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사 한 페이지] (6) 교구 설정 25주년 -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1963년 설정 당시 본당 24개에 신자 4만2548명이었던 수원교구는 25년 만에 신자 20만 명에 복음화율 6%에 달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1988년 설정 25주년을 맞은 교구는 재정 자립을 바탕으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거듭날 것을 다짐했다. 밖으로는 아시아교회를 위한 선교와 경제적 지원을 했고, 안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25주년 맞아 ‘빛이 되어’ 나아갈 것 다짐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계기로 교구는 민족 복음화와 이웃 민족들의 복음화를 사목 목표로 설정하면서 교구 내 선교 활동에 집중했다. 그 결과 교구 설정 25주년인 1988년에는 신자 20만 명에 복음화율은 6%를 넘어섰다. 당시 14개 교구 중 신자 수 4위, 복음화율 3위를 차지할 만큼 교세 확장이 두드러졌다. 교구는 복음화의 결실을 토대로 미래를 향해 ‘빛이 되어’ 나아갈 준비를 했다. 교구장 김남수(안젤로) 주교는 ‘빛이 되어’란 표어를 내걸고, 묵주기도 3억 단 봉헌과 ▲성체 중심의 성사생활 ▲성서 중심의 배우는 생활 ▲로사리오 중심의 기도생활 ▲단식·금육 중심의 희생과 극기의 생활 ▲모두 하나 됨을 확인하며 반기도회 활성화 ▲기쁨을 전하는 생활(성소 계발과 육성, 전교) 등의 실천을 제안했다. 교구는 1987년 6월 26일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이듬해인 1988년에는 성경 읽기 운동을 비롯해 본당별 중고등부 백일장, 어린이 신앙대회 ‘늘샘고을 잔치’, ‘젊은이여 우뚝 서라’ 주제 청년 신앙대회, ‘빛이 되어 밝게 빛나리’ 주제 중고등학생 신앙대회가 열렸다. 또한 기념사업 일환으로 가톨릭센터 건립, 농아를 위한 특수 교리반과 행려자를 위한 식당 등도 운영했다. 1988년 10월 9일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 신앙대회는 신앙 선조들의 선교 정신을 계승해 그리스도의 빛을 이 땅에 전파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김남수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교구 설정 이후 25년간 교구의 성장과 발전을 언급하고, 향후 추진해야 할 교구의 사명으로 이웃 전교를 강조했다. 또한 교구 재정 자립을 바탕으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화돼야 함을 강조했다. 김 주교는 “밖으로는 아시아를 비롯한 해외로 선교사를 파견하고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하며 안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을 찾아가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교회 수입의 10% 정도를 본당과 교구가 자선비로 사용하도록 주문했다. 실제 교구는 설정 25주년 행사 비용 중 10% 이상을 자선사업에 사용했다. 행사 3부에 열린 기념식 중 교구는 25개 사회사업 단체에 약 1300만 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설정 25주년을 맞이한 교구의 핵심 목표는 ‘아시아의 빛’ 역할을 담당하며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한 단계 도약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선교 사명을 기본적으로 강조해 온 당시 교황청의 요청도 교구가 해외 선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원동력이 됐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김남수 주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아시아 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명을 자각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 외방 선교회의 선교 방향을 동아시아로 전환하고, 더 나아가 북한 선교를 지향했다. 김남수 주교는 해외 선교에 있어서 사제, 수도자뿐 아니라 훈련받은 레지오 단원 등 역량 있는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했다. 평신도 참여를 강조한 것은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선조들의 순교 신심을 본받아 더욱 적극적으로 선교사업이 펼쳐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교구는 설정 30주년인 1993년부터 3년간의 사목 목표로 복음화 3단계를 설정했다. 1994년은 ‘민족 복음화의 해’로서 남북통일과 북한 선교를 가장 큰 과제로 상정했다. 현실적으로 당장 선교사를 파견하기 어려운 북한 대신 그 교두보 역할을 할 중국에 선교 역량을 집중했다. 구체적인 중국 선교 시도는 1993년 6월 김남수 주교의 중국 방문에서 비롯됐다. 교구 차원에서 중국 길림교구를 돕고 북방 선교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1994년 7월 수원교구는 길림교구와 자매결연 했다. 이와 함께 1993년부터 통일 준비 기금 조성을 시작했다. 본당 총예산의 2%를 적립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2차 헌금을 실시해 기금을 조성했다. 이어 1995년 ‘이웃 민족들의 복음화의 해’를 맞아 중국과 러시아 등 아시아 전교가 우리의 사명이라고 강조했고 구체적인 선교 방안을 모색했다. 수원시 내 본당은 북방 선교를 위한 통일 성금 통장 운동 결의대회(1가구 1통장 갖기 운동)를 개최하고 모금을 권장했다. 1996년부터는 매월 마지막 주일을 ‘민족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의 날’로 정하고 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하도록 했다. 1997년 ‘600만 북녘 동포들이 아사 직전’이라는 긴급한 상황이 전해지자, 김남수 주교는 5월 11일 특별 담화문을 발표해 “북방 선교 중에서도 북한 선교를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라며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가자는 희년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교구는 ‘북녘에 있는 내 동포, 내 가족과 밥을 나누자’는 구호를 내걸고, 1세대 1가정 돕기 운동, 매주 금요일 단식을 통한 봉헌, 본당 내 모금함 설치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가정에서 음식을 남기지 않기, 북한 동포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기 등의 실천을 권고했고, 본당 차원에서는 예산으로 책정된 자선비 중 일부를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등 북한 원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4면

‘성 프란치스코의 해’ 전대사 받을 수 있는 수원교구 성당· 수도원은?

레오 14세 교황은 1월 10일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을 기념해 아시시의 ‘가난한 이’를 닮아가는 삶을 격려하고자 특별 희년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2027년 1월 10일까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주보 성인으로 삼는 본당이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 등의 회원이 소임하는 성당에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해’를 맞아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억할 수 있는 수원교구 내 본당과 수도회를 소개한다. 가난을 선택하고, 하느님이 창조한 자연을 찬미한 프란치스코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1년 혹은 1182년 이탈리아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사를 꿈꿨던 성인은 1205년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원정군에 합류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스폴레토 계곡에서 주님의 환시를 체험하고 아시시로 돌아온다. 이후 평범한 생활을 하던 성인은 1206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센인을 만나 입을 맞추고 끌어안는 체험을 한 뒤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심리적인 변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님께서는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그렇게 참회를 시작하게 하셨다. 내가 죄 중에 있을 때, 한센인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내가 그들을 떠날 때, 나에게 불쾌하게 보였던 것이 영혼과 육체의 기쁨으로 바뀌었다.” 이후 성인은 한센인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이를 통해 결정적인 회개 생활로 들어간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성인은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의 삶을 선택했다. 그의 삶에 감동한 동료들이 함께했고 성인은 그들과 함께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희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생활양식으로 삼았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연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찬미했다.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형제’나 ‘자매’로 불렀으며, 새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다. 1224년 라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길 기도하던 중에 성인은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인 오상을 받았다. 기력이 쇠해지고 시력마저 사라져 가던 성인은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찬가>를 지어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전해진다. 1개 수도원, 11개 성당에서 프란치스코 성인 기억하며 기도 레오 14세 교황은 1월 10일 특별 희년을 선포하면서 “우리 시대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고, 바로 그러하기에 성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더욱 유효하고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인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 애덕이 사라진 이 시대에 신앙이 가진 의미를 찾을 것을 권고한 것이다. 교구 내에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양평 성 정하상 바오로 수도원 성당과 제1대리구 세류동·광교2동·상미·동탄숲속·소사벌·봉담성당, 제2대리구 연성·송산새솔동·별양동·동판교·태평동성당이다. 이 중 세류동본당은 1966년 작은형제회가 교구로 진출하면서 설립된 본당으로, 프란치스코 영성과 함께 신앙을 다져온 공동체다. 설립 초기부터 수도원에 머무는 사제와 수사가 교리교육을 돕는 등 공동체와 함께해 왔다. 1975년에는 본당 신자들이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창립해 프란치스코 영성을 실천하고 있다. 작은형제회 수도원 건물과 이웃하고 있는 세류동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상을 비롯해 다미아노 십자가 등 곳곳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본당은 특별 희년을 맞아 사순 시기 동안 작은형제회 오상선(바오로) 신부가 강의하는 영성 특강을 마련한다. 3월 7일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3월 14일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 3월 21일 성 프란치스코의 유언 주제 강의가 오전 10시 대성전에서 열린다. 오전 9시30분 찬미를 시작으로 강의 후에는 11시부터 미사가 봉헌된다. 상미본당과 송산새솔동본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신자들의 열정이 공동체에 녹아있다. 2019년 6월 18일 설립된 상미본당은 신자들의 투표로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당 주보 성인으로 결정했다. 자연 가운데 지어진 성당을 순례하며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겸손과 평화, 가난의 삶을 실천한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억할 수 있다. 송산새솔동성당 정면에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찬미하는 프란치스코 성인 마크가 걸려 있다. 신자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 마크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입은 후 건강이 악화되고 눈이 멀어 오직 주님만을 찬미하며 피조물의 찬가를 노래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동판교본당은 성당을 순례하며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날 수 있는 희년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성당 입구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상 앞에서 순례자 기도를 한 뒤 성모동산을 들러 로비로 들어서면 프란치스코 성인과 관련된 성물을 관람할 수 있다. 대성당에서는 생태 십자가의 길을 바치도록 안내하고 2층에는 「찬미받으소서」를 필사하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순례를 마치고 1층 카페에 들르면 무료 음료도 제공한다. 순례 프로그램은 4월경 시작한다. 전대사를 받는 방법은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에 따른 기도 등 전대사의 일반 조건들을 이행하고, 위 장소를 방문해 ▲미사를 봉헌하거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와 모범을 묵상하고 하느님께 기도 ▲주님의 기도와 신경 봉헌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 프란치스코, 성녀 클라라, 프란치스코회 모든 성인에게 간구해야 한다.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4면

[수원교구사 한 페이지] (5) 신앙선조 시복시성 운동과 성지 개발

수원교구는 설정 초기부터 순교자 현양에 역점을 둬왔다. 미리내성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은 제2대 교구장 김남수(안젤로) 주교 재임 시기 더욱 활기를 띤다. 현재 교구 성지 14곳 중 절반이 넘는 8곳이 김 주교 재임 시기 개발이 시작된 곳이다. 이 시기 교구 내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시복시성 운동과 성지 개발의 모습은 어땠을까. 시복시성 운동 - 창립 선조에 관심을 기울이다 김남수 주교는 주교 임명 전부터 꾸준히 순교자 시복시성 추진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김 주교는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던 1968년 10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한국 신자를 파견하는 실무를 맡았다. 1971년부터는 103위 한국 순교복자 시성 추진 건을 주교회의에 상정하는 일에 앞장섰고, 이런 활동이 주교 서품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어 김 주교가 1974년 수원교구장으로 취임한 이후, 1975년 주교회의 추계 총회에서는 ‘시성을 위한 기도문’이 인준됐다. 1976년 춘계 총회에서는 김 주교가 정식으로 103위 복자 시성 건을 발의해 시성 추진 담당을 맡게 됐다. 무엇보다 김 주교가 크게 관심을 가진 것은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을 비롯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선 창립선조들의 시복시성이었다. 김 주교는 주교회의에서 시성 추진 담당을 맡을 당시부터 한국교회 창립 선조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의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운동을 103위 복자의 시성운동과 함께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김 주교는 1980년 「가톨릭수원」에 ‘이벽 시복시성 운동에 즈음하여’를 발표해 교구민의 참여를 독려했다. 김 주교는 ▲신약성경 통독하기 ▲적어도 한 사람 입교시키기 ▲각자 본당에 성심껏 헌금하기 ▲‘이벽 성조 시성 운동 기도문’ 9일간 바치기 등을 구체적인 실천 사항으로 제시했다. 교황청에서 103위 복자의 시성이 확정되자 김 주교는 다음 추진 사업이 창립 선조 시복시성임을 강조했고,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인 광암 이벽과 그 동료 순교자 및 증거자들의 시복 추진 심사’의 착수를 선포했다. 그러나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시복 추진 업무는 전례위원회로 넘어갔고, 1985년에는 주교회의에서 시복 추진을 교구별로 분리 추진하기로 하면서 수원교구는 ‘창설 주역 5위 시복’에 나서게 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1988년 103위 성인 신심 위축을 이유로 보류됐다. 그럼에도 교구는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추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교구는 1996년 ‘윤유일(바오로)과 7위 순교자’의 시복 추진을 시작해, 그해 11월 교황청에서 시복 추진 허가 공문을 받았다. 교구의 이런 노력이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복자’의 탄생으로, 또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의 시복시성 추진으로 이어졌다. 성지 개발에 나서다 창립 선조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의 열기는 성지 개발로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천진암성지다. 교구는 ‘한국천주교 발상지’로 천진암 터를 주목하고 1978년 대지를 매입했다. 이어 1979년에 발견된 이벽의 묘에서 이벽의 유해를 이장하면서 성지 개발이 본격화됐다. 교구는 1981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창립기념일’ 제1회 경축 기념행사를 천진암성지에서 개최했다. 김남수 주교를 비롯해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루치아노 안젤로니 주한 교황대사 등이 참석한 성대한 행사였다. 그해 11월에는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묘를 천진암으로 이장했다. 천진암성지뿐만이 아니었다. 구산·남한산성·어농·단내·남양성모·죽산·수원성지도 김 주교가 재임하던 시기 개발된 성지다.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의 묘역인 구산성지는 1980년 성지로 선포됐다. 성인의 후손들과 신장본당이 1977년 성인의 묘 옆에 ‘김성우 안당 순교현양비’를 건립하면서 성지 개발과 본당 승격운동이 시작됐고, 1979년 구산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성지 개발이 빠르게 진척될 수 있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1978년 남한산성 내 대지를 매입하면서 개발이 시작됐지만,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인 관계로 개발 제한이 많아 성지 조성에 많은 난관을 겪었다. 그러나 신장본당과 서부본당의 노력으로 성역화 작업에 매진했고, 마침내 1998년 순교성지로 선포될 수 있었다. 어농성지와 단내성지는 본래 ‘이천성지’로 함께 개발된 성지다. 1987년 복자 윤유일(바오로)의 후손을 통해 어농리에 있는 선산에 복자 윤유오(야고보)의 묘가 있다는 것이 확인돼 그해 9월 성지로 선포됐다. 이때 정은(바오로) 순교자가 살던 교우촌 터이자 묘소도 함께 성지로 축복됐다. 이천성지는 2003년에 어농성지와 단내성지로 분리됐다. 병인박해 순교지인 남양·죽산·수원성지 개발도 진행됐다. 남양은 남양본당을 중심으로 1983년 ‘남양 치명성지 개발위원회’가 구성돼 성지 개발에 들어갔다. 본당은 순교자들이 성모님께 의탁했던 점을 기억하면서 순교자 현양과 성모신심을 위한 성지로 개발하고자 했고, 이전부터 성모순례지를 조성하고자 했던 김 주교는 이 뜻을 받아들였다. 교구는 1991년 남양 순교지를 성모성지로 선포했다. 죽산성지는 1979년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안성본당은 1980년 죽산리의 대지를 매입해 죽산성당을 완공했으나 순교지와 떨어져 있어 대지를 다시 매입해 개발을 시작했고 1995년 성지로 선포될 수 있었다. 또 북수동본당이 1995년부터 순교지에 관한 자료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병인박해 순교지임에도 잊혀져 있던 수원성지 개발도 시작됐다.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4면

“「2027 WYD 수원 교구대회 안내서」 함께 살펴봐요”

2027 WYD 수원 교구대회(이하 교구대회) 조직위원회 사무국은 최근 35쪽 분량의 「2027 WYD 수원 교구대회 안내서」를 발행했다. 안내서 전문은 하늘다리 홈페이지(https://heavenbridge.net)의 「하늘다리 매거진」 1월호 하단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 다운로드 일정부터 문답까지 알찬 구성 총 12장으로 구성된 안내서는 먼저 교구대회 및 서울 본대회 관련 일정과 홈스테이에 대해 상세히 다룬다. 본문 외 별첨으로도 교구 홈스테이 매뉴얼과 본당 공동 숙소 준비 매뉴얼을 마련했다. 제7장과 제8장에서는 본당에 대해 정리했다. 본당의 구체적 역할로는 홈스테이와 공동 숙소 준비, 성지 순례와 지역문화탐방 참여 등을 제시한다. 본당 조직위원회 역할도 짚으며 그 안의 대회진행분과, 인원생활분과, 양성교육분과 등 각 분과의 업무에 대해서도 다룬다. 또한 제9장에 교구대회가 시작되는 2027년 7월까지 ‘교구장 월별 기도지향’을 안내해 지향에 따라 봉헌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으며, 제10장의 교구대회 기대효과를 나누는 페이지를 통해 교구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했다. 제11장은 교구대회에 대해 교구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궁금증과 이에 대한 답변을 담고 있다. 어른들이 준비하는 일회성 행사는 아닐지, 봉사를 하고 싶은데 외국어를 못 해도 괜찮을지, 대규모 이벤트에 그치는 것 아닌지 등 솔직한 물음에 대한 답을 살펴볼 수 있다. 환대와 체험 그리고 찬양과 축제로 하나된 교구대회 안내서는 7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5일간 열리는 교구대회의 일정과 매일의 의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환대(7월 29일) - 순례자들은 배정된 본당 또는 공동 숙소로 이동한 뒤 지구 혹은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환영 예식을 거행한다. 이 과정 안에서의 ‘환대’는 마음을 열어 서로를 바라보고 새로운 만남 속에서 젊음의 잠재력과 희망의 첫걸음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성지순례&지역문화체험(7월 30~31일) - 교구대회의 핵심 일정이다. 5~10명의 순례자와 1~2명의 인솔 봉사자가 그룹을 이뤄 순례하는 것이 권장된다. 각 성지에는 언어권별 해설사가 배치된다. 청년들은 신앙 증거의 토대인 성지를 주체적으로 순례하며, ‘증언’이라는 행동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찬양과 파견미사(8월 1일) - 지구와 본당을 중심으로 지구 연합 성가 축제나 레크리에이션, 전통문화 체험과 음식 나눔 등이 열릴 예정이다. 청년들은 받은 은총을 기쁨으로 나누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젊은 교회의 힘과 활력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행사 참여를 넘어서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나서는 시작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본대회 파견(8월 2일) - 본대회로 이동하는 순례자들을 지구 혹은 본당 차원에서 환송한다. 순례자들에게는 머물렀던 자리에서 일어서, 성령 안에서 새롭게 나아가는 증언의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다. “순례자들을 정성으로 환대해요” 교구대회 참가 예상 인원은 1~3만 명이다. ‘교구 홈스테이’는 교구대회 기간 동안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을 가정과 공동 숙소로 맞아들여 ‘그늘과 쉴 자리와 양식’을 나누는 것을 뜻한다. 단순한 숙박 제공이 아닌, 하나의 작은 교회로서 ‘환대’ 속에 이루어지기에 순례자들은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느끼며 형제애를 배우게 된다. 홈스테이 봉사자들은 사전 교육과 순례자 기본 정보를 받는다. 아울러 순례자 맞이를 위한 그림 카드와 소통을 위한 기초 표현 카드도 제공된다. 순례자들도 한국 사회 가정이나 공동 숙소 이용에 관한 간단한 교육을 받을 예정이다. 가정 홈스테이 2차 모집은 2월 한 달 동안 각 본당을 중심으로 신청을 받고 있다. 순례자들은 안전상 문제로 2인 이상의 동성이 방문한다. 미성년 순례자는 보호자 또는 인솔자와 함께 배정된다. 공동 숙소는 본당의 상황에 맞춰 신청한 교구 단위로 배정된다.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2면

수원교구 정자꽃뫼본당-日 나고야교구 청년 교류회 마련

“언어는 달라도 기도하는 마음은 하나라는 것을 느꼈어요.” 수원교구 제1대리구 정자꽃뫼본당(주임 이기수 요아킴 신부)은 2월 6일부터 8일까지 일본 나고야교구에서 ‘수원-나고야교구 교류회’를 마련했다. 본당이 나고야교구와 협력해 마련한 이번 교류회는 한국 청년들이 이웃 일본 청년들과 신앙 안에서 교류하며, 작은 세계청년대회(WYD)를 직접 체험하고 준비한 뜻깊은 자리였다. 한국과 일본 청년들이 함께 기도하며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한 현장을 소개한다. 6일 나고야에 도착한 본당 청년 6명은 나고야교구 청년들과 첫 만남을 가졌다. 서로 다른 언어로 건넨 인사는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반가움과 환영의 마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교류회는 문화 체험과 신앙 체험으로 구성됐다. 첫날 청년들은 메이지시대 건축물을 모아놓은 메이지무라 박물관과 나고야성을 방문해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통 복장을 갖춰 입고 함께 사진을 찍고 서로의 문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양국 청년들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저녁 식사는 ‘함께 만드는 냄비 요리’로 특별하게 진행됐다. 한국 청년들은 일본에서 인기 있는 불고기와 순두부찌개를 준비했고, 일본 청년들 역시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전골 요리를 내놓았다. 서툰 솜씨였지만 서로를 위해 정성껏 만든 음식은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됐다. 비록 서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손짓과 몸짓, 번역 앱을 활용하며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두 나라 청년들의 마음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줬다. 배보경(클라라) 씨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웃는 순간들이 많았다”며 “친해지기 위해 중요한 건 말보다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문화 체험뿐 아니라 매일 저녁 진행된 기도와 나눔도 한국과 일본 청년들에게 뜻깊은 시간이었다. 묵주기도를 한 단은 일본어로, 또 한 단은 한국어로 번갈아 바치며 신앙 안에서 하나 됨을 체험했다. 배 씨는 “일본도 청년 신자 수가 줄고 냉담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당장 해법을 찾을 수는 없지만 같은 지향을 두고 기도하며 함께 힘을 모은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의 주제 성구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이다. 혼자서는 용기를 내기 어려웠던 청년들도, 같은 고민을 나누는 다른 나라 청년들과의 만남 속에서 큰 힘을 얻었다. 한국과 일본 청년들이 손을 맞잡고 함께 드린 기도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꿈꾸게 했다. 이번 교류회는 청년들이 용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는 시간이었다. 배 씨는 “신앙은 내가 힘들 때 기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힘들 때 내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 의미 깊은 교류였다”고 덧붙였다. 교류회에 동행한 정자꽃뫼본당 보좌 신성수(라파엘) 신부는 “서로 다른 지역 교회이지만, 같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각자의 자리에서 그분의 이끄심을 느끼고 살아가려는 노력만으로도 청년들의 마음에 성령의 불꽃이 심어진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며 “이번 교류회를 통해 청년들이 혼자가 아닌 ‘우리’로서 하느님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기쁨을 체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발행일 2026-02-15 제3479호 4면

[수원교구사 한 페이지] (4) 수원가톨릭대 설립·광암학원 운영

수원교구는 신학교 설립 초기부터 사제 양성과 교육을 교구 사명의 핵심으로 삼아 왔다. 신학교 설립 이전 전 교구 차원의 성소 활성화 운동부터 수원가톨릭대학교의 탄생, 그리고 광암학원을 통한 교육 사업의 체계화에 이르기까지, 교구가 걸어온 사제 양성과 교육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신학교 설립 전부터 교구 사제 양성에 힘써 1984년 수원가톨릭대학교 설립 이전부터 교구는 사제 양성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이는 교구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각 본당과 관련 기관으로까지 확산하며 전 교구적인 사제 양성 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안젤로, 2002년 선종)가 취임한 1970년대 중반에는 열악한 재정 여건 속에서도 다양한 지원 대책을 펼쳤다. 교구는 본당별로 ‘사제 양성 후원회’를 조직해 사순 시기 절제와 나눔을 실천하는 운동을 권장했으며, 사제들은 자발적으로 3만 원 이상의 성금을 모아 신학생 양성 기금을 조성했다. 교구는 모든 본당과 기관에서 매월 한 차례 ‘사제 성소의 날’을 정해 봉헌하도록 하고, 본당과 단체별로 성소 지망자와 희망자를 발굴하는 한편 사제 양성을 위한 연수와 모임, 기도의 날을 정례화해 나갔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수도권 인구 증가로 교구 내 신자 수가 급증하면서 사제 수는 상대적으로 부족해졌고, 사목 현장의 어려움은 계속됐다. 이에 김남수 주교는 1980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수원에 대신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건립 비용과 교수진 확보 등의 현실적인 제약으로 계획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당시 사목자 수급 문제는 교구뿐 아니라 한국천주교회 전체가 안고 있던 공통의 과제였다. 한국교회 제4대신학교 ‘수원가톨릭대학교’ 설립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82년, 주교회의 성직위원회는 한국교회의 장기적인 사제 양성 수요를 고려해 수원 지역에 제4대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안을 제시했고, 이 안은 같은 해 5월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에 교구는 1982년 8월 대신학교 건립 추진을 공식 발표하고, 성직자 5명과 평신도 3명으로 구성된 ‘제4대신학교 설립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교구는 충분한 건축 면적과 접근성을 고려해 당시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리에 있던 왕림본당 부지를 신축 부지로 선정했다. 이후 1983년 3월 교황청으로부터 학교 설립 인준을 받고, 4월 7일 본관 신축을 위한 기공식을 거행했다. 설립추진위원회는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교구 차원의 모금 활동을 본격화했다. 교구 내 모든 신자가 참여하는 모금을 진행하고, 지구별 바자를 열었고, 특별강론 신부를 파견해 본당별 모금 활동도 이어갔다. 같은 해 9월 당시 문교부(文敎部)는 ‘수원가톨릭대학’ 신설을 승인하고 김춘호(베드로) 신부를 초대 학장으로 임명했다. 본격적인 건립 단계에 접어들며 재정 확보는 더욱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 건립추진위원장 황익성 신부(아우구스티노, 2008년 선종)는 신학교 건립의 필요성과 재정 상황을 교구 전반에 알리며, 신자들이 각 가정 단위로 매년 일정 금액을 봉헌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구 역시 소유 토지 일부를 매각하고, 김남수 주교가 직접 교황청과 미국, 유럽 등을 방문해 원조를 모색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같은 호소에 신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응답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세뱃돈 봉헌을 비롯해 결혼 패물을 익명으로 내놓은 신자, 비신자의 자발적인 참여까지, 다양한 헌신의 모습은 당시 수원주보를 통해 전해지며 공동체의 참여를 끌어냈다. 공사비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됐다가 재개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성직자와 신자들의 지속적인 협력 속에 공사는 차츰 진전을 이뤘다. 그 결과 1987년 9월 모든 공정을 마무리하고, 1988년 5월 6일 김남수 주교 집전으로 수원가톨릭대학교 축복 미사가 봉헌됐다. 김남수 주교는 미사에서 “수원가톨릭대학교는 민족 복음화를 향한 여정 속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태어난 성소의 요람”이라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위해 사제 양성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자”고 당부했다. 수원가톨릭대학교는 이날을 개교기념일로 삼아 기념하고 있다. 수원가톨릭대학교는 개교 이후 사제 양성에 힘을 기울여 1989년 첫 부제서품식, 1990년에는 첫 사제서품식을 열었다. 한국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대신학교인 수원가톨릭대학교는 이후에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사제 양성을 이어가며, 교구와 한국교회의 사목 기반을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다. 교구의 교육사업 ‘광암학원’ 교구는 수원가톨릭대학교 설립을 결정한 이후, 교구 차원의 교육 사업을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1983년 5월 학교법인 광암학원을 설립했다. 광암학원 이사장은 김남수 주교가 맡았으며, 이사진에는 정덕진 신부(루카, 1996년 선종)와 김창린 신부(필립보, 2012년 선종)를 비롯한 6명의 사제가 참여해 운영을 이끌었다. 광암학원 산하에는 소화초등학교와 광성초등학교를 비롯해 효명중·고등학교, 안법중·고등학교 등 모두 여섯 개의 초중고등학교가 포함돼 교구 교육 사업의 기반을 이뤘다. 이 가운데 안법중학교는 1909년 당시 안성본당 주임 앙투안 공베르 신부(공안국, 1950년 선종)가 설립한 안법학교에서 출발했다. 남자 초등학생 대상 교육기관으로 시작했으나, 해방 이후 초등교육 의무화로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1974년 중학교로 개편됐다. 안법고등학교는 신자 학생 교육과 성소 계발에 힘쓰고 비신자 전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1990년대 전반까지 매년 약 1~3%의 비신자 학생들이 세례받는 성과를 거뒀다. 효명고등학교는 1953년 당시 서정동본당 주임 유수철 신부(도미니코, 1977년 선종)가 설립한 효명고등공민학교에서 비롯됐다. 가난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농촌 청소년들에게 중등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출발한 효명학교는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건학 이념 아래 성장해 왔다. 이후 1981년 중학교가 분리되면서 효명중·고등학교 체제로 자리 잡았고, 현재까지 평택 지역 인재 양성의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광암학원은 교구 교육 사업을 하나로 묶는 기반이 되어, 신앙과 교육을 함께 아우르는 교구 사목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발행일 2026-02-08 제3478호 4면

[수원교구 2025년 선교 우수 본당] 제2대리구 최우수 동판교본당

수원교구 제1·2대리구는 각 본당의 선교 활동을 독려하고, 지구 중심 사목 활성화를 위해 ‘2025년 선교 우수 본당’을 공모했다. 이번 공모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복음의 기쁨」 120항)를 되새기며,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선교 사명을 실천으로 이어가는 발판이 됐다. 진심을 담은 소통과 새 신자 후속 모임 등으로 제2대리구 선교 최우수 본당에 선정된 성남 동판교본당(주임 이상용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의 활동을 소개한다. 신자로 새로 태어나는 여정, 배려와 이해 속 함께해 본당 선교분과는 주로 예비신자와 새 신자를 대상으로 봉사하고 있다. 예비신자 모집을 위해 입교식 두세 달 전부터 성당 외벽에 대형 현수막을 달아 홍보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자리한 성당 주변으로 유동 인구가 많아 홍보 현수막을 보고 입교한 예비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선교분과는 본당 문화가 낯선 이들에게 원칙이나 규칙을 강요하기보다, 각 개인의 여러 사정을 배려하고 이해하며 유연하게 운영해 입교의 문턱을 낮췄다. 사정이 있어 교리를 받지 못하는 경우 개인별로 보충 수업을 마련해 교리를 이어가도록 했다. 2025년 성탄반에서 세례받은 신우섭(요아킴) 씨는 부인 그리고 30개월 아이와 함께 예비신자 교리를 받았다. 처음에는 한 명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따로 교리를 받을까 생각했는데, 선교분과에서는 모두 함께 교리 받기를 권했다. 아이가 어려 수업 참여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공동체 모두 이해하고 돕는 분위기 속에서 부부는 큰 어려움 없이 세례받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 씨는 “많은 분의 배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새 신자가 될 수 있었다”며 “과정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성당에 있는 시간은 영적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기에, 많은 분이 이를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본당은 레지오 마리애에서 맡아오던 선교분과를 2024년 2월부터 독립 단체로 재정비했다. 이에 따라 분과는 선교에 집중할 수 있었고, 2023년 39명이었던 영세자는 2024년 102명으로 세 배가량 크게 늘었다. 새내기 신자들에 대한 관심은 입교자가 세례식 이후에도 지속됐다. 한 달 정도 후속 교리를 열고 마지막에는 첫 고해가 연결되도록 했다. 또한 소속감과 친교를 증진하기 위해 여러 단체의 가입을 도왔다. 선교분과 김희숙(오틸리아) 봉사자는 “새 신자가 다시 선교분과 위원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멀어진 가족, 가까운 가족 모두 챙겨요 본당의 여러 단체는 신자들과의 열린 소통의 장을 마련해 친교를 나누고, 교육 이수와 기도 활동을 함께하며 신앙 공동체로서의 결속을 다졌다. 특히 소공동체는 냉담 교우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주보를 전달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2024년 한 해 동안 650여 명이 본당으로 다시 돌아오는 결실을 봤다. 신자 재교육과 신앙심 증진을 위한 견진교리도 활발히 진행됐다. 주말 오전반과 주중 저녁반을 개설해 직장인, 청소년, 대학생 등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 사회복지 기관이나 본당 복지 대상자에게 후원 활동을 이어가며, 본당의 따뜻한 마음을 지역사회에 전했다. 아울러 본당 카페를 운영해 신자들 간의 만남과 소통의 공간을 마련했고, 카페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며 선순환을 실천했다. 특히 가정생명생태분과는 생애주기별로 자리를 마련해 신자들을 아울렀다. ‘영유아 가족과 함께하는 가톨릭 그림책 읽기’는 아기 때문에 미사 참석을 주저하는 부모들을 위한 공동체를 제공하고, 비신자에게도 열린 선교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어르신을 위한 ‘생명학교’는 황혼기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고, ‘태아 축복식’에서는 교구장 축복장을 수여해 생명 존중의 의미를 나눴다. 초·중·고등부 대상 ‘한국 틴스타 특강’을 열어 자녀 세대를 본당으로 초대했다. 2025년 가정생명생태분과장을 맡았던 권새봄(아녜스·생태환경분과장) 씨는 “나도 냉담 교우였기 때문에 그 심정을 잘 알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며 “사회교리와 생명 수호 등을 담은 교회의 가르침이 신자들의 삶 속에 뿌리내리기 위한 활동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이상용 신부는 “큰 행사나 대형 슬로건보다, 기도를 중심으로 한 봉사자들의 눈빛과 미소가 선교의 기틀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입교한 분들은 본당 공동체에 내려진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이들을 보물로 여기고 더욱 소중히 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우수 본당과 지구별로 선정된 「선교 우수 본당 활동 사례 온라인 자료집」은 제2대리구청 홈페이지(https://v2.casuwon.or.kr) 공지사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 동판교본당 정훈조 선교분과장, “입교자들 통해 신앙 열정 배워요” “입교한 분들에게서 오히려 신앙에 대한 열정을 배우기도 해요.” 본당 선교분과장 정훈조(안드레아) 씨는 2024년 2월 선교분과가 독립할 당시 분과장으로 임명돼 활동을 시작했다.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한 선교분과는 두 명에서 아홉 명으로 성장했고, 본당은 이듬해 ‘2025년 제2대리구 선교 최우수 본당’에 선정됐다. 정 분과장은 이를 “함께한 봉사자들의 열정과 진심 덕분”이라고 돌아본다. 그는 예비신자들을 보며 오히려 자신이 감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기와 함께 교리에 참석하는 부부, 정규 수업 외에도 추가 교리를 듣겠다고 자청한 입교자 등은 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신앙생활 40년 여정을 걸어온 정 분과장이지만, “이분들을 통해 신앙의 본질을 다시 배운다”고 말했다. 물론 입교자들과의 소통은 때로 어려움을 동반한다. 연락이 끊기거나 서류 제출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어 마음고생이 따르지만, “세례받는 순간을 보면 모든 게 잊힌다”고 전했다. 정 분과장은 본당 입교자의 중도 이탈이 거의 없는 점도 자랑스럽게 여긴다. “신청만 해놓고 안 오는 경우는 있지만,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봉사자들과 교리교사들이 진심으로 다가가며 꾸준히 연락하고 대화하는 것이 큰 역할을 합니다.” 선교분과장 임명 당시 단체 구성원이 자신밖에 없어 막막했지만, 봉사자가 한 명 두 명 늘어나며 프로그램도 점차 체계를 갖췄다. 그중에서도 2024년 운영한 외짝교우반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배우자가 신자인 경우 교리 기간을 3개월로 줄였고, 부담을 덜자 더 많은 이가 참여했다. 정 분과장은 아내의 신앙 덕분에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본당 활동에 거리를 두던 그였지만, 아내의 권유로 선교분과에 발을 들였다. 이후 부부가 함께 봉사했던 분당 국군수도병원 성요셉본당에서는 사병과 장교들을 대상으로 식사 봉사를 했고, 특히 비신자 사병들의 대부로 여러 차례 나섰다. 한 번에 6명의 대부를 맡았던 적도 있다. 10여 년간 이어온 선교 봉사를 돌아보며 그는 겸손하게 웃는다. “사실 지금도 선교분과장을 맡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거부감 없이 계속 걸어오게 됐고, 아마도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이라 생각하며 임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6-02-01 제3477호 4면

[수원교구사 한 페이지] (3)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 착좌

1974년 10월 5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이었던 김남수(안젤로) 신부가 수원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이후로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10년간 교구에는 또 다른 장이 펼쳐진다. 초대 교구장이었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가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교구는 더욱 성장해 나갔다. 특히 전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며,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에 맞서 생명 운동에 힘썼다.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 착좌 김남수 주교의 착좌식은 1974년 11월 21일 당시 주교좌였던 고등동주교좌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 주례로 거행됐다. 김 주교가 교구장에 부임할 당시인 1974년 12월 교구 내 본당은 31개, 공소 339개, 신자 6만 7736명, 성직자 62명, 대신학생 48명, 소신학생 27명이었다. 김 주교는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UT SINT UNUM)’를 사목 표어로 내걸었다. 즉, 교구장을 중심으로 온 교구민이 하나로 뭉쳐서 현대사회의 분열, 종교에 대한 불신과 황금만능주의 풍토를 극복해 나갈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1975년 ‘화해의 희년’에 발표한 연두 교서에도 반영됐다. 김 주교는 연두 교서에서 “특히 주교와 사제들, 사제와 사제, 사제와 교우들, 교우와 교우 사이에 참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교회적 일치야말로 그리스도의 최후의 소망이었으며, 일치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 주교는 교구의 여러 부분을 챙기며 발전을 이끌었다. 첫째, 훗날 수원가톨릭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사제 성소 발굴과 양성에 열의를 가지고 임했다. 둘째, 전 세계교회의 흐름과도 같이, 청소년에 관심을 두고 효과적 교육 방법 모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셋째,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과 시성을 위한 순교자 공경 열정을 되살렸다. 이러한 순교자 연구와 현양, 성지 개발은 교구 차원으로 발전됐다. 넷째, 교세 확장 속 교구의 구심점인 주교좌성당, 교구청 정비가 이루어졌다. 1977년 5월 18일 조원동주교좌성당 준공식과 함께 교구 공식 주보로 ‘평화의 모후’가 선정됐다. 아울러 교구와 지구 조직 체계가 자리를 잡게 됐다. 1977년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재결성됐으며, 1978년 교구 사제평의회가 구성됐다. 한국교회 200주년, 전교하며 준비 1979년 ‘전교의 해’를 맞아 김 주교는 사목 지침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교구 신자들에게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타인의 구원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전 생애를 전교 활동에 바칠 것을 권고했다. 이를 위해서 기도와 영성 생활을 강조하며, 가정과 본당에서 기도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또한 신자 재교육, 사제와 수도 성소 육성, 청소년 배려, 성당 건축을 위한 경제적 협력, 성지 개발 협조 등을 요청했다. 또 1981년 ‘이웃 전교의 해’에는 각 본당에서 다각적인 전교 활동을 독려해 교세 확장에 크게 힘썼다. 그 결과, 1982년에는 전년 대비 신자 수가 1만2000명 증가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교구 설정 20주년이었던 1983년 5월 8일, ‘교구 20주년 기념 선교대회’를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거행했다. 참석자 약 3만5000명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 아래 ‘모두 모이자! 기도하자! 선교하자!’를 구호로 외쳤다. 또한 사목 지침을 통해 한국교회 200주년을 위한 기념 회의와 정신 운동, 기념행사, 기념사업과 신앙 행사들의 추진을 제시했다. 우선 기념 회의로 교구 사목 회의를 개최했다. ‘200주년 사제, 수도자 및 평신도 합동 연수회’와 교구 산하 단체·수도회·지구·본당별 사목 회의가 열렸으며 최종 정리 회의로 마무리됐다. 교구는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도문’과 ‘200주년 어린이 노래’를 보급해 쇄신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정신 운동을 펼쳤다. 또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교자 유해의 본당 순회 기도회를 열고 본당과 기관에 유해 분배도 이어갔다. 중점사업도 마련했는데, ▲대신학교 건립 ▲미리내성지 개발 ▲천진암성지 개발 ▲교구 20년사 편찬을 결정하고 추진했다. 이러한 준비 속에 교구는 1984년 한국교회 200주년을 맞이한다. 생명 수호와 가정 성화 펼쳐 1960~197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정부는 산아 제한 정책을 펼쳤다. 피임 도구 보급, 불임수술 시행, 인공 유산(낙태) 허용 등을 추진해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교회는 낙태 허용과 불임수술을 명시한 모자보건법에 대항하여 1973년 행복한 가정 연구위원회를 발족했다. 또한 낙태와 비 그리스도적 피임법에 반대하며 대신 자연주기법을 홍보했다. 특히 김 주교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있던 시기부터 정부의 경제성장 위주 보건정책 비판에 앞장섰다. 김 주교는 교회의 미래가 산아 장려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구 증가와 성소 계발을 연결시키며 적극적으로 생명 수호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에 교구는 1976년 ‘경제 발전을 위해 생명권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김 주교의 뜻에 따라 행복한 가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성빈센트병원과 교구청 강의실에서 지도자 교육을 실시했으며, 유급 가족계획 지도원을 채용해 본당 출장 교육을 전개하도록 했다. 각 본당 대표 여성 교육과 성직자·수도자들 대상 세미나 등을 마련했다. 1980년 ‘가정 성화의 해’에는 교구장 사목 교서를 통해 가정과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혼인 준비 교육과 산아조절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으며, 그 이후로도 이를 실행해 나갔다.

발행일 2026-01-25 제3476호 4면

[수원교구 2025년 선교 우수 본당] 제1대리구 최우수 기안본당

수원교구 제1·2대리구는 각 본당의 선교 활동을 독려하고, 지구 중심 사목 활성화를 위해 ‘2025년 선교 우수 본당’을 공모했다. 이번 공모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복음의 기쁨」 120항)를 되새기며,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선교 사명을 북돋는 계기가 됐다. 적극적인 가두 선교와 전입 교우 돌봄 등으로 ‘제1대리구 선교 최우수 본당’에 선정된 기안본당(주임 윤범진 도미니코 신부)의 활동을 소개한다. ‘사람 낚는 어부’로 새 가족 맞이해요 기안본당 선교분과는 해마다 두 차례 입교식을 앞두고 가두 선교를 펼치며 예비신자들을 맞이한다. 입교 전에는 9일 기도를 봉헌하고, 이후 5개월간 성경 읽기, 사제와의 친교, 전례 특강 등을 통해 새 신자 돌봄에도 힘쓴다. 정채원(가브리엘라) 씨는 2024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세례를 받고 현재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로 봉사 중이다. 그는 “예비신자 시절 자격증 시험 때문에 교리 수업에 참여하기 어려웠는데, 나만을 위한 보충수업을 마련해주셔서 감동했다”며 “세례 후에도 성경 모임을 통해 공동체 소속감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봉사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12년째 선교분과에서 봉사하고 있는 전귀옥(히야친타) 씨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형제·자매들을 볼 때면 너무나 기뻐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고 전했다. 본당의 선교 활동은 선교분과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우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가정분과, 냉담 교우와 신자 재교육을 담당하는 교육분과도 선교의 중요한 축이다. 성지순례와 가정 미사, 정기적인 환경 정화활동을 하는 소공동체, 장례를 담당하는 연령회 등의 다양한 활동도 입교와 회두의 통로가 되고 있다. 가정 중심 프로그램으로 ‘우리 신자’ 따뜻하게 돌봐요 본당은 새 신자뿐 아니라 기존 신자들에 대한 관심도 놓치지 않는다. 일반 가정, 유아 가정, 전입 가정을 중심으로 다양한 모임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가정분과는 2024년 하반기 매월 마지막 주 추첨을 통해 총 165가정에 가족 식사 쿠폰을 전달했다. 2025년 상반기에는 ‘말씀 카드 뽑기’ 프로그램을 마련해, 가족 간의 신앙 대화와 유대를 도왔다. 유아 가정을 위한 부모 모임과 본당 사제·수도자와의 다과 시간, 유아세례 전 부모 교육 등은 친교와 신앙의 토대를 다졌다. 전입 가정은 사제 방문과 면담, 집 축복, 소공동체 참여로 본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도왔다. 냉담 교우들도 성지순례와 다과 모임을 통해 다시 공동체로 이끌고 있다. 소공동체 최양숙(율리아나) 구역장은 “10년 넘게 냉담하던 한 교우가 다시 나와, 복사를 서는 딸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크게 느꼈다”며 “평소 길에서 냉담 교우들을 만나면 꼭 인사하고 전화를 통해서도 다시 성당에 나오기를 꾸준히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당의 선교 활성화에는 주임 윤범진 신부의 관심과 지지가 큰 힘이 되고 있다. 윤 신부는 소공동체 모임을 격려하며 추가 모임 시 커피 쿠폰을 지원했고, 냉담 교우를 초대하는 자리도 함께 마련했다. 다자녀 가정에는 장학금을 전달하고, 부모 모임을 통해 유아기 가정이 본당과 멀어지지 않도록 세심히 살폈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가두 선교도 다시 시작했다. 윤 신부는 “하느님을 멀리하는 시대에 자발적으로 하느님과 교회를 찾는 분들이 너무 감사하다”며, “그분들을 통해 저 또한 신앙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사랑하고 닮고 싶은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품고 전하려 노력하는 것, 그것 자체가 선교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기안본당 박승미 선교분과장, “예비자가 마음 열 때 가장 기뻐요” “본당의 거의 모든 단체가 선교를 위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어요.” 박승미(클라라) 선교분과장은 “본당이 본격적으로 선교에 나선 것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며 “분과별로 유기적이고 체계적으로 각자 역할을 잘 수행해 준 덕분에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했다. 선교분과는 본당 선교의 최전선에서 활동한다. 최근 열린 가두 선교에서는 입교 안내서와 함께 대형 물티슈를 배포해 큰 호응을 얻었다. 박 분과장은 “입교식을 앞두고 봉헌하는 9일 기도에서는 예비신자들이 신앙심을 키우고, 끝까지 교리를 배우며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지향한다”고 설명했다. 박 분과장의 선교 생활의 뿌리는 1982년 온 가족과 함께 세례받은 경험에서 비롯됐다. 당시 기안에 공소가 있던 시절, 새댁이었던 그는 갑작스럽게 쓰러진 시어머니를 위해 동네 어르신들이 매일 집으로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시어머니는 교우가 아니었기에 그 기도는 더욱 뜻깊게 다가왔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타지 생활을 거쳐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온 뒤, 2025년부터 선교분과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고향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은 박 분과장에게 특별한 의미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예비신자들이 점점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돼요.” 그는 2025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한 부부가 세례받았던 순간을 가장 기쁜 기억으로 꼽았다. 그 부부는 본당 신자들이 무려 20여 년 동안 정성과 관심을 쏟아온 이들이었다. 박 분과장은 “두 분은 저희 집안의 형님과 아주버님이기도 해, 특별한 일이 있을 땐 직접 음식을 마련해 찾아가기도 했다”며 “세례식 날은 온 마을이 함께한 동네잔치 같았다”고 전했다. 선교의 역할은 세례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새 신자들이 신앙을 지켜가며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잡도록 지속적으로 돕는다. “영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대부모들이 많아요. 단체에 소속되어야 서로를 이끌고 북돋아 주며 신심이 깊어질 수 있어요.” 박 분과장은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선교를 실천한다. 체육관에서는 옆 사물함을 쓰는 이웃에게 가볍게 말을 건네며 집 근처 성당을 소개하곤 한다. 그는 “내가 할 일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고, 거두는 것은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며 겸손히 말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데는 용기와 기쁨이 필요해요.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용감하게 시작해 보세요.”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4면

[수원교구사 한 페이지] (2) 순교자 현양 운동과 평신도 양성

초대 수원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는 교구 설정 이후 ‘신앙생활과 전교활동의 강화’를 교구의 핵심 목표로 내세웠다. 인적·물적 기반이 부족한 신설 교구가 자립하고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신자들의 신앙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윤 대주교는 ‘순교자 현양’과 ‘평신도 양성’에 역점을 뒀다. 순교자 현양 통한 순교 신심 함양 당시 교구에는 신앙 선조들이 왕래하며 박해의 고통을 겪은 터에 세워진 본당들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안장됐던 미리내성지를 비롯해 유서 깊은 신앙의 유산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윤 대주교는 신자들이 이러한 유산을 직접 체험하며 순교 신심을 키워가길 바랐다. 그 중심에는 순교자 현양 활동이 있었다. 특히 김대건 신부의 묘역과 경당이 지닌 신앙적 의미를 중요하게 여긴 그는 미리내성지를 순교 신심을 다지는 핵심 장소로 꼽았다. 1964년부터는 이곳에서 교구 차원의 순교자 현양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윤 대주교는 훗날 “교구는 초창기 교회 순교 선열들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공동체라고 생각했다”며 “더 많은 이가 신앙 안에 순교 정신이 뿌리내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미리내성지에서의 순교자 현양대회를 기획했다”고 회고했다. (가톨릭신문 2011년 2월 13일자) 이와 함께 교구는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맞아 추진된 ‘순교복자 기념성당’ 건립에도 동참했다. 1965년 주교회의는 각 교구에 순교복자 기념성당을 세우는 전국적인 현양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고, 교구는 같은 해 6월 15일 사제회의를 통해 뜻을 모았다. 3개년 계획으로 추진된 이 사업은 총 400만 원을 모아 수원 서둔동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윤 대주교는 교서를 통해 성직자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순교 정신에 따라 절약한 용돈을 봉헌하길 권유했다. 성당 건립 과정 자체가 신자 각자의 삶에서 순교 신심을 체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1969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23주년 기념일에 서둔동 순교복자 기념성당이 완공됐다. 한옥 정자형 종탑과 옹기가마를 연상케 하는 건축 양식은 순교자들의 영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지역 사회에 천주교의 존재를 알리는 이정표가 됐다. 3개년 평신도 교육 시행 1960년대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가 교회의 주체라는 인식이 확산되던 시기였다. 교구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르며, 동시에 신설 교구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평신도의 적극적인 참여를 절실하게 요청했다. 윤 대주교는 교구장 착좌 당시부터 사목 지침을 통해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 출발점은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이하 평협) 설립이었다. 윤 대주교는 1968년 12월 1일 ‘제1회 평신도 사도직의 날’을 맞아 모든 본당 주임신부에게 평신도 사명에 대한 특별 강론을 요청했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23일에는 27개 본당 대표와 교구 단위 단체 대표 등 55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구 평협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평협 창립을 계기로 평신도 지도자 교육도 속도를 냈다. 1971년 11월 교구는 ‘평신도 교육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계획에 따르면, 1972년에는 평신도 지도자 교육과 사제 연수를 병행하고, 1973년에는 교육을 받은 사제와 평신도 지도자가 일반 신자를 재교육해 평신도 역량을 강화한다. 마지막 해인 1974년에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신자들이 단체를 조직하고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경우 1975년에는 본당 단위에서 인력과 재정의 자립이 가능해지고, 본당 간 협력과 공동 사목, 사도직 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교구는 기대했다. 아울러 사제 양성, 순교자 현양, 은퇴 사제 지원, 군종 사목, 농촌 아동 교육 등 교구의 현안 해결은 물론, 다른 교구의 소외된 신자들을 돕는 기반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교육과정은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교회론’, ‘전례학’, ‘성사론’ 등을 포함했고, 1972년 제1차 교육에는 본당 대표급 남녀 회장 30여 명이 참여했다. 이후 교육은 본당과 지역, 공소, 단체 등으로 연쇄적으로 확산됐다. 이듬해 대부분의 본당이 지도자 교육, 신심 단체 피정, 어린이 부모 교육 등의 이름으로 신자 재교육을 시작했다. 이러한 평신도 교육운동은 전교 활동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교구 신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평신도 교육이 시작된 1972년, 신자 수는 전년(5만6303명) 보다 2675명 늘어난 5만8978명이었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전년보다 9012명이 증가해 6만7990명을 기록했다. 1973년 기록한 15.2%의 증가율은 1990년대 초까지 가장 높은 신자증가율로 기록돼 있다.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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