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만난 복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주사목은 이주민들을 향한 사목적 돌봄을 수행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지만, 단순한 사목적 돌봄을 넘어 때로는 이주민을 환영하고, 만나고 또 그들의 어려움을 듣고 도와주는 일들도 하게 된다. 영성적인 도움만이 아니라 법률적, 물질적 도움도 주어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중의 하나가 당장 갈 곳 없는 이주민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이다. 쉼터의 목적은 갑자기 실직하였거나 치료의 목적으로 단기간 머물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국적에, 다양한 사정으로 많은 이가 거쳐 갔다.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보통 2~3명의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 따라서 공동생활 안에서 요구되는 규칙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잠시 지내다 떠나는 곳이지만, 공동체 생활이기에 각자 곤궁한 사정의 경중을 따지기에 앞서, 함께 지내기 위해 자기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난민 인정을 희망하며 체류하는 어떤 이주민이 쉼터에 왔다. 쉼터에는 이미 다른 국적의 이주민 두 명이 있었다.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쉼터에 마련된 식기와 식재료도 공유하고 요리도 직접 해야 하며, 청소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관리자나 봉사자 없이 그들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쉼터에 온 후 스스로 요리도, 청소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다 덩치가 큰 그는 함께 지내는 이주민들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참다못한 이들이 이 이야기를 담당 사제에게 전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런 일은 절대 없다며 부인한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자신은 그들보다 도움이 더 필요한 처지임을 주장하는 데 열심이다. 어느 쪽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태도에 화가 나서, 결국 그를 곧 쉼터에서 내보내기로 했다. 도움 앞에서는 간절한 모습이지만, 같은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는 작은 배려와 희생에도 인색한 사람이라는 의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어디든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있기 마련이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희생을 당연한 듯 여기고 자신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 같이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인색한 모습을 보면 베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괘씸한 마음이 든다. 약자의 사회 안에서도 벌어지는 약육강식과 이기적인 행태로 보인다. 복음에서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뒤돌아서 나올 때 자신에게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의 마음’(마태 18,23-35 참조)이 그러했을까? 하지만 이런 결정에는 늘 후회와 반성이 따른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받았기에 베풀어야 하는 사람 아닌가. 내가 제공하는 도움은 나의 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명과 소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앞세워 처음에 지녔던 따뜻한 시선은 거두고 쉽게 의심과 미움에 사로잡히는 냐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받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어버린 인색한 종’은 아닌가.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쉼과 함께

찬양이 있는 곳을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한 해가 금세 지나갑니다. 대림과 사순 시기에 늘어나는 음악 피정, 성탄과 부활, 연중 시기를 가리지 않는 찬양 미사와 공연 그리고 연습과 준비의 시간까지 더하면 한 해는 참 알차게 흘러갑니다. 본당이나 교구, 단체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행사를 하나하나 준비하고 마무리하다 보면 어느새 한 해가 훌쩍 지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행사가 끝날 때마다 기뻐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수고했다”,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 보람을 느끼며 또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종종 뜻하지 않은 갈등이 생기거나 정성껏 준비한 노력이 빛을 잃는 순간이 찾아오면, 다음 봉사도 신앙생활도 내려놓고 싶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마음과 에너지를 나누는 일을 하다 보면 작은 일에도 깊이 상처받고, 뜨거웠던 마음이 쉽게 식기도 합니다. 저 역시 바쁜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때는 깊이 돌아보지 못했던 오해와 미움, 실수들이 떠오르며 뜨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우연히 피정과 성지순례의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곳에서 맡은 역할과 책임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느님과 마주하는 시간, 나 자신과 머무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찬양의 여정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것처럼 더욱 설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이 가볍고, 하루에 대한 기대도 커졌습니다. 이전에는 맡은 역할에만 집중하느라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고, 좋았던 순간들을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요즘은 다녀온 장소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곳에서의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신부님들의 어우러진 목소리와 함께 찬양하는 동료들의 연주, 신자들의 노래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던 그때가 또렷이 기억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힘을 모아 봉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알아주지 않을 때도 많고, 서로 뜻이 맞지 않을 때도 있으며, 생각처럼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머리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생각보다 더 여리고 약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가기도 합니다. 갑작스러운 ‘신앙생활의 멈춤’이 오지 않도록, 틈틈이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권합니다. 피정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고, 본당을 벗어나 다른 본당이나 성지를 찾아가 보는 것도 좋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미사가 없는 시간에 성당에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위로해 주기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 _ 장영환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연주분과장)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

194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인도주의와 평화주의가 무르익었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밝혀진 전쟁범죄에 대한 분노가 커짐에 따라 세계 각국이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협약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제네바 협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협약이 체결된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렇게 3년간 33개 국가가 함께 참전하게 되었던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UN군과 북한군이 협정을 맺으며 끝나게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제네바 협약으로 전쟁 포로를 교환해야 했고, 전사자들의 시신을 인도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창기 북은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소극적으로 행동합니다. 끈질긴 협정 끝에 포로 교환에는 동의하지만, 시신 교환에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당시 한국에서는 전사자의 시신을 방치할 수 없기에 훗날 제네바 협약으로 이뤄지게 될 시신 교환을 위해 파주 적성면에 적군 묘지를 만들고 중국군과 북한군의 시신을 안장했습니다. 2016년까지 중국군 시신은 중국으로 보냈지만 아직도 북한군들의 시신은 묘지에 남아있습니다. 이 묘지는 다른 묘지들과 다르게 북향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만약 시신 교환이 이뤄진다면 고향으로 가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때까지만이라도 고향 땅을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묘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치적인 논리에 사로잡혀 ‘왜 적군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냐’라고 항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국제 협약에 의하면 우리는 반드시 이 무덤을 조성해 두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국군의 시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실종된 군인은 약 13만 명, UN군은 약 7400명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유해는 지금 우리나라 땅에도 있을 것이지만 북에도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북한군의 유해도 보존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존된 이들은 지금 북을 바라보며 누워있습니다. 문이 열린다면, 송환이 시작된다면, 바로 북으로 가기 위함이지만 이미 7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송환이 이뤄지지 못하고 고향만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부활을 꿈꾸고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고향 땅을 밟아보기를 바라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사순시기는 부활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을 원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그냥 일상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파주에는 진정 부활을 원하는 시신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고향 땅을 밟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이들이 하루빨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진정한 부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 _ 허현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미래를 위한 찬양

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는 정기적으로 밴드 미사 형태의 찬양 미사인 ‘발걸음 미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더 많은 이와 함께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왔고, 지난해부터는 ‘찾아가는 발걸음 미사’라는 이름으로 교구 본당과 단체의 신청을 받아 직접 찾아가 찬양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매년 초 신청을 받아 선착순으로 본당을 방문하는데, 접수가 빠르게 마감되는 모습을 보며 ‘각 본당에서 찬양 미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큼 준비에도 더욱 정성을 기울이게 됩니다. 특히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미사 요청이 많아, 교회의 미래인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10여 명의 봉사자들은 아이들과의 찬양 미사를 위해 각자 연습하고 함께 합을 맞춥니다. 기다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준비 과정에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은 ‘평소 K-팝을 듣는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만족할 수 있을까’ 입니다. 선곡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입니다. 찬양 미사 당일에는 아침 일찍 모여 음향 장비를 싣고 본당으로 향합니다. 현장에서 장비를 세팅하고 리허설을 진행합니다. 매번 환경이 달라 변수가 생기기도 하지만, 리허설을 마치면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립니다. 한 번은 주일학교 교사들의 요청으로 교사들이 좋아했던 성가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응은 기대와 달리 차가웠습니다. 그 일을 통해 ‘아이들의 미사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무대 앞에서 아이들의 표정을 바라보다 보면, 어른들도 함께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후에는 아이들이 따라 부르기 쉽게 구성이 간결하고 반복이 많은 곡으로 준비해 봤습니다. 몇 번의 연습만으로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떨리는 준비의 시간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아침부터 흘린 땀의 피로도 어느새 잊히곤 합니다. 간혹 본당에서는 “아이들이 새로운 노래를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익숙한 곡 위주로 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SNS 릴스를 통해 대중음악을 빠르게 익히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과연 아이들이 새로운 노래에 약한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곡들을 듣다 보면 성가책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성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성가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들과 함께 찬양할 사도들도 더 필요합니다. 동시에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성가가 창작되고,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대가 변해도 아이들의 교회를 위해 어른들이 먼저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 _ 장영환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연주분과장)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찬양의 힘

수원교구 대건청소년회 산하에 ‘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이하 수찬협)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20대 초반, 연주자를 모집한다는 주보 광고를 보고 지원했던 게 어느덧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수찬협은 가장 큰 연중행사인 ‘창작성가제’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매년 초 전국 신자분들의 신청을 받고 예선을 거쳐, 8월 중 본선 대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매년 새로 발표되는 10여 곡의 무대를 위해 참가자들은 곡을 쓰고 연습하며 6개월 이상의 시간을 준비합니다. 다양한 나이와 개성의 개인 혹은 단체가 무대에 오릅니다. 본당에서 성가대를 하던 분들도 있고, 음악을 전공한 분들도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태어나 처음 쓴 곡을 들고나오는 분도 계시고, 함께 찬양하고 싶은 이들이 모여 곡을 받아 무대에 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이 처음 모이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겠지”, “내가 제일 못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물론 순위를 나누고 시상이 있는 대회이긴 하지만, 10여 년을 지켜보면 전공자이거나 무대 경험이 많은 분도 긴장해 실수하기도 하고, 반대로 연습을 많이 한 분들이 본선 무대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 입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본선 무대에는 화려한 조명과 음향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작은 부분도 잘 드러납니다. 여기에 유튜브 생중계까지 더해지지만, 참가자들을 보며 느끼는 건 많은 사람 앞에서 찬양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성가가 발표된다는 사실 자체가 온 마음을 다해 준비한 이들에게 기쁨이 된다는 점입니다. 성가제가 끝난 뒤 참가자들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에 실망한 표정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입상 여부와 상관없이 사진을 찍으며 기쁘게 웃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대회가 끝난 뒤 전해 듣는 참가자들의 뒷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적지 않습니다. 성가제를 준비하며 본당이 활성화됐다거나, 개인의 신앙생활에 변화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습니다. 처음에는 저 역시 새로운 성가가 나온다는 점에만 집중했지만, 주님께서는 이 대회를 통해 참가자 개인을 넘어 그 가족과 본당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저희 수찬협은 참가자들의 후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수용해 규정과 과정, 심사 기준 등을 보완합니다. 또한 참가자들의 찬양 열정에 부응하는 결과를 만들고, 매년 더 나은 성가 축제를 위해 조금씩 수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여름에도 새로운 성가로 풀어낸 참가자들의 신앙 이야기와 찬양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지 기대해 보면 어떨까요? 올해로 19회를 맞이하는 ‘수원교구 창작 성가제.’ 역대 발표된 창작 성가는 유튜브 채널 ‘대건 미디어’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글 _ 장영환 요한 세례자(수원교구 찬양사도협의회 연주분과장)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나무야 부탁해”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창세 2,15)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뿜어냅니다. 나무 전체 무게의 50% 정도는 탄소입니다. 수령 10년 이하의 어린 나무는 연간 10kg 정도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합니다. 수령 40년 이하의 나무는 연간 20kg 내외, 40년 이상 수령의 큰 나무는 연간 20∼40kg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합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많은 양의 탄소를 흡수하는 나무는 공동의 집인 지구 생태계와 인류에게 소중한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40년 이상 된 큰 나무가 흡수하는 탄소량을 내연기관 차량의 탄소 배출량(약 2500kg)과 비교해 보면, 큰 나무 약 125그루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보면 생각보다 흡수 효과가 크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숲 전체를 바라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45∼65%의 탄소를 저장합니다. 낙엽층이 약 10∼15%를, 토양을 이루는 유기물이 30∼50%의 탄소를 저장합니다. 숲의 탄소 절반은 토양 위로 드러난 나무가 아니라 땅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많은 양의 당류를 만들어서 양분으로 사용합니다. 이중 50% 정도의 당류가 뿌리로 내려갑니다. 대략 1m 깊이의 흙속으로 뻗어 내려간 나무의 뿌리는 햇볕을 볼 수 없는 미생물과 접촉을 하고, 광합성을 통해 얻은 당류를 미생물에게 나눠줍니다. 광합성을 할 수 없는 미생물은 나무의 뿌리와 접촉을 하며 당류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미생물은 자신들이 받은 당류보다 훨씬 더 많은 무기질 영양소를 나무와 나눕니다. 서로 공생을 합니다. 나무는 탄소를 흡수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토양을 살아 숨 쉬게 하고, 숲을 건강하게 만들어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듭니다. 공동의 집 지구 생태계의 생명력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따라서 기존의 숲을 잘 보존하는 것과 함께 꾸준하게 새로운 나무를 심어 숲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구 생태환경위원회는 지난 4년 동안 어농성지와 미리내성지에서 ‘나무야 부탁해’ 나무 심기 행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올해는 3월 28일에 미리내성지에서 행사를 진행합니다. 참여한 이들은 자신이 심은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기후위기 완화에 도움을 주고, 많은 새와 짐승, 미생물이 함께 사는 숲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을 확인합니다. 교구 내 여러 본당의 주일학교에서 은총 시장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나무 심기 기금을 후원하고 참여합니다. ‘나무야 부탁해’를 통해 매년 200∼300그루의 묘목을 심으면서 참가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나무가 숲을 이루고 지구 생태계에 큰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동들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올해 3월 미리내 성지에서 열리는 ‘나무야 부탁해’ 행사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비롯한 많은 신자분들을 초대합니다. 글 _ 양기석 스테파노 신부(수원교구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청소년들이 행복한 신앙인의 길로 가는 길

본당 신부 생활 중 느꼈던, 어렵고 아쉬웠던 점들이 대리구청에 부임한 이후 여러 부분에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청소년 견진 캠프입니다. 주임 신부님 혼자 계신 본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을 시기가 된 학생들을 위해 견진교리를 따로 준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방법이, 1년 동안 주일학교 교리에 몇 번 이상 빠지지 않으면 견진교리를 이수한 것으로 인정해 준다거나, 아니면 성인 견진교리반에 억지로 앉혀 놓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견진성사를 받을 때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성사를 받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성장하는 시기인 청소년기에 영적으로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견진성사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성사의 의미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받게 된다면 자칫 그 의미가 퇴색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해소하고자 시작한 청소년 견진 캠프가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이했습니다. 15개 본당 103명의 학생과 함께한 2박3일 간의 이번 캠프에는, 학생들이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거창하고도 원대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캠프를 거듭할수록 ‘과연 누가 누구를 성장시키고 도와주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웠습니다. 처음 만난 친구들을 배려할 줄 알았고 선생님께 감사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어른인 저보다 더 나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학생들을 통해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고, 저 역시 잠시 잊고 지냈던 정체성, 곧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겼습니다. 이제 견진 캠프를 통해 희망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학생들이 더욱 행복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에 대해 교리적으로 분명한 대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막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견진성사를 통해 밝고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힘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견진성사를 통해 받은 성령의 은총으로 가정과 학교, 성당에서 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고, 더 나아가 그 사랑을 이웃에게 돌려줄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것이 세상이 가르치는 성공보다 훨씬 더 귀하고 행복한 것임을 깨닫는, 밝고 빛나는 사람이 되어 행복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쟁을 부추기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쳐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기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가기보다, 신앙생활로 인해 자주 웃고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관심을 가지며 이웃에게 눈길을 돌릴 줄 아는, 그런 행복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글 _ 이규성 요셉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청소년2국장)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커튼콜, 그리고 나의 일상에 다시 켜진 조명

객석을 가득 채웠던 환호와 박수 소리가 잦아들고, 무대를 뜨겁게 비추던 화려한 조명이 꺼집니다. 땀과 눈물, 그리고 붉은 피 분장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어내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거울 앞에 서면, 그곳에는 인류의 죄를 짊어졌던 비장한 표정의 ‘예수’ 대신 평범한 청년 김승현이 서 있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텅 빈 극장을 나설 때 느껴지는 묘한 공허함은 배우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지만, 저에게 이 순간은 단순한 공허함이 아닌 또 다른 무거운 비장함으로 다가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기도로 깨어있던 겟세마니 동산이 아닌, 경적 난무하는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으로 출근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인류를 구원하겠다며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던 제가, 오늘은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끼어드는 차에 짜증을 내거나, 직장 상사의 부당한 꾸지람에, 속으로 거친 불평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갈 때마다 저는 화들짝 놀라며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집니다. “무대 위에서는 너를 팔아넘긴 유다 이스가리옷의 배신조차 눈물로 용서했던 네가, 고작 현실의 작은 불편함 하나를 견디지 못하는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거룩함이 일상의 거룩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연기는 그저 관객을 속이고 나 자신마저 속인 위선적인 ‘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앗숨도미네에서 배운 신앙의 정점은 화려한 커튼콜의 갈채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박수 쳐주지 않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 무대에서 체득한 사랑을 얼마나 치열하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자처했다면, 삭막한 직장과 사회에서도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날카로운 상처가 아닌 부드러운 위로가 되도록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술가는 무대 위에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지만, 신앙인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단 하나의 명작으로 빚어내야 합니다. 비록 무대 위 물리적인 조명은 꺼졌지만, 내 삶이라는 무대에는 하느님이 비추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핀 조명이 항상 켜져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하느님께 캐스팅된 주인공들입니다. 대본은 이미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손에 쥐어져 있고, 연출가이신 그분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사랑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오늘도 저는 일상이라는 거대한 연습실에서 ‘사랑’이라는 대사를 읊고, ‘봉사’라는 몸짓을 연습합니다. 비록 나를 향한 환호와 박수는 없지만, 가장 위대한 관객이신 하느님께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계심을 알기에 저는 멈출 수 없습니다. 이 공연은 단기 공연으로 끝나지 않는, 내 생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 ‘롱런(Long-run)’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공연은 끝났지만, 우리의 진짜 무대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계속됩니다. “자, 이제 당신의 삶이라는 막을 올릴 시간입니다.” 글 _ 김승현 대건 안드레아(앗숨도미네 단원)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3면

[현장에서 만난 복음] “넌 왜 먹지 말라는 걸 자꾸 먹니?”

이주사목위원회에서 운영 중인 공부방에 얼마 전, 난민 가정의 두 아이가 들어왔다. 초등학생 나이의 두 자매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왔고, 자연히 이슬람 교리를 배우며 자랐다. 공부방을 담당하시는 수녀님은 종교와 관계없이 이주민과 난민들의 자녀들을 받아들이고 보살펴주신다. 물론 각자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신다. 그래서 공부방 아이들의 간식을 준비할 때는, 그 두 자매를 위해 이슬람 문화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따로 준비하고 아이들에게도 그것이 차별이 아닌 배려임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공부방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이가 많은 언니는 수녀님의 배려대로 따로 준비된 간식만을 먹지만, 어린 동생은 늘 다른 친구들이 먹는 간식에 호기심을 느끼며 먹고 싶어 한다고 한다. 언니가 먹지 말라고 말려도 기어코 맛을 본다고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교육으로 금지된 것에 대한 반항. 나는 친구들의 음식을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빛을 상상하며 미소 짓게 된다. 그것은 단지 어린아이의 분별력 부족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가장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요즘 뉴스를 통해 신정 체제 국가인 이란에서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MZ세대 청년층의 저항이 반체제 시위를 이끌고 있고, 여전히 보수적·종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경제적 위기로 촉발된 시위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종교가 사회체제와 문화를 통제하는 것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시대적 흐름임을 새삼 느낀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모두 이념과 종교, 이익다툼으로 벌어진다. 어떠한 이유에서 갈등이 생겨나든 우리는 한쪽에 서길 강요받고 또 어느 한편을 선택하고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인간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설 목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인간이 맞서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닌 절대 악이다. 종교마다 ‘그른 것(옳지 못한 것)’에 대해 가르치지만, 그것을 절대 악과 꼭 동일시할 순 없다. 오히려 문화와 전통을 배제하고 숙고해보면 우리가 ‘악’이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그름’의 문제에 대한 시각은 달라진다. 때로는 국적과 인종, 세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에 비추어 ‘옳고’ ‘그름’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도 ‘그름’이라고 생각하는 문제 또한 교회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숙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가톨릭교회에서 윤리로 가르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성적 합의에 우선하여 신앙의 눈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단지 그 의무와 기준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단죄와 배척은 결코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 (예수님께서)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3-28) 글 _ 이상협 그레고리오 신부(수원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3면

[예술로 빚은 신앙] 함께 맞춘 호흡, 우리 모두는 그분의 도구일 뿐

앗숨도미네의 단원들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전문 배우들이 아닙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혹은 가정에서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평범한 아마추어들입니다. 퇴근 후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늦은 밤 연습실 문을 열 때면,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은 바로 극단의 이름이자 고백인 “Ad Sum, Domine(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정신입니다. “주님, 비록 지치고 부족하지만 당신을 위해 제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이 비장한 응답이 있기에 우리는 피로를 기도로 승화시키며 수십 번 반복되는 고된 연습을 기쁘게 견뎌냅니다. 서로의 눈빛을 읽고 감정을 주고받는 ‘연기의 호흡’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기적입니다. 누군가 대사를 놓쳐 당황하면 상대 배우가 깊은 눈빛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그 빈틈을 채워주고, 격한 감정에 호흡이 흔들리는 동료를 위해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템포를 맞춰 기다려줍니다. 나 혼자 돋보이기 위해 감정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대사를 온전히 듣고 반응하기 위해 나의 호흡을 조절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배운 ‘공동체 기도’의 본질입니다. 공연 시작 5분 전, 모든 조명이 꺼진 암흑 같은 백스테이지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경당으로 변합니다. 직업도, 나이도, 배역도 다른 우리 모두가 서로의 차가운 손을 맞잡고 둥글게 모여 섭니다. 떨리는 침묵 속에서 바치는 간절한 화살기도는 그 어떤 장엄한 대성당의 미사보다 뜨겁습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드러나소서.”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주인공은 없으며, 하느님이라는 위대한 연출가 아래 모인 겸손한 일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막이 오르고 핀 조명이 나를 비추는 순간, 무대 뒤의 떨림은 사라지고 기이한 평온이 찾아옵니다. 이때부터 나는 내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내가 내뱉는 대사가 나의 목소리가 아닌 그분의 음성으로 관객들의 귀에 닿기를, 나의 눈물이 그분의 슬픔으로 그들의 가슴에 스며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연기합니다. 나는 그저 비워진 그릇이며, 그 안을 채우고 흘러넘쳐 객석으로 향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무대 위의 모든 막이 내리고, 화려했던 조명도 꺼질 시간입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커튼콜의 박수 소리가 잦아든 후, 분장실의 거울 앞에 선 한 인간의 모습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무대를 내려온 예수는 과연 어떤 얼굴로 일상이라는 진짜 세상과 마주하게 될까요? 글 _ 김승현 대건 안드레아(앗숨도미네 단원)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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