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41절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를 고치신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병 고침을 넘어, 예수님이 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고통 속에 있던 사람이 믿음을 고백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시선과 그 시선에 마음을 연 한 인간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대개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거나, 자기 관심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고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은 이러한 우리의 시선과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요한 9,1) 여기서 ‘보셨다’는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아닙니다. 본문의 그리스어 동사 호라오(ὁράω)는 기본적으로 ‘보다, 인식하다, 깨닫다’는 의미로, 그 사람의 고통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시선을 뜻합니다. 이 시선은 예수님의 구원 행위가 시작되는 첫 순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의 신체적 조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그 안에 깃든 고통과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이 시선은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들으시고, 살펴보시고, 알게 되셨다’(탈출 2,24-25 참조)라는 하느님의 시선과 이어집니다. 약자 위에 머무는 예수님의 시선은 곧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이 사람의 고통 앞에서 그 원인을 찾으며 죄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그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는 단죄도, 그 원인을 따지는 판단도 없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오직 연민과 구원의 의지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는 행위는 창세기 2장에서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던 창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치유는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창조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에게 ‘파견된 이’라는 뜻의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게 하십니다. 이는 이 치유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이는 육안의 문제가 아니라, 겸손과 교만의 문제입니다. 눈먼 이는 겸손으로 마음의 눈을 떠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우리는 잘 본다”(요한 9,41)라고 확신한 바리사이들은 교만으로 그 눈을 감았습니다. 자기 확신에 갇힌 시선은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를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는 본다고 여기지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제1독서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겉모습을 넘어 그 사람의 중심과 가능성, 상처까지 함께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눈먼 이를 바라보신 방식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고 선언합니다. 빛은 마음의 눈이 열릴 때, 곧 사랑과 겸손 안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눈이 열리면 시선도 달라집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사람의 내면을 헤아리는 마음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은 눈먼 이의 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열어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시선을 닮아갈 때 사람을 살리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사순 시기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기쁨의 라에타레(Laetare) 주일은, 바로 이런 시선의 전환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보는 눈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깊이를 존중하는 마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8면

[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예수님께서는 길을 걷느라 지쳐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요한 4,6 참조)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겸손을 느끼듯이, 주님께서 한낮에 우물가에 계셨던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온 죄 많은 여인을 만나기 위한 치밀한 자비로 보입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8)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하고 반문하지만, 사실 그녀에게 물을 청하신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목말라하신 것입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5,2)라는 제1독서처럼, 주님은 갈증을 해소하려 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여인 안에 오히려 생명의 물을 부어주기 위해 대화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성령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신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라는 것은 우물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성령의 은총은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예지력을 발휘해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요한 4,16)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솔직하게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함께 사는 남편이 남편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가 아직 참된 신랑이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헛된 우상이나 집착 속에 살고 있음을 직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의 수치를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참회로 이끌기 위해 그녀의 과거를 비추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바라보며 저희 조상들은 산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선생님네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예배의 장소 ‘그리짐 산’에 집착했고, 유다인은 전통 곧 ‘예루살렘’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함을 선언하십니다. 영 안에서라는 것은 성령의 비추심을 뜻하며, ‘진리 안에서’라는 것은 그림자인 구약의 제사를 넘어 실체 그리스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의 오심을 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바로 모세가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탈출 17,6) 했던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주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요한 4,27-30 참조)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 여인이 이제 육체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물동이를 버린 것은 더 소중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복음의 기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만 구원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즉시 주님의 소식을 전하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요한 4,31)하고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몸의 음식을 걱정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구원’에 굶주려 계셨습니다. 주님께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바로 길 잃고 지친 영혼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영성은 ‘목마름의 전환’입니다. 세상의 우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우물물이지만, 주님의 우물은 나의 내면에서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우리도 참된 생명수를 맛본 사람이 됩시다. 과거의 물동이(집착)를 미련 없이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기쁨을 전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모두 주님과 영적으로 대화하는 새로운 사마리아 여인 곧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될 것입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6주일

호주의 간병인 브로니 웨어의 책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에는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남을 의식하며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일만 열심히 했다). 3)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많은 것을 억누르며 살았다). 4) 친구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그때의 친구가 보고 싶다).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큰 집에 살거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과연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게 될까요? 그보다 생각, 말과 행동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 전체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때 후회 많은 삶이 아닌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정리한 관습적인 조문의 수는 모두 613개(긍정 명령 248개, 금지 명령 365개)입니다. 이를 실천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깜짝 놀라고, 어쩌면 불가능한 말로 비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살인의 뿌리가 되는 성내고(내적 감정), 바보라고 부르며(언어 폭력), 멍청이라고 하는(인격 모독) 행위까지 살인의 범주에 포함하십니다. 가장 거룩한 행위인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와의 화해에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십니다. 간음 역시 물리적 행위 이전에, 마음속의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여자를 소유의 대상이나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모세 율법은 이혼장을 써주도록 허락했지만, 배우자를 버리면 그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근원적 가르침을 전달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은 아예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맹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평소의 말에 거짓이라는 악이 섞여 있다는 증거이기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만 잘 지키고 죄라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죄를 만드는 뿌리인 분노, 음욕, 거짓 마음 등을 마음에서 지우는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높은 기준을 우리 힘만으로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1코린 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억압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의 자유인이 되라고 지금 초대하십니다. 그래도 지키기 힘든 주님의 계명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자기 삶의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회복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행만 하시지 않습니다. 방랑벽이 있어서 오랫동안 많이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만, 어떤 여행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출발지인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지상에서 여행 중인 우리는 이 여행을 마치면 출발지인 고향으로, 즉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면 과연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행 중인 지금 삶에서 계속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6면

[말씀묵상] 연중 제5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십니다.(마태 5,13-16 참조) 소금은 녹아 사라질 때 제 역할을 하고, 빛은 드러날 때 세상을 밝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 사라짐과 드러남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마태 5,13)이라 부르신 말씀은, 구약에서 소금이 지닌 계약과 상징을 배경으로 합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곡식 제물에 소금을 치게 하십니다. 소금은 부패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 계약의 변치 않는 영원함을 상징합니다. 민수기 18장 19절과 역대기 하권 13장 5절에서 언급되는 “소금 계약”은 바로 이러한 ‘영원한 계약’을 의미합니다. 예언자 전통에서도 소금은 정화와 치유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에제키엘은 신생아를 소금으로 문질러 깨끗하게 하는 관습을 언급하고(에제 16,4 참조), 번제물에 소금을 뿌리는 정화 의식을 소개합니다.(43,24) 엘리사는 오염된 물을 소금으로 되살립니다.(2열왕 2,19-22 참조) 지혜문학에서 소금은 음식의 풍미를 더함으로써 먹는 기쁨과 삶의 의미를 더해 주는 상징입니다. 욥이 “간이 맞지 않은 것을 소금 없이 어찌 먹겠느냐?”(욥기 6,6 참조)라고 말하듯, 소금은 삶의 즐거움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징은 신약에서도 확장되어 바오로도 “말이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한다”(콜로 4,6 참조)고 하며, 지혜롭고 분별 있는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소금이 뿌려진 땅이 황폐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습니다.(신명 29,22; 판관 9,45 참조) 소금은 생명을 보존하는 동시에, 심판을 나타내는 강렬한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상징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라 부르신 뜻이 분명해집니다. 소금은 자신을 남기지 않고 녹아 사라질 때 제 역할을 하듯, 우리 역시 자기희생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세상을 보존하고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다음으로 “빛”의 상징은 성경에서 더욱 강력하게 등장합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일으킵니다. 구약에서 빛은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의 표지입니다. 시편 27장 1절은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하고, 시편 119장 105절은 하느님의 말씀이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 말씀의 빛, 주님의 빛을 받아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을 “민족들의 빛”(이사 42,6; 49,6)으로 세우셨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 5,14)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바로 이 종의 사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신학이 잘 드러나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시며,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전히 어둠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둠 속에서 빛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빛이 어떤 삶을 통해 드러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굶주린 이에게 양식을 나누고, 떠도는 이들을 맞아들이며, 헐벗은 이들을 덮어주는 자비와 연대의 실천 속에서 주님께서는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올 것”(이사 58,8 참조)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복음 역시 우리의 “착한 행실”(마태 5,16)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 곧 참된 빛이 드러나게 하라고 요청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삶의 근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임을 밝힙니다. 그는 자신의 복음 선포가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1코린 2,4)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때는 소금처럼 기꺼이 녹아 사라지고, 어둠을 밝혀야 할 때는 담대히 믿음의 빛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4주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참행복(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진짜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세상과 복음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나에게 행복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외치는 행복에 부, 명예, 권력, 쾌락 외에 다른 것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가난’이 단순히 물질적인 빈곤이 아니라 ‘겸손’과 연결된다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칠죄종 첫 자리의 교만이 모든 죄의 시작이듯, 겸손은 모든 축복과 미덕의 기초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 안에 가득 찬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욕망을 비워내어, 그 빈자리에 하느님을 모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1독서에서도 “주님을 찾아라.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스바 2,3)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겸손한 이, 곧 비천한 이들은 힘이 없어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에 마음을 두지 않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은총이 내 영혼에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즉 영적인 가난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세상은 강함, 지식, 가문, 능력을 행복의 조건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하느님의 선택 기준이 세상과 정반대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적인 수단 곧 권력이나 지혜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약한 이들을 통해 구원사업을 이루시는데, 그 이유는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나는 하느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내 자신의 부족함과 악함을 인정할 때(마음의 가난),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말한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하는”(1코린 1,31) 이유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가톨릭의 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세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은 쾌락과 소유욕을 절제하는 단계로서 욕망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자를 말합니다. 둘째,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은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로서 사랑으로 활동적인 삶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단계로서 관상적인 삶으로 인간 완성을 향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박해를 받는 것은 이 모든 덕행의 시금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옛 율법의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은총의 새 법을 선포하시는 권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외치지만, 예수님은 “비워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강해야 살아남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온유하고 자비로워야 땅을 차지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행복을 원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 아는 것에서 실수가 발생합니다. 오늘 나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행복을 찾고 있나요? 사라져 버릴 세상의 위로일까요? 물론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하느님의 약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나의 힘과 욕망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를 하느님으로 채워보시지 않으실래요?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최고 선’이신 하느님을 소유하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지금 여기서 맛보는 유일한 길입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해외 원조 주일

오늘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초점은 죄인들의 회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신 일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의 회개와 제자로의 부르심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셨는데 “그들은 어부”(마태 4,18)였습니다. 좀 더 가시다가는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마저도 제자로 부르셨는데 그들도 “그물을 손질”(마태 4,21)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부였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네 어부를 다음과 같이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아무래도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밑도 끝도 없이 ‘제자로 삼겠으니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는 것보다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편이, 당신의 뜻을 더 쉽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물고기 잡는 ‘어부’였던 이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 모든 걸 내팽개치고 따라나설 만큼 매력적인 제안이었을까요? 어떻게 하여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마태 4,22)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이들은 모두 ‘어부’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어부를 ‘페쉐(pêcheur)’라고 합니다. 그런데 발음은 매우 비슷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른 ‘페쉐(pécheur)’도 있습니다. 전자는 어부지만 후자는 죄악에 빠진 사람, 곧 ‘죄인’을 가리킵니다. 정확한 발음표기를 보자면, 어부를 뜻하는 페쉐(pêcheur)는 [pɛʃœːʀ]이고, 죄인을 뜻하는 페쉐(pécheur)는 [peʃœːʀ]입니다. 모음이 ɛ와 e의 차이니, 프랑스인이 아니고서야 구별해서 듣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단어에 속합니다. 저 같은 외국인이 ‘어부’와 ‘죄인’을 구분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pêcheur)였다”가 아닌 “그들은 죄인(pécheur)이었다”라고 들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물을 손질하던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직업적으로는 물론 기록된 대로 ‘어부(pêcheur)’가 맞지만, 인간 본성상 ‘죄인(pécheur)’이기도 하므로,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을 직업상 어부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상 죄인으로 바라본 것이라면, “그들은 페쉐(pécheur)였다”라고 해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인간 본성상 ‘죄인(pécheur)’인 그들을 부르시어,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사람을 살릴, 사람 낚는 ‘어부(pêcheur)’가 될 것이라고 선언해 주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한다면, 죄인들의 회개를 선포한 공생활의 시작점에서 일어난 이 부르심을 어부가 아닌 죄인을 부르신 사건으로 이해하는 건 어떨까? 물론 저의 이런 엉뚱한 발상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신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마태 9,13) 오신 분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도 처음부터 완전한 성인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죄인이었기에 부르심을 받은 것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부족하고 죄가 많지만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을 따르는 한, 우리는 모두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주일, 일치 주간

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는 집이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책 읽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텔레비전 없애는 예전의 유행이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함께 모여 텔레비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과 같이 전 국민의 관심을 끄는 경기에서나 함께 보기 때문입니다. 몇 년에 한 번 거실에서 보기 위해 굳이 거실에 텔레비전을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 쟁탈전으로 서로 싸웠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알아서 스마트폰으로 보면 됩니다.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 가졌던 거실은 이제 텅 빈 곳이 되었습니다. 예전의 채널 쟁탈전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는 ‘함께’하는 것보다 ‘혼자’가 익숙합니다. 친구나 가족보다도 스마트폰이 더 가깝고, 때로는 나의 전부이고 심지어 마치 배우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또 자극적인 것 등을 모두 이 스마트폰에서 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너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마트폰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사는 우리입니다. 이렇게 편하고 쉬운 것, 자극적인 것을 가까이하다 보니,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렵고 힘들어집니다. ‘주님도 스마트폰으로 만나면 안 되나?’, ‘성체도 그냥 스마트폰으로 보면 안 될까?’, ‘굳이 고해소에 들어가 고해성사 보는 것보다 스마트폰으로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등 인격적인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얻기 힘들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사제는 미사 때 성체를 들어 올리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이 바로 오늘 복음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석에 앉아 있는 신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 “여기에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해결해 주실 진짜 구원자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벅찬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귀찮다’고, ‘지루하다’고, ‘힘들다’고, ‘믿지 못하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하기보다 피하는 것을 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중심이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없으며, 주님 안에서 은총과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노래 중 두 번째 노래로, 하느님께서 선택된 종의 사명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경계를 넘어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를 비추는 ‘민족들의 빛’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 1,3)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의 조종사가 실수로 북쪽으로 1도 다르게 설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갈까요? 비행기가 60마일을 날아갈 때 1도가 틀어지면 1마일을 벗어난다는 60대 1의 법칙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인천까지 8,800km, 그래서 148km의 오차가 생깁니다. 인천 기준으로 북쪽 150km이면 평양에 도착하게 됩니다. 겨우 1도라 해도 목적지가 아예 바뀌게 됩니다. 우리 삶의 항로도 바꿔야 할 때가 아닐까요? 편하고 쉬운 길,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딱 1도만 바꾸면 충분합니다. 매일 1도쯤 더 기도하고, 매 순간 1도쯤 더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이루어지는 1도의 방향 전환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1999년 사제품을 받았다. 인터넷카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를 운영하고 있으며,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왕복해야 하는 강연 요청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 사제다. ‘빠다킹’은 목소리가 느끼하게 들린다고 해서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으로, 25년 넘게 이 별명을 버리지 않아 공식 애칭이 되었다. 저서로 「주는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 「날마다 행복해지는 책」,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위해 스스로 요한을 “찾아가셨다”(마태 3,13)는 표현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파라기네타이’는 단순히 어떤 장소로 이동해 ‘왔다’는 의미를 넘어, 의도적이고 결정적인 공적 등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죄인들의 한가운데로 내려오신 현현이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이 세례 사건은 예수님의 사명이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고 전개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먼저 죄인들과 연대하시기 위해 연약한 인간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더욱이 놀랍게도 죄 없으시면서도 죄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세리들, 죄인들, 병자들과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은 규율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였습니다. 완고하고 차갑고 동정심 없이 살피고 감시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분리와 판단을 넘어서 그들 모두를 형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사명 수행 방식은 공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죄인들과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실 때(루카 19,5; 요한 4,7; 요한 5,6 참조), 엠마오로 향하던 낙담한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실 때(루카 24,15 참조), 그리고 부활 후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요한 20,19 참조)도 예수님은 먼저 움직이는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기로 결단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움(디카이오쉬네)’은 도덕적 올바름이나 법적인 정의를 넘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행위인 그분의 자비하신 마음을 드러내는 삶을 뜻합니다. 곧 연민과 자비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람들 한가운데서 이루어야 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드러난 이러한 ‘의로움의 실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3)라고 약자와 함께하는 정의를 선포한 이 예언은, 예수님의 죄인들과의 연대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종에게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이사 42,6)라고 하신 약속 또한, 세례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는 장면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 자신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한 사건입니다. 그날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신 날이며,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 위에 머무르셨으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들이다”라고 선언하신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은총은 예수님께서 먼저 요르단강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세례는 단순히 죄를 씻는 정화 예식이 아니라, ‘의로움’과 ‘성령의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무시는 존재로 변화되고,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여정으로 초대된 것입니다. 이 의로움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태도, 곧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삶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이사 42,1; 마태 3,17 참조)가 됩니다. 따라서 주님 세례 축일을 기념한다는 것은, 다시 한번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글 _ 전봉순 수녀(그레고리아·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1985년 입회했으며 서강대학교 대학원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 그 후 동 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부산 가톨릭 신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구약성경 주해, 시편 Ⅰ- Ⅲ권」, 「시편 90편과 지혜로운 마음」 등이 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8면

[말씀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다. 그들은 왜 유다인이 아닌 동방 박사들이었을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구원이 혈통을 넘어, 진리를 찾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별은 낮에도 빛나지만, 박사들을 인도하며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 위에서 멈췄다. 하느님은 각 사람의 수준과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데, 점성술과 자연법칙에 익숙했던 박사들에게 ‘별’이라는 자연적 표징을 통해 그들을 초자연적인 신앙의 신비로 인도하셨다.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들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별이 될 수 있다. 동방 박사들이 바친 세 가지 예물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본성을 고백한다. 황금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유향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한다. 그분이 참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흠숭의 표현이다. 몰약은 그리스도의 인성 곧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데, 인간의 죽음을 썩지 않게 보존한다. 그러므로 몰약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구세주의 인성을 미리 보여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사랑의 ‘황금’을, 기도라는 ‘유향’을, 육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절제라는 ‘몰약’을 바쳐야 한다.” 동방 박사들이 바친 세 가지 제물은 한편 오늘 우리에게 내적인 마음의 태도를 준비하도록 인도한다. 황금은 물질의 헌금보다는 내 삶의 가장 귀한 가치와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는 것이다. 곧 나의 시간, 재능 그리고 돈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왕좌에 누구를 앉히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하는 삶이 오늘날의 황금을 바치는 삶일 것이다. 유향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에서 쓰였다. 이는 지적인 영혼이 하느님께 고양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현대의 삶에서 소음과 분주함 속에서 마음을 모아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 시간이 유향의 내적 의미이다. 하루 중 단 5분이라도 세상을 향한 관심을 내려놓고, 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관상’의 향기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활동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이 현대의 유향이다. 몰약은 시신의 부패를 막는 데 쓰였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수난을 상징한다. 나의 이기심과 탐욕이 영혼을 부패시키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는 희생이다. 삶에서 마주하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이를 이웃을 위한 사랑의 도구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내 안의 미움이 흘러가도록 하는 사랑의 행위가 바로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내적인 몰약이다. 왕권으로서 황금이 내 우선순위의 봉헌이 되고, 신성을 고백하는 유향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고 대화하는 기도의 봉헌이며, 인성의 수난을 뜻하는 몰약은 자기 욕망의 절제로 생기는 고통을 인내로 승화하는 희생 봉헌을 뜻한다. 이렇게 동방 박사들이 주님께 봉헌하는 세 가지 보물들은 오늘의 우리가 주님께 드릴 영적인 선물이다. 박사들이 보물 상자를 열어 예물을 드렸듯이, 우리도 마음의 보물 상자를 열어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물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은 꿈에 지시를 받은 박사들이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고 전한다. 이것은 ‘회심’의 전형이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이전과 똑같은 길 곧 죄의 길, 세속적인 길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를 뵌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오늘의 동방 박사인 우리가 헤로데의 세속적 권력과 탐욕의 길을 피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본다. “나는 내 삶에서 떠오른 별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나의 황금인 재능, 유향(기도), 몰약(희생)을 기꺼이 준비하고 바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별’과 같은 질문을 통해, 동방 박사들처럼 주님 앞에 영적 보물을 바치며 엎드려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198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1996년부터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강의했다. 2019년 호주 시드니 한인본당 주임 신부를 맡았고, 2023년부터 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발행일 2026-01-04 제3473호 18면

[말씀묵상]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오늘 루카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로부터 메시아 탄생에 관하여 들은 말을 전해 줍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놀라워하였지만, 마리아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 마리아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먼저 루카 복음이 ‘간직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쉰테레오’(συντηρέω)입니다. 쉰테레오는 어떤 상태를 잘 유지하고 지켜 ‘보존한다’라는 뜻의 ‘테레오’(τηρέω)에서 유래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어, 잔치가 끝날 때까지 좋은 포도주가 떨어지지 않게 되자 과방장은 신랑을 불러 말합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요한 2,10) 여기서 ‘남겨두었다’라는 말이 테레오인데, 포도주를 양적 차원에서 남겨두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포도주의 질적인 상태까지 변하지 않고 그 본래의 맛과 향이 잘 ‘보존되었다’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 테레오에 ‘~와 함께’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쉰’(σύν)을 덧붙여, 마리아가 ‘마음속에 간직했다’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보존했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천사의 말을 당장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을 온전히 그 말씀에 일치시켜, 말씀의 본질적인 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간직한다는 것은 간직하려는 대상에 나의 생각과 뜻을 일치시키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내가 그 안에 머물면서 반복해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특별한 간직함은 끊임없는 ‘기억의 현재화’로서 ‘되새김’을 의미합니다. ‘곰곰이 되새겼다’라고 번역되는 ‘쉼발로’(συμβάλλω)가 쉰테레오 뒤에 함께 사용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쉼발로는 원래 ‘의논하다, 함께 이야기하다, 협의하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는 본래 주사위를 던져 제비를 뽑거나, 씨앗을 땅에 뿌린다거나, 그물을 바다에 칠 때와 같이, 무엇을 ‘던진다’라는 뜻을 가진 ‘발로’(βάλλω)에서 유래하지요.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보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βάλλω) 의미 물음은 끊임없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한다는 점에서, 내가 나와 함께 의논하고 이야기하는 것(συμβάλλω)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할 때, 곰곰이 되새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사실 마리아가 ‘곰곰이 되새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전할 때에도 마리아는 이미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루카 1,29 참조) 하였고, 잃었던 소년 예수를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루카 2,51 참조) 하였었지요. 마리아는 항상 곰곰이 생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이해하기 힘들 때마다 그 안에서 그분의 뜻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며 순종하였습니다. 간직하고 되새긴다는 것. 그것은 결국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끊임없이 주님의 뜻과 말씀의 의미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기념하는 우리는 마리아의 그 모범을 따라 힘겨운 일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안에 숨겨진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그분 마음에 내 마음을 두는 거룩한 행위이며, 내 마음이 주님 마음 안에서 기뻐 뛰노는 것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201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프랑스 파리가톨릭대학교에서 기초신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 부원장, 의정부교구 고양동본당 주임을 거쳐 2024년부터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5학년 원감으로 소임하고 있다. 2025년 「애니그마, 말씀의 수수께끼1」을 저술했다.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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