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내일 성당 가는 날이지?” 아이가 먼저 기다리는 교회를 꿈꾸며

최근 많은 본당에서 어린이 수가 크게 줄어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아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며 신앙생활을 할 때 성당을 더욱 친숙한 공간으로 느낍니다. 반대로 함께할 친구가 적으면 성당은 점차 재미없는 곳이 되고 발걸음도 멀어질 수 있기에,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배우는가’만큼이나 ‘누구와 함께하는가’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부모가 되어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교적이 지역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출산이라는 현실 앞에서 미래 세대의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유연한 사목적 접근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적은 각 본당에 유지하되 어린이 미사와 주일학교만 구(區) 단위 또는 권역별로 함께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본당의 아이들이 함께 모여 미사와 교리, 다양한 활동을 함께한다면, 더 많은 친구와 함께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성당을 더욱 기다려지는 공간으로 느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참석 인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경험하고 신앙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근 이사하며 다니게 된 서울대교구 장안동본당에서, 어린이 사목이 아이들의 신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새롭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주요한(요한 사도) 신부님께서는 미사가 끝난 후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며 자연스레 한데 어우러지십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익히며, 신앙을 기쁘고 즐거운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미사 중에 아이들이 제대 앞으로 나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모습은 부모님들도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어렵게 느끼는 대신 기쁨 속에서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부모인 저 또한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은총을 느끼곤 합니다. 아이도 이제는 토요일이 되면 “내일 성당 가는 날이지?” 하고 먼저 묻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신부님과 함께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시간이 아이에게는 한 주를 기다리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먼저 식사 전후 기도를 주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저는 오히려 아이를 통해 하느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어린이 사목은 단순히 교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기쁨을 경험하고 공동체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좋은 사례들이 교구와 본당 사이에서 더 많이 적용되고, 서로 배우며 발전할 수 있다면 한국 천주교의 어린이 사목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사목자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성당을 좋아하고 신앙 안에서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한 명의 평신도 아버지로서 이 글을 씁니다. 저출산이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도 아이들이 더 많은 친구를 만나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성당에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 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은 제안이 한국 천주교의 미래 세대를 위한 논의에 작은 씨앗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글 _ 박규식 유스티노(서울대교구 장안동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 (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독자마당] 치유의 하느님

이십 년 전, 시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장례를 치르고 일주일 만에 집에 왔는데, 긴장이 풀려서일까 머리가 아프고 가슴에 통증이 오면서 커다란 물체가 나를 덮쳤다. 그대로 어디론가 헤매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부른다. “엄마 살았어. 깨어났어. 깨어났다고.” 3일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단다. 말로만 듣고 뉴스에서만 봤던 뇌졸중, 무서움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한 달 만에 집으로 왔다. 병원에서는 편하게 울지 못했던 울음을 집에 와서 가슴 찢어지게 울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싫었다. 입은 비뚤어졌고 양쪽 팔은 감각이 없었으며 다리 또한 절름발이가 되었다. 걷는 것도 불편했지만 손을 쓸 수가 없으니 밥 먹을 때가 정말 싫었다. 남편과 딸이 내가 먹을 수 있게 그릇에 덜어 놓으면 겨우 왼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일그러진 입 모양의 나를 슬프게 비추는 거울도 치워버렸다. 둘이서 나를 웃게 하려고 아기 다루듯 애쓰는 모습에, 끝까지 곁을 지켜줄 가족이라 감사했다. 한 달 전의 내 모습은 어디로 가고 다른 사람이 내게 들어와서 이렇듯 야생의 한 송이 들꽃으로 살게 하나.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그러던 중 성당에서 다음 주부터 개강하는 성경통독에 나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하고 싶었지만 발음이 부정확해 자신이 없었다. 며칠을 생각하고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남들처럼 성경을 또박또박 읽지는 못하겠지만 한 자라도 입에서 내뱉게 해 주세요.’ 4주 차까지는 한 글자도 뱉지 못하고 눈으로 읽고 마음속으로 말씀을 되새겼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지도하는 자매가 “오늘부터는 모니카도 통독을 해볼게요. 모두 신경 써 주세요”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나서 울었다.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사랑으로 격려해 주던 자매들이 고마웠다. 주님 말씀을 읽다 보니 일 년이 지났고 우리는 성경을 완독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던 그날 신부님께서 완독 수료증을 주시며 “모니카 자매는 통독을 다시 한번 해서 이번에는 자신 있게 주님 말씀을 또렷하게 읽으세요”라고 하셨다. 그렇게 성경통독을 다시 시작했다. 어눌했던 말은 조금씩 안정을 찾았지만, 팔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다. 새벽이면 매일 성체조배를 갔다. 성체조배실에 들어서면 눈물부터 나왔다. ‘손이 있어도 밥도 스스로 못 먹고 사는데 이런 제 모습을 언제까지 보고만 계실 건가요. 주님, 이런 모습으로 살아온 날이 십 년이 됐어요. 성경필사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어요.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나요.’ 성경통독 과정을 끝낸 어느 날, 성경필사 노트를 구입했다.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기도한 뒤 연필을 잡으려는데 무딘 손가락은 거부했다. 첫날에 몇 시간을 노력했지만 결국 안 됐다. 그 뒤로 매일 몇 시간씩 무딘 손으로 연필을 잡아보려 울면서 주님께 매달렸다. 무딘 손으로 성경필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운 성경 완필을 해냈다. 15권의 성경 노트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내 몸을 살린 것은 의료진이었지만, 내 마음의 고통과 아픔은 나를 사랑하시는 영원한 치유의 하느님께서 낫게 하셨다고 믿는다. 긴 세월 속에서 분명 잃은 것도 있지만, 나는 오늘도 우리 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있음에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살아간다. 아멘. 글_ 손명숙 모니카(인천교구 구월동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 (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2면

[독자마당] 서품(敍品), 그 엄숙한 부르심

이 사진은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며 그분을 닮은 참된 목자가 되기 위해 사제품을 받는 경건한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수난당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겠다는 서약은, 단순한 종교적 의식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가장 깊고 무거운 결단이다. 몸을 바닥에 온전히 맡긴 채 엎드린 두 사람은 단순한 의식의 참여자가 아니다. 스스로를 비우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려는 순간,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가장 낮은 자세를 기록했다. 어둠 속에 부유하는 듯한 상단의 사제복은, 보이지 않는 거룩한 부르심과 신성한 권위를 상징한다. 반면에 하단의 엎드린 두 사람은 인간의 지상적인 한계와 겸손을 나타낸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의례를 넘어, 스스로의 삶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겠다는 침묵의 서약처럼 읽힌다. 평생을 바쳐 걷고자 하는 그 좁은 길 위에서 이 장면은 한 인간이 짊어질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무게를 조용히 환기 시킨다. 나는 이 고요한 찰나를 통해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자 했다. 신의 길을 따르기 위해 선택된 순간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 길 앞에 엎드린 인간의 의지를 담고자 했다. 이는 서품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고통과 헌신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내면을 응시하는 한 장의 기도서이다. 어쩌면 나도 이 기도서를 통해 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 준비가 되었는지 되묻고 싶었는지 모른다. 글·사진 _ 김재필 루카(의정부교구 고양 주엽동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2면

[독자마당] 예수당

세상은 오늘도 묻는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깃발은 바람 따라 흔들리고 권력은 계절처럼 바뀌며 어제의 정의가 오늘의 논쟁이 되고 오늘의 영광이 내일의 폐허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는 묻는다 어느 편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 것이냐고 어디에 서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살아가느냐고 나는 예수당원이다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하느님보다 앞서는 이념이 없고 사랑보다 높은 사상이 없으며 복음보다 위대한 법전이 없음을 믿는 사람이다 세상은 높은 곳으로 오르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고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약한 이의 손을 잡으셨으며 세상은 더 많이 가지라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나누라 하셨다 신앙은 세상을 떠나는 길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 기도는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며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는 결단이다 굶주린 이 앞에서 빵이 되고 외로운 이 앞에서 벗이 되며 눈물 흘리는 이 곁에서 함께 우는 것 그것이 복음이고 신앙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굶주린 이를 위해 빵을 떼는 손 상처 입은 이를 품어 주는 가슴 진실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양심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 그것이 세상을 살리는 힘이다 십자가 아래 서면 원수도 형제가 되고 증오는 눈물로 녹아내린다 그곳에는 이념도 권력의 이름도 없다 오직 하나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진실만이 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세상은 강한 자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바꾼다는 것을 역사는 권력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양심이 만든다는 것을 인생은 많이 가진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많이 사랑한 사람의 승리라는 것을 마침내 모든 깃발이 내려오고 모든 권력이 침묵하며 모든 이름이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날 영원 앞에 남을 한 이름 그 이름은 사랑 그 사랑이 법이 되고 그 사랑이 정치가 되고 그 사랑이 삶이 되는 나라 오늘도 두 손들이 모여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고백한다 나는 세상의 당원이기 전에 하느님의 사람이며 모든 이념의 시민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러므로 끝내 나는 예수당원이다 글 _ 허두환 경일 시메온(대구대교구 달성 가창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2면

[독자마당] 천진암의 큰 울림

하늘에 맞닿은 듯 산이 하늘을 움켜잡은 듯 적막이 고요히 흐르는 깊고 험한 산골짜기 오르고 또 오르니 어머니 태중(胎中) 같은 포근한 터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골방 그 옛날, 그분들의 기도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주님, 바싹 말라버린 조선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나기를 퍼부어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타 들어가는 저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하소서!"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던 불꽃들이 이 깊은 산골짜기를 온통 비추었기에, 어둠에 갇혔던 조선의 하늘이 마침내 열렸나 봅니다. 그 거룩한 가시 돌밭길 발걸음 덕분에 지금 저희는 신앙의 꽃길을 걸으며 과분한 행복에 젖습니다. 그날의 기도가 마른 땅 적신 단비가 되어 오늘 내 가슴으로 보슬보슬 흘러내립니다. 이제 그분들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은 우리가 걷는 길가에 이름 모를 들꽃으로 피어나 여전히 향기로운 고백을 건네어 옵니다. "거룩한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일구신 이 땅에서 이제는 우리가 당신의 빛이 되게 하소서." 굽어보는 산등성이 너머로 은총의 노을이 따스하게 내려앉는, 여기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천진암 성지입니다. 글 _ 박기섭 바오로(안동교구 주교좌목성동본당)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 등을 자유롭게 보내주세요.(원고 분량 A4 2/3장 이내) ※보내실 곳 (우) 04919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중곡동) 2층 편집국 독자마당 담당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22면

[독자마당] 길 잃은 한 마리 양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오늘도 숨 가쁜 하루가 지나갑니다. 새벽 별을 보며 집을 나서고, 어둠이 내려앉은 후에야 돌아오는 고단한 삶의 현장입니다. 휴일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한 팍팍한 삶 속에서도, 가슴 한편의 작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들은 폭풍우 속에서 촛불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성전을 향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고 하셨습니다. 길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길을 잃지 마라, 냉담하지 마라”고 호소하면서도, 정작 그 양들이 목을 축일 수 있는 우물을 하나둘 덮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돌아보게 됩니다. 바리사이의 율법적 의로움을 좇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좇습니까? 교회는 신자들에게 ‘신앙인의 향기’를 강조하지만, 정작 그들이 발 디디고 선 곳은 삶의 모진 풍파가 몰아치는 일상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높은 담장 위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먼지 날리는 시장통에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언어와 눈높이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형식보다 ‘정의와 하느님 사랑’을 강조하셨던 그분의 뜻을 되새겨 봅니다. 그리운 것은 목자의 흙냄새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신부님들에게선 흙냄새가 났습니다. 가정을 방문해 냉담 교우의 차가운 손을 잡고, 가난한 이들을 남몰래 도우시던 그 땀방울이 곧 살아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지금의 사제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양 떼와 함께 걷는 동반자가 아닌 관리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수직적 관계가 아닌, 거친 파도를 한 배를 타고 헤쳐 나가는 동반자, 즉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성직자부터 평신도까지 경청과 대화를 통해 함께 걷는 길입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존중하며 교회의 방향을 함께 식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시노달리타스 정신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목마름을 달래러 찾아가는 미사에서부터 실현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미사는 모두가 함께 걷는 길을 향해 열려 있는지, 아니면 효율성의 논리로 그 문턱을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효율성을 이유로 미사 시간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 머무르라”고 당부하지만, 늦은 퇴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온 ‘한 마리 어린양’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갈 곳을 잃습니다. “미사가 있는 더 큰 본당으로 가라”는 말은, 목마른 이에게 “우물 문 닫았으니 딴 마을로 가라”는 안타까운 답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새벽 미사는 뒤로 밀리고, 저녁 미사마저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 겨우 동네 작은 성당을 찾은 이들에게 ‘풍요로운 본당’ 이야기는 너무나 먼 이야기입니다. 지치고 힘든 그 한 마리 양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라면 이 닫혀가는 문 앞에서 어떤 말씀을 건네셨을까요?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이 이 시대에 오신다면 땀 흘려 늦게 온 신자를 위해 기꺼이 다시 초에 불을 붙이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잘 정돈된 아흔아홉 마리의 대열이 아니라, 덤불 속에 갇혀 울고 있는 단 한 마리를 향해 손을 뻗는 그 간절한 마음일 것입니다. 글 _ 전백근 요셉(전주교구 호성동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2면

[독자마당] "가정, 말씀으로 피어나는 작은 교회"

대구대교구 대봉본당이 5월 성모 성월을 맞아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신앙의 뿌리를 튼튼히 다지기 위해 ‘성모 성월 성경가훈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본당 공동체가 지난 4년간 꾸준히 기도하며 정성을 쏟아온 ‘가정 성화’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김충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임신부는 가정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앞선 4년 동안 매월 넷째 주를 ‘가정 주일’로 지정해 운영해 왔다. 가정 주일에는 온 가족이 함께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가정 기도 바치기, 가정 안에서 세례명 부르기 등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활동을 통해 가정 성화의 영적 토대를 다졌다. 김 신부는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되는 가장 작은 교회”라고 강조하며, “지난 4년간 매월 가정 주일을 지내며 쌓아온 기도와 노력이 성경 가훈 전시라는 구체적인 결실로 나타나게 되어 매우 뜻깊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구대교구의 ‘1인 1개의 성경 구절 갖기 운동’에 발맞춰 신자들이 성령 강림 대축일 전까지 성경 가훈과 더불어 각자의 성경 구절을 정하도록 권장했다.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손길로 완성된 200여 점의 성경 가훈 작품은 5월 9일부터 17일까지 9일간 성당과 야외 마당 일원에 전시되었다. 앞서 4월부터 2주간 진행된 접수 기간에는 각 가정이 회의를 거쳐 중심이 되는 성경 구절 중 하나를 선정해 신청하도록 이끌었다. 특히 이번 전시는 가정위원회 회원 중 이선영 로사, 박영주 가브리엘라 자매의 노고가 더해져 완성되었다. 이웃 가정이 말씀 안에서 하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 내려간 액자들은 그 자체로 나눔과 사랑의 실천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본당은 전시가 끝난 후, 출품된 성경 가훈 액자들을 각 가정에 전달했다. 각 가정이 거실 등의 공간에 성경 말씀을 모심으로써, 일상에서 ‘작은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가정위원회 회원들의 정성과 각 가정의 신앙 고백이 담긴 작품들은 전시 기간 내내 보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각 가정으로 돌아간 성경 가훈은 앞으로 가족 구성원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 성모 성월에 마련된 이번 전시는 성모 마리아의 순명과 사랑을 본받아, 각 가정을 성가정으로 가꾸어 나가는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 _ 예옥현 베로니카(대구대교구 대봉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2면

[독자마당] ‘한사랑 가족 공동체’에서 열두 해를 맞으며

2013년 5월,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가는 시간, 프란치스코 수도회 박재한 루카 신부님을 통해 정말 우연히 ‘한사랑 가족 공동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서울 중림동 쪽방촌에 자리 잡아,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밥상과 쉴 곳을 내어주며 자립을 돕는 소중한 사랑방입니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신 하느님께서 ‘한사랑 가족 공동체’로 이끌어 주신 시간이 어느덧 12년째 접어듭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봉사한다는 마음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의 식구들과 더불어 보낸 시간을 통해서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만난 벗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만남 자체가 참으로 편안해졌습니다.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간…. 한 달에 한 번뿐이지만, 매월 두 번째 주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날입니다. 아침 일찍 잔칫집 분위기라도 내려고 전이나 튀김을 하는 저희의 마음을 아시는지, 공동체 식구들과 수사님 그리고 간혹 신부님께서도 “냄새 좋아요”라며 맛을 보시곤 합니다. 솜씨가 부족해 아주 맛있게 끓이지는 못하는 국수지만, 요리하는 저희의 정성을 보아 즐거운 마음으로 맛있게 드셔 주시는 모습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좁은 방에서 거룩한 미사를 드릴 때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실 때도 이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에서 미사를 집전하시는 사제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함께해 주시는 수사님들의 모습에서도 하느님께 봉헌된 삶, 즉 그리스도께 바치는 향기가 느껴집니다. 독서와 미사 해설을 맡아 주시는 형제들의 모습은 신심으로 가득하며, 가난한 삶 속에서도 봉헌의 바구니는 정성으로 넘쳐납니다. 가끔 윤 프란치스코 신부님과 다과를 같이할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각자 태어난 곳도 다르고 살아왔던 환경도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을 신부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이토록 끈끈한 한 식구로 만드셨을까요? 그간 얼마나 많은 기도와 희생으로 노력해 오셨을지 생각하면 저희 또한 본받고자 다짐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 귀한 시간 속에서 영적 상담과 지도를 받을 수 있어 참으로 행복합니다. 윤석찬 프란치스코 신부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고 바오로 신부님, 백 에드몬드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격의 없이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한사랑 가족 공동체 실장님과 식구들께도 인사를 전합니다. 백 프란치스코 님과 마리아 님 내외분이 전례와 반주를 통해 하느님께 거룩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봉사해 주시는 것, 한사랑 공동체 식구들을 위해 김치와 찬거리를 만들어 보내주시는 후원자님들, 정성스레 맛깔나는 떡을 만들어오시는 형제님, 단주 모임을 주관해 주시는 분들, 그리고 저희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해 주시는 경기도 용인 지역 군종회원회 회원분들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지면을 통해 전합니다. “주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복음의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하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당신의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 그리고 영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친교의 부르심에 신앙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창설 100주년 기도문 중) 글 _ 김영미 바울라(수원교구 용인 삼가동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22면

[독자마당] 오늘은 나, 내일은 너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참조) 우리 가족이 함께 다니는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에는 연도실이 있습니다. 장례식장이라고도 부르는 그곳에서는 수시로 연도가 이루어지고, 연도 안내판이 성당 마당 입구에 세워져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태어나는 데는 어느 정도 순서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것이 새삼 제 가슴에 깊이 와닿습니다. 젊은 이도, 나이 든 이도, 건강한 이도, 병든 이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합니다. 집 근처 대구대교구청 안에 자리한 성직자 묘지로 들어서는 입구 양쪽 벽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오늘은 내가 무덤 속에 잠들어 있지만, 내일은 바로 네 차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미 세상을 떠나 흙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이들이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전해 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피해 갈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바로 죽음입니다. 성당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장례 안내를 볼 때마다, 죽음이란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수시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이 말씀은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 죽고, 그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대전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 때는 사랑의 실천을 많이 했는지를 평가하실 것이고, 그 기준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벌인지를 결정짓습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또 언제 어떻게 우리를 부르실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다만 한 가지, 주님께서는 도둑처럼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처럼, 그러나 두려움이 아닌 감사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는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밥은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밥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해 주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하루, 내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는 빛나는 상급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주님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고, 저희 또한 그 자리에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여 주소서. 아멘.’ 글 _ 현창걸 세바스티아노(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본당)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2면

[독자마당] 성모님께 드리는 한 아버지의 고백

아름다운 장미와 빛나는 별 그리고 아카시아 향기가 그윽한 오늘 밤, 그리운 성모님을 불러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이 말씀하신 순종의 응답으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고 어지신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 그래서 오늘 밤은 더욱더 마음이 뭉클합니다. 1997년 5월의 어느 날 한 영혼이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을 때, 성모님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전구해 주셨습니다.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냥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날 성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세속에 휩싸여 방탕의 어두운 길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서서 성모님께 드리는 장미와 촛불을 바라보니, 저의 지난 세월이 더더욱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저는 일흔이 넘은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입니다. 삶의 고비마다 늘 지켜보고, 보듬어 주시는 성모님의 지극한 사랑의 손길이 있었기에 따뜻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의 사랑스러운 자식들도 만났습니다. 그날 이후, 나만을 생각하던 삶에서 벗어나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했고, 때로는 길고 고단하기도 했습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다치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때로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말없이 지켜봐야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제, 자식들은 또 다른 가정을 이루어 모두 떠나고 저는 아내와 그 시절을 뒤돌아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으셨던 성모님이 생각납니다. ‘아, 성모님의 마음이 이런 거였구나!’ 묵묵히 뒤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시던 성모님의 모습이 제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제 아내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로서의 제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며 고통 중에서도 묵묵히 견디셨던 그 모습이 이제야 제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그 옛날, 당신 아들을 십자가 아래에서 바라봐야 하셨던 성모님의 아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아마 저였다면,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애로운 성모님!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삶은 예전보다 더 불안해졌습니다. 성모님께서 저희를 위해, 우리 자녀들을 위해 지금도 기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길을 잃지 않고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품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도와주십시오. 항상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의 손을 내어 주십시오. 성모님, 저희 모든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글 _ 박기섭 바오로(안동교구 주교좌 목성동본당)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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