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동아시아의 예로니모’ 선종완 신부를 기억하자

한평생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헌신했던 고(故)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선종 50주기를 맞아 그의 업적과 영성을 새롭게 일깨우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선 신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어 성경 원전을 우리말로 옮겼을 뿐 아니라, 당시 성서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번역본에 충실히 담았다. 그는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까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성서학자’, 나아가 ‘동아시아의 예로니모’라 평가할 만한 선구자였다. 선 신부의 위대함은 학문적 성취에만 있지 않다. 그는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더 쉽게 읽고 깨닫도록 성경 번역에 온 힘을 쏟았고, 그 비용을 마련하려 메추라기를 기르고 밭을 일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성서 작업에도 참여해 교파의 벽을 넘어 말씀을 전하는 데 헌신했다.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까닭도 성경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학문과 노동, 사목과 영성은 모두 말씀이라는 한 뿌리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그의 업적을 과거의 기념비로 기리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그 가르침을 따르라는 그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 말씀이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고 우리의 삶이 가난한 이웃을 향한 사랑과 겸손한 섬김으로 드러날 때, 성경은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선 신부가 평생 보여준 길은 분명하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의 선종 50주기를 맞아 한국교회와 모든 신자는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피와 살이 되도록 새겨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농민이 일군 생명의 땅, 이제 함께 지켜야

기후위기로 농사 시기와 수확량을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고령화와 생산비 상승, 일손 부족까지 겹치며 농촌의 삶은 갈수록 고단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생명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논과 밭을 일군다. 경기도 연천에서 농사를 짓는 최성순 씨는 제초제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만큼 더 많은 노동을 감수한다. 부족한 일손은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이 메우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지키는 원칙은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은 팔지 말자”다. 생명농업이 농민의 땀과 양심, 사명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장 박현동 아빠스도 올해 농민 주일 담화에서 생명농업을 흙과 물, 뭇 생명을 지키는 생태 영성의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생명의 땅을 지키는 일은 농민만의 의무가 아니다. 본당과 교구는 우리농산물 나눔터를 넓히고, 교회 행사와 공동체 식탁에 생명농산물을 우선 사용해야 한다. 농촌 방문도 일회성 봉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농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정기적인 구매와 안정적인 판로를 함께 만드는 도농의 연대로 발전시켜야 한다. 신자들도 가격과 모양만이 아니라 누가 어떤 방식으로 길렀는지를 살피고, 친환경·지역 농산물을 꾸준히 선택해야 한다. 정부 역시 기후 재해와 가격 변동으로부터 농가 소득을 보호하고, 친환경 농업과 농촌 인력 확보를 위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농민 주일을 맞아 농민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가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교회의 식탁과 신자들의 소비, 정부의 제도가 함께 달라져야 한다. 농민이 홀로 감당해 온 짐을 교회와 사회가 나눌 때 생명의 땅과 우리의 밥상, 다음 세대의 삶도 지킬 수 있다.

사설

‘동아시아의 예로니모’ 선종완 신부를 기억하자

한평생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헌신했던 고(故)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선종 50주기를 맞아 그의 업적과 영성을 새롭게 일깨우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선 신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히브리어 성경 원전을 우리말로 옮겼을 뿐 아니라, 당시 성서학의 최신 연구 성과를 번역본에 충실히 담았다. 그는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까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성서학자’, 나아가 ‘동아시아의 예로니모’라 평가할 만한 선구자였다. 선 신부의 위대함은 학문적 성취에만 있지 않다. 그는 신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더 쉽게 읽고 깨닫도록 성경 번역에 온 힘을 쏟았고, 그 비용을 마련하려 메추라기를 기르고 밭을 일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성서 작업에도 참여해 교파의 벽을 넘어 말씀을 전하는 데 헌신했다.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까닭도 성경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학문과 노동, 사목과 영성은 모두 말씀이라는 한 뿌리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그의 업적을 과거의 기념비로 기리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그 가르침을 따르라는 그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 말씀이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고 우리의 삶이 가난한 이웃을 향한 사랑과 겸손한 섬김으로 드러날 때, 성경은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선 신부가 평생 보여준 길은 분명하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의 선종 50주기를 맞아 한국교회와 모든 신자는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피와 살이 되도록 새겨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3면
일요한담

내게로 보내신 아기

모든 아기는 정말 신기한 존재다. 인간 근원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찬미와 순수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아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가 미국에 머물 때였다. 당시는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 출산이 한창 유행하던 때라, 아이를 낳고 귀국할 수 있겠다며 주위의 부러운 눈길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남자아이일 경우, 병역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덤으로 주어지니 당연한 선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나는 가족이 없는 땅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내가, 나의 엄마인 할머니의 사랑과 지혜 없이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더욱이 편법은 싫고, 군대도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곧 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귀한 생명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매콤한 낙지볶음도 먹고, 모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동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으니 더욱 편안했다. 그런데 아기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서둘러 세상에 왔다. 아직 폐가 완성되지 않았을 시기라 급히 종합병원으로 옮겼고, 나는 열이 40도까지 오른 상태로 꼬박 하루를 진통한 끝에 첫 아이를 만났다. 의사들의 염려와 달리, 아기는 다행히 숨도 잘 쉬었고 크고 건강했다. 위험할 만큼 출혈이 심했다지만 그런 상황은 이미 흘러갔고, 그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품 안에 놓여 있다는 것만 보였다. 아기는 젖을 빨 힘이 부족해 마냥 울기도 했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러던 아기는 어느새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하더니, 바람을 쌩쌩 가르며 두발자전거를 탔다. 품 안의 아기는 아이가 되었다. 마구 달리는 아이를 따라가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고, 아이의 말 속에서 “아하!”를 외치며 순간의 진리를 발견했다. 엄마에게 첫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슈퍼 천재’다. 그리고 둘째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아기가 또 존재할 수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 그런 아기도 성장 과정을 거치며 때론 깨어지고 또 빛난다. 동시에 엄마를 깨우치고 깨지게도 한다. 세상 모든 아이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독립심을 키우며 엄마의 틀을 깨고 나간다. 사춘기 아이를 걱정하던 나에게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엄마처럼밖에 더 되겠어?”라고 하시던 내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엄마의 부조리함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 온 아이는, 어리숙하고 무딘 엄마가 꼰대가 되지 않도록 날카롭게 지적하고 반항하며, 새로운 세대의 원리를 알려주고, 세상을 배우는 동시에 또 바꾸어간다. 그런 나의 첫 아이가 훌쩍 커서 군대에 갔다. 입대하고 딱 1년이 지난 지금,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대했던 만큼 평화롭지 않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다시 전쟁이 난무하고, 난 내 아이와 세상의 모든 아이를 걱정한다. 노인이 된 나의 엄마가 그렇듯이, 엄마에게 자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이 구유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요람 속의 아기는 결국 우리의 스승이 된다. 주님은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돌보고 배울 존재로, 우리에게 새로이 고유한 아기를 보내신다. 그 순리의 과정에서 결국 구원으로 닿으리라 믿으며, 세상의 모든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독자마당

[독자마당] “내일 성당 가는 날이지?” 아이가 먼저 기다리는 교회를 꿈꾸며

최근 많은 본당에서 어린이 수가 크게 줄어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아이들이 몇 명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웃고 뛰며 신앙생활을 할 때 성당을 더욱 친숙한 공간으로 느낍니다. 반대로 함께할 친구가 적으면 성당은 점차 재미없는 곳이 되고 발걸음도 멀어질 수 있기에,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배우는가’만큼이나 ‘누구와 함께하는가’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부모가 되어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교적이 지역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제도임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출산이라는 현실 앞에서 미래 세대의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유연한 사목적 접근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적은 각 본당에 유지하되 어린이 미사와 주일학교만 구(區) 단위 또는 권역별로 함께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본당의 아이들이 함께 모여 미사와 교리, 다양한 활동을 함께한다면, 더 많은 친구와 함께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성당을 더욱 기다려지는 공간으로 느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참석 인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경험하고 신앙을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근 이사하며 다니게 된 서울대교구 장안동본당에서, 어린이 사목이 아이들의 신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새롭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주요한(요한 사도) 신부님께서는 미사가 끝난 후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며 자연스레 한데 어우러지십니다. 아이들은 즐겁게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익히며, 신앙을 기쁘고 즐거운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미사 중에 아이들이 제대 앞으로 나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모습은 부모님들도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어렵게 느끼는 대신 기쁨 속에서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부모인 저 또한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은총을 느끼곤 합니다. 아이도 이제는 토요일이 되면 “내일 성당 가는 날이지?” 하고 먼저 묻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신부님과 함께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시간이 아이에게는 한 주를 기다리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먼저 식사 전후 기도를 주도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저는 오히려 아이를 통해 하느님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어린이 사목은 단순히 교리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아이들이 교회 안에서 기쁨을 경험하고 공동체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좋은 사례들이 교구와 본당 사이에서 더 많이 적용되고, 서로 배우며 발전할 수 있다면 한국 천주교의 어린이 사목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사목자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성당을 좋아하고 신앙 안에서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한 명의 평신도 아버지로서 이 글을 씁니다. 저출산이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도 아이들이 더 많은 친구를 만나 신앙 안에서 성장하며, “성당에 가는 것이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 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은 제안이 한국 천주교의 미래 세대를 위한 논의에 작은 씨앗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글 _ 박규식 유스티노(서울대교구 장안동본당) ※ 독자마당은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과 따뜻한 신앙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일상 속 은총의 순간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미담을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 (A4 ⅔장 이내) 보내실 곳 서울 광진구 능동로 37길 11 2층 이메일 jebo@catimes.kr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방주의 창

유전자 편집 기술은 바람직한 것인가?

최근 기존의 3세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보다 발전된 4세대 유전자 가위를 통해 인간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4세대 유전자 가위의 경우 3세대 유전자 가위처럼 DNA를 잘라내는 기술이 아닌 염기 한 개를 치환할 수 있는 기술로 더 정밀한 유전자 교정이 가능하고 유전자를 대규모로 손실할 수 있는 위험도 적다고 합니다. 이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등장했을 때도 많은 사람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허젠쿠이라는 과학자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통해 에이즈에 걸리지 않은 쌍둥이를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해 많은 이를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유전병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상황에 온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유전자 편집 기술은 아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단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전성 문제입니다. 허젠쿠이 박사의 발표에 대해서 많은 과학자가 비판했던 이유는 이 기술의 적용이 미칠 결과를 아직 분명하게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전자 하나하나가 우리 몸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어떤 유전자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쌍둥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해도 장차 어떤 유전적인 문제를 갖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유전자 편집 기술이 질병 치료에 활용될 수 있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안전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배아에 대한 유전자 편집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 기술이 체외 수정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전자 편집 연구는 실제 인간 배아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이 연구를 통해 초기 단계의 인간 생명이 파괴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한 인간의 삶이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르침은 과학적인 사실을 토대로 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도 인간 배아에 대한 연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연구를 위해서 배아를 만드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난임 시술을 위해서 생성된 배아의 사용은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체외 수정 즉, 시험관 아기를 위해서 필요보다 많은 숫자의 배아를 만들게 되고, 그 가운데 일부만이 어머니의 태중에 이식됩니다. 이식되지 않은 배아는 잔여 배아라고 하는데, 잔여 배아는 냉동 보관이 되고, 5년이 지나면 폐기되거나 연구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잔여 배아가 냉동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매년 폐기되는 배아가 5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서 엄청난 숫자의 인간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서 유전병을 치유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꿈같은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이 언제 안전하게 질병 치료에 적용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고 연구 과정에서 계속해서 인간 배아가 희생되고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 앞에서, 생명을 위한 기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이끄는 인공 생식 기술을 비판하셨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통찰이 지금 절실히 필요합니다. 글 _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교수)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3면
사설

농민이 일군 생명의 땅, 이제 함께 지켜야

기후위기로 농사 시기와 수확량을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고령화와 생산비 상승, 일손 부족까지 겹치며 농촌의 삶은 갈수록 고단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생명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논과 밭을 일군다. 경기도 연천에서 농사를 짓는 최성순 씨는 제초제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만큼 더 많은 노동을 감수한다. 부족한 일손은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이 메우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가 지키는 원칙은 “내가 먹을 수 없는 것은 팔지 말자”다. 생명농업이 농민의 땀과 양심, 사명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장 박현동 아빠스도 올해 농민 주일 담화에서 생명농업을 흙과 물, 뭇 생명을 지키는 생태 영성의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생명의 땅을 지키는 일은 농민만의 의무가 아니다. 본당과 교구는 우리농산물 나눔터를 넓히고, 교회 행사와 공동체 식탁에 생명농산물을 우선 사용해야 한다. 농촌 방문도 일회성 봉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농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정기적인 구매와 안정적인 판로를 함께 만드는 도농의 연대로 발전시켜야 한다. 신자들도 가격과 모양만이 아니라 누가 어떤 방식으로 길렀는지를 살피고, 친환경·지역 농산물을 꾸준히 선택해야 한다. 정부 역시 기후 재해와 가격 변동으로부터 농가 소득을 보호하고, 친환경 농업과 농촌 인력 확보를 위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농민 주일을 맞아 농민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가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교회의 식탁과 신자들의 소비, 정부의 제도가 함께 달라져야 한다. 농민이 홀로 감당해 온 짐을 교회와 사회가 나눌 때 생명의 땅과 우리의 밥상, 다음 세대의 삶도 지킬 수 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3면
그분이 계셨다

이름값

“한비야가 본명이에요?” “네, 세례명을 개명해서 본명으로 쓰고 있어요.” “비야라는 세례명도 있어요? 비야(飛野)라는 한자까지 있고요?” 주민등록증을 보여줄 때마다 듣는 질문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은 비아로 표기가 통일됐지만, 내가 세례받은 1970년대에는 삐아, 삐야, 비아, 비야를 함께 썼다. 교리 담당 수녀님은 비야로 골라주셨고, 영세 후 나는 세례명을 ‘새로운 삶의 증표’라 여기며 성당 밖에서도 될수록 한비야라는 이름을 썼다. 개명이 쉬웠던 어느 해, 아예 이를 본명으로 개명했고 공적 이름에는 한자가 필수여서 날 비(飛), 들 야(野)를 붙여 한비야(韓飛野)가 된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맘에 든다. 무엇보다 한 씨라서 다행이다. 김비야, 박비야는 좀 어색하고, 변비야, 공비야라면 놀림감이 되었을 거다. 나비야, 왕비야도 괜찮지만, 어감상 한비야가 제일 예쁜 것 같다. 이름의 뜻도 나라마다 다양하다. 인도에선 내 사랑(Priya), 이란에선 이리 와(Biyā), 스페인어권에서는 길(Via)이고 베트남에서는 맥주(Bia)를 뜻해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 동아프리카 어느 지역에선 한은 물이고 비야는 큰항아리라는 의미란다. 극심한 가뭄이 든 에티오피아 마을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말하자, 일제히 어깨를 들썩이며 환성을 질렀다. 큰 물항아리가 왔다면서. 놀랍게도 그날 밤, 몇 년 만에 땅이 흥건할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름값 하기 버거운 이름도 많을 거다. 개신교인들이 대부분인 남수단에서 우리 긴급 식량 지원팀은 모세, 솔로몬, 마리아, 바울 등 신구약 인물들의 집합체였다. 심지어 한 팀원 이름은 예수였다! 발음도 우리말 그대로 ‘예수’여서 그를 부를 때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르는 사람도 이런데, 평생 예수로 불리는 그의 어깨는 얼마나 무거울까? 생각해 보면 내 이름 비아(pia)도 절대 가볍지 않다. 비아는 라틴어 덕목에서 온 세례명으로 경건하고 신앙심 깊으며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고백하건대 오랫동안 나는 예쁜 세례명을 가졌다는 사실만 감사하며 살았다. 그런데 작년 봄, 피정 중에 각자의 세례명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에 비로소 깨달았다.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새 이름을 얻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새 삶을 시작하면서 그 이름에 걸맞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일이라는 것을! 따라서 이름값을 한다는 것은 그 이름에 담긴 뜻대로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개인 묵상 후 나눔 시간에 피정 담당 노수녀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비아는 단순히 신앙심이 깊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무엇을 맡기시든 끝까지 충실하게 해 내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답니다. 지금까지 자매님이 걸어온 구호 활동의 삶과 딱 맞는 세례명이네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그동안 세례명을 마음에 쏙 드는 이름으로만 여겼을 뿐, 그 뜻과 소명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겠지? 50년 전에 하느님은 내게 새 이름을 내려주셨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그 이름값 하며 살고 싶다. 정신 바싹 차리고 살아야겠다! 글 _ 한비야 비아(국제구호전문가, 작가)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현장에서

우리 이웃 이야기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저를 써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이웃’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복음을 실천하고 있는 하느님을 따르는 이웃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 ‘우리 이웃 이야기’ 코너에는 보통의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더위 속에서 노숙인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 대접하는 봉사자, 늦은 시간까지 순례객들에게 성지를 안내하는 성지 해설사, 주일마다 교회 행사 취재를 위해 현장을 누비는 교구 명예기자. 그들이 시간과 열정을 들인 대가는 사실 크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그들의 입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보낸 하루가 행복했다”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이웃을 향한 이러한 마음은 봉사 현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수원교구 청년들은 7월 4일부터 11일까지 6개 성지를 순례하며 모두 216.7㎞를 걸었다. 함께 신앙의 기쁨을 찾고자 길을 나선 청년들은 자신의 고단함을 호소하기보다, 교회를 떠난 많은 청년이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걸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걸음을 내어놓은 이들의 기도와 실천은 교회와 우리 사회를 조금씩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교회 안의 수많은 이웃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는 위대한 교회사적 업적이나 대단한 선행을 이룬 특별한 몇몇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소박하고 작은 이웃들의 이야기 안에는 하느님의 뜻과 복음의 위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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