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마태오복음 13장은 일곱 가지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인 ‘하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이라는 완전수에 담아내고 있지요. 씨 뿌리는 사람, 가라지,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상인, 그물과 같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비유로 제시함으로써,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겁니다. 그중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입니다.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자는 동안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내용이지요. 가라지와 하늘 나라는 어떤 의미와 연관성이 있는 걸까요? ‘가라지’로 번역하는 그리스어 ‘지자니온(ζιζάνιον)’은 생육 기간에는 밀과 생김이 흡사해 분간하기 매우 어려운 식물입니다. 또한 밀과 같은 계절에 열매가 익기 때문에, 추수 때 곡식이 섞이기는 더욱 쉽지요. 하지만 맛은 쓰기 때문에, 밀에 섞였을 경우 밀가루의 맛을 훼손한다고 하여 ‘독보리’라고도 불립니다.(김영숙, 「성경에 나오는 식물들」 참조) 복음에 의하면, 밀의 품질을 떨어뜨릴 가라지가 자라고 있으니, 종들은 그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그대로 두게 하지요. 종들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마태 13,29) 모를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만약 집주인이 질 좋은 밀을 얻으려고 했다면, 가라지는 그냥 뽑아 거두어 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복음은 그 점이 ‘하늘 나라’에 비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밀과 가라지. 복음서는 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라고 말씀하는 걸까요? 이 비유는 세상에 선과 악이 왜 항상 공존해야 하는지 묻게 합니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 걸까요? 거룩한 성교회 안에는 왜 여전히 위선과 죄인이 존재할까요? 왜 하느님께서는 그 죄악을 없애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실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만약 하느님께서 죄악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밀 또는 가라지‘만’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밀과 가라지가 모두 ‘함께’ 자라도록 하신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밀이 긍정성이라면 가라지는 부정성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부정성을 제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긍정적인 것만 보고 싶은 것이지요. 철학자 한병철은 「신에 관하여」에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부정성을 제거하려 드는 긍정성의 사회에서 산다”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은 세상을 마치 무균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부정성을 제거한 나머지 세상을 온통 매끄럽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보기 싫은 것은 아예 없애거나 안 보려고 하는 이러한 태도는 세상을 긍정성으로만 획일화시킵니다. 이를테면, 디지털화된 현대 사회는 타인의 저항을 줄이고 부정성이나 아픔을 일으킬 만한 맞수를 점점 더 사라지게 만들며, 끊임없는 ‘좋아요’로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거지요.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오히려 깨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 ‘깨짐’은 아픔이라는 부정성에 의해 발생하고요.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가라지의 비유는 부정성이 오히려 우리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성찰하게 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 내면의 가라지를 발견했을 때, 비록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것 때문에 시련을 겪을지라도,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하느님이 왜 가라지를 밀과 함께 자라도록 하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밀과 가라지를 모아들일지, 거두어서 태워 버릴지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확 때, 곧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나의 가라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우리를 당장 거두시지 않는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 투성이인 나와 너, 우리지만, 모두 ‘함께’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신비입니다. 글 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이사 55,10-11 / 제2독서 로마 8,18-23 / 복음 마태 13,1-23 어느 건축가가 지인의 배려로 박물관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장고에는 아직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은 많은 작품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둘러보다가 낯설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필체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명필이라 할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시되지 않고 이 수장고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친일파이자 매국노라 불리는 이완용이 쓴 글이라 전시 불가라고 합니다. 이완용은 실제로 당대 최고의 명필 중 한 명으로 꼽혔습니다. 특히 물 흐르듯 쓰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에 매우 능했습니다. 이렇게 글을 잘 쓰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충분히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그 죄가 너무 커서 모든 노력 자체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위대한 일을 많이 남겼어도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죄인의 삶을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어떨까요? 세상 안에서 남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관한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사실 땅을 먼저 갈고 씨를 뿌리는 우리의 농사 방법과 달리, 이스라엘 지역의 농사는 씨를 먼저 흩뿌린 뒤에 땅을 갈아엎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에 나오듯이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까지 씨앗이 날아가도록 놔두는 농부는 없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낭비이고, 따라서 실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온 세상에 말씀의 씨앗을 던지시는 하느님의 무한하고 관대한 사랑을 상징합니다. 먼저 길가는 수많은 발길에 짓밟혀 단단하게 굳어버린 길입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이나 세상의 논리로 굳어버려 말씀이 한치도 스며들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돌밭은 겉으로는 흙이 있어 보이나, 그 밑에는 단단한 돌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동요나 위로를 구할 때는 기쁘게 말씀을 받지만,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할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뿌리가 없어 이내 말라 버립니다. 가시덤불은 흙도 깊고 뿌리도 내렸지만, 주변의 가시덤불이 햇빛과 양분을 가로챕니다. 세상의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더 커서 영적 질식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마지막은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넘어 자기 삶의 실존적 결단으로 깨닫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수확량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비옥한 땅만 골라서 씨를 뿌리지 않으십니다. 굳어버린 길가 같은 내 마음, 얕은 돌밭 같은 내 결심, 걱정과 욕심으로 가득 찬 가시덤불 같은 내 영혼에도 끊임없이, 때로는 바보 같을 정도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혹시 자기조차 포기한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정작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 안에 길가,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의 모습이 모두 있습니다. 어제는 돌밭이었어도 오늘 쟁기질을 열심히 하고 돌을 골라내면 충분히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 13,8)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때, 뿌린 씨의 4~5배 정도 거두면 평년작이고, 7~10배 정도 거두면 대풍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백 배, 예순 배의 수치는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풍요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씨앗의 4분의 3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져 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좋은 땅에 떨어진 4분의 1의 씨앗이 모든 실패와 낭비를 덮고도 남을 승리를 거둔다는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길이 험난하고 세상의 유혹이 가득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18면

[말씀묵상]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2026년 1월 15일자)는 Open Doors의 2026년 보고서를 인용하며, 전 세계 약 3억880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박해나 차별을 겪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박해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동시에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옥중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그는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열아홉 번째 서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거룩한 이름을 증언할 힘을 청하였습니다.(스무 번째 서한)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는 결국 ‘예수님의 이름을 포기하라’는 강요였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는 그분의 이름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였다”(사도 5,41 참조)라고 전합니다. 순교자들은 참으로 “당신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시편 119,132 참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와 사명, 권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복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는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박해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오로를 두고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오로는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될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습니다”(사도 21,13 참조)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가 죽임을 당합니다. 비록 예수님의 이름을 알기 이전 시대의 인물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그는 구약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3)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힘도 결국 하느님께 대한 희망에서 나왔습니다. 화답송에서는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제 목숨을 당신 손에 맡기니”(시편 31,4-6 참조)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시편의 기도자는 ‘하느님의 이름 때문에’ 보호와 인도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박해의 이유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의 힘과 희망의 원천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곧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비록 순교의 칼날 앞에 서 있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더 내어주며, 먼저 용서하고, 평화와 희망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는 용기입니다. 끝까지 그분의 이름을 붙드는 이에게 주님은 반드시 구원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오늘은 교회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교회의 일치와 보편적 사명을 되새기는 ‘교황 주일’(연중 제1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온전한 봉헌’,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파견된 이들을 기꺼이 맞아들이는 복음의 환대’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으로 가장한 불의에 타협을 요구하고, 자아의 확장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제2독서), 가장 소중한 가족 관계마저 주님의 사랑 아래 두며(복음), 하느님의 사람을 위해 내 삶의 한 자리를 내어주라(제1독서)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수넴의 한 부유한 여인은 엘리사 예언자를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합니다. 소박하지만 정성 어린 환대는 ‘생명의 잉태’라는 축복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그들이 겪을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셨지만, 동시에 그들을 환대하는 이들이 받을 상급을 선언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는 위로를, 신자들에게는 예언자들을 돌볼 거룩한 의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오늘, 이 환대의 영성은 교회의 가시적 일치의 중심이신 교황님과 복음화 현장에서 피 흘리며 헌신하는 목자들을 향한 우리의 기도로 확장됩니다.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내 삶에 임금으로 모시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는 말씀에서 ‘~보다 더 사랑하다’라는 표현은 감정적인 미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사명 앞에서 마주하는 ‘선택의 절대적 우선순위’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제자직의 정점을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고 하십니다. 당시 로마 제국 체제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한 삶의 무거운 고뇌를 뜻하는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반역자로 처형당하는 자가 겪는 극도의 수치와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히 단절됨을 뜻하는, 생생하고도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세상의 명예를 모두 버리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해야 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길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결합됐고,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됐다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복음 말씀대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이유는, 내 안에 내 힘으로 살아가는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안에 사시는 분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갈라 2,20 참조)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내면에서 이뤄지는 영적 전쟁과 성전 건립의 차원으로 승화시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요구하신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 또한 ‘내면의 애착으로부터의 정화’를 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보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가족에 대한 집착, 내 영적 위로를 더 사랑할 때, 마음은 소란스러워지고 영혼의 눈은 어두워집니다. 마음의 성전에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임금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영혼은 온갖 잡념과 정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중대한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자아와 인간적 애착이라는 낮은 땅에 갇혀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며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을 향해 고고히 피어나는 새 생명의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오늘 교황 주일을 지내며 보편교회의 목자이신 교황님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파견된 모든 작은 이들을 환대하는 따뜻한 손길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의 자리에서 문득문득 찾아오는 염려와 집착의 순간마다 마음의 성전으로 들어가 가만히 예수님께 기도를 바치며 내면의 등잔불을 밝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드님, 제 마음의 주인이 되어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되고, 우리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풍요로운 생명의 기적을 목격하는 행복한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2주일

‘파견 설교’라고도 불리는 오늘 복음의 골자는, 너희가 제자가 된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마태 10,32 참조)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마태 10,26)인 까닭이지요. 그분이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숨긴다고 숨겨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고, 진리는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 마태오 복음이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아포칼립토’(ἀποκαλύπτω)입니다. 이는 함께하는 단어 앞에 붙어서 ‘~으로부터’ 또는 ‘~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다는 의미를 강화하는 전치사 ‘아포’(ἀπό)와 ‘덮거나 감추다’라는 뜻을 가진 ‘칼립토’(καλύπτω)가 합쳐진 말이지요. 직역하면 ‘덮어진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니, 결국은 감추어진 것이 밖으로 환히 드러난다는 뜻이 됩니다. 아포칼립토는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하신 말씀에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드러나게(아포칼립토)’ 하는 주체가 성자 예수님이 아니라 성부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숨어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직접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느님의 ‘자기 계시(revelatio)’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시는 걸까요? 그것은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주심으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계시헌장」(Dei Verbum) 2항 참조)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는 계시 진리를 통해 하느님을 뵙고(visio Dei)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하느님 본성에 참여’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라고도 하였습니다.(「신학대전」 I-II, q.3, a.8) 계시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한, 만날 수밖에 없는 진리의 빛입니다. 인간은 그 빛으로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거지요. 계시는 항상 인간에게 ‘눈이 열리는 것’으로 체험됩니다. 이를테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루카 24,16)지요. 그러나 그분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루카 24,31)습니다. 예수님을 못 보던 이들이 다시 알아보게 된 건, 갑자기 또 다른 예수님이 새롭게 등장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아포칼립토가 말하는 하느님의 드러냄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우리 앞에 새로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눈이 열리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눈을 뜬다는 건 때때로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 자신의 나약함까지 고스란히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뜰수록 자기 환상은 무너지고, 꼭꼭 숨겨 두었던 상처가 드러납니다. 나의 위선은 그대로 폭로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던 나의 삶이 산산이 조각나는 과정을 겪게 되지요. 어쩌면 계시는 하느님을 바라보기에 앞서, 인간 실존의 나약함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숨겨왔던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죄의 경향성을 ‘드러내’ 주심으로써, 당신 사랑과 자비를 ‘계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이 드러날수록 그분의 자비 또한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사람들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첫째는 지금 여기, 둘째는 옆에 있는 사람, 셋째는 그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옆의 사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면서 내 옆에서 밀어냅니다. 다른 것이 더 좋다면서 밀어내기도 합니다. 또 나와 같지 않다고 밀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것들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본당 교우, 그밖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귀할까요? 지금 그 귀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먼 훗날에 그들이 내 옆에 있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님께서 주님 곁으로 가신 뒤에야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게 되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귀함을 보지 못했음에 후회하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고 시작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연민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지금 상처받고 억눌린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타락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율법의 무거운 짐만 지웠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착한 목자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그들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완벽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로마에 세금을 가져다 바치는 세리 마태오도 있었고, 로마에 무력으로 항거하던 민족주의자 열혈 당원 시몬도 함께 있었음을 봅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제자로 뽑으시고, 심지어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까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완벽한 의인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실패의 가능성까지 품고 있는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특히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잊어버리고, 대신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곤 합니다. 내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야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미니코회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하느님은 언제나 준비되어 계시지만,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준비됨을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에 있는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너는 하느님을 믿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매주 성당에 다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그러면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 사람은 더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고, 또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움직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주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영적 고전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의 저자인 월터 J. 취제크 신부님은 1940년 위장 이주노동자로 소련에 잠입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3년 만에 미국으로 귀환하기까지의 긴 세월 속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지 5년 만에 다시 드린 어느 날의 미사를 신부님은 잊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건포도로 만든 미사주와 부엌에서 간신히 구한 빵, 위스키 유리잔과 회중시계 뚜껑을 성작과 성반 대신 사용해 봉헌한 그 미사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강제노동 수용소라는,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짓밟히던 자리에서 이루어진 그 미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거룩한 양식이 그들의 참된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을 지탱한 힘은 더 많은 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게 해 준 성체였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히 생존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신앙을 형성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길러낸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우리는 살기 위해 매일 양식을 먹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성찬례에서 우리가 먹는 양식은 단순한 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마음과 삶의 방식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 양식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는 굶주림을 채우며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 갑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살과 피’는 성경에서 한 인간의 생명과 존재 전체를 뜻합니다.(마태 16,17; 1코린 15,50; 히브 2,14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그분의 생명 전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일상적인 빵과 동일시하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의 일상과 배고픔 속으로 들어오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빵을 매일 먹어야 하듯이, 성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그분과 점점 더 일치하게 됩니다. 성체는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화합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이 우리를 형성하듯이, 영적 양식인 성체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빵을 먹는 사람은 그분과의 친교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는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개인의 영적 성장 안에서 성체의 소중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동시에 공동체적으로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라도 한 몸입니다”(1코린 10,17)라는 진리 안에서 상호 일치와 친교의 형제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서로에게 형제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그 빵이 오늘 우리의 삶이 되게 합시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오늘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한 분 하느님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신비입니다. 삼위일체는 인간 이성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삼위일체를 단순히 ‘이해해야 할 어려운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느님의 삶’으로 가르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시나이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금송아지를 만들며 하느님을 배반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이는 구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먼저 전능함보다 자비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중심이 자비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씀하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라는 것은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이며 그리스도교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한 자연만이 아니라 때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 세계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입니다. 저는 얼마 전 교구에서 인공지능(AI)에 관련된 사제연수에 참여하여 AI에 대한 장점과 문제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영성과 가장 극한이 되는 물성의 끝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AI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빠릅니다.’ ‘물음에 답을 완성합니다.’ AI가 ‘인간의 뇌를 닮게 만들었다’ 해서 인공지능일 텐데, 현대의 바벨탑 곧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고 있는 신격 모사처럼 보였으며, 인간이 하느님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1만 년 동안 읽을 책의 단어를 48시간 만에 읽어댄다니, AI는 수학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인문학적 가치와 특히 신학적 가치로 검증하지 않으면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을 간파했습니다. 연수의 마지막 메시지는 AI와 대화하지 말고, 필요한 때만 도구처럼 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AI가 불가역적 사건이고, 기왕에 하느님을 닮으려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따랐으면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삼위일체의 성부께서는 성자를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닫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친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성부는 성자를 향하고, 성자는 성부께 응답하며, 성령은 그 사랑의 일치라고 설명합니다. 즉 삼위일체의 중심은 고독한 힘이 아니라 사랑 안의 관계입니다. 동방 교부들은 이것을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즉, 서로 안에 머무시는 사랑입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며, 성령은 그 사랑 안에서 일치하십니다. 삼위일체 안에는 경쟁도 없고, 지배도 없으며, 고립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기 증여와 완전한 사랑의 일치만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느님의 가장 깊은 뜻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지만 AI는 하느님의 뜻과 충분히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의 핵심을 다시 봅니다. 삼위일체는 혼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친교의 하느님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 연결하시는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주장만 하면 일치는 깨집니다. 그러나 서로 들어주고, 기다려 주고, 용서해 줄 때 사랑은 살아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워가는 공동체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때 흩어진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하나가 되고, 우리는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평화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18면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의 ‘고별사’(요한 13~16장)와 한 번의 ‘고별기도’(17장)를 남기셨습니다. 이때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요한 14,16) 보호자 성령을 약속해 주셨지요. 예수님의 고별사 안에서 보호자 성령에 대한 약속은 모두 네 번 등장합니다.(요한 14,16-17; 14,26; 15,26; 16,7-15) 복음서에서 ‘보호자’로 번역되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여기 옆으로(παρα) 오라고 살갑게 부르는(καλέω) 것을 뜻하는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에서 유래합니다. 당시 유다교 회당에서 추방당하거나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지내야 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곁에 머물러 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얼마나 큰 용기와 위안이 되었을까요.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셨지요. 그런 다음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별사를 통해 약속하셨던 보호자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성령’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라는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요한복음이 숨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로 사용한 그리스어는 ‘엠퓌사오(ἐμφυσαω)’입니다. 엠퓌사오는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곳에만 유일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그 유래나 성경의 다른 용례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어근에 해당하는 ‘퓌사오(φυσάω)’는 생명을 산출하고 자라게 한다는 뜻의 동사 ‘퓌오(φύω)’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숨을 불어넣는 것이 곧 생명을 움트게 하고 생장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엠퓌사오는 한 생명체가 자라나고 형성되기까지(φυσάω) 그 과정 안(ἐν)으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요. 엠퓌사오 곧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이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고 그들을 다시 살게 하셨다는 것이 충분히 표현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한 번 더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가리키는 단어는 ‘프네우마(πνεῦμα)’입니다. 프네우마는 창조 때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명의 숨’(창세 2,7)과 태초에 땅이 아직 꼴을 갖추기 전,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을 적에, 그 물 위를 감돌고 있던 ‘하느님의 영’(창세 1,2)을 가리킬 때 사용된 말이지요. 프네우마는 바람처럼 스며드는 하느님의 숨결로, 생명을 생명이도록 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생명체의 힘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내쉬는 숨이나 호흡과는 또 다른 차원의 숨결입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이 생명의 숨결로 말미암아 비로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숨만 쉰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듯 내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경우가 있지요. 제자들은 믿었던 스승 예수가 처참하게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살아갈 이유와 삶의 근거를 잃었습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스승을 배반한 죄책감과 온갖 두려움으로 순간순간 숨이 막혀 제대로 숨 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이 내쉬는 숨이라 해 봤자 온통 좌절의 한숨과 슬픔의 탄식뿐이었습니다. 꺼져가는 그들에게 숨통을 트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숨의 근원이신 생명의 숨뿐이었습니다. 생명의 숨, 그것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영, 그분의 숨결, 프네우마, 그 거룩한 성령이 우리의 숨구멍을 통해 들어옵니다. 성령은 우리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희망의 숨결로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가 숨 쉬는 한, 우리는 그분 사랑의 숨결인 성령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숨보다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청하십시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8면

[말씀 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구경꾼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춤은 이제까지 흔히 보던 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놀라움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어이없어하며 이 남자의 춤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한 남자가 나와서 이 사람의 춤을 따라 추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며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이제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며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처음에 춤꾼 한 명을 지도자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첫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당시 모습은 미친 짓이라고 할 만큼 놀라웠습니다. 죄인과 먹고 마셨으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안식일 법도 어기곤 했습니다. 만약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따름’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모두 알아서 해주시기만을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따름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 여정이 끝나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지금이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승천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우리 곁을 떠나 저 멀리 우주 공간으로 사라지신 주님의 부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성령을 통해 세상 어디서나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더욱 깊고 충만하게 머무르십니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현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현존이 우리의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나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깁니다. 이는 완벽하게 준비된 성인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의심하는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모이고 모여 주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환하게 들어 높여질 것입니다. 너무나 부족한 우리인데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엄청난 사명을 건네주십니다. 그러나 사명만 던져주고 떠나시는 방관자 같은 주님이 아니십니다. 실패와 박해,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파견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고, 이렇게 주님께서 멀리 계신다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우리입니다. 이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철저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고, 또 부족한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도 들겠지만, 어떻게든 따르려는 우리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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