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8주일

복음서가 전해 주듯이 예수님 곁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렀을까요?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신 뒤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침묵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군중을 보고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배고픈 사람들, 아픈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태 14,14 참조) 그 연민이 예수님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슬픔 속에서도 사람들의 아픔을 먼저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자신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온유하고 부드럽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끌어당기는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연민은 예수님을 군중에게 다가가게 했고,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며, 제자들의 계산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자체보다 그 기적을 낳은 예수님의 연민에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특별한 사람만이 실천하는 거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아주 작은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배움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산책을 하다가 맨발의 한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르신은 맨발 걷기를 하려고 쉼터에 신발을 벗어두었는데 관리인이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바람에 신발을 꺼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전철을 타고 집에 가야 하는데 맨발로는 갈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저는 제 신발을 벗어드렸습니다. 산책로에서는 맨발이 괜찮았지만, 수녀원까지 아스팔트 길을 맨발로 걸어가려니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날 저는 맨발로 수녀원까지 걸으며 깨달았습니다. 연민은 반드시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편을 내 불편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연민은 멀리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삶 속으로 한 걸음 다가서는 사랑입니다. 연민은 연약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곧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성경에서 연민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라하밈(rachamim)’과 복음서의 그리스어 동사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는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품고 사랑으로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연민은 하느님의 언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부족한 현실에 머문 제자들의 시선과 배고픈 군중을 보시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참조)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시선 사이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연민입니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일깨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대개 작지만 깊은 연민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연민의 실천은 때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열매를 맺습니다.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오늘, 교회가 전해야 할 가장 큰 힘은 예수님의 연민입니다. 예수님의 연민은 인간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시고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능력은 없지만,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의 불편을 내 불편으로 받아들이는 연민은 오늘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작은 연민의 순간들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고,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를 닮아 갑니다. 예수님의 연민이 살아 있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④: 인간의 죄와 죽음, 원복음

인간의 원죄와 죽음 성경은 한처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당신의 각별한 사랑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에덴 동산에 두십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에덴’은 기쁨과 환희를, ‘동산’은 낙원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인간을 기쁨의 낙원에 두셨다는 표현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인간은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며 행복을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악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게 되었는지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원죄와 그 결과인 죽음이란 운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뱀은 간교한 유혹자입니다. 뱀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뱀의 유혹이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를 범하게 된 인간은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고 찾으시는 하느님을 피해 숨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원죄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의 관계에 단절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은 생명의 소멸인 죽음이란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죄의 다양한 모습들 이어서 창세기 4장부터 11장까지는 인간이 범하는 죄의 다양한 모습들을 전해 줍니다. 먼저 카인과 아벨 이야기(창세 4,1-16 참조)는 인간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 결과 초래된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농부인 형 카인과 양치기인 동생 아벨은 각자의 소출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물만이 받아들여지자 카인은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동생을 살해하는 폭력을 저지르고 맙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창세 6,5-9,17 참조)에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만연해지고, 마음의 생각과 뜻이 타락하였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시며(창세 6,6 참조) 홍수로써 세상을 정화하시게 됩니다. 바벨탑 이야기(창세 11,1-9 참조)에서는 창조 때 첫 인간이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과 같아지려 했던 교만이 다시 나타납니다. “자,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세 11,4)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해 버린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하느님의 구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원복음 인간의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약속해 주십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창세기 3장 15절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리라.” 하느님께서는 장차 여인의 후손, 즉 메시아를 통하여 인간을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 유혹하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심으로써 구원해 주시리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초대교회의 이레네오 성인(130/140?~202년경)은 이 구원 약속을 원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구원의 첫 번째 기쁜 소식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기 위하여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오늘 말씀들은 ‘참으로 값진 것을 알아보는 눈은 어디서 오는가’를 제시합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을 위해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는 지혜를 제안합니다. 주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고 물으십니다. 솔로몬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듣는 마음’을 청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하느님의 뜻대로 이끌 수 있는, 듣는 능력입니다.(1열왕 3,5.7-12 참조)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은 아드님과 같은 모습을 닮아가는 것(로마 8,29 참조)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알아봐야 할 참된 가치의 기준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솔로몬이 청한 ‘듣는 마음’과 바오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는 결국 하나로 만납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과 가라지 비유의 결론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과 값진 진주 하나를 찾아낸 상인의 공통점은 ‘가진 것을 다 팔아’(마태 13,44) 그것을 산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 교부의 해석에 따르면, 밭에 묻힌 보물은 밭으로 비유되는 성경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신비’이며, 그것을 캐내는 일은 곧 말씀을 깊이 파고드는 ‘영적 독서의 수고’를 가리킵니다. 한편 눈여겨볼 부분은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과 달리 이미 ‘좋은 진주를 찾고 있던 상인’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어떤 이에게는 뜻밖의 은총으로, 어떤 이에게는 오랜 추구 끝의 응답으로 주어지지만, 그것을 알아본 뒤의 반응은 동일합니다. 그 반응은 기쁘게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보물을 다시 숨겨두고 ‘기뻐하며’(마태 13,44)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손익 계산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어지는 그물 비유(마태 13,47-50 참조) 역시 성장 시기의 교회 안에 선한 이와 악한 이가 함께 있음을, 그리고 최종 판별은 종말에 이뤄짐을 말합니다. 그물이 지금 당장 물고기를 가려내지 않듯, 교회 역시 지금은 심판자가 아니라 그물의 역할, 곧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옛 계약의 지혜와 새 계약의 은총을 함께 간직하고 나눠 줄 수 있는 사람 곧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의 새로움에 눈뜬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들을 관통하는 하나는 ‘보물을 알아보는 마음’입니다. 문제는 보물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흐려진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맑게 하는 그리스도교 수련 고전이 「필로칼리아」인데, 여기에서 교부들은 정념을 정화하고, ‘예수 기도’로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게 함으로써, 점차 일상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된다고 증언합니다. 참된 가치를 알아보는 눈은 은총으로 주어지고, 그 눈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내어놓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우리 곁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값어치를 알아보는 ‘듣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이웃 사랑,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사실 밭을 사고 진주를 사는 행위입니다. 문제는 그 밭 속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데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나는 지금 내 삶의 밭을 갈고 있는가, 아니면 그 밭에 묻힌 보물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나에게 하느님 나라는 우연히 만난 보물인가, 오래 찾던 진주인가.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의 눈’을 주신 주님께 그 마음을 청합시다. 세상의 값어치와 하느님 나라의 값어치를 혼동하지 않고, 참된 보물(그리스도와 복음 선포)을 알아보았을 때는 손해라 여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용기도 주님께 청해 봅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③: 인간의 역할과 부부관계

인간의 역할 이번 편지에서는 세상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 성경 말씀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1장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대해 “보시니 좋았다”라는 표현이 다섯 차례 나옵니다.(창세 1,4.10.12.18.21)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31절에 다시금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의 피조물을 당신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 인간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세상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세상 다스림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 다스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세상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맡기셨기에 하나의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인간이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위하여 무분별하게 생태계를 파괴하고 훼손하는 행위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권한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자연환경의 문제는 이러한 남용이 초래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창조하신 세상을 잘 보호하면서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도록 인류가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부부의 관계에 대한 성경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여기서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제시되는 것은 두 존재가 동등한 관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 여자는 ‘잇샤’입니다. 두 단어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잇샤는 이쉬의 여성형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뼈와 살이 함께 언급될 때 두 존재의 유사성을 나타냅니다.(창세 2,23 참조) 둘째,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보호하고 협력하는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갈비뼈는 생명과 직결되는 신체 기관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나타냅니다. 하와(생명,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 불리게 되는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 생명의 보호자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남자의 협력자(창세 2,23 참조)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부부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부부입니다.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기에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마르 10,9 참조) 부부는 한 몸으로서 서로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동등한 인격적 존재인 배우자를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배려하는 마음으로 부족한 것을 서로 보완하고, 필요할 때 서로 협력하며, 부부 사랑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26 제3501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②: 창조주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세상 창조 이번 편지에서는 창세기가 전하는 하느님의 세상 창조에 대한 계시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의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에 대한 신앙(구두 전승)이 구약 당시의 표현 방식으로 기록(문서화)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보편적 계시 진리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계시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여기서 ‘한처음’은 세상의 시작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구약의 히브리어 용법에 의하면 온 세상을 뜻합니다. 한자어 천지(天地)의 의미를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하느님께만 적용되는 고유한 표현으로 신적(神的) 창조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1장 1절은 한처음에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계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가운데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계시 진리를 전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 예언서는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기에 만군의 주인이시며, 영원하시고 유일한 주님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 신약성경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사도 17,24)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에서도 창조주 하느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묵시 4,11) 성경이 전하는 계시 진리 말씀에 따라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하느님의 인간 창조 성경 말씀은 인간의 기원이 하느님께 있다는 계시 진리와 함께 인간이 가지는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세상 안에서 가지는 인간의 위치와 사명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성경 말씀을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은 구약의 히브리어 용법에 따르면 인간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습’은 인간이 가지는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와 비슷하게’라는 말은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차별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히브리어 아담입니다. 여기서 아담은 첫 인간의 이름일 뿐 아니라 집합명사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과 의지로 창조된 존재요,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 존재, 즉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인간관이요 가르침입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마태오복음 13장은 일곱 가지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인 ‘하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이라는 완전수에 담아내고 있지요.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상인, 그물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비유로 제시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중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입니다.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는 동안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내용이지요. 가라지와 하늘 나라는 어떤 의미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요? ‘가라지’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지자니온(ζιζάνιον)’은 생육 기간에는 밀과 생김이 흡사해 분간하기 매우 어려운 식물입니다. 또한 밀과 같은 계절에 열매가 익기 때문에, 추수 때 곡식이 섞이기는 더욱 쉽지요. 하지만 맛은 쓰기 때문에, 밀에 섞였을 경우 밀가루의 맛을 훼손한다고 하여 ‘독보리’라고도 불립니다.(김영숙, 「성경에 나오는 식물들」 참조) 복음에 의하면, 밀의 품질을 떨어뜨릴 가라지가 자라고 있으니, 종들은 그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대로 두게 하지요. 종들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마태 13,29) 모를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만약 집주인이 질 좋은 밀을 얻으려고 했다면, 가라지는 그냥 뽑아 거두어 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복음은 그 점이 ‘하늘 나라’에 비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 복음서는 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이 비유는 세상에 선과 악이 왜 항상 공존해야 하는지 묻게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 걸까요? 거룩한 성교회 안에는 왜 여전히 위선과 죄인이 존재할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그 죄악을 없애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실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만약 하느님께서 죄악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밀 또는 가라지‘만’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밀과 가라지가 모두 ‘함께’ 자라도록 하신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밀이 긍정성이라면 가라지는 부정성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부정성을 제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긍정적인 것만 보고 싶은 것이지요. 철학자 한병철은 「신에 관하여」에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부정성을 제거하려 드는 긍정성의 사회에서 산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은 세상을 마치 무균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부정성을 제거한 나머지 세상을 온통 매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보기 싫은 것은 아예 없애거나 안 보려고 하는 이러한 태도는 세상을 긍정성으로만 획일화시킵니다. 이를테면,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는 타인의 저항을 줄이고 부정성이나 아픔을 일으킬 만한 맞수를 점점 더 사라지게 만들며, 끊임없는 ‘좋아요’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거지요.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오히려 깨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깨짐’은 아픔이라는 부정성에 의해 발생하고요.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가라지의 비유는 부정성이 오히려 우리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하게 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 내면의 가라지를 발견했을 때, 비록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것 때문에 시련을 겪을지라도,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하느님이 왜 가라지를 밀과 함께 자라도록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밀과 가라지를 모아들일지, 거두어서 태워 버릴지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확 때, 곧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나의 가라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우리를 당장 거두시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투성이인 나와 너, 우리지만, 모두 ‘함께’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이사 55,10-11 / 제2독서 로마 8,18-23 / 복음 마태 13,1-23 어느 건축가가 지인의 배려로 박물관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장고에는 아직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은 많은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둘러보다가 낯설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체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필이라 할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되지 않고 이 수장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친일파이자 매국노라 불리는 이완용이 쓴 글이라 전시 불가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물 흐르듯 쓰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매우 능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잘 쓰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충분히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그 죄가 너무 커서 모든 노력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위대한 일을 많이 남겼어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죄인의 삶을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떨까요? 세상 안에서 남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실 땅을 먼저 갈고 씨를 뿌리는 우리의 농사 방법과 달리, 이스라엘 지역의 농사는 씨를 먼저 흩뿌린 뒤에 땅을 갈아엎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에 나오듯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까지 씨앗이 날아가도록 놔두는 농부는 없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낭비이고, 따라서 실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온 세상에 말씀의 씨앗을 던지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관대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먼저 길가는 수많은 발길에 짓밟혀 단단하게 굳어버린 길입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나 세상의 논리로 굳어버려 말씀이 한치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겉으로는 흙이 있어 보이나, 그 밑에는 단단한 돌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동요나 위로를 구할 때는 기쁘게 말씀을 받지만,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할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뿌리가 없어 이내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은 흙도 깊고 뿌리도 내렸지만, 주변의 가시덤불이 햇빛과 양분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더 커서 영적 질식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마지막은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자기 삶의 실존적 결단으로 깨닫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수확량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비옥한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굳어버린 길가 같은 내 마음, 얕은 돌밭 같은 내 결심, 걱정과 욕심으로 가득 찬 가시덤불 같은 내 영혼에도 끊임없이,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혹시 자기조차 포기한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정작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안에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모습이 모두 있습니다. 어제는 돌밭이었어도 오늘 쟁기질을 열심히 하고 돌을 골라내면 충분히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8)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뿌린 씨의 4~5배 정도 거두면 평년작이고, 7~10배 정도 거두면 대풍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백 배, 예순 배의 수치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풍요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씨앗의 4분의 3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4분의 1의 씨앗이 모든 실패와 낭비를 덮고도 남을 승리를 거둔다는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길이 험난하고 세상의 유혹이 가득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창세기①: 개괄적 이해

이번 편지에서는 구약성경 오경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성경, 구약성경에 대해 간략히 소개드리고, 이어 오경과 창세기의 전체 내용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1)성경 성경에는 하느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이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경륜을 통해 계시됩니다. (2)구약성경 구약성경은 성경의 전반부로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후반부인 신약성경은 하느님의 구원경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함) 구약성경에 속하는 46권의 책들은 그 내용과 문학 양식에 따라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오경’, ‘역사서’,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입니다.(성경의 목차 참조) (3)오경과 창세기 오경은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하며, 원역사, 성조시대, 이집트 탈출과 광야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기원, 인간의 기원과 운명, 하느님 구원 역사의 시작,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 구원 체험,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생활 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진리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오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기원(起源)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진리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내용에 따라 ▲세상과 인간의 기원, 인간의 운명, 원복음(原福音)에 대한 말씀인 창세기 1-11장(원역사) ▲구약의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을 전하는 창세기 12-50장(聖祖 이야기)으로 구분됩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1-11장에는 세상 창조에 이어 인간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계시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으로 창조되어 낙원에 있던 인간(1-2장)은 악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원죄) 스스로 고통과 죽음이란 운명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3장) 이어 나오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인간이 범하는 ‘죄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4,1-16), 카인의 후손 라멕(4,19-24), 거인족(6,1-4), 노아의 홍수(6,5-9,17), 노아의 가정(9,18-29), 바벨탑(11,1-9) 등이 그것입니다. 창세기의 두 번째 부분인 12-50장은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는 성조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세 가지 축복 약속을 주십니다.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은 세 번째 축복 약속을 통해 계시됩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3) 이 축복 약속은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 마침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축복 약속은 아브라함에 이어 이사악과 야곱 이야기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야곱 집안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 경위를 전하는 요셉 이야기(창세 37-50장)는 기근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안배였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창세 50,20) 다음 편지부터는 창세기의 첫 부분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8면

[말씀묵상]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2026년 1월 15일자)는 Open Doors의 2026년 보고서를 인용하며, 전 세계 약 3억880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박해나 차별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박해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옥중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열아홉 번째 서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거룩한 이름을 증언할 힘을 청하였습니다.(스무 번째 서한)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는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라’는 강요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는 그분의 이름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였다”(사도 5,41 참조)라고 전합니다. 순교자들은 참으로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시편 119,132 참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사명, 권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복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박해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오로를 두고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사도 21,13 참조)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알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그는 구약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3)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힘도 결국 하느님께 대한 희망에서 나왔습니다. 화답송에서는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시편 31,4-6 참조)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시편의 기도자는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보호와 인도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박해의 이유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의 힘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곧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비록 순교의 칼날 앞에 서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더 내어주며, 먼저 용서하고, 평화와 희망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용기입니다. 끝까지 그분의 이름을 붙드는 이에게 주님은 반드시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편지를 시작하며

하느님의 계시 말씀이 담겨 있는 성경이 신앙생활에 있어 중요함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특히 구약성경은 더욱 그렇다. 이번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연재는 성서학을 전공한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가 매주 주보를 통해 교우들에게 보냈던 편지 형식의 글을 재구성한 것으로, 구약성경 중에서도 처음 다섯 권의 책인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간결하고 쉽게 전한다. “신부님, 세례받은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세상사는 일이 바빠서 신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느 신자 분이 답답해하시면서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고 싶고, 그분과 함께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것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앙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을 찾는 것은 시간이 날 때, 여유가 있을 때 언젠가 하면 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삶의 자세와 방향을 결정하는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 물음들에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십니다. 놀랍고도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먼저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啓示)는 사도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룩한 전통인 ‘성전(聖傳)’과,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거룩한 경전인 ‘성경(聖經)’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 삶의 근본과 참된 행복, 나아가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하느님을 믿고 공경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성장을 위해, 행복한 신앙생활을 위해 성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그분의 지극하신 사랑과 가르침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도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힘, 마음의 양식, 영성 생활의 깨끗하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는 힘과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21항)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많은 분에게 생소하거나 어렵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귀중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진 하느님 구원의 의미를 충만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분들이 하느님을 만나 그분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더 깊게 하고, 인생의 근본을 알아 삶의 참된 가치관과 희망을 가지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구원으로 나아가시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교우님과 함께 구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는 은혜로운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여정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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