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더하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를 받는다?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분이 본당 공동체와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전대사라고 하면, 희년에 지정된 순례지를 순례하거나 11월 위령성월 첫 주간에 묘지 등을 방문해 얻는 것을 떠올립니다. 올해도 프란치스코 성인 선종 800주년을 맞아 특별 희년인 ‘성 프란치스코의 해’가 선포되면서 성인과 관련된 성당을 방문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지요. 이렇게 전대사라고 하면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장소를 방문하는,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해야만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평소 다니는 성당은 물론, 어느 성당·성지에서도 가능하고, 심지어 사순 시기뿐 아니라 1년 중 모든 날에, 하루에 한 번 받을 수 있습니다. 교황청 내사원이 발행한 「대사 편람(Enchiridion Indulgentiarum)」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할 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고, 또 하나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로 전대사를 받으려면 우선 성당이나 성지 등에 합법적으로 설치된 14개의 십자가, 즉 14처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처에서 처로 이동하면서 바쳐야 합니다. 공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하는 경우라면 인도자만 이동해도 괜찮습니다. 또 교황님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실 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로 경건하게 참여해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 등으로 여건이 되지 않아 이마저도 어렵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경건한 독서와 묵상으로도 십자가의 길 기도와 같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십자가의 길 기도만 바친다고 저절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반 조건이 전제돼야 합니다. 일단 전대사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을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이 없는 상태여야 하지요.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부분 대사를 얻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판공이 있으니 이 일반 조건을 채우기도 좋지요. 그래서 ‘전대사 받기가 이렇게 쉬워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대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성인의 공로, 무엇보다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거저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고, 그분의 상처로 우리가 낫게 됐습니다. 성인들도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의 수난을 따르려 노력해 공로를 쌓았습니다. 전대사가 쉽게 남용돼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일은 전대사를 위한 다른 어떤 활동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꼭 전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사순 시기를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신앙·희망·참사랑을 통해 찾는 신앙인의 행복한 직장 생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긴 제목을 가진 드라마가 많은 직장인을 울컥하게 했다. 이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들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렸다. 치열한 성과 경쟁과 구조조정의 불안, 회사 정책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직장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실적 압박 속에서 승진을 앞두고 동료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구조조정 소문에 마음이 무너졌다가 다시 버티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주인공 김 부장은 겉으로는 성공한 중간관리자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무엇이 정말 옳은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내 인생의 마지막 기준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사람이다. 거의 손에 잡은 듯했던, 자신의 성공을 놓치고 좌절하는 김 부장을 바라보며,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진 능력과 강점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對神德)’, 곧 신앙(fides), 희망(spes), 참사랑(caritas)에 대한 설명이다. 토마스 성인은 좌절하고 방황하는 김 부장과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조언해 줄 수 있을까? 자연적인 덕과 구별되는 초자연적인 대신덕 토마스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의 자연적 상태에 적합한 덕들과,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덕들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토마스는 “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도덕적 덕 외에도, 초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다른 덕들”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이 덕들을 ‘대신덕(virtus theologiae)’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향주덕(向主德) 또는 ‘신학적 덕’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덕들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I-II,62,1) 여기에는 지성에 있어서 ‘신앙’, 의지에 있어서 하느님을 향하는 ‘희망’ 그리고 그분과 일치하게 해주는 ‘참사랑’이 속한다.(I-II,62,3) 이 덕들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하느님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를 인간의 반복된 행위로 얻어지는 ‘획득된 덕’(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성적 덕이나 도덕적 덕)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주입(注入)된 덕’이라고 불렀다.(I-II,62,1; II-II,24,12) 신앙·희망·참사랑 뜻하는 ‘대신덕’…하느님이 신앙인에게 부여하는 은총 성공과 실패 앞에 항상 방황하며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직장인들 자만·절망 대신 신앙의 덕 갖추고 초자연적 행복 향한 여정 떠나길 ‘획득된 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사와 지상의 행복에 적합하게 만들어주지만, ‘주입된 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준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이 덕이 주입되면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자연 본성을 넘어서는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대신덕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자유로운 선물이다. 대신덕으로서의 믿음(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영역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김 부장이 잘 보여주듯이, 인간적인 영역에서 믿음과 희망에는 통찰력 부족, 무력함 등의 결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확실한 믿음과 희망을 진정한 덕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덕인 희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바람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란 덕의 대상은 참된 행복인데, 이는 “획득하기 어렵지만 가능한 미래의 선”(II-II,17,7)이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참사랑이라는 다른 대신덕도 하느님의 결함 없는 권위와 전능한 능력으로 지탱되기 때문에 인간 행위가 지닌 불확실함과 무력함이 없다. 대신덕을 통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 좌절했던 김 부장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선 둘째 덕인 ‘희망’을 집중해서 살펴보자. 토마스는 희망을 자만(praesumptio)과 절망(desperatio) 사이의 중용이라고 분석한다.(I-II,64,4). 실제 직장 생활에서 이 중용을 찾기 어려운 것은 대기업 문화로 대표되는 경쟁 사회가 이 두 극단으로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의 김 부장처럼 승진에 성공하고 인정받을 때 우리는 “내 능력과 인맥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흐르기 쉽다. 중반 이후의 김 부장처럼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 김 부장은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고 느끼는 절망으로 기울고 만다. 만일에 김 부장에게 희망의 덕이 주입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최종 목적이 “이 회사,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희망을 통해서 하느님을 우리 자신을 위한 행복의 원천으로 사랑하게 된다. 희망이라는 덕은 성과주의와 번아웃 사이에서 김 부장이 절망과 냉소에 빠지지 않도록, 최종 목적을 향한 긴 호흡을 제공한다. 신앙이 없는 김 부장들은 실적 압박과 보고서 조작의 유혹, 상사의 눈치와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신앙이라는 덕을 갖추게 된다면, 사내의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고, 양심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 열정적으로 노력하던 김 부장은 팀을 위해 희생하고 부하 직원을 감싸는 모습에서 ‘좋은 상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가 팀원의 선과 공동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평판·이미지·승진이라면, 토마스의 기준에서 이는 “참되지만 불완전한 덕” 혹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일 뿐이다.(II-II,23,7). 그가 참사랑을 갖추게 된다면, 그의 모든 덕과 선택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공동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에 맞게 재정렬하여, 팀 운영과 회사 정치 속에서도 타인을 수단이 아닌 친구이자 이웃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은 좌절하는 수많은 김 부장을 단지 ‘생존·승진·몰락’의 서사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정자’로서, 대신덕 안에서 자연적인 덕을 구체적 상황에서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I-II,62,4; 63,3) 대신덕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현대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를, 하느님과의 우정에 의해 통합된 인격의 드라마로 변형시키는 놀라운 힘으로 작용한다. 직장을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회사를 무대로, 신앙·희망·참사랑이라는 은총의 습성을 따라 자신의 직장 생활을 초자연적 행복을 향한 여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학과 철학의 차이

“하느님이라는 말마디는 ‘믿는 사람’(신학자)이 사용하는 말마디이고 ‘부동의 제일동자’라는 말마디는 ‘생각하는 사람’(철학자)의 말마디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사람의 말마디와 믿는 사람의 말마디는 서로 다르지만, 그 말마디들은 서로 상대편의 말마디들을 잘 조명해 준다”(정달용 「그리스도교 철학」 참조)는 글은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암시한다. 신학과 철학은 공통성도 지니지만 차이점도 지닌다. 한마디로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며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스스로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며, 그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익을 경멸하고 포기하여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진짜 금화’(지혜, 정의 등)를 얻기 위해 다른 모든 선을 맞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예수님은 마태오복음에서 값비싼 진주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산다고 하였다.(마태 13,46 참조) 이렇게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신학과 철학이 같지만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그 사랑하는 사물의 내용에 있다. 즉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신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리하르트 셰플러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II)」 참조) 철학에서도 신을 논하지만, 최고의 존재요 존재의 근거로서 신의 본체나 속성을 이성으로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을 추구한다. 쉽게 말해서 철학은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신학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과 철학은 현실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한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는 학문인 신학은 계시와 신앙에서 출발하고, 어원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인 철학은 자연과 이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신학은 계시를 통한 신앙의 학문이고, 철학은 이성을 통한 진리의 학문이다. 철학이 질문을 통해 솟아 나온 사색의 학문이라면, 신학은 철학이 질문한 것에 답을 제공하면서 신앙으로 응답하는 실행의 학문 즉 구원의 학문이다. 유한의 체험을 말하는 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이 존재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단지 이 존재를 생각하고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한다. 한편 무한의 체험을 말하는 신학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이 존재를 확실히 인정한 뒤, 이 존재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면서 존재의 신비로 들어간다. 철학이 이 존재의 문지방에 서성거린다면, 신학은 이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 그 신비를 향유한다. “철학 없이 신학 없다”라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추기경의 말처럼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을 해야 한다. 인간의 궁극적 의미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은 신학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신학은 철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와 신앙을 설명한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노는 플라톤의 철학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현대에서 칼 라너 신부는 하이데거 철학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폭풍의 언덕」 : 사랑과 폭력

사랑의 가치는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순수성, 진실성, 열정, 헌신, 자유 등.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열정적인 사랑의 대명사이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사랑의 강렬함은 독자들의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1847년 출판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당시 고딕 소설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명확한 도덕적 시각이 없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흔하지 않은 깊은 사랑이 복수와 폭력을 감싸고 있어서, 빛과 어둠이 혼재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교회사 안에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었던 경우들이 있다. “신이 원하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간 비극적 폭력을 낳았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 믿었다. 또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학살 등의 사건들이 있다. 교회는 과거 그리스도교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규범과 예의를 강조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남녀의 사랑은 절제되고 예의범절에 맞는 형식 안에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규범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그리고 죽음도 멈출 수 없는 강렬한 열정의 힘 자체였다. 캐서린의 “나는 히스클리프이다”라는 말과,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영혼(캐서린)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서로를 자기 존재 그 자체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규범적이고 문명화된 사랑은 이들의 결합을 담아낼 수 없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을 “영원한 바위층과 같다”는 유명한 표현을 한다. 자신의 사랑이 달콤하고 낭만적이기보다, 거칠며 변하지 않는, 뭔가 근원적임을 보여준다. 이 사랑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거친 들판과 격렬한 날씨, 즉 폭풍의 언덕 같은 것으로 형상화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길들지 않는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캐서린의 죽음 앞에서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미치게 만들어도’ 좋으니, ‘어떤 모습’이라도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절규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유령이 되어서 자신을 괴롭혀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심연에 홀로 사는 것보다, 유령에게 시달리기를 스스로 자청하며, 사랑이 무덤의 문턱을 넘어선다. 고통과 죽음조차도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랑의 열정을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캐서린의 신체적, 심리적 무너짐과 히스클리프의 평생에 걸친 고뇌와 잔혹한 복수의 주된 원인으로서 파괴적이며 광적인 집착이다. 캐서린이 에드거와 결혼해 버리자, 사랑은 복수로 변한다. 3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사법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담보, 부채, 결혼 계약을 이용해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해 버린다. 결국 힌들리는 과거에 어린 히스클리프가 그랬던 것처럼, 하인처럼 전락해서 완전히 파멸한 채 절망 속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연인에 향한 히스클리프의 집착…복수를 ‘사랑’으로 정당화해 절망·파멸 자초 평화로 충만한 사랑 이루려면 폭력 멈추고 끊임없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복수를 폭력이나 죄로 생각하지 않고, 근원적 질서를 바로 잡는 행위로 간주한다. 그와 캐서린은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 엮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캐서린이 에드거를 선택한 일은 사회의 계급과 재산 구조가 강요한 부당함으로 느끼기 때문에, 복수의 폭력과 잔혹함은 캐서린의 결혼이 무너뜨린 존재론적 사랑의 질서와 균형을 회복하는 정의로 포장된다. 히스클리프에게 사랑과 복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복수는 사랑의 연장선이다. 복수는 상대방에게 고통 자체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받은 고통을 드러내고 알리기 위함이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심장을 부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를 버림으로써 그녀의 심장을 부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심장도 부서졌다”고 말한다. 즉 복수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파괴는 바로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다. 캐서린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복수에 의해 겪는 고통을 통해, 그의 고통을 깨닫도록 기대된다. 복수는 과거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말한다, “나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어. 내가 그녀에게 가기 전에 내 영혼은 저 언덕 꼭대기에 있을 거야.”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길이 결국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복수를 사랑의 행위로 정당화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히스클리프는 계획했던 복수를 거의 다 이루었음에도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소진되어 버리고, 만족과 평화를 얻지 못한다. 이제 그는 ‘기와 한 장 들어 올릴’ 힘도 없고, “그들을 파괴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털어놓는다. 복수가 그의 존재를 충만케 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집어삼켜 버렸다.” 자기 기만적이며 파괴적 집착으로 포장된 그의 사랑은 결국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해 버렸다.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태복수법이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구약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심지어 이런 형태의 복수는 부모들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히스클리프는 과거에 힌들리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헤어튼의 교육을 박탈해 버리고, 캐시에게 자신의 병약한 아들과 결혼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히스클리프가 뉘우치는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끝 무렵 캐시와 헤어튼에게서 캐서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이 관계를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놓아둔다.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을 상징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복수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용서와 치유를 향해 나아간다. 두 사람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태도 변화는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점이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열정적인 사랑의 깊이는 예의범절과 사회계급이 중요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분명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동시에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히스클리프의 폭력은, 19세기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잔인함과 폭력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와 자기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적 신분과 물질적 욕망 때문에 에드거와 결혼해 버린 캐서린을 용서하지 못한 완고한 마음 때문이다. 죽음조차 멈출 수 없었던 사랑이었지만, 그 안에 용서가 없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결국 집착과 복수와 자기파괴의 결과를 낳았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의 사랑은 실망과 상처를 피해 갈 수 없다. 사랑으로 포장된 폭력적인 관계의 지속이 아니라, 평화와 충만감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단어가 지겨워지지 않아야 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전대사는 ‘면죄부’다?

‘면죄부(免罪符)’라는 말은 ‘책임이나 죄를 없애 주는 조치나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사실 ‘대사(大赦, indulgentia)’가 잘못 번역된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신가요? 대사는 교회가 정한 조건을 채우면 잠벌을 면해 주는 것(교회법 제992조 참조)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어도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는데요. 잠벌은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 소죄와 용서를 받은 죄에 대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받는 벌입니다. 이 잠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벌을 전부 없애 주는 것을 ‘전대사’, 일부를 없애 주는 것을 ‘부분 대사’라고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데 왜 벌이 남아있는 걸까요? 죄는 두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죄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친교를 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을 ‘영벌’이라고 합니다. 영벌은 고해성사를 통해 벗어나게 되지요. 반면 모든 죄는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도 가져오는데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3항) 교회는 이를 생전에, 혹은 죽은 뒤 연옥을 통해 정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정화를 통해 잠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 견디고, 또 자비와 자선의 행위, 기도와 속죄 행위들로 잠벌을 정화해 나갑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잠벌을 정화하는데 예수님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통해 도움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받은 교회는 대사를 통해 그 길을 열어줍니다. 이처럼 대사는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에 대한 증서를 표현하자면 ‘대사부’가 바른 번역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면죄부’라는 오역이 생긴 것일까요? 대사가 남용됐던 역사에서 비롯한 오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 반박문」에서 “연옥 영혼에게 벌의 면제를 전구의 방식으로 베푸는 것은 옳은 행위”라고 대사의 중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져 짤랑 소리를 내는 즉시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오른다”고 설교하며 대사를 파는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잘못된 설교와 증서 발부로 인해 신자들이 대사의 의미를 잊고 ‘돈을 내면 죄가 사라진다’고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사가 ‘면죄부’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자 최근에는 역사학계나 교과서 등에 ‘면벌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후 교회는 대사의 남용을 바로잡고자 트리엔트공의회 「대사에 대한 교령」을 통해 “대사를 얻기 위한 모든 부적절한 돈벌이들을 전적으로 철폐”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전대사의 수를 줄이고 신자들이 전대사를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규범을 수정했습니다. 대사는 ‘면벌’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신심과 참회와 사랑의 행위, 특히 신앙의 성장과 공동선을 증진하는 행위”를 북돋는 역할도 합니다. 또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봉헌하는 것은 “탁월한 사랑의 실천이자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령 「대사 교리」 8항)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다

신학은 계시로부터 출발한 하느님에 대한 학문이다. 학문으로서 신학은 신앙으로 이미 받아들인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성을 사용하는 믿는 이들의 연구이다. 간단히 말해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인 것이다. 인간은 신앙으로 수용한 계시가 신비일지라도 그 내용을 알고자 하는 지성적 관심을 항상 가지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믿으면서도 인간 지력의 힘으로 더 정확하고, 더 충만하게 파악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지성적 탐구를 신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이성화하려는 노력, 즉 신학이 필요하다. 신학은 생각하는 머리로써 하는 신앙인 것이다. 신앙이 없는 역사가가 그리스도교 계시의 사실들을 학문적으로 다루게 될 때 종교학이나 역사학의 차원을 넘을 수 없다. 신앙이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계시의 본질적인 내용과의 만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계시 사건들은 자연적인 종교현상들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이며, 이를 올바로 감지하기 위해 신앙이 필수적이다. 신앙은 말하자면 인식의 차원을 초자연적 차원으로 올려주며, 참된 의미의 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안셀모 성인의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바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 없으면 가장 높은 것,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믿음으로써 더 큰 앎에 이른다. 즉 하느님을 지복직관하게 된다. 고통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 물질 안에 영이 있다는 것, 역사와 시간 안에 영원히 있다는 것, 세계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우리 눈과 이성으로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써 고통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세계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믿음으로써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안셀모 성인은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Fides querens intellectum)”(안셀모 「프로슬로기온(Proslogion)」 참조)라고 말한다.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즉 신앙의 대상을 이해하려는 신앙이다. 결국 신학은 신앙의 학문적 이해인 것이다. 신앙 없이 신학자는 신학을 전개할 수 없다. 따라서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학설만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신앙을 위한, 신앙의 행위이다. 신앙은 신학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신학의 중심이며 목표다. 신학은 신앙 안에서 태어나고 신앙 안에서 자라고 신앙 안에서 완성된다. 신앙 안에서 나온 신학 서적을 읽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어렵지만 1년에 한 권 정도 신학 서적을 읽으시기를 바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20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과도함도 부족함도 없는 중용을 통한 행복 추구

전 세계가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특히 미국 소비자 기술협회가 주관한 ‘2026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는 피지컬-AI를 대표하는 로봇들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동작이나, 오히려 인간을 능가하는 다양한 능력을 선보여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개월간 벌어진 변화는 과거 한 세대가 겪었던 변혁에 맞먹는다. 기술이 예측을 추월했고, 투자 시장에 전례 없는 자금이 몰려들며, AI 혁명은 ‘가능성’에서 ‘현실’이 되었다. 인간들에게 이제 과도한 육체노동이나 반복되는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AI를 통해서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행복’이 증대될 것을 꿈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곳곳에서 위태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많은 이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AI의 답변이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자주 빠진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더욱이 AI와 상담을 지속하던 학생은 그 충고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AI를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엄청난 전력 수요 때문에 사라져가던 원자력발전소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특수가 버블이라는 의심도 나타나고, AI의 발전으로 많은 이가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며, 범용지능(AGI), 초지능(ASI)까지 발전하면 인간이 AI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찬성이나 반대 이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찾기 위한 덕을 ‘중용’이라고 불러왔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 중용 개념의 수용과 변형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우선 토마스에 따르면, 모든 ‘획득된 덕’에 적용되는 어떤 공통적 특징은 그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간’, 즉 중용(medium)에서 성립된다는 점이다.(I-II,64,1) 도덕적 덕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습성’이며, 과도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때 악습(vitium)이 발생한다. 용기를 예로 들면, 두려움이 지나치게 적어 무모해지는 것도, 지나치게 많아 비겁해지는 것도 모두 악습이며, 그 사이에서 상황과 대상, 행위자의 능력에 상응하는 ‘마땅한 정도의 두려움’을 지키는 것이 용기의 중용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이 중간은 단순히 ‘산술적 평균’이나 ‘미지근함’이 아니라, ‘이성의 중용(medium rationis)’을 의미한다. 무엇이 중용인지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인생 경험이 많고 상황 판단력이 있는 ‘현명(prudentia)’의 덕을 가진 사람이 이 중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덕들과 중용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절제와 용기 같은 덕들은 정념의 내적 조절을 통해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상대적으로 규정되지만, 정의의 덕은 사물과 몫의 객관적 분배에서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갖는다. “정의 안에서 이성의 중용은, 정의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한에서, 사물들의 중용과 동일하다.”(I-II,64,2) 이처럼 토마스는 도덕적 덕의 중용을 정념 중심의 주관적 측면과 정의의 객관적 구조를 함께 고려하여 정교하게 구분한다. 인공지능 혁명에 큰 기대감도 있지만 ‘기술에 지배당할 우려’ 두려움 확산 중용의 덕으로 올바른 이성·윤리적 성찰 균형 찾고 모두의 행복 증진 추구 해야 중용과 다른 덕들과의 연결 여기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의 궁극 판단 기준을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에 두는 점에서 그 이론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킨다. 그에 따라 ‘현명’이라는 덕은 단순히 근시안적 실용 이익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 곧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관점에서 개별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덕이다. 따라서 도덕적 덕의 중용을 판단하는 궁극 기준은 ‘어떤 것이 최종 목적의 달성에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현명’의 덕은 도덕적 덕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예컨대 탐욕과 불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계산이 빠르더라도 참된 의미에서의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도덕적 덕 또한 현명 없이 완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한 덕에서 완전한 중용을 이룰 수 있으려면, 다른 덕들에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덕 개개의 균형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덕의 연결(connexio virtutum)’까지를 강조한다.(I-II,65,1) 지성적 덕으로 확대된 중용 토마스는 중용 개념을 도덕적 덕에만 국한시켰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지성적 덕에도 확대 적용한다. 먼저 지성적 덕의 경우, 토마스는 진리를 지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지성의 지나침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잘못된 긍정’이며, 부족함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부정’이다.(I-II,64,3) 그러므로 지성적 덕의 중용은 AI 시대에 종종 망각되고 있는 ‘사물 자체와의 정확한 일치’를 통해 성취된다. 이는 단지 논리적 형식이나 계산의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정직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뜻한다. 특히 지혜(sapientia)는 제일 원리, 곧 하느님의 본질과 창조된 세계의 궁극 질서를 실제로 인식하는 덕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중용은 ‘미지근한 회색지대’가 아니라, 과도함과 부족함을 모두 넘어서, 올바른 이성(현명)과 최종 목적(하느님)에 비추어 가장 정확한 선을 선택하는 덕이다. 이제 각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 세계는 인공지능의 시대로 급속하게 진입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중용’의 덕이 필요해 보인다. 과도한 열광으로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산업혁명 초기에 기계를 파괴하던 러다이트 운동식의 무조건적인 반대도 바람직하지 않다. 토마스에 따르면, 중용은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성이 끊임없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윤리적 성찰 없이 최대한 빠른 상용화와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미 제기된 위험성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해결책들을 모색하며 개발자나 투자자뿐 아니라 실제 사용자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하는 길이야말로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가톨릭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

종종 길거리에서 ‘유월절’을 알려주시겠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요. 그 설명을 듣다 보면 ‘가톨릭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과월절’, 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성경」에서는 ‘파스카’라고 번역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를 말합니다. 우리에겐 파스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요. 파스카(πασχα, Pascha)는 ‘거르고 지나가다’라는 의미로, 유월(逾越)·과월(過越) 모두 이 뜻을 한자로 옮긴 말입니다. 파스카 축제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의 모든 맏아들과 맏배가 죽는 재앙을 내리실 때 어린 양의 피를 집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재앙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탈출 12,13)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탈출 12,14)면서 파스카 축제를 제정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파스카 축제에는 어린 양을 잡아 불에 굽고,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습니다. 심지어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쥔 채 서둘러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런 예식을 한 기억이 없으실 겁니다.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통해 파스카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난 전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라 하시며,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지내던 파스카 축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신 예수님의 피로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새로운 파스카 축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를 거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특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간 첫날, 즉 주일에 기념하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 특히 주님 부활 대축일에 더욱 장엄하게 거행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신자들은 주일에 모여 기도하고, 또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1코린 11,26)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사순시기를 통해 파스카 성삼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파스카는 단순히 기념일이나 축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파스카를 통해 옛것을 버리고 새로 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20면

[교회상식 더하기] 기도 끝에 꼭 ‘아멘’을 해야 할까?

우리는 기도를 “아멘”으로 끝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 끝에 아멘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기도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아멘이 뭐길래 이렇게 자주 말하는 걸까요? 실은 아멘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기도 끝에 하는 아멘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아멘은 ‘믿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와 ‘견고함, 신뢰성, 성실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확실하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으로, 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멘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를 확인할 때, 하느님의 심판이나 저주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표현할 때, 하느님을 찬양할 때 그리고 시편의 찬미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주로 기도와 찬미의 끝에 아멘을 사용합니다. 서간을 보면 기도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끝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 바오로 사도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초심자가 어떻게 그대의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1코린 14,16)라며 신령한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기도 하는데요. 초대교회에서도 오늘날 우리처럼 교회 공동체가 모여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멘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멘은 예수님도 자주 사용하신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멘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에서 “진실로”로 번역된 부분의 원문이 사실 아멘입니다. 얼마나 많은가 하면, 마태오복음에서 30번, 마르코복음에서 13번, 루카복음에서 6번, 요한복음에서 25번 말씀하십니다. 특히 아멘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고 아멘을 두 번씩 반복해서 사용하시는데요.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권위가 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아멘의 하느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사 65,16)으로 번역됐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멘’이시다”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5항)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2코린 1,20)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 아멘이십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아멘을 받아서 완성해 주십니다. 기도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아멘만큼 훌륭하게 기도를 마무리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8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오만과 편견」: 사랑의 학교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을 조사하였는데,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다아시가 단연 1등으로 뽑혔다. 차갑고 불친절해 보이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가족을 남몰래 보호하는,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행위는 많은 독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두 연인은 사랑을 단순히 받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변화되어 가며 사랑을 배우게 된다. 갓난아이가 무수한 반복과 실수를 통해 모국어를 습득하는 것처럼, 사랑도 단숨에, 한 번에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랑을 정적인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증가하며 성숙해질 수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내는 첫째 서간에서, ‘주님께서’ 사랑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여 우리는 ‘흠 없이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1테살 3,12-13 참조)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간다. 흥미롭게도 성숙한 사람이 되어 갈수록 사랑의 깊이는 더해간다. 사랑의 깊이와 인간 성숙함의 깊이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이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첫인상’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서로에 대한 첫인상이 모든 갈등의 시작이다. 다아시는 무도회장에서 엘리자베스와 춤을 추라는 주변의 권유를 거절하면서 그녀의 외모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그럭저럭 괜찮지만, 내가 관심 가질 만큼 예쁘지는 않아.” 이런 모욕적인 말을 우연히 들은 그녀는 무도회 직후, “그는 몹시 불쾌하고 끔찍한 사람이며, 비위를 맞출 가치조차 없어”라며, 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다아시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에 대한 그녀의 부정적 판단은 바뀌지 않는다. “그가 내 자존심을 짓밟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자만쯤은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허영심을 상하게 한 그 모욕으로 인한 개인적 감정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아시 집안 집사의 아들인 위컴이 다아시에 관하여 헐뜯는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다아시가 그런 나쁜 사람이라고 바로 평가해 버린다. 스스로 총명하다고 자부하는 그녀는 일방적인 한쪽만의 의견을 듣고, 그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고집하며, 다아시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한편, 다아시의 엘리자베스에 대한 편견은 계급적 우월감과 피상적인 판단에서 시작된다. 첫 만남에서 그녀의 외모와 사회적 지위를 무시하는 태도는 첫 번째 청혼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음’을 고백하는 청혼의 진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보다는, 청혼을 결정하기까지 자신이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과 희생들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나의 더 나은 판단, 가족의 기대, 그대의 열등한 출생, 나의 신분과 처지에 맞서 싸워”야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기중심에서 그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마치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결혼의 승낙을 당연히 기대하는 태도에 “좌절하고 격분한다.” 다아사와 엘리자베스의 첫 만남 서로 참모습 보지 못하고 충돌 시간 지나며 성숙해진 두 사람 이기심 버리고 헌신적인 삶 선택 자기 중심 아닌 ‘타인 중심’ 될 때 진정한 사랑에 도달 할 수 있어 그러나 청혼을 거절당한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자기 성찰의 편지는 그녀가 바라본 자기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후, 엘리자베스의 막내 여동생 리디아 사건을 그녀가 모르게 해결한다. 영웅적인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마침내 두 번째 청혼에서 그는 사회적 계급과 우월감을 모두 버리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한다고 말하며,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의 사랑으로 변화된다. 오만한 아집에서 겸허한 자기 인식으로의 성장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도 자기 성찰의 모습을 보여준다. 청혼을 거절한 후, 그녀는 다아시가 보낸 편지를 여러 번 읽게 된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강한 편견을 가지고” 읽으려 하지만, 여러 번 들여다볼수록 위컴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할 정도로’ 속았는지, 다아시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자신을 얼마나 눈멀게 했는지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통찰력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능력을 지녔다고 자신 높이 평가’해 왔지만, 그것들이 ‘이성이라기보다 허영’이었음을 깨닫는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강도 높은 자기 성찰의 과정은 자신과 상대방에 대해 보다 더 객관적인 지식을 얻게 한다. 신분 사회의 우월감이나 편견에 얼룩진 사랑이 아니라, 상호 간의 성숙한 사랑은 바로 서로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확장으로 가능하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도록 기도한다.(필리 1,9) 당시 필리피는 작은 로마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로마의 문화적 영향 아래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 사는 로마 식민지였다. 로마 문화에서 관계는 계급과 명예, 후원, 의무 등의 가치관에 기반하였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위계보다 상호 섬김을, 명예보다 겸손을, 상호 의무가 아닌 자기 헌신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권고한다. 로마의 문화와 가치관에 대항하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참된 가르침에 대한 지식과 분별력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잘못 적용되거나 오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서로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인식함으로써 사랑에 도달한 것처럼, 필리피 신자들도 그리스도 십자가의 참된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욱더 풍부해진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십자가를 ‘사랑의 학교’라고 표현하였다. 진실한 사랑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적인 삶을 묵상하고 깨닫고 배워간다는 의미이다. 이 ‘학교’에서 사랑은 위로를 주는 감정이나 영적 감미로움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섯 쌍의 부부는 오스틴이 살았던 영국 섭정 시대(1811~1820)의 결혼과 사랑의 여러 문제를 잘 보여준다. 낭만적 사랑은, 참된 사랑 보다는, 주로 돈, 명예, 사회적 지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러한 가치들에 기뻐하고 행복해하였다. 엘리자베스의 똑똑한 친구 루카스가 진실로 사랑을 할 수 없지만, 경제적 안정을 위해 콜리즈를 남편으로 선택한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오스틴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가장 이상적인 부부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섭정 시대의 가치관에 도전하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치열한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화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사랑을 배워야 했던 것처럼, 독자들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배워간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사랑의 학교이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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