 몬시뇰은 남성동본당 주임을 역임했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사목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1973년부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사무차장 겸 가톨릭대 교수로 봉직했다. 이 무렵부터 1994년 은퇴까지, 정 몬시뇰은 20여 년을 신학교 교수로 후학 양성에 헌신했다. 700여 명 사제를 가르친 이력으로 ‘사제들의 아버지’, ‘사제들의 영원한 스승’이라 불렸다. 1975년부터 광주대건신학대학 교수로 일하며 4년여간 학장을 맡았고, 1982년부터는 대구가톨릭대 학장으로 8년, 교수로 4년간 소임했다. 대구가톨릭대 학장으로 재직하던 198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몬시뇰로 서임됐다. 사제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훌륭한 사제를 많이 길러낸 일”을 꼽은 정 몬시뇰은,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전국 교구를 찾아 신자들을 위한 강연을 펼치며 활발히 활동했다. 정 몬시뇰은 ‘외유내강’을 원칙으로 ‘사제답게’를 강조해 가르쳤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다. 정 몬시뇰 사제수품 60주년(2011년)과 70주년(2021년) 기념행사는 제자 사제들이 주축이 돼 마련했으며, 몬시뇰이 2022년부터 지내왔던 경남 창원 이화요양병원에도 후학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발행일 2026-04-05 제3485호 25면

[위령기도를] 마산교구 정하권 몬시뇰

‘교회론의 대가’, ‘학자 중의 학자’로 불린 정하권 몬시뇰(플로리아노‧마산교구 성사전담)이 3월 29일 선종했다. 향년 99세. 1927년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1951년 사제품을 받은 정 몬시뇰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품을 받은 ‘유일한 동기 사제’이다. 서품 직후 창녕본당 주임을 역임하고, 스위스 프리부르그대학, 프랑스 파리대학교 등에서 유학했다. 유학기간 동안 그가 사목했던 창녕본당이 대구대목구에서 부산대목구로 소속이 바뀌면서 정 몬시뇰 역시 부산대목구 사제가 됐다가, 유학이 끝날 무렵에 마산교구가 생기면서 마산교구 사제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후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부임했고, 대구대목구에서 시작한 ‘동기 사제’의 인연이 마산교구로 이어진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1966년 귀국한 정 몬시뇰은 남성동본당 주임을 역임하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사목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1973년부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 사무차장 겸 서울가톨릭대 교수로 일했다. 이 무렵부터 1994년 은퇴까지, 정 몬시뇰은 20여 년을 신학교 교수로 후학 양성에 헌신했고, 700여 명 사제를 가르친 이력 덕에 ‘사제들의 아버지’, ‘사제들의 스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5년부터 광주대건신학대학 교수로 일하며 4년여간 학장을 맡았고, 1982년부터는 대구가톨릭대 학장으로 8년, 교수로 4년간 소임했다. 대구가톨릭대 학장으로 재직하던 1987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몬시뇰로 서임됐다. 사제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훌륭한 사제를 많이 길러낸 일”을 꼽던 정 몬시뇰은,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전국 교구를 찾아 신자들을 위한 강연을 펼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외유내강’을 원칙으로 ‘사제답게’ 살아간 정 몬시뇰을 제자들은 따랐다. 정 몬시뇰 사제수품 60주년(2011년), 70주년(2021년) 기념행사를 제자 사제들이 주축이 돼 마련했으며, 정 몬시뇰이 2022년부터 지내왔던 경남 창원 이화요양병원에도 후학들의 발걸음은 이어졌다. 최근 3월 22일 교구장 이성효(리노) 주교의 병문안을 마지막으로 정 몬시뇰은 영면에 들었다. 고인의 장례미사는 31일 오전 10시 마산교구 주교좌양덕동성당에서 이성효 주교 주례로 봉헌되며, 유해는 경남 고성군 이화공원묘원 성직자 묘원에 안장된다.

입력일 202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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