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진심’으로 걷는 길

평창에 있는 성필립보생태마을에 있을 때, 둥그렇고 포근한 모양새가 매력적인 산을 멀리서만 바라보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산자락에 발을 내디딘 적이 있었습니다. 험난한 산길에 멀리서 보았을 때의 포근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제 발길은 어느새 다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제 삶에 또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너무나 따듯하고 매력적이어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예비 신학생 기간 6년, 신학생으로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포근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져 꼭 한 번 그 뒤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되새기곤 했습니다. 기어코 그날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포근함에 감추어진 험난한 그 길에 올라설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날에 저는 훈련병처럼 큰 소리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해 버렸습니다. 둥글둥글한 산과는 다르게 여기는 하산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바다에 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는 이게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었고, 잠깐의 분심에 미사 경문을 잘못 읽었을 때에는 식은땀이 줄줄 났습니다. 강론은 제 삶과 다르게 너무나 거룩해서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해야 할 기도는 왜 이렇게 많고 귀찮은지 의무감에 꾸역꾸역 바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감동받았다고 저를 치켜세워주시는 신자분들을 만날 때면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적응이 될 무렵 다가오는 인사이동은 저를 항상 미궁에 몰아넣는 것 같았습니다. 말도 느리고 행동도 느린 저로서는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이 참 고역이었습니다. 이제야 적응이 된 것 같은데, 새로운 곳에서 내가 복음을 잘 전할 수는 있는지, 새로운 곳에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지 매번 걱정, 또 걱정했습니다.(신부님마다 다릅니다.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만약 부르심의 길이 등산이었다면, 저는 진작에 하산했을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를 너무나 아껴주시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과 제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마음이 진심이면 되지 않을까요?’ 정답을 주려 하지 말고 진심을 주는 것, 이것이 사제에게 필요한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마음을 다하는 것만큼 중요한 자세도 없는데 저는 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한 걸음을 걷더라도 진심을 다해 걷는다면, 주님께는 충분한 봉헌 제물일 것입니다. 느리더라도 진중한 한 걸음, 그 순간이 저에게 가장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 대단한 것을 이루려는 마음보다 진심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는 성실한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 13,33)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3면

[신앙에세이]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

신앙은 때때로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끕니다. 저는 충남 금산의 시골 마을에서 소아마비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의사의 꿈을 키웠지만, 집안 형편으로 대전의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습니다. 낯선 도시와 환경 속에서 불량배들의 괴롭힘을 받으며 하루하루가 힘겨웠습니다. 삶의 벽 앞에서 답답함과 절망이 밀려왔던 어느 날, 저는 산꼭대기에 올라 눈물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멀리 붉게 빛나는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그 빛은 한 줄기 희망처럼 다가왔고, 저는 용기를 내어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를 괴롭히던 불량배들이 이미 그 교회의 신도였습니다. 당황스럽고 두려웠지만, 예배당의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이 경험은 제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신앙은 제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선사했습니다. 더욱 깊어진 신앙 속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여건으로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더욱 제 안에서 단단히 뿌리내렸고, 성당에서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다시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저는 또 다른 중요한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교도소 봉사였습니다. 재소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26년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의 모든 순간은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이었습니다. 불확실하고 힘겨운 시간을 겪으면서 신앙 안에서 진정한 위로를 얻었고,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시골 작은 본당에서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모든 여정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큰 축복이 있었습니다. 국제구호기구 (사)꿈나눔재단의 설립입니다. 공익법인을 통해 체계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치고자 꿈나눔재단을 설립하였고, 그 재단은 나눔의 손길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제게 축복이었습니다. 이제 그 축복을 나누며, 방황하는 이들에게 작은 빛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는 모든 순간이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더 큰 사랑을 배우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글 _ 신원건 대건 안드레아(사단법인 꿈나눔재단 이사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3면

[밀알 하나] 죽음의 열매

길에 떨어진 벚꽃잎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무 위에서는 보송보송한 느낌과 새하얀 그 색감이 아름다웠다면, 바닥에서는 켜켜이 쌓여 농축된 색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떨어진 그 잎들은 썩어 없어지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하늘을 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늘을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땅에 떨어져도 이쁜데, 떨어지기 전에 더 많이 구경할걸 그랬네….’ 벚꽃은 두 번 피는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서 숭고하게 살아온 이들은 살아생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간다움을 피워내고, 남긴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의 삶에 흔적을 남겨 또 다른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이들은 죽음 이후 그의 말과 행적이 재조명되고 그에 대한 향수가 더해져 많은 이들에게 끊임없는 영향력을 미칩니다. 정말로 훌륭한 이들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용기와 열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숭고한 가치를 몸소 실천한 이들은 죽어서도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희망을 놓지 않았을 때, 헛된 욕망에서 죽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칙 「복음의 기쁨」 마지막에서 이런 기도를 바치십니다. “부활의 새로운 열정을 저희에게 주시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복음을 모든 이에게 전하게 하시고 새로운 길을 찾는 거룩한 용기를 주시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움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다다를 수 있게 하소서.”(288항) 교황님은 자신이 했던 수많은 말들에 갇히지 않고 실천으로 그 말들을 세상에 심어주셨습니다. 이 기도문처럼 교황님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움의 은총을 죽음 이후에도 전해주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남긴 메시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해묵은 논쟁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가난한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고, 그곳에서 온몸으로 사랑과 평화, 위로와 치유를 전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그 어떤 지도자, 높은 사람도 보여주지 못한 일치와 평화를 온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지나간 자리들을 다시 살펴보며 그분의 행적이 나의 삶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사랑과 평화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민만 하다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지 않기 위해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인류에게 복음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3면

[신앙에세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에 대하여 짧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이 주제는 짤막하게 다루기에는 나에게 너무나 크고 무거운 거대 담론이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간단치 않을 뿐 아니라, 이를 실천하고 결실을 보는 것은 너무 어려워 보여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핵심 본질을 피해서 사랑을 말할 수는 없으니 어렵지만 솔직한 고백을 해보기로 하였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봤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시면서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코린토 13,4-7) 또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5,44)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쉽게 자주 언급하며 주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이와 같은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일상의 기도 속에서도 습관처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해주세요’라고 청하지만, 진지함이 부족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 어찌하여 이렇게도 가혹한 계명을 선포하셨나이까!” 무력감이 몰려오는 순간이다. 사랑! 그것은 우리가 가깝게 두기엔 너무나 어렵고 감내해야 할 고통 그 자체로만 느껴진다. 주님의 명령에 ‘못하겠습니다’라고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순명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묵상하던 중 다시 힘을 내라는 주님의 말씀을 보게 됐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고 하신 말씀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임을 약속하신 그 말씀은 나에게 위로와 희망이 됐다. 지금은 비록 사랑의 계명이 어렵게만 느껴지겠지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힘이 되어주신다면 그 길은 고통만이 아닌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다.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말을 존중하고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그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희망과 편안함을 주어야 함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배우게 된다. 또한, 가장 큰 사랑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며, 하느님을 알 때 내가 그분 안에 머물고, 그 분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며 그 사랑이 완성된다는 진리를 함께 깨닫게 된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다시 평온을 찾으며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저는 지금 위대하지도 않고, 과감한 희생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언제나 주님이 약속하신 사랑의 깃발을 보고 향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그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기도하며 깨어있게 하소서!” 글 _ 장지원 막달레나(수원가톨릭오르가니스트협회 회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3면

[밀알 하나] 벚꽃을 못 봤는데요?

벚꽃 사진도 못 찍었는데 비바람이 불어서 서운하신 적 있나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벚꽃을 못 본 사실이 이번 한 해를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서면, 우리는 지나간 순간이 아닌 지금에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곡우(穀雨)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봄비는 우리가 놓치고 싶지 않은 벚꽃보다 훨씬 더 소중합니다.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라는 절기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힘들 때마다 되새기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에서 나오는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에어콘 바람, 히터 바람, 선풍기 바람이 아닌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을 천천히 마주하고 느꼈을 때 저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조금 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바람은 너무나 차가워서 쓰리고 아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바람은 너무나 뜨거워서 짜증나고 힘들기도 합니다. 어떤 바람은 너무 시원해서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떤 바람은 너무 포근해서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나의 기호에 따라 그 바람이 좋은 바람인지 나쁜 바람인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바람에 따라 곡물이 자라고 대지가 풍요로워지는 것을 바라보면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음을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그 바람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답답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그 바람이 지금 내 곁을 지나가고 있음을 되새깁니다. 살다 보면 미련이 남고 후회가 생길 수도 있고 지금에 만족하지 못할 때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머무르는 이곳은 우리에게 언제나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충만한 의미를 주시는 하느님을 기다리며 넓은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간다면 모든 순간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울까요? 벚꽃을 제대로 못 보았다고, 일확천금의 기회를 놓쳤다고 슬퍼하지 맙시다. 아쉬워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은 넘치기 때문입니다. 비바람이 불고 난 자리에 올라온 희미한 초록색 잎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마치 나무들이 봄바람을 환영하기 위해 기립박수를 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조용한 나무들이 온몸으로 계절을 표현하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모든 자연의 풍경은 머무를수록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자연의 흐름 안에서 그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도 언제나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글 _ 김영복 리카르도 신부(2027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 부국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3면

[신앙에세이] 믿음이란 무엇인가

오르간을 교육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된다. 오르간 전공을 원하는 학생부터 취미로 배우는 분들도 있지만, 악기 특성상 성당에서 미사 시간에 성가 반주를 하고 있고, 또 이들과 같이 할 수 있기를 꿈꾸며 열심히 배우는 자매님들이 많다. 그리고 이 분들은 대부분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는 것은 물론 수업과 연습에 열정을 투자하며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각자 배우게 된 동기도 다양하지만,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한 분은 80세가 넘으신 자매님이다. 고령의 연세에도 그 어려운 건반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하셨고, 죽는 날까지 배우며 주님께 봉헌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뵐 때면 오르간을 전공한 나로서도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날 레슨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전부터 신기하게 여기던 이 현상(?)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해봤다. “무엇이 이 분들을 이렇게 열심으로 이끄는 것일까? 전문 음악가들처럼 멋진 무대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도 아닐 텐데, 무엇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집중하는 것일까?” 고민과 묵상 끝에 그 현상의 근원이 바로 그들의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 있고, 그 모습은 믿음의 발현이 열정으로 표현된 결과였음을 느꼈다. 믿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평생을 두고 신앙의 여정 속에서 계속 점검하며 완성해야 하는 신자들의 ‘핵심 덕목’ 아닌가. 그런데 이 분들은 그 믿음을 자신의 열정으로 가득 찬 성가 반주를 통해 묵묵히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4-26 참조)이라고 단호히 말씀하신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의 지적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실천으로 입증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저 인간의 관념 속에만 있는 것은 허무할 뿐이며, 그 믿음은 실천으로 완성해야 하는 것임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동안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이 범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어떤 거창하고 그럴듯한 선행 수준으로만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은 그동안 나의 실천을 더 어렵게 만들며 관념 속에서만 머무르는 오류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한 작은 봉헌이라도 실행 한다면 그것은 나만의 실천이 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됐다. 그분들의 진심어린 성가 반주 소리가 자신들에게는 믿음의 실천이면서 어떤 이에게는 눈물의 멜로디 또는 주님의 음성으로 다가오는 은총의 선물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나의 작은 정성으로 하루하루 해나가는 수업이 그 과정에 일조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글 _ 장지원 마리아 막달레나(수원가톨릭오르가니스트협회 회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3면

[신앙에세이]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종종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거의 모든 일상이 바로 이 행복을 위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적을 여기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열심히 일하는 것, 친구나 지인을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봉사하는 일까지 결국은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서 크나큰 비중을 차지하는 ‘행복’에 대하여 나는 지금까지 너무 모호하게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지나친 게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행복에 대하여 ChatGPT에게 물어보았다. 행복은 ‘내면의 평화와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AI는 정의하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어떤 이는 성취감이나 목표를 이루는 경험 등 각자 다른 방법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뭔가 불편한 말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던 행복이 ‘감정의 순간’이라는 것이다. 순간이라면 지속적이지 않다는 의미. 그렇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행복의 개념은 바로 지속적이지 않은 감정의 상태라는 것이다. “아…, 행복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우리의 방향이 그저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인가?”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행복했다고 하는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좋은 자동차를 샀을 때, 경품에 당첨되었을 때 등 최고조 기쁨의 순간들도 그 감정은 계속되지 않았고, 얼마 후에는 원래의 감정 상태로 되돌아왔다. 모든 경우가 다 그랬다. 진정한 행복이라는 건 없는 것일까? 행복과 관련한 책도 읽어보고, 인터넷도 찾아보았다.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조건으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 눈에 띄는 중요한 한 가지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좋은 관계를 추구하는 외향적 성향의 사람들이 행복감을 더 많이 느낀다고 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나는 다시 나의 일상을 살펴봤다. 그리고, 조용히 묵상하던 중 깨닫게 됐다. 행복은 바로 관계가 중요한 것,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지속 가능한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며, 남을 위한 희생과 사랑이 결국 자신에게도 진정한 행복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사랑의 실천이었고, 이를 본받아 우리는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며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깨달음과 함께 다가온 주님의 은총을 느끼며, 나는 오늘도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된다. “주님, 매일의 삶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글 _ 장지원 마리아 막달레나(수원가톨릭오르가니스트협회 회장)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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