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신앙·희망·참사랑을 통해 찾는 신앙인의 행복한 직장 생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긴 제목을 가진 드라마가 많은 직장인을 울컥하게 했다. 이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들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렸다. 치열한 성과 경쟁과 구조조정의 불안, 회사 정책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직장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실적 압박 속에서 승진을 앞두고 동료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구조조정 소문에 마음이 무너졌다가 다시 버티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주인공 김 부장은 겉으로는 성공한 중간관리자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무엇이 정말 옳은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내 인생의 마지막 기준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사람이다. 거의 손에 잡은 듯했던, 자신의 성공을 놓치고 좌절하는 김 부장을 바라보며,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진 능력과 강점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對神德)’, 곧 신앙(fides), 희망(spes), 참사랑(caritas)에 대한 설명이다. 토마스 성인은 좌절하고 방황하는 김 부장과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조언해 줄 수 있을까? 자연적인 덕과 구별되는 초자연적인 대신덕 토마스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의 자연적 상태에 적합한 덕들과,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덕들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토마스는 “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도덕적 덕 외에도, 초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다른 덕들”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이 덕들을 ‘대신덕(virtus theologiae)’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향주덕(向主德) 또는 ‘신학적 덕’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덕들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I-II,62,1) 여기에는 지성에 있어서 ‘신앙’, 의지에 있어서 하느님을 향하는 ‘희망’ 그리고 그분과 일치하게 해주는 ‘참사랑’이 속한다.(I-II,62,3) 이 덕들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하느님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를 인간의 반복된 행위로 얻어지는 ‘획득된 덕’(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성적 덕이나 도덕적 덕)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주입(注入)된 덕’이라고 불렀다.(I-II,62,1; II-II,24,12) 신앙·희망·참사랑 뜻하는 ‘대신덕’…하느님이 신앙인에게 부여하는 은총 성공과 실패 앞에 항상 방황하며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직장인들 자만·절망 대신 신앙의 덕 갖추고 초자연적 행복 향한 여정 떠나길 ‘획득된 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사와 지상의 행복에 적합하게 만들어주지만, ‘주입된 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준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이 덕이 주입되면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자연 본성을 넘어서는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대신덕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자유로운 선물이다. 대신덕으로서의 믿음(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영역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김 부장이 잘 보여주듯이, 인간적인 영역에서 믿음과 희망에는 통찰력 부족, 무력함 등의 결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확실한 믿음과 희망을 진정한 덕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덕인 희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바람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란 덕의 대상은 참된 행복인데, 이는 “획득하기 어렵지만 가능한 미래의 선”(II-II,17,7)이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참사랑이라는 다른 대신덕도 하느님의 결함 없는 권위와 전능한 능력으로 지탱되기 때문에 인간 행위가 지닌 불확실함과 무력함이 없다. 대신덕을 통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 좌절했던 김 부장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선 둘째 덕인 ‘희망’을 집중해서 살펴보자. 토마스는 희망을 자만(praesumptio)과 절망(desperatio) 사이의 중용이라고 분석한다.(I-II,64,4). 실제 직장 생활에서 이 중용을 찾기 어려운 것은 대기업 문화로 대표되는 경쟁 사회가 이 두 극단으로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의 김 부장처럼 승진에 성공하고 인정받을 때 우리는 “내 능력과 인맥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흐르기 쉽다. 중반 이후의 김 부장처럼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 김 부장은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고 느끼는 절망으로 기울고 만다. 만일에 김 부장에게 희망의 덕이 주입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최종 목적이 “이 회사,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희망을 통해서 하느님을 우리 자신을 위한 행복의 원천으로 사랑하게 된다. 희망이라는 덕은 성과주의와 번아웃 사이에서 김 부장이 절망과 냉소에 빠지지 않도록, 최종 목적을 향한 긴 호흡을 제공한다. 신앙이 없는 김 부장들은 실적 압박과 보고서 조작의 유혹, 상사의 눈치와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신앙이라는 덕을 갖추게 된다면, 사내의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고, 양심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 열정적으로 노력하던 김 부장은 팀을 위해 희생하고 부하 직원을 감싸는 모습에서 ‘좋은 상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가 팀원의 선과 공동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평판·이미지·승진이라면, 토마스의 기준에서 이는 “참되지만 불완전한 덕” 혹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일 뿐이다.(II-II,23,7). 그가 참사랑을 갖추게 된다면, 그의 모든 덕과 선택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공동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에 맞게 재정렬하여, 팀 운영과 회사 정치 속에서도 타인을 수단이 아닌 친구이자 이웃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은 좌절하는 수많은 김 부장을 단지 ‘생존·승진·몰락’의 서사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정자’로서, 대신덕 안에서 자연적인 덕을 구체적 상황에서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I-II,62,4; 63,3) 대신덕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현대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를, 하느님과의 우정에 의해 통합된 인격의 드라마로 변형시키는 놀라운 힘으로 작용한다. 직장을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회사를 무대로, 신앙·희망·참사랑이라는 은총의 습성을 따라 자신의 직장 생활을 초자연적 행복을 향한 여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과도함도 부족함도 없는 중용을 통한 행복 추구

전 세계가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대해 열광하고 있다.특히 미국 소비자 기술협회가 주관한 ‘2026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서는 피지컬-AI를 대표하는 로봇들이 인간과 매우 유사한 동작이나, 오히려 인간을 능가하는 다양한 능력을 선보여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지난 12개월간 벌어진 변화는 과거 한 세대가 겪었던 변혁에 맞먹는다. 기술이 예측을 추월했고, 투자 시장에 전례 없는 자금이 몰려들며, AI 혁명은 ‘가능성’에서 ‘현실’이 되었다. 인간들에게 이제 과도한 육체노동이나 반복되는 가사와 돌봄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AI를 통해서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행복’이 증대될 것을 꿈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곳곳에서 위태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많은 이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AI의 답변이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현상에 자주 빠진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더욱이 AI와 상담을 지속하던 학생은 그 충고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AI를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엄청난 전력 수요 때문에 사라져가던 원자력발전소가 다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특수가 버블이라는 의심도 나타나고, AI의 발전으로 많은 이가 일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며, 범용지능(AGI), 초지능(ASI)까지 발전하면 인간이 AI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확산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찬성이나 반대 이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는 이렇게 제3의 길을 찾기 위한 덕을 ‘중용’이라고 불러왔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 중용 개념의 수용과 변형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을 적극 수용하여, 이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우선 토마스에 따르면, 모든 ‘획득된 덕’에 적용되는 어떤 공통적 특징은 그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간’, 즉 중용(medium)에서 성립된다는 점이다.(I-II,64,1) 도덕적 덕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습성’이며, 과도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때 악습(vitium)이 발생한다. 용기를 예로 들면, 두려움이 지나치게 적어 무모해지는 것도, 지나치게 많아 비겁해지는 것도 모두 악습이며, 그 사이에서 상황과 대상, 행위자의 능력에 상응하는 ‘마땅한 정도의 두려움’을 지키는 것이 용기의 중용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이 중간은 단순히 ‘산술적 평균’이나 ‘미지근함’이 아니라, ‘이성의 중용(medium rationis)’을 의미한다. 무엇이 중용인지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인생 경험이 많고 상황 판단력이 있는 ‘현명(prudentia)’의 덕을 가진 사람이 이 중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덕들과 중용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절제와 용기 같은 덕들은 정념의 내적 조절을 통해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상대적으로 규정되지만, 정의의 덕은 사물과 몫의 객관적 분배에서 중용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갖는다. “정의 안에서 이성의 중용은, 정의가 더도 덜도 아니고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한에서, 사물들의 중용과 동일하다.”(I-II,64,2) 이처럼 토마스는 도덕적 덕의 중용을 정념 중심의 주관적 측면과 정의의 객관적 구조를 함께 고려하여 정교하게 구분한다. 인공지능 혁명에 큰 기대감도 있지만 ‘기술에 지배당할 우려’ 두려움 확산 중용의 덕으로 올바른 이성·윤리적 성찰 균형 찾고 모두의 행복 증진 추구 해야 중용과 다른 덕들과의 연결 여기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의 궁극 판단 기준을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에 두는 점에서 그 이론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킨다. 그에 따라 ‘현명’이라는 덕은 단순히 근시안적 실용 이익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 곧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관점에서 개별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덕이다. 따라서 도덕적 덕의 중용을 판단하는 궁극 기준은 ‘어떤 것이 최종 목적의 달성에 얼마나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현명’의 덕은 도덕적 덕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예컨대 탐욕과 불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무리 계산이 빠르더라도 참된 의미에서의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도덕적 덕 또한 현명 없이 완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한 덕에서 완전한 중용을 이룰 수 있으려면, 다른 덕들에서도 조화로운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토마스는 덕 개개의 균형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덕의 연결(connexio virtutum)’까지를 강조한다.(I-II,65,1) 지성적 덕으로 확대된 중용 토마스는 중용 개념을 도덕적 덕에만 국한시켰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지성적 덕에도 확대 적용한다. 먼저 지성적 덕의 경우, 토마스는 진리를 지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지성의 지나침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잘못된 긍정’이며, 부족함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부정’이다.(I-II,64,3) 그러므로 지성적 덕의 중용은 AI 시대에 종종 망각되고 있는 ‘사물 자체와의 정확한 일치’를 통해 성취된다. 이는 단지 논리적 형식이나 계산의 올바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정직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뜻한다. 특히 지혜(sapientia)는 제일 원리, 곧 하느님의 본질과 창조된 세계의 궁극 질서를 실제로 인식하는 덕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중용은 ‘미지근한 회색지대’가 아니라, 과도함과 부족함을 모두 넘어서, 올바른 이성(현명)과 최종 목적(하느님)에 비추어 가장 정확한 선을 선택하는 덕이다. 이제 각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 세계는 인공지능의 시대로 급속하게 진입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중용’의 덕이 필요해 보인다. 과도한 열광으로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산업혁명 초기에 기계를 파괴하던 러다이트 운동식의 무조건적인 반대도 바람직하지 않다. 토마스에 따르면, 중용은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이성이 끊임없이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윤리적 성찰 없이 최대한 빠른 상용화와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미 제기된 위험성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해결책들을 모색하며 개발자나 투자자뿐 아니라 실제 사용자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개발하는 길이야말로 ‘중용’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현명을 비롯한 덕의 훈련을 통한 행복 추구

TV의 아침 방송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하는 건강식품을 꾸준히 섭취하더라도, 노화와 함께 늘어나는 다양한 질병을 막아낼 수는 없다. 병에 걸리면 대부분의 사람은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지인들에게 물어 자신의 병을 치유해 줄 명의(名醫)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 유명세를 탔던 의사들이 과도한 욕심으로 몰락하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된다. 이와는 달리 드물지만 우연히 들른 병원에서 인간적인 따뜻함과 뛰어난 학식을 갖춘 의사를 만나 감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피하고 싶은 의사와 만나고 싶은 의사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최소 10년 이상의 교육과 실습 과정을 마친 전문의들은 가히 ‘이해’와 ‘지식’이라는 사변이성의 덕이나 ‘기술’이라는 실천이성의 덕까지 갖추었다고 볼만하다. 특히 고(故) 이태석 신부님이나 선우경식 원장님처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분들은 자주 ‘좋은 의사’를 넘어 ‘좋은 인간’이기도 하다. 이런 분들은 소위 고대철학에서 말하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사추덕(四樞德)’을 갖춘 분들이라 불릴 만하다. 그렇다면 ‘사추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추덕의 역사적 배경과 새로운 체계화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제시했던 사추덕을, 인간을 윤리적으로 완성하는 ‘도덕적 덕’들로 더욱 확장시켰다. 곧 용기, 절제, 아량, 관대, 웅지, 명예에 대한 사랑, 온유, 우정, 진실함, 재치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토마스는 이런 긴 목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I-II,60,5) 그 많은 덕을 플라톤의 사추덕으로 다시 환원해서 정리했다. 이 네 가지 덕들은 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모든 핵심 내용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I-II,61,3) 그에 따르면 ‘지복직관’이라는 인간의 최종 목적은 사후에야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세에서 인간적인 삶은 바로 ‘도덕적 덕들의 실천에 기반을 둔 활동적 삶(vita activa)’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덕들은 우리 삶에 있어 주된 덕, 즉 ‘추요덕(virtutes cardinales)’이라 불린다. 이 세상에서 최선의 삶은, 문이 경첩(cardo)을 회전하듯, 주로 그러한 덕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전통적인 사추덕을 새롭게 정리하기 위한 틀로서 인간 영혼의 대표적 기능인 지성, 의지, 욕구를 사용한다. 지성의 행위들을 조절하는 것이 ‘현명(prudentia)’이다. 사변이성의 덕이자 행위의 목적과 연관된 ‘지혜’와는 달리, 현명은 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의 선택에 관계하는 실천이성의 덕이다. 의사의 경우, 병든 이웃을 치료하려는 목적은 지혜에 의해서 추구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각각의 환자를 치료할 것인지는 현명을 통해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올바른 치료 방법이 선택되었다 하더라도 그 치료 행위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덕들이 필요하다. 인간의 습성들을 규제하여 욕구 능력이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도덕적 덕들이다. 행위의 실행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지성적 욕구인 ‘의지(voluntas)’를 따르는데, 이와 연관된 덕이 바로 ‘정의(iustitia)’다. 정의가 의지를 완성하여 타자에 대한 행위의 올바름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적 부분은 이성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저항하기도”(I-II,58,2)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적 욕구’에 따라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행했을 때 다가올 수 있는 위험과 고통이 무서워서 피하고 싶다면 ‘용기(fortitudo)’의 덕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욕정적 욕구’에 따라 자신이 무엇인가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생활의 올바른 균형을 깨트릴 위험이 있다면 ‘절제(temperantia)’의 덕을 통해 이를 억제해야 한다. 복잡하게 확장됐던 도덕적 덕들 대신 ‘지혜·용기·절제·정의’의 사추덕 재정립 지성·의지·욕구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도덕적 덕 설명 행위의 올바른 기준인 ‘현명’ 특히 강조…덕의 훈련 통해 진정한 행복 추구해야 사추덕에 대해서 숙고하면서, 갑자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인터뷰 도중에 예외적으로 눈물을 터뜨리셨던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우리나라 전체가 뒤숭숭했다. 김 추기경님은 “하느님은 한국인에게 좋은 머리를 주셨는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라고 한탄하셨다. 황 교수와 그의 연구팀들은 최고의 과학적 지식과 유전자 치환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기술로 난치병 환자들을 모두 치료하려는 선한 의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험 결과를 정의롭게 취급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할 용기도 지니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수령한 막대한 연구비와 이에 따른 명예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현명하지 못하게 실험 결과를 조작해서 세상을 속이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뛰어난 손기술을 통해 발달해 온 의학적인 발전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면, 사추덕이 필요해 보인다. 현명의 덕이 지닌 특별한 중요성 토마스는 도덕적 덕에 관해 논의하면서 “도덕적 덕은 현명 없이 존재할 수 없다”(I-II,58,4)고 말함으로써 현명의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지성적 덕들이 충만해도, ‘행위의 올바른 기준’인 현명이 결여되면 발달된 지식과 기술은 전체 삶과 공동선의 관점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나 행정가들은 현명의 덕이 없다면 희귀질환 치료제, 유전자 편집, 고가 중환자 치료의 자원 배분에서 누구의 생명을 우선하고 어떤 취약성을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해 바르게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학의 발전도 사추덕이 결여되어 있을 때, 오히려 구조적 부정의를 실행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세속적인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건강을 얻고자 한다면, 뛰어난 의료인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 각자가 자신의 상황을 ‘현명’하게 인식하고, 의사가 제시한 치료 수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도 지녀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라면, 수술이 두렵다고 하더라도 용기를 내야 한다. 자신이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당뇨병 위험이 있다면 케이크와 단 음료의 섭취는 ‘절제’해야 한다. 이렇게 사추덕을 지니는 것이 어찌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과정에서만 유용할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주 쉽게 인생의 거의 모든 경우에 사추덕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혜’를 통해 도달하는 행복

인간이 문자를 발견한 이래, 인류는 꾸준히 지식을 축적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지식의 증가를 무색하게 하는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엄청난 양의 지식을 자체 학습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인간의 지식은 거의 무한대로 증식해 가고 있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고 외치며 권력과 행복을 추구하던 인간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열린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인공지능은 현대판 소피스트이며 지식은 난무하고 지혜는 사라진다’라는 비판도 등장한다. 더 나아가 AI가 가져올 급격한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할 것을 우려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연 축적된 지식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 차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과 지혜의 대비는 대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덕’에 대한 성찰에서 제시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전통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 지혜의 전통과 융합시킴으로써 훨씬 더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을까? 지성적 덕에 관한 철학적 성찰 ‘철학(philosophia)’은 처음부터 ‘지혜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지만, 지혜를 제1원리들에 대한 인식과 직접 연결시킨 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선 단련을 통해 얻어지는 ‘품성적(도덕적) 덕’과 주로 가르침에 의해 얻어지는 ‘지성적 덕’을 구분하고, 지성적 덕을 사변이성의 덕과 실천이성의 덕으로 세분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지식(scientia), 이해(intellectus), 지혜(sapientia)라는 사변이성의 덕들과 기예(ars)와 현명(prudentia)이라는 실천이성의 덕을 구분해 활용했다. 토마스는 우선 덕에 대해 논하며 사변이성의 덕들에 집중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알려지는 진리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덕을 ‘이해’라고 부른다. 백지상태(tabula rasa)에 있던 지성이 이해의 덕에 의해 제1원리들을 파악하면, 지성은 이제 추론적 탐구의 출발점들을 갖추게 된다. 추론을 통해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데, 특정 부류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위한 덕이 ‘지식’(학문)인 반면에, 모든 인간 인식의 제1원리를 인식하기 위한 덕은 ‘지혜’라고 불린다.(I-II,57,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지성적 덕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지만, 토마스는 이것들은 선을 행하는 한에서가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 주는 한에서 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I-II,57,1) 지식은 특정 대상의 진리 추구하지만…지혜는 모든 인류의 원리 통찰하는 힘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 받으려면…파편화된 지식 넘어서는 지혜 필수적 지식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 통찰하고…마음 속 지혜로 하느님과 친교 이뤄야 성령의 선물인 지식과 지혜 그뿐 아니라 토마스는 신앙에 대한 논고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원천을 지닌 ‘성령의 선물’로서의 이해, 지식, 지혜에 대해서 논한다.(II-II,4,8) 이 선물들에 대한 논의는 이사야서 11장 2절(불가타판)에서 유래했고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유한 의미에서 ‘지혜’라고 불려야만 하는 영원하고 신적인 대상들을 지성적으로 파악하는 일과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시간적이고 인간적인 대상들에 대한 추론적인 인식을 구별했다. 토마스는 이러한 이론을 수용해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선물들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I-II,68,2) “지식이라는 명칭은 … 일종의 판단의 확실성을 내포한다. 만일 판단의 확실성이 가장 높은 원인을 통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지혜’라는 특별한 명칭을 가진다. … 그런데 단적으로 가장 높은 원인, 즉 하느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단적으로 ‘지혜로운 이’라고 언급된다. 따라서 신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식이 ‘지혜’라고 불린다. … 그래서 지식의 선물은 오직 인간적인 사물들 또는 창조된 사물들에 관한 것이다.”(II-II,9,2) 이렇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을 종합해서 이 세상의 사물에 관한 연구에 필요한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식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지혜의 필요성 그렇지만 토마스는 ‘인간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악덕과 다를 바 없다’던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 달리 지식에게도 긍정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토마스에 따르면, ‘더 높은 것에 의한 판단은 낮은 것에 의한 판단을 대체하거나 압도하지 않는다.’(II-II,120,1,ad2) 토마스는 당대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지식을 교만과 호기심이라고 평가절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지식 안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제한성을 주목하며, 인간의 참행복은 오직 ‘지혜’를 통해 도달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지혜는 지식의 결과물들을 종합하고,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통찰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혜 없이는 지식이 파편화되거나 제한된 관점에 머물 수 있다. 또한 지혜는 단순히 지식을 ‘통제’하는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삶의 의미나 도덕적 판단에 올바르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지혜란 이론 차원에 머물며, 참행복의 실현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지혜라고 불린 신학과 지혜의 선물은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표를 이해하고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방대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열렸지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정보의 축적을 넘어 참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실재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부분과 전체를 통합하며, 의사결정과 그 결과를 숙고하는 능력”으로서의 ‘마음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교황청 인공지능(AI)에 관한 문헌(Antiqua et Nova)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완성도는 그가 가진 정보나 지식량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할 줄 아느냐로 측정”된다. 바로 이 마음의 지혜가 끝없이 발전하는 과학적인 지식들을 인간 중심으로 활용하고, 전인적 발전, 인류의 공동선, 창조질서의 보전을 넘어,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비출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덕 없이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덕은 더 이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을 단어이자, 사람들이 그에 대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는 구식 단어”라고 말했다. 사실 근대 이후에는 전통 철학에서 윤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던 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의무론·공리주의·감정주의가 채웠다. 계몽주의와 근대 자연과학은 자연과 인간 안의 목적 개념을 배제했고, 이와 연관된 덕은 부수적이거나 개인적 성향 정도로만 취급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생활에서는 도덕과 관련된 언어가 남아 있으면서도 윤리적 판단에 대한 공통된 기반이 붕괴돼 버렸다. 그나마 20세기 중반 이후에 상황이 변화되어, 앤스콤(E. Anscombe)과 매킨타이어(A. MacIntyre) 등의 학자들은 도덕 생활을 위해 덕에 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덕 윤리를 대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이 다시 주목받게 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덕 전통이 실제 삶을 포괄하는 도덕의 기준으로 작동하던 시대와는 달리 현대 사회에는 덕 윤리 자체가 하나의 ‘경쟁 이론’으로 취급될 뿐이다. 현대인들은 니체의 말처럼 덕을 강요된 사육이나 운동선수의 지나친 훈련처럼 여기며, 수도원에서나 적합한 것으로 취급한다. 철학 상담의 창시자 아헨바흐(G. Achenbach)에 따르면, 오늘날 덕이 사라진 곳에는 악덕들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게 된다. 그러나 덕은 특별한 것이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것으로서, 덕 없이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신학대전」에서 누구보다도 덕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덕에 대해서 어떤 내용을 설명할까? 본격적인 성찰에 앞서 우선 철학사 안에서 덕에 대한 이론이 어떻게 발전해 왔고, 토마스가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에 대한 커다란 윤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한 덕 개념 이미 소크라테스는 덕 있는 습성이 올바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돕는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덕이 무엇이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규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영혼의 세 부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인간의 윤리적인 특성도 드러난다고 주장하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혼에 따르는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절제’라는 상태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 또한 기개혼에 따르며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욕망에 종속되면 오히려 ‘비굴함’을 드러내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의 덕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성혼을 따르는 사람이 국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유익한 지식을 가지려면 ‘지혜’의 덕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올바르게 되는 상태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제 일을 하는’ 경우이며, 이때 영혼의 조화가 이루어지며, 이를 위해서는 ‘정의’라는 덕이 필요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4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다. 윤리적 판단 기반 붕괴된 현대사회…덕의 윤리도 경쟁 이론으로만 취급 ‘사추덕’으로 대표되는 고전적 이론…「신학대전」에서 종합해 계승·발전 하느님의 은총 통해 가지게 되는 신앙·희망 등 초인간적 덕까지 포괄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기회가 왔을 때 언제나 주요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다. 따라서 덕은 자신 속에 ‘잘함’ 혹은 탁월성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으며, 그 계기를 통해서 올바른 행동들을 지속적으로 해 나갈 수 있다. 더욱이 영혼의 덕에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은 자신의 최종 목적인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품성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그 중간을 실행하는 것, 즉 ‘중용(中庸)’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라고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용기라는 덕은 만용과 비겁의 중용이라고 말한다. 절제도 인색과 마구 돈을 쓰는 낭비의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은 자신의 상태와 그 상황에 맞게 찾아가야 하는,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시도해야 하는 윤리적 과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고전적 덕 이론의 체계화 플라톤의 4추덕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온 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 이미 초기 스콜라 학자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대한 강조는 13세기 중반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번역 소개되면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신학대전」에서 절묘하게 종합해 낸다. 토마스는 “작용적 습성인 인간적 덕은 하나의 선한 습성으로서 선을 산출한다”(I-II,55,3)고 말한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토마스에 따르면, 덕은 획득된 능력이자 작용적 습성이며 훈련과 교육을 통해 획득된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덕에 관한 규정뿐만 아니라 지성적 덕과 도덕적 덕에 관한 구분도 그대로 수용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플라톤이 강조한 지혜는 이해, 지식과 함께 지성적 덕에 속한다.(I-II,57,2) 따라서 그는 도덕적 덕의 핵심을 이루는 4추덕에서 지혜라는 용어를 ‘현명’(prudentia)이라는 용어로 대체한다. 또한 그 순서도 조금 변형시켰지만, 4추덕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성의 규범에 ‘현명’, 의지의 규범에 ‘정의’, 탐욕적 욕구의 규범으로 ‘절제’, 분노적 욕구의 규범인 ‘용기’(I-II,61,2), 이 네 가지면 도덕적 덕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지나침이나 부족 때문에 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의 일치됨’인 “덕은 중용을 지키는 데 있다”(I-II,64,1)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이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고대 그리스철학의 다양한 유산이 「신학대전」 안에서 종합되고 놀라울 정도로 체계화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덕에 관해서 단지 고대철학을 계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들이 언급했던 인간적 덕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가지게 되는 신앙, 희망, 참사랑이라는 초인간적 덕들을 모두 포괄하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토마스가 이 어려운 과제를 어떻게 수행하며 이를 통해 악덕이 잡초처럼 자라는 현대 사회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지 다음 호부터 단계적으로 상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훈련이나 ‘습성’이 있을까?

현대 사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즉각적이고 강렬한 보상이 주어지는 기쁨과 쾌락에 더욱 집착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더 맵고, 더 달고 심지어 이것이 합쳐진 ‘단짠’ 음식들이 대성공을 이루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인생을 성찰하게 해주는 긴 영화나 강연보다는 순간의 관심을 사로잡는 숏폼이 인터넷 안에서 조회수를 집어삼킨다. 요즘 웬만한 궁금증은 AI에게 물으면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과 훈련을 요구하는 일들이 과연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이런 현상을 돌아보게 해주는 중요한 성찰이 「신학대전」의 일부인 ‘습성에 대한 논고들’(I-II, qq.49-54)에 등장한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논고를 인간의 행복과 긴밀하게 연결된 윤리적 덕과 악덕에 관한 논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다룬다. 그의 성찰은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습성이란 무엇인가? ‘습성’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이가 항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따분한 활동을 떠올리게 된다. 이와 반대로 각 분야의 천재들은 끝없는 일상의 반복에서 생겨난 습성에서 벗어나 뜻밖의 특이한 행위로 세상을 놀라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토마스는 ‘습성’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다. ‘습성’의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는 ‘소유하다’를 뜻하는 ‘하베레’(habere) 동사로부터 온 것으로서, “어떤 것이 잘 또는 나쁘게 준비를 갖추고 있는 하나의 상태”(I-II,49,2)를 의미한다. 이런 규정에서 토마스는 “습성은 더 지속적이고 더 오래 간다는 점에서 (일시적) 상태(dispositio)와 차이가 난다”고 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런 습성은 능력(potentia)과 행위(actio)의 중간에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습성에 의해서 활성화된 능력은 추후 똑같은 행위들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인간에게만 고유한 습성 현대인은 인간보다는 동물을 습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하기 쉽다. 더욱이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기 위해서 짐승의 행동이나 심지어 벌레 등의 작용을 관찰하는 연구는 이런 경향을 부추긴다. 그러나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엄밀하게 규정된 습성을 취득할 수 있지만,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동물의 경우에, 감각적 욕구의 활동은 그 본성과 더불어 바로 주어졌고 이미 규정되어 있다.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훈련을 받을 경우에만, 어느 정도의 습성이 형성될 수 있을 뿐이다.(I-II,50,3) 이와는 대조적으로 습성의 피조물이라 불릴 만한 인간은 장차 발전될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잠재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 능력들 자체는 다만 자라날 수 있는 씨앗들에 불과해서, 그것들이 결실을 풍부히 내기 위해서는 훈련을 통해 특별한 ‘습성’을 획득해야 한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습성이란 엄격한 의미에서 결코 육체적 구성이나 단순한 ‘동물적’ 본능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의 성질일 뿐이다.(I-II,50,1) 그래서 토마스는 영혼의 행위적 습성은 행위의 영적 원리들인 지성과 의지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행위의 반복 통해 획득되는 습성 훈련 통해 한계 늘릴 때 강화 가능 본성적 목적으로 이끄는지 여부로 덕과 악덕으로 구분할 수 있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습성 토마스는 지성의 원리들을 손쉽게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들이나 인간의 역량을 넘어서는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는 ‘주입된’ 습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I-II, 51,1&4) 그런데 여기서는 일단 인간의 행복을 위해 더 기본적인 ‘획득된’ 습성들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일반적으로 습성은 행위의 반복을 통해 획득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 안에 동일한 어떤 원초적 능력이 있다면, 각 개인이 획득한 습성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요즘 세계를 놀라게 하는 조성진이나 임윤찬과 같은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보여주는 예술성은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수많은 훈련을 통해 획득한 ‘습성’이다. 습성은 실제로 힘들고 반복된 노력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계발된 능력으로 접붙여진 가치처럼 본성에 뿌리를 내렸으므로 ‘두 번째 본성’이라 불린다. 습성이 시작될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습성이 강해질수록 노력은 덜 필요하게 되고, 같은 행위를 더 쉽고 무난하게 완수할 수 있다. 그래서 토마스는 습성을 “행위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 습성은 전혀 자유에 반대되지 않는다.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습성의 강화와 약화 습성은 보다 ‘증대’되거나 ‘위축’될 수 있다. 습성의 성장은 단지 양적인 반복 횟수에 달려 있지 않고, 행위의 질과 의도,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의 깊이에 달려 있다. 습성은 모든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습성 자체보다 더 강하고 더 진지한 행위들에 의해서만 증가된다.(I-II,52,2) 따라서 운동선수들은 자신이 한계를 확장하는 더 강렬한 훈련을 통해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어떤 행위를 수행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특정 습성과 합치되게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습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기존의 습성이 파괴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행위를 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게으름이나 나태함만으로 충분하다. 오랫동안 외국어를 쓰지 않으면 대부분을 망각하듯이, 단순히 습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습성을 매우 약화시키며 때로는 완전히 소멸시킨다. 계속해서 지성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훨씬 하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급속하게 퇴보하게 된다. 그렇다면 습성은 도대체 행복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본성과 마찬가지로 습성은 우리의 행위들이 더 쉽게, 더 유쾌하게 흐르도록 만들어 주므로 모든 진보의 조건이다. 천재적인 사람이 그렇게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습성을 통하여 그의 본성적 능력들에 완전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말하는 습성의 강화와 약화는 신앙인의 일상을 향해 매우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습성을 키우고 있는가?” 습성은 인간을 본성적 목적으로 인도하는지 아니면 그 목적에서 멀어지게 하는지에 따라 선하거나 악하다고 판단된다. 토마스는 이 선한 습성을 ‘덕’(virtus)이라고 부르고, 악한 습성을 ‘악덕’(vitium)이라 부른다. 자유의 결실인 습성은 덕의 경우에는 자유 자체를 강화하지만, 악덕의 경우에는 자유를 약화시킨다. 다음 호부터는 우선 자연적으로 획득된 덕들과 행복의 관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1-01 제347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분노하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요즘 뉴스에서는 ‘분노’로 인한 이해하기 힘든 범죄들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분노에 차 흉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칼부림을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에 대한 분노가 살인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와 유사한 사태들을 보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함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거나, ‘분노는 하나의 결점이기 때문에 덕스러운 삶에 기여할 수 없다’는 일부 윤리학자들의 판단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크게 주목받았던 드라마 <글로리>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찾아가 하나씩 복수할 때 많은 이가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분노는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것인가, 아니면 행복을 위해 긍정적인 면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분노를 억제하는 것은 언제나 선한가, 아니면 때때로 선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노에 관한 이론은 이런 어려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분노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발견된다. 선과 악을 모두 지향하는 분노의 원인 토마스는 분노를 ‘복수에 대한 욕구(ira est appetitus vindictae)’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분노는 사소한 일보다는 ‘중차대한 것’에서, 곧 어렵고 심각한 악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분노는 자신이 겪은 상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며, 그 안에는 욕망하고 희망하고 향유했던 선을 옹호하려 하고, 동시에 공격적으로 입은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함으로써 그 악이 갚아 지기를 바라는 이중의 목표가 함께 들어 있다.(I-II,46,2) 그래서 토마스는 “분노는 겪은 고통에서 생겨나고 복수에 이르며 즐김으로 끝난다”(I,81,2)고 말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분노의 원인은 언제나 ‘분노하는 사람을 거슬러 행해진 어떤 악’이다. 누군가가 우리를 거슬러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다면, 또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특히 ‘마땅히 있어야 할 존중의 결핍’, 즉 경멸(parvipensio)이 분노를 크게 자극한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이 모멸감을 더 크게 느끼고, 반대로 아주 낮은 사람에게서 모욕을 당할 때 분노가 더욱 격렬해지기도 한다.(I-II,47,4) 예컨대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이 크게 폭발한다. 그러나 가난한 이도 ‘부당한 모멸감’을 당할 때, 얼마든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다. 분노와 이성 - 동반과 방해 흔히 분노를 ‘이성을 잃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토마스의 관점은 더 세밀하다. 제대로 보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정이 폭발하기보다 당한 악과 겪게 될 벌을 저울질하는 정확한 비교와 추론이 전제돼야 한다. 이런 이유로 토마스는 “분노는 언제나 이성을 동반한다”고 말한다.(I-II,46,4) 그러나 분노가 이성을 동반한다고 해서, 분노가 항상 이성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토마스는 “분노는 다른 정념들보다 더 명백하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한다”(I-II,48,3)고 말한다. 분노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다양하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몸 전체를 뒤흔들기 때문에, 불(火)에 비교할 수 있다. 분노가 심해지면 피가 끓어오르고, 심장이 빨라지며, 심지어 혀의 움직임까지 방해해서 말을 더듬게 하거나 말문을 막히게 만들 수 있다.(I-II,48,2) 이런 신체적·정신적 동요 때문에 분노는 깊은 사유와 관상, 차분한 판단을 크게 어렵게 만든다. 분노를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정의와 사랑 위해 사용해야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불의하며 죄악의 근원이 돼 정당한 분노와 죄가 되는 분노 그런데 토마스는 분노를 무조건 죄로 보지 않는다. 분노는 정의로울 수도 있고 불의할 수도 있다. 오히려 어떤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복수를 원하기 때문에, 분노는 불의(iniustitia)보다는 정의(iustitia)에 더 가까운 셈이다.(I-II,46,7) 분노가 이성의 적절한 통제 하에서 일어나 ‘정당한 복수’일 경우, 그것은 정의라는 덕의 발로로 여겨진다. 반대로, 분노가 무질서한 복수를 지향할 때 - 법적 질서를 벗어나 사적인 방식으로 응징하려 하거나, 죄를 없애기보다 죄인 자체를 파괴하고 절멸시키려 할 때 - 그것은 죄가 된다. 이런 문제 때문에 토마스는 분노를 칠죄종(七罪宗, 추요죄) 가운데 하나로 보면서, 분노에서 말다툼, 고성, 저주, 폭력 등 여러 악습이 흘러나온다고 분석한다. 분노는 정당하게 다루어질 때 정의를 위해 타오르는 불이 되지만, 방치될 때는 많은 죄악을 낳는 ‘악습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불의를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도 하나의 악습으로 본다. 그는 정당한 원인에 대해서 그 느낌에 상응하는 움직임의 부재, 곧 처벌하려는 의지의 결핍을 분노의 결핍이라는 악습으로 설명한다. 즉 분노해야 할 자리에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 불의 앞에서 무감각한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토마스는 증오(odium)가 분노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한다. 증오는 악을 그 자체로서 원하지만, 분노는 ‘정당한 복수라는 선’으로 악을 원하기 때문이다.(I-II,46,6) 분노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의의 이름을 내세우고, 그에게 내리는 벌이 어떤 의미에서는 공동선을 위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증오는 상대에게 그 어떤 선도 바라지 않고 악을 그 자체로 원하므로, 분노보다 훨씬 사악한 정념이다. 토마스는 ‘올바른 이성과 일치되는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분노’를 인정한다. 이성에 앞서 선행하여 이성을 어지럽히는 분노는 악하지만, 이성이 내린 정의로운 판단을 따른 후속하는 분노는 선하며 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노는 교회의 선익, 사회 정의, 약자의 보호를 위한 투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정화할 때 분노하셨다.(마태 21,12-13 참조) 이런 분노는 상처받은 감정에서가 아니라, 정의와 경건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정의와 사랑을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덕의 도우미가 된다. 그러나 복수 그 자체를 위해 분노를 사용하면, 분노는 칠죄종으로서 많은 악습과 죄를 낳는다. 신앙인은 분노를 부정하거나 억누르기만 하기보다 자기 안의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정의 감각과 어떤 상처에서 나오는지 살피면서, 그것을 정의와 사랑을 위한 힘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한 순간도 어둡게 만들 수 있는 ‘두려움’의 그림자

현대 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여러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이다. 그런데 광고에서 가장 자주 클로즈업되는 광경은 특정 상품을 썼을 때 느끼는 행복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앞으로 다가올 불행들을 나열하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는 보험 관련 광고도 적지 않다. 행복감을 느끼는 장면과 끊임없이 다가올 불행을 예방하라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두려움은 행복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의문이 생겨난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취업, 노후, 건강), 사회적 평가와 비교(열등감, 실패), 과거 경험과 후회, 생활환경 변화, 병리적 요인(불안 장애, 공포증), 생존 본능(자연재해, 범죄)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두려움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성찰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두려움을 정념으로 다루기도 하고 성령의 선물로 다루기도 하는데, 지금은 정념으로서의 두려움과 그와 반대되는 담대함에 대해서만 고찰하도록 하겠다. 두려움에 대한 토마스의 정의와 성찰 토마스는 두려움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자연적인 두려움(timor naturalis)'과 ‘자연적이지 않은 두려움(timor non naturalis)’을 구분한다.(I-II,41,3) 자연적인 두려움은 그야말로 본능에 의한 두려움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그에 비해 비자연적인 두려움은 인식을 전제로 하는 두려움이다. 예를 들어 인간들은 아무리 체구가 작고 못생겼어도 폭군이나 독재자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가 나타나면, 벌벌 떨면서 피하게 된다. 이어서 토마스는 두려움을 ‘미래에 일어날 재난이나 고통’ 앞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정으로 규정한다: “두려움은 ‘미래의 악’과 관련되는데, 그 악은 두려워하는 사람의 역량을 넘어서는, 즉 그에 맞서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I-II,41,4) 따라서 두려움은, 지각·상상에 의해 인간의 마음으로 미래에 마주칠 악의 이미지가 들어올 때,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이를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때 발생한다. 두려움은 이성의 판단과 상상력이 결합한 결과로 생긴다. 물론 선도 그 선을 애호하는 이들이 그것이 상실될까 봐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간접적 대상은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악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은 동시에 두려움이 우리 영혼에 침입할 수 있는 길들을 보여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직접적 대상은 악이다.’(I-II,42,1) 두려움의 원인과 결과 그렇다면 무엇이 다양한 두려움들을 불러일으키는가? 토마스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대상의 힘’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즉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갑자기 일어나는 것, 뜻밖에 발생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은 더 지속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두렵다.(I-II,42,5&6) 단순히 환상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주체의 나약함’도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I-II,43,1&2) 다가오는 악을 물리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빠진다. 나약한 우리는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흔하다. 두려움의 연쇄는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 토마스는 두려움의 다양한 결과도 보여준다. 두려움은 심장을 수축시키고 숨을 멈추게 하며, 떨게 하고 창백하게 하고, 육체의 힘도 사라지게 한다. 두려움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은 움츠러들고 행동이 제한되며 자신 안으로 물러나게 된다. 또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악이 임박해 있지 않을 때보다 잘 숙고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가 더 기꺼이 조언을 구하고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지나치지 않다면 영혼의 힘을 촉진하기도 한다.(I-II,44,1-4) 두려움에 맞서는 ‘담대함(audacia)’이란 정념 악이 다가온다고 해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정념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에 따르면, 그 악이라는 동일한 대상은 때로는 우리 안에서 두려움과는 반대되는 정념인 담대함을 일깨운다. 담대함이란 끔찍한 악을 만났을 때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선을 추구할 때 취하는 충동적이고 용감한 움직임에서 성립된다.(I-II,45,1) 그것은 언제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한다는 희망에서 비롯된다.(I-II,45,2)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위험을 겪어낸 그의 체험, 그가 성공적으로 행위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고찰 등은 희망을 직접적으로 증가시킨다. 또한 자기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것 등은 그 희망을 강한 담대함이 되게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겪게 될 어려움들을 깨닫지 못한 채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정념으로서의 담대함이 아니라, 이성적 인식의 단계들을 거쳤기 때문에 어려움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진정한 담대함’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담대함은 위험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으며 모든 어려움과 패배를 알고 있으면서도 단호하게 가까이에 있는 악에 맞서 싸우러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담대함이 이성의 규제를 넘어 과도할 때 두려움의 결핍 때문에 악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II-II,127,1-2) 현대 사회에서 쾌락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그것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 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두려움을 단순히 억압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성찰하고 대처하여 삶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기회로 변화시켜야 한다. 두려움은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할 수 있지만, 지나치면 행복을 방해한다. 토마스가 말한 대로 두려움은 삶을 위축시키지만, 이성적 성찰을 통해 담대함을 실천하면 극복과 성장이 가능하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먼저 두려움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도망가지 않고 점진적으로 직면하며, 자신을 격려하는 가족, 친구 등의 지지 체계도 잘 활용해야 한다. 토마스가 강조한 담대함의 개념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경험을 반복하면 두려움에 좀 더 잘 대처함으로써 결국 더 깊은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30 제3468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고통과 슬픔,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惡)일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고통이 다가왔을 때, ‘혹시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이 꼭 죄인들만이 아니라, 올바르고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도 닥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많은 종교인은 ‘하느님이 의인(義人)을 시험하거나 교육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내린다’라고 해석한다. 이런 입장은 역사가 매우 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적인 논변의 형태를 갖추며 ‘변신론(辯神論)’으로 발전했다.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되기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은 불가피하게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모든 고통이야말로 악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는 현대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변신론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더라도, ‘과연 고통과 슬픔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입장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그 자체로 악인 고통에 대한 정당한 저항 토마스는 고통이 선하거나 악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그 자체로(secundum se)’와 ‘어떤 다른 것을 전제로(ex suppositione alterius)’, 즉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들여온다. 그는 ‘그 자체로’ 바라본다면 ‘모든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고통을 바라본다면 욕구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판단은 라이프니츠식의 변신론적 주장들이 설 자리를 없애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이 고통을 무조건 없애 버려야만 하는 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고통이나 슬픔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토마스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전제 아래 ‘부끄러움’은 선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된 일이 전제되고, 어떤 이가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면 이는 선한 일이다.(I-II,39,1) 조건에 따라 선도 될 수 있는 고통 토마스는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선하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들어간다. 그는 욕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선인 ‘정당한(Honestum) 선’과 사람들이 욕구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인 ‘유익한(Utile) 선’, 그리고 최종 목적을 즐길 때 느껴지는 ‘편안한(Delectabile) 선’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을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켜 보자. 가장 먼저 고통이나 슬픔은 ‘정당한 선’일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는 슬픔도 ‘악에 대한 인식과 거부를 포함하는 한에서’ 정당한 선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의 경우, 위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이 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생명이라는 선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적 슬픔의 경우, 악에 관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슬픔도 ‘정당한 선’이 될 수 있다.(I-II,39,2) 이것을 인정한다면, 두 번째로 고통과 슬픔이 다른 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익한 선’이 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고통 그 자체로는 악이지만 특정 조건에서 선 될 수 있어 고통이 유용할 수 있다 해도 고통받는 이와 함께해주길 실제로 서구 사상사 안에서 고통에 대해 죄에 대한 처벌, 사회 안정성 유지 등으로 도구적인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해석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토마스는 여기서도 고통 전체보다는 내적인 고통인 슬픔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죄와 같이 피해야만 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라면 유용하다. 또한 악은 아니더라도 악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세상 사물들이 지닌 일시적 좋음에 대한 슬픔은 유용할 수 있다. 더욱이 피해야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은 그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도 유용하다.(I-II,39,3) 그렇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 고통과 슬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인간에게 가장 큰 악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슬픔이나 고통은 진정으로 악인 것에 의해 발생하거나, 실제적으로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발생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그것에 대한 슬픔은 가장 큰 악일 수 없다. 진정으로 악인 것에 대한 슬픔보다 실제적으로 악인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음이나 그것을 거부하지 않음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보다 진정한 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아무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 가장 큰 악이 된다.(I-II,39,4) 고통받는 이를 위로할 때 필요한 감수성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통은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드러내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조건 하느님을 옹호하는 것은, 자칫 그들의 솔직한 상태나 표현을 억누르거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2차 가해가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 고통 받는 이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는 불확실성과 불평을 함께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견딜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고통의 심오한 의미가 고통받는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수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고통의 유용성을 과장해서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당사자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 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이기심과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7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을 위한 준비운동: 고통을 경감시키는 구체적 방법

우리는 지난 호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통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이를 영적 성장의 계기로 삼으라’고 조언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이 충고를 듣고도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을 이해라도 하는 듯,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뿐만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 안에서, 현대 사회의 고통 경감법과 비교해 보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는,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현대의 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조작 가능하고 제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 연구 방향은 고통의 근원을 줄이려는 노력보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느끼는 경로를 차단할 수 있을까’에 집중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취나 무통분만이며, 이런 경향은 일반 생활에도 널리 퍼져있다. 또한 현대인들의 다수가 정신적인 고통이 다가오면 알코올이나 마약 등을 통해 고통을 잊어버리려 하고, 심지어 많은 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고통을 차단하려 한다. 이에 반해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통과 슬픔을 치유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즐거움을 통한 고통의 약화 토마스가 제시한 방법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치료법은 ‘잠과 목욕’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힘을 되찾게 해 주고 몸의 신체적 균형을 회복시켜 주어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게 해 준다.(I-II,38,5) 밤잠을 줄여도 된다는 특별 허가를 받아서까지 연구에 매진했던 토마스이기에 이런 충고는 더욱 유별나게 들린다. 그럼에도 잠이나 목욕 등이 심장 박동을 정상으로 돌림으로써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치료 방법은, 이미 현대 의학에 의해서 훨씬 더 효과적인 마취와 통증 완화의 방법을 통해서 대체되었다. 하지만 다른 네 가지 방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토마스는 기쁨이나 쾌락이 슬픔이나 고통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쾌락(Delectatio)’은 고통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I-II,38,1) 만일 직면해 있는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겪고 있던 고통은 약화될 수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음악은 환자의 슬픔을 감소시킨다. 때로는 슬픔을 잊을 정도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좋은 영화는 우울함에 대한 최고의 치료책이다. 풍선에 바람이 빠질 때 바람을 조금 불어 넣으면 다시 팽팽해지듯, 인간이 느끼는 쾌락도 그것이 어디에서 오든 슬픔의 치료제로 작용할 수 있다. 눈물과 한숨을 통한 슬픔의 배출 그렇지만 진정으로 극심한 고통 앞에서는 잠깐의 즐거움이 마치 한 여름의 뙤약볕에 달구어진 바위 위에 몇 방울의 물을 떨구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토마스는 이런 극심한 고통을 덜기 위해 ‘눈물과 탄식(Lacrymae et Gemitus)’이 자연스럽게 고통을 바깥으로 배출시킴으로써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친다.(I-II,38,2) 마음속에 있는 모든 해로운 요소는 영혼의 주의가 그리로 쏠릴 때 더욱 고통스럽지만, 바깥으로 분출될 때는 주의가 분산되어 내면의 고통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울고 싶을 때는,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안정이 되고 슬픔을 이기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과 수용, 즉 눈물 흘리기나 깊은 탄식 등도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현대에도 적극 권장되는 방법이다. 가까운 이들의 위로와 공감…진리 탐구·종교적 묵상으로 육체와 정신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 이뤄낼 수 있어 친구와 가족의 위로 토마스는 계속해서 친구들의 위로가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고 강조한다.(I-II,38,3 참조) 마치 무거운 짐을 함께 들었을 때 가벼워지는 것처럼, 영혼의 짐인 심적인 고통도 동료들의 위로를 통해 가벼워진다. 또한 친구들이 고통받는 이에게 가지고 있는 ‘공감(Compassio)’이나 사랑은 그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친구나 가족, 공동체와의 교감과 위로는 고통 완화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대 사회의 고립과 단절 문제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슬픔을 나누는 것은 토마스가 중요시했던 위로의 힘이다. 진리의 관조를 통한 고통의 극복 이런 일시적인 고통의 완화와는 달리 강렬한 즐거움을 포함하는 더 지속적인 치료제가 있는데, 바로 ‘진리에 대한 관상(Contemplatio Veritatis)’이다. 토마스는 이 관상이 고통을 대단히 완화시킨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관상의 쾌락은 ‘흘러넘쳐(Redundat)’ 감정에 자리 잡고 있는 고통까지도 완화시켜 준다.(I-II,38,4) 지혜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관상이 고통과 슬픔을 완화시킨다. 지복직관과 미래에 대한 행복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토마스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겪는 온갖 시련을 참된 즐거움으로 여겨야 합니다(야고 1,2)”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다가올 기쁨 때문에 타오르고 있는 숯불 위를 마치 ‘장미 꽃밭’ 위를 걸어가듯이 걸어가는 순교자도 소개한다. 진리 탐구와 영적 명상, 신앙적 희망은 현대의 정신 건강과 영성 돌봄 분야에서 여전히 깊이 공감되는 부분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강조하는 명상, 마음 챙김, 종교적 혹은 철학적 묵상 방식들은 고통과 슬픔을 초월할 수 있는 내적 힘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신학대전」 안에서 구체적인 상황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 만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의 슬픔 해소법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러 면에서 적용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방법들은 단순히 과거의 뒤처진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상호 관계, 몸과 마음을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치유의 길로, 오늘날 심리치료와 영성 상담, 공동체 활동 등 다양한 현대적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질병, 사고 등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2차 가해에 가까운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문제와 같은 ‘고통에 대한 오해’를 집중적으로 성찰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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