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는 단식과 절제를 통해 신앙을 돌아보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시간이다. 전통적으로 단식은 음식이나 기호품을 절제하는 방식으로 실천돼 왔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의 일상을 차지하는 것은 음식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일지도 모른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하루 종일 디지털 기기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모습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디지털 미디어의 과도한 사용이 인간관계를 빈곤하게 만들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교황은 특히 “소셜미디어가 진정한 만남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강조하며, 온라인 소통이 실제 인간관계를 약화시킬 위험을 지적했다.(2019년 제53차 홍보 주일 담화) 필리핀 주교회의가 올해 사순 시기 발표한 사목 서한 「음식을 넘어선 단식: 디지털 미디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기」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주교회의는 디지털 기술이 비록 유익하지만, 과도한 사용은 기도와 침묵의 시간을 빼앗고 인간적 관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아침과 취침 전 휴대전화 사용을 줄이고, 식사 시간에는 디지털 기기를 내려놓거나 끄고 기도와 성경 읽기, 가족과의 대화에 할애하는 ‘미디어 단식’을 제안했다. 사순 시기의 단식은 단순히 욕구를 참는 행위가 아니다. 극기를 통해 삶의 중심을 다시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는 영적 훈련이다. 잠시 화면을 내려놓고 침묵 속에서 가족과 이웃을 바라보는 시간,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단식일지 모른다. 그렇게 비워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 기도하고, 하느님께 마음을 향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 신앙인에게 ‘미디어 단식’은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돌려놓는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준비가 보편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서울 WYD 조직위원회는 최근 로마를 방문해 대회 준비 상황을 공유했다. 조직위원장 정순택 대주교를 만난 레오 14세 교황은 한국에서 전 세계 젊은이들과 만날 날을 기대하며 준비에 감사를 전했다는 후문이다. 보편교회와 조직위원회가 서울 WYD를 향해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적 관심과 기대에 비해 국내 준비 상황은 여전히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WYD는 단순한 교회 행사를 넘어 수십만 명의 청년이 참여하는 세계적 규모의 국제행사다. 그럼에도 정부 차원의 지원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세계청년대회 특별법’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논의가 지연되고 있다.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는 행정과 재정, 인프라 지원이 필수적인 만큼 정부와 정치권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협력이 요구된다. 준비 과정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과제는 대회의 핵심 행사인 폐막미사 장소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WYD 밤샘기도와 폐막미사는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상징적 순간이자 대회의 절정이다. 그만큼 안전, 교통, 숙박, 공간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면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서울 WYD는 신앙의 축제일 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는 소중한 기회다. 이제 준비에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교회와 정부, 사회가 함께 지혜를 모아 보다 체계적이고 치밀한 준비에 나설 때, 서울 WYD는 세계 젊은이들에게 오래 기억될 희망의 축제가 될 것이다.
“아니, 주님께서 부활하셨는데 대영광송을 외국어로 들어야 하나요?” 매년 부활 때마다 내 마음속에 드는 불만 중 하나는 부활 성가를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로 들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마저 성가가 길어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일어나 달라”는 해설자의 멘트에 마지못해 일어난 적도 있었는데, 이 또한 불만이었다. “과연 이런 모습으로 어려운 성가들을 듣고 있기만 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하는 것이 전례 형식에 들어 있는 줄 알았다. 2025년 겨울, 제주교구 하귀본당에서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보다 더 예전에 어느 교구의 작은 본당에서 한 달 정도 지휘자 흉내를 내다가 쫓겨 난 이후로 관심조차 없었던, 아니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생각조차 안 했던 내가 지휘를 한다고 성가대원 앞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음악 전공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심히 공부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하귀본당에서 나를 선택한 건 실수라는 핑계를 마음에 두고 성가대원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끝내고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기초적인 지휘를 시작했다. 이때 깜짝 놀랐던 것은 내 손짓에 반주와 노래가 시작되고, 내 지휘 템포에 맞춰 성가가 불리고, 나의 마무리 지휘 액션에 노래가 끝난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럽고 등짝에 땀이 물 흐르는 듯했다. 내가 뭐라고, 이런 위치에 있는 게 맞는지, 뭔가 잘못된 건 아닌지 심장이 뛰었다. 연속되는 긴장감 속에 어깨는 무거워지고,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연습을 했고, 어떻게 미사를 했는지도 모른 채 빨리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학수고대했던 것 같다. 육지에서 지휘하고 있는 후배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주변의 신부님들에게 전례에 관해 여쭈어보기도 하고, 영상도 참고하기 시작하였다. 30년의 찬양 사도 활동에서 얻은 경험과 현장에서 배우고 느꼈던 방법도 생각해 내며 본격적인 공부(?)를 하려고 했을 때, 그동안 불만이었던 것들이 해결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꼭 성가를 어렵게 외국어로 불러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는 것이다. 성가는 신자들이 즐겁고 기쁘게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불러야 한다는 것이 전례 관련 책을 읽고 계셨던 신부님께 들은 내용이었다. 오호라~. 그다음부터 성가대 단원들에게 “외국어로 된 특송은 절대 하지 않겠다. 제 능력이 거기까지고, 전례서에도 꼭 어렵게 부르라는 내용도 없으니, 불만이면 저를 쫒아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면서 연습에 임하고 지휘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 지휘한 지 아직 짧은 기간임에도, 느낀 것이 있다면 성가대가 즐겁고 행복하게 성가를 불러야 미사에 오시는 신자들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또한 일주일 동안 힘겨운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내어 미사에 참석하신 신자분들에게 성가를 통해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시간인지를 신자분들의 얼굴을 통해, 목소리를 통해 조금씩 체험하고 있다. 이 체험을 한 후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그 바람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어려운 성가를 부르는 것보다, 내 목소리를 드러냄으로써 주님의 이름이 가려지는 것보다, 나의 작은 찬양과 작은 몸짓이 주님과 신자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미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글 _ 박우곤 알렉시우스(가톨릭청년머뭄터 혼숨지기, 안드레아여행사 성지순례 프로그램 담당)
주일 오전 9시. 서울 홍제동본당 주일학교 개학 미사 현장을 찾았다. 모처럼의 휴일, 더 자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 채 성당을 찾았을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친구들을 다시 만난 탓인지 성당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학생들의 웃음과 재잘거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일은 흔치 않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평소 취재를 하며 여러 본당 주보를 살펴보지만, 교구나 본당에 따라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때가 많다. 형식은 대부분 비슷하고, 달라 봐야 글꼴 정도만 다른 경우가 많다. 내용 역시 전례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담당 취재처 주보를 훑어보다 보면 이 주보가 어느 본당 것인지 한눈에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자주 있어 왔다. 그런데 지난주, 유독 눈에 들어오는 주보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의 일곱 컷 만화가 실려 있었다. 바로 홍제동본당 주일학교 동아리 ‘봉우리’ 학생들이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린 ‘신앙 만화’였다. 단순히 그림이 예뻐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신앙을 바라보고 표현한 장면들이 주보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개학 미사와 교리 수업을 마친 봉우리 학생들을 교리실에서 만났다. 다음 달 주보 지면 구성에 대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은 생각보다 더 의욕적이었다. 학업과 여러 활동으로 바쁜 시간 속에서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주보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어른들이 마련해 준 틀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언어와 시선으로 신앙을 표현하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교리실에서 이어지던 회의는,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은 선물입니다. 아침이라는 선물 외에 다른 선물도 여럿 당도한 봄날. 제자가 노래를 하나 보내주었고, 동료 선생님은 책을 보내주셨네요. 제자는 랩을 참 잘해서 아이돌로 성공할까 싶던 아이였는데, 신학대학원에 가더니 이제는 교회에서 신앙의 길을 이끄는 사목자가 되었네요. 학생들은 가능성의 씨앗입니다. 저는 그 씨앗에 물을 주는 사람. 가능성을 믿고 정성 어린 마음으로 마주하며 나누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먼 지방에서 서울로 와서 보니 지역의 격차가 너무 크다고, 고향에 남은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던 아이였습니다. 사랑 많은 그가 기도하는 어른이 되어 참 좋습니다. 그가 보내온 성가를 듣는 봄날 아침이 그대로 기도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 주님이 가신 길 아무도 원치 않는 길을 내 주님이 걸으셨네.”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에 대한 노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주님이 따르신 순종의 길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길 같아요.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래요. 자기 몸의 안위를 생각할 때는 어떤 일을 하는 동기 부여가 쉽게 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순종은 얼핏 이해가 잘되지 않지요. 타인을 구원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하지만 지금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깎아가며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계시기에, 주님 걸으신 순종의 길, 그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돌아보게 합니다. 다시 노래를 듣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조용히 지고 가신 주님은 순종하셨네 그의 몸을 버리셨네.” 몸을 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 지상에서 몸을 버리는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병원 중환자실에서 고통받으셨던 3일간, 이 성가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고통에 몸을 비틀고 얼굴을 찡그리시는 아버지를 보며 울면서 생각했지요. ‘아버지,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셨는데, 인간됨으로 겪는 이 고통을 부디 조금만 참으세요. 아버지 조금만 더 참으세요.’ 어쩌면 참 야속할 수도 있는 딸의 기도였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다시 떠올리지만, 사실 이 길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영적인 실천을 통해 이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하실 때, 여기서 ‘날마다’는 매일 죽음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십자가의 신비를 이야기하니까요. 한편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는 그 순종의 길이 절대적인 비움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몸을 완전히 비우고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는 이제 죽음 너머에서 제게 질문하십니다. 유교의 관습으로 2대 양자의 삶을 사신 아버지는 양쪽 집안의 무게를 오롯이 지면서 사셨기에 참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묵묵히 참아가며 걸으신 그 조용한 길은 어쩌면 예수님을 닮은 작은 순종의 길이었음을, 주어진 운명을 불평 없이 따르신 아버지의 삶이 곧 믿음의 삶이었다 싶습니다. 지금 제게,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열심히 기도하고, 실천하고,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응원하고 있을까, 아니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을까. 글·그림 _ 조재형 안드레아 신부(수원교구 궁리본당 주임)
1813년 겨울, 잉글랜드 요크에서 14명의 노동자가 반란 혐의로 교수대에 올랐다. 방직 산업의 급격한 기술 혁신이 오히려 노동자들의 삶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있던 때였다. 숙련은 존중받지 못했고, 임금은 추락했으며, 생계는 흔들렸다. 급진적 노동운동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를 부수는 파괴적인 저항으로 알려진 ‘러다이트 운동’도 그 하나다. 흔히 무지한 폭도들의 반란으로 묘사되고는 했지만, 역사학자 E. P.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이를 새롭게 읽었다. 그것은 단지 기술에 대한 증오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삶의 균형, 스스로 삶을 규정하는 힘이 파괴되며, 자신들의 생활과 존엄을 아무 가치도 없게 만드는 질서에 대한 ‘도덕적 저항’이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 노동 현장은 방직기에서 반도체 클린룸과 데이터센터로 바뀌었다.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떠들썩한 시대, 한국 사회는 AI와 반도체를 국가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거대한 산업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고 초고압 송전선로가 농어촌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종일 꺼지지 않는다. 욕망과 눈물이 함께 떨어지는 풍경이다. 효율과 경쟁력이 지상과제가 되고, 주식과 AI가 성장의 상징이 되면서,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지역 공동체의 삶, 환경의 착취, 에너지 자원의 과다 소비 같은 생존과 보호의 문제들은 배제되었다. 온갖 종류의 특별법과 육성 정책은 사적 기업의 위험을 공공이 떠안는 ‘디리스킹(De-risking) 국가’ 기제로 전락하고, 생명과 생태의 가치는 사라졌다.(김상현, 「반도체·AI 신드롬에 짓밟히는 노동과 생태」, 창비주간논평)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살만한 미래를 상상한다면, 과잉과 남용을 피할 수 없는 성장 방식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려는 욕망이 우리를 온전하고 충만하게 살게 하겠는가? 사회·생태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발전을 지연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발전을 인간화하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다. 특히 노동은 단순히 생산과정의 한 부분이 아니다. 노동은 인간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방식이며, 창조에 협력하는 행위이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건이다. 이를 비용으로만 환산하는 체제는 경제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왜곡된 질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듯이, 노동은 ‘존엄으로 가는 통로’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인 성취로 가는 길’이다.(「찬미받으소서」, 128항) 노동은 인간을 인간답게 ‘움직이게 하는’ 통로다. 러다이트의 처형대와 데이터센터의 불빛은 시간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의 질문이 있다. 노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기술의 변화는 누구의 삶을 지우는가. 자본의 막대한 이익은 누구에게 가는가. 사회적 삶의 재구성도 근본적으로는 ‘회개’의 요청이다. 회개란 방향을 바꾸는 행위다. 속도를 늦추고, 기준을 다시 세우며, 목적을 다시 확인하는 영적 결단이며, 노동과 기술을 관계의 질서 안으로 돌려놓는 영적 용기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고, 노동이 존엄을 드러내며, 창조 세계가 선물로 존중받는 질서로의 전환은 거창한 전략 선언을 믿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타자의 자리를 더 존중하고 욕심을 더 묻어놓는 마음에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선택은 기계의 새벽이 아니라, 인간의 새벽이다. 그 새벽은 정의를 향한 결심, 연대를 위한 발걸음, 전환과 회개의 용기 속에서 비로소 떠오른다. 글 _ 박상훈 알렉산데르 신부(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상징하는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 춘천교구 순례가 2월 25일 강릉 솔올성당에서 시작됐다. 환영식은 이날 오후 3시 교구장 김주영(시몬) 주교님, 춘천교구 영동지구 신부님들을 비롯한 많은 신부님, 그리고 수도자와 평신도가 모여 성대하게 거행됐다. 성당에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됐다. 전국 교구별로 약 한 달 일정으로 순회하는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는 교계 언론 보도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영광이 나에게도 주어졌다. 전국 교구의 첫 순회는 원주교구에서 이뤄졌고, 그 두 번째가 춘천교구인데 우리 교구에서도 영동지구 지구장 본당인 솔올에서 첫 순회를 하게 됐으니 본당 신자로서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평일이라 주인공인 청년들의 참여가 적을 수밖에 없었던 점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영동지구 12개 본당에서 온 신자들로 인해 환영식 시작 전에 이미 400석의 성전 안에는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차서 그 열기가 주님 부활 대축일이나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때의 축제 분위기를 능가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신자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성당 뒤편에서 입장하는 WYD 십자가는 사제 1명, 수도자 1명, 청년 4명, 장년 2명 등 모두 8명이, 성모 성화는 주일학교 학생 2명이 운반했는데, 행렬 순서는 향-촛불-향합-성모 성화-WYD 십자가-사제단 순이었다.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가 성당 중앙 통로를 지나며 제대 앞으로 옮겨질 때, 모든 신자가 일어나 고개를 숙여 경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듯했다. 중앙 제대 앞에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를 정성을 다해 모시고, 독서와 복음 낭독, 강론 후에 참석한 신자들이 함께 바치는 십자가의 길 기도는 사순 시기에 절묘하게 마음의 울림을 주었다. 교구장 김주영 주교님 말씀대로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가 춘천교구를 순례하는 기간이 사순 시기와 겹치게 된 것도 신자들에게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여겨졌다. WYD 대회가 열리는 전 세계를 순례해 온 십자가와 성모 성화를 경배하는 나는 짧고 반복적인 음으로 울려 퍼지는 떼제성가 속에서 이런 지향을 두고 기도했다. “사랑의 하느님, 2027년 전 세계 젊은이들이 순례 여정 안에서 한국의 독특한 신앙 유래와 요즘 한창 핫한 이슈인 K-문화를 통해 이사야서 11장과 같은 평화로운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고 젊은이들이 두려움 없이 용기를 내어 친교와 일치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는 3월 1일 솔올성당을 떠나 춘천교구 두 번째 순례지인 양양성당으로 이동했고, 3월 22~25일 주교좌죽림동성당까지 총 15개 성당을 순례한 뒤 수원교구로 인계된다. WYD 십자가와 성모 성화가 순례하는 모든 성당에서 신자들이 내가 받은 뜨거운 은총을 체험하기를 기도한다. 글 _ 이철호 베네딕토(춘천교구 강릉 솔올본당 전 사목회장)
내가 살고 싶은 집 Pakistan, 2011. 높고 깊은 산맥에 소중히 숨겨진 가쿠치 마을. 흰 만년설과 푸른 하늘과 붉은 흙집과 노란 나무가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가을날. 남자들은 산 위에서 야크를 치고 땔감을 구하고 여인들은 양털을 자아 옷감을 짜고 빵을 굽는다. 따사로운 가난마저 고르게 빛나는 마을. 단순하고 단단하고 단아한 작은 흙집. 마음까지 환해지는 내가 살고 싶은 집. - 박노해(가스파르) 사진 에세이 「다른 길」 수록작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3월 29일까지 박노해 시인 상설 사진전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도를 아십니까?’, ‘인상이 좋으시네요.’ 길거리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질문이다. 직접 듣지는 못했더라도 이 말들이 유사종교 단체가 포교 활동을 벌이며 던지는 질문이라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수법은 이제 많이 알려져 대부분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의 포교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새 학기가 시작되는 시기, 대학가를 중심으로 교묘한 포교 활동이 만연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이들은 신분을 위장한 채 MBTI 검사, 심리테스트, 봉사활동이나 동아리 활동 등을 내세우며 접근해 친분을 쌓고 서서히 자신들의 단체에 빠져들게끔 한다. 설문조사를 가장해 이름, 연락처, 학과 등 개인 신상을 적도록 유도하거나 행운권 추첨 등을 미끼로 개인 정보를 수집하기도 한다. 특히 새로운 환경과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생들에게 주로 접근해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사종교 포교 활동이 계속되면 정상적인 동아리 가입 권유도 의심하게 되고, 타인의 친절 또한 믿을 수 없게 된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물론이고 일상생활마저 어렵게 만들고, 학생들 사이에 신뢰를 무너뜨려 공동체에 해를 끼치게 된다.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한 이유다. 더 이상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회는 2017년 한국천주교 유사종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대응하고 있고, 일부 대학에서도 올바른 신앙 문화 정착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등 예방 활동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올바른 교리 학습을 비롯한 개인의 노력과 신앙에 대한 확신이 더해진다면 현혹되지 않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