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빚은 신앙] 예술과 신앙

큰 주제여서 쓸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지만, 막상 35년간 게으른 조각가로 살아온 지난날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간도 나를 위해 마련해 두신 하느님의 조용한 계획이었음을 깨닫는다. 30여 년간 가톨릭미술가회 회원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조각가였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고 살았을 것이다. 학원 일이 커질수록 물욕도 커졌다. 그러면서 고요한 내면의 삶과는 자꾸 멀어지고 있었다. 수백 명의 아이가 학원을 드나들자 아이들의 안전이 염려돼 성당 레지오 마리애에도 가입했다. 봉사하려는 마음보다는 내 이익을 위한 이기심이 더 컸다. 어느 날 나와 가까운 학부모가 책을 들고 찾아왔다. 「들숨날숨」이라는, 가톨릭 신부님이 펴내는 잡지였다. 그는 1년 치 구독료까지 내주며 그림을 그리는 신부님을 소개해 주었다. 전시장에서 본 신부님의 작품은 뜻밖이었다. 그림이나 조각을 하는 다른 수녀님과 신부님들의 작품과는 많이 달랐다. 사실적이기보다는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함이 드러났고 작품성도 뛰어났다. 마음 한구석에서 늘 초라하다고 느껴 왔던 성미술과는 달리 개성이 두드러지는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하셔서인지 서구적인 세련미가 느껴졌고, 사용한 재료도 남달라 보였다. 「들숨날숨」에 실린 글도 내 마음을 끌었다. 어느 해인가 부산에서 영성미술 캠프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했다. 쉼 없이 이어지는 작업 일정은 일반적인 피정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가라앉아 있던 창작 열정을 되살리는 강의와 실습이 이어졌다. 주로 미술을 전공한 가톨릭 신자들이 모여 있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타고난 재능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곤 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붓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이들의 솜씨를 보며, 손재주도 뛰어나지 않은 내가 미술을 한다는 사실에 낙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빛나는 재능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 역시 큰 즐거움임을 영성미술 캠프에서 알게 됐다. 재능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잘 가꾸어 발휘하는 것이 마땅하다. 캠프가 끝난 뒤 그곳에서 만난 대학 선배님과 함께 미술 동아리를 만들고 실습 모임을 이어 갔다. 신부님께서 주제를 정해 주시면 여러 연령대의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어 와 발표하고, 서로 감상하며 토론했다. 대학 시절보다 더 큰 창작 의욕을 일깨운,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다. 이후 신부님께서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면서 우리 모임은 중단됐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내 삶에 주어진 큰 기회였음을 기억한다.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틈틈이 준비해 두셨다가 우리 앞에 펼쳐 보이신다. 모르고 지나쳤던 일의 의미를 어느 순간 불현듯 깨닫게 하신다. 그 섬세하고 치밀한 계획에 놀라게 된다. 그러니 불평하고 툴툴거릴 시간이 없다. 나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을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을 수 있도록 늘 준비해야 한다. 들숨과 날숨이 맞물려 이어지듯, 우리는 하느님의 숨결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 글 _ 추명희 제르트루다(수원교구 가톨릭미술가회)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얼마 전 프랑스에서 오신 한 원로 신부님께서 대리구청을 방문하셔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 중 신부님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신부님은 무엇을 담당하고 계십니까?” “중고등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저는 “초등부까지는 성당에 잘 나오던 학생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신부님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다시 물으셨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너무 바쁩니다. 학업 때문에 성당에 나올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되물으셨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 질문에 다시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까. “학생들이 성당에서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부님은 프랑스 파리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BTS를 보기 위해 모였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젊은이들은 BTS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그들을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오는 학생들도 교회 안에서 위로와 평화를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성당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까?” 이어 신부님은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직접 물어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재미있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거나, 강론은 무조건 짧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추측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이야기는 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저 역시 청소년 사목을 담당하며 여러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시도해 왔지만 정작 학생들에게 제대로 물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너희는 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싶니?”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하니?” “너희에게 교회는 어떤 곳이니?” 교회는 이제 젊은이들이 교회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그렇게 선언한다고 해서 그들이 저절로 교회의 현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교회의 현재라면 그들의 목소리도 지금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힘들어하는지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리 정해 놓은 답에 맞추기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존중해야 합니다. 어쩌면 청소년 사목의 출발점은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묻고 그 대답을 듣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청소년을 위한 사목을 넘어 청소년과 함께하는 사목, 어른들이 정해 주는 교회가 아니라 청소년과 함께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어른들이 조금 더 천천히 말하고 조금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묻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자신이 단순한 사목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교회를 이루어 가는 소중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청소년들은 교회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이규성 요셉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청소년2국장)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가족이란

어느 날, 한 필리핀 여성이 울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며칠 전 그녀의 공장이 화재로 완전히 전소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지만, 소지품과 저축 통장, 서류 등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오직 “여기에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있습니다.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드릴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우리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 곁에 있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바라보며 눈물을 닦고 감사를 표했습니다. 며칠 후, 제게 전화를 걸어 새 직장과 거처를 찾았고, 모든 것을 잃었지만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고 말했습니다. 공동체가 그녀에게 희망과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 것입니다. 바로 그날, 필리핀에서 사진 한 장과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아버지(신부님), 보세요! 한국에서 같이 일하다가 필리핀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이 있어요!” 사진 속에는 한때 광주엠마우스 이주민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필리핀 이주민 두 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고 너무나 기뻤고, 공동체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이주민들은 고국을 떠날 때 모든 것을,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을 두고 갑니다. 그들은 외로움을 느끼고, 이 외로움은 때때로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결국 자신의 가족을 파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저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때로는 그들의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주민들이 우리 엠마우스를 통해 한국에서 만난 공동체는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 그리고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그것은 가족, 물론 ‘새로운 가족’이지만 ‘건강한 가족’입니다. 이 가족은 고향에 있는 그들의 진짜 가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신앙을 지키도록 도와줍니다. 엠마우스는 그들이 한국을 떠날 때도 함께하는 가족입니다. 엠마우스를 통해 한국에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은 이주민들을 풍요롭게 하고 그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소중한 것을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건강한 가족, 즉 공동체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암에 걸린 한 이주민 환자가 옆 병상 환자에게 했던 말이 항상 생각납니다. 한국에는 그를 보살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저는 그와 매일 몇 시간씩 함께하며 도와드렸습니다. 저는 이탈리아 사람이고 그는 필리핀 사람이었습니다. 옆 병상 환자가 궁금해하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저 이탈리아 사람은 누구예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필리핀 사람이고, 아버지(신부님)는 이탈리아 사람이고, 가족은 한국 사람입니다.” 그 한 문장에는 공동체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9) 글 _ 이청우 마우리찌오 신부(오블라띠 선교 수도회·광주엠마우스 이주민 공동체 담당)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띵동, 누구세요?

다섯 살 아들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며 가녀리고 예쁘장한 엄마가 학원을 찾아왔다. 다음 날, 학원에 온 아이는 자그마하고 귀여웠지만 눈을 맞추지 않았다. 종이와 미술 도구를 건네자 지우개 달린 연필로 한 점을 힘껏 찍고 그 주변만 맴돌았다. 선이 겹치면서 종이는 이내 찢어졌다. 엄마에게 늘 이렇게 그리느냐고 묻자, 그는 몸을 움츠리며 눈물을 흘렸다. “자폐예요. 치료받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게 해 보라고 하셔서…” 미술치료라는 말조차 낯설던 때였다. 자폐에 관한 책을 사서 읽었지만 망망대해에 홀로 배를 띄운 기분이었다. 전문 분야가 아니라며 머뭇거리자 엄마가 말했다. “아이가 여기 오는 걸 좋아해요.” 그렇다면 가르치려 들지 말고 이곳을 놀이터로 만들어 주자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에게 영화 <나의 왼발>도 보여 주며 친구의 그림이 자신들과 달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했다. 처음에는 나도 아이의 가정환경에 원인이 있을 것이라 섣불리 짐작했다. 모든 어려움을 사랑의 부족으로 설명하려던 나의 편견이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을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아이의 방식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었다. 아이는 매일 무언가를 끄적였고 종이에 구멍도 내고 어느 날은 구멍 나기 직전에 멈추기도 했다. 종이 열 장을 포개 주면 끝까지 이어진 터널을 만들었다. 나는 재질과 색이 다른 종이를 건네고 크레파스와 파스텔, 물감도 마음껏 만지게 했다. 구멍을 내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함께 받아들였다. 얼마 뒤 아이는 까만 점의 동굴을 벗어나 벌레가 기어가듯 가느다란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점에서 선으로 가는 길은 눈물겹게 긴 여정이었다. 아이에게는 ‘띵동’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띵동, 누구세요?”가 아이가 유일하게 되풀이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입시반 형과 누나들은 “띵동이 왔구나”, “띵동이 화가네”라며 반겼다. 띵동이는 차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호기심을 보였다. 부모와는 아이의 하루를 쪽지로 주고받으며 변화를 살폈다. 좋아하는 연필과 여러 재료를 활용해 집착을 억지로 떼어 내기보다 다른 놀이로 넓혀 갔다. 가을 야외 전시회에는 띵동이의 작품 여러 점이 걸렸다. 자폐 사실을 모르는 입시반 선생님들이 직접 고른 그림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너무 달라 걱정했던 특징이 작품에서는 독보적인 개성이 됐다. 전시 마지막 날 새벽, 비가 내려 그림을 걷으러 갔더니 띵동이와 엄마가 서 있었다. 아이가 그림을 보러 가자고 졸랐단다. 두 사람은 작품을 걷는 일까지 도왔다. 빗속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도 울었다. 엄마의 얼굴에도 빗물 같은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갈 무렵 띵동이는 특수학교에 진학하며 이사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아이를 꼭 안아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5년 동안 수천 명의 아이를 만났지만 유독 띵동이가 떠오른다.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할 때면 띵동이도 함께 기억했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글 _ 추명희 제르트루다(수원교구 가톨릭미술가회)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아, 이를 어쩌나”(크리스마스를 위한 그림)

주교님께서 내 그림을 선택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내가 운영하던 미술학원은 동네에서 유명해졌다. 조소과 출신이라며 내 그림 실력을 의심하던 학부모들도 “그 선생님은 그림도 잘 그린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교습소는 관인 학원이 됐고, 10평이던 공간을 33평으로 넓혀 옮겼다. 성당에 다니는 아이들도 자연스레 학원으로 모여들었다. 11월 중순, 길가의 플라타너스잎이 거의 다 떨어질 무렵 새로 오신 수녀님이 작업실을 찾으셨다. 성당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학원은 아이들이 몰려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수업할 만큼 바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에게서 지방대학 미술교육 강의도 제안받은 터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성당에 다니던 강사가 돕겠다고 나서면서 결국 일을 맡게 됐다. 작업은 단순한 트리 장식이 아니었다. 명동대성당을 본떠 지은 성당은 천장이 높아 웬만한 크기로는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 여러 스케치를 그려 신부님께 보여 드리고, 채택된 초본을 바탕으로 강사들과 3m가 넘는 무대미술 같은 그림을 제작해 설치했다. 첫 3년은 성공적이었다. 신부님도 흡족해하셨고 신자들도 해마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해 ‘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작품을 준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설치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뿐이었고 작업실은 좁았다. 작품을 보행로까지 펼쳐 놓고 작업해야 했다. 얇은 천에 그리던 그림이 찢어져 다시 그려야 했고, 물감은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급기야 작품을 손수레에 싣고 세탁소로 옮겨 건조기로 말렸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성당 봉사가 내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번까지만 하고 그만둬야지’ 마음먹자 성화는 정성을 다해 완성해야 할 작품이 아니라 빨리 해치워야 할 일이 됐다. 겨우 날짜를 맞춰 설치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화가 난 듯한 성모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설렘과 기쁨으로 그렸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그해에는 번아웃 상태에서 불평하며 붓을 들었다. 작업이 끝난 뒤 수녀님은 늘 그러셨듯 난 화분과 작품 사진을 넣은 액자를 들고 찾아오셨다. 나는 그날도 전화받느라 정신이 없어 수녀님과 제대로 마주 앉지도 못했다. 한참 머뭇거리던 수녀님이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제르트루다 자매님, 어쩌지요. 사진이 안 찍혔어요.” 카메라도 기계이니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꼼꼼하신 수녀님에게 쉽게 일어날 실수는 아니었다. 더구나 해마다 빠짐없이 남겨 오던 작품 사진이었다. 나는 그 말을 단순한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성 없이 그린 성화는 기록으로조차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성당의 일을 무조건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미술대학을 나왔고 신자라고 해서 성화와 성물을 만들 자격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수녀님과 나만 알고 있던 신앙의 신비를 이제야 고백한다. 글 _ 추명희 제르트루다(수원교구 가톨릭미술가회)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순교자 성월에 기억할 분들

1950년 4월 15일,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는 고(故) 노기남(바오로) 주교 주례로 9명의 신학생이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 어린 시절부터 큰 어려움을 겪었던 이현종(야고보) 신학생도 있었습니다. 1922년생이었던 그는 두 살 무렵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집을 떠나면서 숙부와 고모들의 손에서 자랐고, 그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 사제품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제가 된 이현종 신학생은 4월 22일 서울대교구 도림동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뒤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6월 28일 상황이 급격히 악회하자 이현종 신부는 주임신부와 함께 서울을 떠나 수원교구 하우현성당으로 피신합니다. 하지만 이 신부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임신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림동성당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남아 복사였던 서봉구(마리노) 형제와 함께 사제관을 지키며 남아 있던 신자들의 피난과 신앙생활을 함께 도왔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7월 3일 오후 3시경 북한군 30여 명이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한 군인이 제의실 앞에 있던 이 신부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이에 이 신부는 “이 성당의 신부요”라고 답을 합니다. 그 답이 끝남과 동시에 북한군은 총을 쏘았습니다. 그렇게 쓰러지면서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죽이는 게 그렇게 원이라면 더 쏘시오. 당신들이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오.” 이 말에 북한군은 다시 총을 쏘았고, 총성에 성당에서 뛰어나왔던 서봉구 형제에게도 북한군은 총을 쏘았습니다. 북한군이 떠난 뒤 인근 주민들이 성당에 도착했을 때, 서 형제는 이미 숨졌고, 이 신부는 아직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신부님은 자기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자신보다 먼저 서 형제를 걱정하며 “서봉구가 죽었으니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고모에게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는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모두 조선 시대에 순교하신 분들입니다. 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에 순교하신 분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을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아직 홍보와 관심 부족으로 진행이 더딘 것이 현실입니다. 더구나 북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유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번 순교자 성월에는 이분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리고 아직도 신앙의 자유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침묵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합니다. 글 _ 허현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첫 만남

예술과 신앙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때로 절묘하게 만난다. 종교미술은 정신을 물질로 드러내고, 물질을 통해 다시 정신을 일깨운다. 예식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 그 쓰임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예술과 신앙은 하나가 된다. 세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포일본당 신부님이 미술 전공자들을 성당으로 불러 모았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회색 시멘트벽이 그대로 드러난 성당에 임시로 걸 14처를 그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화가 중에는 이미 성화를 그려본 분도 있었지만, 나처럼 신앙도 그림도 처음인 경우도 있었다. 주임신부님은 우리에게 가톨릭 성물의 역사와 14처의 내용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14개의 쪽지 중 나는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뽑았다. 당황했다. 미술대학을 나왔지만 입체를 다루는 조소를 전공했고,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도 오래였다. 무엇보다 초보 신자라 교리도, 예수님의 수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로 미국에서 생활하던 시절, 외로움과 생활고를 견디다 교회를 찾았다. 남편이 개신교에 비판적이어서 수소문해 찾아간 곳이 한인성당이었다. 개신교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그림으로 가르친 적은 있었지만, 정작 나는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이들은 노아의 방주와 에덴동산을 즐겁게 그렸지만, 내게 성경은 여전히 낯선 이름이 가득한 두꺼운 책이었다. 귀국 후 포일본당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그런 내가 예수님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며칠을 고민한 끝에 신부님을 찾아가 말했다. “신부님,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못 하겠습니다.” 며칠 뒤 본당의 큰 수녀님에게 전화가 왔다. “제르트루다, 언제 시간 나시나요?” 그렇게 시작됐다. 수녀님의 일대일 신앙강좌가. 그날부터 수녀님은 매일 저녁 우리 집으로 오셨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수녀님은 곁에서 기도하며 14처의 의미와 예수님의 수난을 들려주셨다. 유화를 다룬 경험이 없어 파스텔로 그림을 그렸다. 손가락으로 색을 문지르다 보면 얼굴에 가루가 묻곤 했다. 수녀님이 흰 손수건으로 내 볼의 파스텔 자국을 닦아 주시던 감촉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림은 사흘 만에 완성됐다. 액자에 넣은 14처가 성당 벽에 걸리자 신자들은 그 앞에서 기도했다. 많은 신자가 내 작품을 보고 가는 것이 부끄러워 미사 중에 몰래 내 그림을 바라보곤 했다. 한 달쯤 뒤 외벽 공사가 시작되며 그림이 사라졌다. 성당 사무실에 찾으러 갔더니 직원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주교님께서 마음에 드신다고 가져가셨어요.” 며칠 뒤에는 주교님에게 감사 전화까지 받았다.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했던 그 경험은 내 신앙과 작품 활동의 출발점이 됐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의 기억을 품고 여전히 흙을 만지고 있다. 예술과 신앙이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시작된 길을 지금도 묵묵히 걷고 있다. 글 _ 추명희 제르트루다(수원교구 가톨릭미술가회)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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