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걷고 기도하고] 대구대교구 성모당

대구시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을 지나면 114년 역사를 간직한 대구대교구청을 만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의 낮고 짧은 오르막길을 오른다. 언덕에 다다르니 평일에도 많은 신자들이 모여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열심히 바치고 있다. 동네 어르신부터 먼 곳에서 온 순례객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 바로 대구대교구 성모당이다. 기도가 이뤄지는 곳 성모 발현지로 잘 알려진 프랑스 루르드 성모 발현 동굴의 크기와 바위 모양을 본떠 지은 성모당은 대구대교구 제1주보 ‘루르드의 복되신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기도하는 곳이다. 대구대교구 신자뿐 아니라 타지역 신자들도 많이 찾으면서 한국교회 신앙의 요람으로 자리 잡은 데에는 특별한 은총으로 시작된 장소라는 사연도 한몫한다. 성모당은 설정 당시 아무것도 없던 대구대교구가 기초를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성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운 곳이다. 1911년 4월 8일 한국교회에 대구대목구(현 대구대교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6월 26일 부임한 플로리앙 드망즈 주교(Florian Demange·한국명 안세화·1875~1938). 황무지 같은 임지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성모께 모든 것을 의탁하기로 결심한다. 교구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주교관(교구청사) 건축 ▲신학교 설립 ▲주교좌성당 증축 등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세 가지 소원을 성모께 서원하고, 이 모든 것이 이뤄지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성모동굴(성모당)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모든 사업이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서원 2년 만인 1913년 주교관 건축이 이뤄졌다. 1914년에는 성유스티노신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주교좌계산대성당 증축에는 난항을 겪었다. 그러던 중 계산본당 보좌 소세 신부(Hippolytus Saucet·한국명 소세덕·1877~1921)가 중병을 앓아 임종 직전에 이르렀다. 드망즈 주교는 성모께 ‘소세 신부를 낫게 도와주시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당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다. 기적처럼 소세 신부가 건강을 되찾자 드망즈 주교는 1917년 7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918년 10월 13일 성모당을 봉헌했다. 성모당 윗부분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이라는 글귀는 1911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께 바친 서원이 1918년 이뤄졌음을 뜻한다. 전대사 은총 받는 성모 순례지 성모당에는 1973년 5월부터 성모의 밤 행사가 열리면서 전국적인 성모 신심의 중심지가 됐다. 지금도 매년 5월 성모 성월이면 본당별로 성모의 밤 행사가 열린다. 한국을 찾은 콜카타의 성 마더 데레사 수녀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각각 1981년과 1984년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대구시 유형 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됐다. 성모당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성모 순례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안장되면서 더 잘 알려진 로마 성모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과 성모당이 2009년 영적 유대를 맺으면서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는 로마 성모대성당을 순례했을 때와 동일한 영적 은총이 주어진다. 그러나 신자 대부분은 전대사를 목적으로 성모당을 찾진 않는다. “시간 날 때마다 여기 와서 성모님께 제 잘못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제 기도를 전해주십사 부탁드려요.” “마음이 정말 편안해져요. 가슴에 쌓아둔 상처와 고통도 여기에 오면 한결 편해지는 걸 느낍니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와야 하지만, 그래도 자꾸 오고 싶어 자주 와요. 왠지 여기에서는 성모님께서 제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는 기분이랄까요?” “날씨 좋을 때 여기 만 한 곳이 없어요. 그런데 눈과 비 올 때도 운치 있고 좋아요.” 각자 다른 사연으로 성모당을 찾지만, 편안함과 영적 위안을 위해 성모께 기도하는 마음은 같았다. ◆ 순례 길잡이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로4길 112 - 미사: 월~토 오전 11시 - 고해성사: 월~토 오전 10시~11시20분 - 문의: 053-250-3055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도나토 브라만테

서양의 대학은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1088년)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1150년)을 그 시작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들 대학은 오늘날처럼 다양한 학문을 다룬 것이 아니고, 대체로 라틴어 교육을 기본으로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이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회화나 조각, 건축 등 예술 분야는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문하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물려받는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예술 분야도 학교 교육의 형태를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대학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건축을 학교 교육 형태로 시작한 첫 번째 건축가로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를 꼽고 싶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활동한 시기에 건축 공방을 운영하였는데, 그곳에서 같은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를 비롯하여 발다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 1481-1536),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3-1546),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 1486-1570) 등의 건축가를 배출하였습니다. 미켈란젤로를 제외하면 16세기에 로마에서 활동한 건축가들 대부분이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브라만테는 1444년 우르비노 근처의 페르미냐노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우르비노에서 수학하였습니다. 우르비노에서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 그곳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의 제자로 있으면서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 1441-1523)와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 등과 교류하였고,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 1439-1502)로부터 건축을 배웠을 것입니다. 이후 1477년경부터 브라만테는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였고, 롬바르디아에서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등의 작품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브루넬레스키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1478년부터 밀라노에 체류한 그는 초기에는 화가로 활동하였는데, 그가 그린 작품의 배경에는 건축 공간의 기하학적 구성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이후 건축가로서의 브라만테는 밀라노 시기(1480-1499)와 로마 시기(1499-1514)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밀라노 시기에 브라만테가 설계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성당(Chiesa di Santa Maria presso San Satiro), 파비아 대성당(Duomo di Pavia),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 등이 있습니다. 1482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밀라노에 오자 브라만테는 그와 교류하였고, 레오나르도와 브라만테는 롬바르디아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 일 모로의 전속 건축가가 되어 성당 외에도 일반 건축과 토목의 일에 관여했고, 밀라노의 인문주의자 및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그리스도교 고전주의를 습득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1499년 밀라노를 공격하자 로마로 피신하였고, 이때부터 그의 로마 시기가 시작됩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브라만테의 나이는 55세로 건축 현장을 이끌기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유적들을 보는 순간 브라만테는 그것에 사로잡혀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물론 이전에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로마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고전 건축의 원리를 배워서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알베르티가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로마에 소개하고 르네상스의 중심에 로마를 끌어들이며 초기 르네상스를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브라만테는 피렌체가 아닌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우며 로마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르네상스 건축을 한 차원 올려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브라만테가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 등 이전의 건축가와 다른 점은 그에게 로마는 배움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 교황청의 수석 건축가로서 로마의 재건 사업에 투신하였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황청 안에 건축 공방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도시 계획과 건축 설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브라만테는 로마의 고전 건축물들 사이에 자신의 작품을 나란히 놓은 로마의 건축가입니다. 브라만테의 이러한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인문주의를 장려한 율리오 2세 교황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교황이 공방을 허락하였고 그곳에서 브라만테는 설계, 감리, 시공 등의 업무를 총괄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만테의 건축 공방은 당시 개인 소유의 소규모 공방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늘날의 건축학과, 설계 사무소, 그리고 시공 회사를 합쳐놓은 건축 종합 센터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대의 스타 건축가들이 배출되었으며, 후대의 건축가들도 브라만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로마 시기 동안 브라만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Pace),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Tempietto di San Pietro in Montorio), 그리고 팔라초 카프리니(Palazzo Caprini, 일명 Casa di Raffaello) 등입니다. 물론 실제로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바티칸의 벨베데레 안뜰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역작입니다. 로마에서 펼쳐진 브라만테의 활동은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에 국한되지 않고, 로마 자체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도 일조하였습니다. 그가 집중한 바티칸의 건축 공사는 바티칸을 로마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더 나아가 로마는 오래전 로마 제국 시대의 수도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 유럽의 중심으로 거듭 성장하였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20면

[성소 주일 특집] 수도회·신학교,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

한국교회 성소자 발굴과 양성도 시대 흐름에 따라 점차 변화하고 있다. 수도회 체험 프로그램이 확대되는가 하면 유튜브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신학교는 신학생 양성과 학문 교육을 각각의 전문성을 더하도록 체계를 다지고, 질 좋은 기도·생활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학교의 역사가 담긴 교내 건물들을 재건축한다. 성소 주일을 맞아 최근 교회가 성소자들을 위해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알아본다. 수도원·수녀원 개방으로 체험 기회 제공 수도회들은 젊은 성소자나 청년들을 위해 열린 체험 프로그램을 해오며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최근 수도회들은 체험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최해 일반인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톳찡 포교 베네딕도 대구 수녀회(대구 본원장 이일경 베타니아 수녀)는 수녀원 내 영성과 피정의 집에서 10년 넘게 성소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살이피정’을 해오고 있다. 피정 참가자들은 ‘기도하며 일하라’는 베네딕도 성인 말대로 전통 수도생활의 리듬을 체험해볼 수 있다. 모든 일정을 수녀원 일과표에 토대를 두고 만들었다. ‘살이피정’은 수도 성소를 고민하는 여성 성소자들에게 식별의 경험을 제공하는 한편 일반 여성 청년들에게도 수도생활이라는 체험의 장을 열어두고 있어 성소자가 아니더라도 참가할 수 있다. 다만 수녀회 일정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차수마다 10명 내외로 신청을 받는다. 대구 수녀원 성소담당 김정미(아니마) 수녀는 “일상에서 벗어나 수녀원 생활 리듬에 머무는 것 자체가 복잡하고 산란했던 마음에 질서를 가져오는 경험을 했다고 참가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며 “특별할 것 없는 수녀원의 일상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현대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장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수녀원도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2023년부터는 ‘살이피정’을 한 번에 50명이 참가하는 규모로 확장한 ‘소울스테이’도 열리고 있다. ‘소울스테이’는 2024년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가 ‘베네딕도 영성관 피정의 집’에 의뢰한 수도 생활 체험 프로그램으로, 1년에 두 번 대구가톨릭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치러진다. ‘살이피정’의 일정을 바탕으로 하지만 남·녀 대학생들에게 모두 개방된 피정이라는 점이 다르다.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 가르멜 수도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등 많은 수도회가 수도원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특히 경상북도 지역 수도회들은 2015년부터 지자체와의 협업으로 비신자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가고 있다. ‘미디어 활용해 젊은 세대에 다가가요’ 성바오로딸수도회는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2013년경부터 이미 유튜브 콘텐츠 제작을 시작했다. 그중 2022년 4월 기획해 2023년 6월까지 약 1년간 업로드된 ‘수도생활 외안해’는 수녀회 소속 세 명의 수녀가 출연해 수도회 일상과 성소 고민 등을 솔직담백하게 풀어내는 콘텐츠다. 영상은 ‘수녀원에서 나가고 싶었을 때’, ‘수녀원에는 어떤 MBTI가 많을까?’, ‘밸런스게임으로 알아보는 수도 생활’ 등 흥미로우면서도 젊은 세대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영상들이 주를 이뤘다. 성바오로딸수도회 콘텐츠기획팀 박하나(마리아) 수녀는 “수녀원에서 함께 지내는 삶의 기쁨과 어려움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복음 선포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해 제작했다”고 전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도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한 특별 프로젝트로 유튜브 브이로그 ‘생생 수녀원’을 선보여 지난 4월 25일 마지막 영상까지 총 7편을 업로드했다. 수녀회의 기도 생활뿐만 아니라 빨래, 수녀원 연못 물고기 밥 주기(?), 행정 업무 등 일반 신자가 자세하게 접하기 어려운 수녀원 생활을 카메라가 직접 수녀들을 따라다니며 담았다. 또한 수녀회 소속으로 본당, 유치원, 학교, 병원 등 다양한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수녀들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알리며 한국 사회 곳곳에서 선교하는 수녀회의 넓은 영역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수녀회 미디어팀 고재향(마리 마르타) 수녀는 “수도자들이 기쁨과 열정으로 투신하는 모습을 우리끼리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공유하고자 했다”며 “현대 젊은이들은 미디어 매체를 통해 수도자의 삶을 이해하고 또 성소를 가지는 사례가 더 많은데, 이런 사례들은 그만큼 미디어가 선교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이원화로 변화 겪은 서울 대신학교, 신학생 기숙사 및 대성당 재건축 2018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과의 이원화를 통해 상담과 생활지도, 성소 식별 등 양성에 전문성을 더하며 조직 체계에 이미 큰 변화를 겪은 서울대교구 대신학교(교장 민범식 안토니오 신부)가 이번에는 교내 오래된 건물들의 대대적인 재건축을 앞뒀다. 재건축 대상은 신학생 기숙사 중 하나인 대건관과 대성당이다. 두 건물의 개축된 부분을 제외하면 대건관은 1972년 완공돼 올해로 50년이 넘은 건물이고, 대성당은 1960년 완공돼 무려 60년이 넘었다. 특히 대성당은 완공된 해부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돼 있어 대신학교는 물론 한국천주교 역사에 매우 의미 깊은 장소다. 다만 워낙 연식이 오래돼 장기적인 안전성 측면에서 재건축을 결정하게 됐다. 신학교 기숙사가 숙소 개념을 넘어 신학생 양성과 식별교육이 이뤄지는 ‘못자리’이기도 한 만큼 예정된 재건축은 신학생들의 구체적인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또한 신학교는 교내 상주하는 양성 사제들과 신학생들이 함께 살아가는 기숙사의 역할을 더욱 강화한다. 민범식 신부는 “대건관 공동체의 경우 재건축을 계기로 교구의 양성 방향에 따라 신학생들이 양성 사제와 함께 소공동체를 이루고 더욱 밀접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재건축은 이르면 내년 4월부터 시작된다.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1면

추기경단, 7일 오전 10시 새 교황 선출 위한 미사 봉헌

[외신종합] 콘클라베를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추기경단은 5월 7일 오전 10시(현지 시각)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새 교황 선출을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추기경단은 같은 날 오후 4시30분 바오로경당에서부터 시스티나경당까지 장엄행렬을 할 것이라고 4월 29일 교황청이 밝혔다. 첫 콘클라베는 장엄행렬 이후 곧바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시간으로 8일 0시 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4월 21일 사도좌 공석이 된 날을 기준으로 투표권을 갖는 만 80세 미만 추기경은 135명이다. 이 가운데 추기경 2명이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하게 돼 콘클라베에 참가하는 추기경은 133명으로 예상돼 왔다. 하지만 업무상 횡령 혐의로 2023년 바티칸 법원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이탈리아 출신 안젤로 베추 추기경이 4월 29일 “나의 무고함을 확신하지만 콘클라베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추기경 수는 132명으로 줄어들었다. 베추 추기경은 당초 참가 의사를 드러냈지만 교황 선출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자 서면 발표를 통해 참가 포기를 선언했다. 4월 29일 열린 추기경단 제6차 전체회의에도 베추 추기경의 콘클라베 불참 사실이 보고됐다. 추기경단은 콘클라베를 앞두고 매일 모임을 갖고 있다. 4월 29일에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위한 4일째 추모미사를 봉헌하며 새 교황의 자격에 대해 묵상했다. 추모미사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수석사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은 “진실한 제자의 모습은 그리스도인들이 외우는 신경이나 그들이 알고 있는 신학에 의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에 의해 정해진다”고 말했다. 이어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이나 교리 지식을 말하거나 전례에 참여한다고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형제자매 중 가장 작은 이들의 존재에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관심을 기울일 때에 보장된다”고 밝혔다. 감베티 추기경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최후에 심판하실 때는 지식이나 지위가 아닌 배고픈 사람, 이방인, 병자 그리고 갇힌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을 보고 판단하신다”고 강조했다. 감베티 추기경이 다른 추기경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차기 교황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자질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나온 것이다. 콘클라베에 관한 영구적인 비밀 준수 서약은 투표권을 갖는 추기경들은 물론 콘클라베 진행에 관계하는 교황청 직원들도 하게 된다. 교황청은 4월 29일 발표에서 직원 서약식은 5월 5일 바오로경당에서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바오로경당은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경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서약식에는 엘리베이터 작동 관리자, 의사, 운전사, 요리사, 세탁소 직원 등이 참여한다. 콘클라베 기간 중 추기경들이 시스티나경당과 숙소인 성녀 마르타의 집을 오가는 동안 교황청에서 일하는 다양한 직원들의 보조를 받는다.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7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5) 가톨릭신문 폐간 시기(1933~1949)의 한국교회

교황 비오 11세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1900주년을 맞는 1933년 특별성년을 선포했습니다. 이 뜻깊은 시기를 맞아 조선의 5개 교구(경성, 대구, 원산, 평양, 연길) 교구장들은 그해 3월에 열린 연례 주교회의를 마치고 ‘가톨릭 진행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공동교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공동교서에는 모두 14개 주를 달아 그 뜻을 해설했는데 그 중 13번째 주에서 “금번 회의에 5교구가 연합하여 지식 청년을 상대로 가톨릭청년이란 월간잡지를 발간하기로 결정되어 지금 준비 중이니 이 잡지와 경향잡지만이 5교구에서 함께 인정하는 것이오, 기타 각 교구에서 월보를 발간할 수 있으나 그 교구 안에만 한함”이라고 규정돼 있었습니다. 당시 천주교회보는 조선 전역은 물론 해외에까지 고루 독자들이 퍼져 있었기에 사실 이는 발행을 중지해야 한다는 결정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기존의 교회 잡지를 통폐합하고자 했던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5교구 주교회의는 그리스도 구속 사업 1900주년 성년에 즈음해 조선 교회의 발전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전교 계획과 방안들을 모색하려 했습니다. 이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외 전교 활동을 전개하고, 가톨릭 정신을 우리 사회와 문화 전반에 전파하기 위한 대외적 교양 잡지를 중앙에서 발행하기로 한 바 교회의 힘과 노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함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기존에 대구의 청년회와 경성의 연합청년회가 각각 발행하던 천주교회보와 ‘별’이 발행 중지됐습니다. 천주교회보는 73호(1933년 4월 1일자)에 폐간사도 없이 붉은 잉크로 이중 인쇄된 폐간공고로 오랜 침묵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별’은 ‘폐간을 고하며’라는 사설을 실은 제71호(1933년 5월 10일자)를 종간호로 폐간됐습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회보는 1949년 4월 1일 다시 복간되기까지 16년 동안 교회의 중요한 소식들을 전혀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폐간 시기의 한국 교회 가톨릭신문이 폐간됐던 시기 동안 일제의 조선에 대한 억압은 한층 극심해졌습니다. 조선 교회에서는 급격하게 교구가 증가하고 조선인 성직자들의 수가 늘어나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에서 조선인이 교회를 관리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직과 제도면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실질적인 복음화율은 답보와 침체 상태에 빠졌습니다. 대륙 침략 전쟁을 본격화한 일제의 수탈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교회에도 혹독한 피해를 입혔고, 그 과정에서 교회는 일제에 협력했다는 오명을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개항기 높은 신자 증가율에 고무된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일제의 약속을 믿고 지속적인 발전을 내다보면서 교구 분할을 시도합니다. 1911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할합니다. 1920년에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관할하는 원산대목구가 신설됐고, 1928년에는 원산대목구에서 연길지목구가 분리됐고 1940년에는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가 설정됐습니다. 이에 앞서 1927년에는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가 관할하는 평양지목구가 설정돼 1939년에 대목구로 승격됐습니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발전한 듯 보였으나 식민통치 하에서 실제 신자 증가율은 급격하게 둔화됐습니다. 개항기의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7%에 가까운 높은 수치를 보였지만 한일 병합 이후 10여 년 후인 3.1운동 당시 8만 8523명에 불과했고 이 시기 신자 증가율은 2.10%에 그쳤습니다. 신자 수 10만 명을 돌파한 것은 1926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3.0%로 저조한 수치였는데, 때로는 신자 수가 오히려 감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예를 들어 1941년에는 신자 수가 18만 3262명이었는데 3년 뒤인 1944년에는 17만 9114명으로 4148명 감소했습니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천주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극히 미미한 부분이었습니다. 한일 병합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1300만 명 가량으로, 그중 신자 비율은 0.56%에 불과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는 0.53%, 해방 직전인 1944년에도 0.71%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개항기와는 달리 일제 강점기 동안 신자 증가율이 극히 저조했던 이유는 가장 먼저 일제의 교회에 대한 억압과 규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교회 공동체를 찾아오던 많은 신앙 선조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 곧 순교로 이어질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공동체는 확장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일제하에서 민족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던 교회의 모습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의 생존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교회의 안이한 태도가 가장 큰 이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신자 증가율의 둔화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을 강화합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진주만 공습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킵니다. 일제는 총력으로 전쟁에 임했고 조선도 그 전쟁에 동원돼야 했습니다. 조선의 모든 것이 전쟁에 이용됐고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일환으로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한 협력자로 편입됐고 그 과정에서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혹독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수밖에 없는 행태를 보이고 맙니다. 일제의 감시망을 벗어나 임명된 최초의 한국인 주교였던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의 경성대목구장 취임사는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야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 복종하라”며 일제에 충성하라고 말했습니다. 노 대주교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을 맡았고 전쟁에 나서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대동아전쟁기구’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교회가 황군의 무운을 비는 미사를 봉헌하고 국방비를 헌납하며 전쟁의 각오를 다지는 시국 강연회, 학도병 독려 등의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과 함께 맞은 해방, 교회는 무신론과 공산주의의 도전에 직면합니다. 과거에 대한 성찰이 충분히 이뤄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교회는 해방 후 혼돈의 조국에서 반공에 나서며 곧 닥쳐올 민족 상잔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8면

[성모 성월 특집] 베트남 짜끼우 ‘성모발현 성당’을 가다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 성모성월을 맞이해 베트남 주교회의 인준 성모 발현지인 짜끼우를 찾았다. 베트남 정부는 17세기 초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에 걸쳐 교회를 박해했다. 베트남 교회는 박해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오며 짜끼우와 라방을 성모 발현지로 인준받았다. 그중에서도 짜끼우는 성모님이 발현해 박해를 물리친 역사가 있는 베트남의 성모 신심을 대표하는 지역이다. 짜끼우 성당과 성모동산을 걸으며 짜끼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 발현하신 성모님 19세기 후반 베트남 정부는 프랑스 식민 통치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있었다. 당시 베트남 중부 꽝남(Quảng Nam) 지방의 작은 마을 짜끼우에는 브루이에레 신부가 사목하고 있던 작은 성당이 있었다. 박해가 거세지던 1885년 9월 반탄(Văn Thân)군은 성당을 공격하려고 사방을 둘러쌌다. 신자들은 저항하려고 했지만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상태였고, 수적으로도 밀리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브루이에레 신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들에게 성모님께 기도해달라고 당부했다. 반탄군과 맞서 싸우던 청년들을 제외하고 본당의 노인, 여성, 어린이들은 성모송을 외우며 성모님께 전구했다. 저항이 지속되던 중 반탄군은 성당에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그때 성당 꼭대기에 하얀 옷을 입은 성모님이 발현하셨고 반탄군의 대포가 모두 빗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반탄군은 코끼리 부대를 동원했지만, 성모님과 희고 빨간 옷을 입은 1000여 명의 아이들이 그들을 향해 오자 코끼리들이 겁에 질려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본 반탄군은 사기가 꺾여 공격을 멈췄고, 성당과 신자들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군인과 주민들의 증언 덕에 짜끼우에 성모님이 발현하신 일이 널리 알려졌다. 베트남 교회는 성모님의 발현 덕분에 열악한 상황에서 반탄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짜끼우를 성모 발현지로 인준했다. 1898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짜끼우성당을 지어 ‘믿는 자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봉헌했다. 다낭교구 성모신심의 중심지로 발돋움 현재의 짜끼우성당은 성모님이 발현하셨던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성당 제대에 있는 성모상과 감실은 기존 모습이지만 신자 수가 늘어나 단층 삼각 지붕에서 2층 성당으로 증축됐다. 성당 전면에는 성모님이 발현하셨을 때의 모습을 본뜬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왼편에는 ‘이곳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1885년 9월 10일과 11일)’라는 문구가, 오른편에는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라는 짜끼우 성모님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 아래는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상이 있고 양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 성전으로 이어진다. 하얗게 칠해진 성전 안에서 조용히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왼쪽 벽면에는 대형 묵주와 성모상이, 오른쪽 벽면에는 요셉 성인상이 보인다. 요셉 성인상 왼편에는 자비의 예수님상이 놓여 있다. 성전 오른쪽으로 연결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성직자 묘역이 있다. 이곳에는 초대 다낭교구장인 팜 응옥 찌(Phạm Ngọc Chi) 주교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성당을 떠나기 전 기나긴 박해를 견뎌온 베트남 교회를 위해 묘역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짜끼우성당을 나와 10분간 걸어 성모님의 발현을 기념해 지은 짜끼우 성모동산에 도착했다. 1971년 당시 교구장이었던 팜 응옥 찌 주교는 짜끼우를 다낭교구의 성모 신심 중심지로 인정했고, 매년 5월 31일 짜끼우에서 전국 규모의 성모 대회를 열고 있으며, 매년 10만 명이 넘는 순례객들이 방문해 순례한다. 베트남 교회의 믿음 보여주는 자리 성모동산은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악을 물리치는 미카엘 대천사상을 볼 수 있다. 그 뒤로는 경당이 있는데 마리아의 ‘M’자를 형상화한 지붕과 종탑 가까이에 걸어져 있는 묵주가 있다. 경당 내부 성모상 아래에는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경당을 나오면 ‘치유의 물’이 솟는 야곱의 우물과 그 양쪽에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성모님 발현 재현 기념탑 왼편에 소성당이 있다. 맞은편 십자고상 앞에서 잠시 묵상하고, 소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소성당은 베트남 성당 건축 특징 중 하나인 성전 양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조성돼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통하는 성당에 앉아 조용히 성체조배를 하는 신자도 볼 수 있었다. 경당에 앉아 짜끼우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의미를 되새기며 순례를 마무리 지었다. 짜끼우는 오랜 박해의 세월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낸 베트남 교회의 역사이자 신자들의 믿음이 담긴 장소였다. 오늘날에도 “얘들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희 어머니가 여기 있다”는 성모님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어딘가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이들에게도 그 메시지가 닿기를 기도한다. ※ 순례 문의 가톨릭신문투어(http://www.cttour.org)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2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 되새기며 생태적 회개의 삶 실천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청빈과 개혁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 수장이었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강조했던 교황은 2016년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제정하고 이주민과 난민의 권리 옹호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현대 사회가 직면한 생태 위기 해결을 위해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회칙이 「찬미받으소서」다. 즉위한 지 2년 만인 2015년, 이 회칙을 발표한 교황은 공동의 집을 보호하는 일이 긴급한 과제라는 것을 역설한다. 「찬미받으소서」가 반포된 지 10년이 된 2025년, 하느님 곁으로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당부를 되새기고 생태적 회개를 위해 노력했던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 「찬미받으소서」의 메시지 2015년 6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가 발표됐다. 회칙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에 나오는 후렴구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이 찬가는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1항)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6장 246항으로 구성된 이 회칙을 통해 교황은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으로 기술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온전한 발전을 위한 접근법으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을 촉구하고 있다. 회칙의 핵심 개념은 온전한 생태학이다. 환경의 문제와 인간 사회의 문제는 서로 깊이 연관되므로 인간, 사회, 자연이 모두 온전히 하느님의 창조 세계로서 훌륭하게 보존될 수 있는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회칙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했던 교황의 의지는 회칙에서도 드러난다. 교황은 생태계의 파괴가 철저하게 가난한 이들, 남반구의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과 희생을 불러일으켰고, 기술의 발전은 지식과 자본을 가진 이들에게 편중돼 왔음을 강하게 지적한다. 피조물에 대한 무자비한 지배는 자연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과 나라들에 대한 억압과 지배로 나타났다. 그래서 생태의 위기는 곧 인간 생태의 위기로 이어지고, 이는 하느님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배신하는 악덕이라고 강조한다. 환경에 관한 국제적 정치 안에서의 대화뿐 아니라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생태위기 앞에서 우리 모두 공동선을 생각하고 언제나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기억하며 인내와 절제와 관용을 필요로 하는 대화의 길로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201항) 아울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태적 회개, 즉 우리의 삶을 성찰하며 우리의 행위와 방관으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해를 끼쳐 왔는지 깨달아야 한다(218항)고 전한다. 또한 회개를 통해 깨달은 것을 실천해 새로운 생활습관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10주년 “생태 위기는 곧 인간 생태의 위기” 생태적 회개·다양한 생태 교육 촉구 교구 차원 통독·정기 교육 등 진행 수도회, 생태 회칙 의미 전달에 집중 ■ 한국교회의 「찬미받으소서」 10년 여정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는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10주년을 맞아 회칙 관련 교육 실시현황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서울과 대구, 광주 등 15개 교구를 비롯해 거룩한 말씀의 회, 그리스도 교육 수녀회, 노틀담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등 16개 여자수도회가 설문에 응답했다. 「찬미받으소서」 통독 활동에 있어서 안동교구와 제주교구는 레지오마리애나 여성연합회와 같은 특정 단체가 통독을 했으며, 춘천교구는 70%의 본당이 찬미받으소서 분과를 신설해 자체적으로 통독했다. 부산교구는 유튜브를 통해 영상으로 릴레이 통독을 실시했다. 2022년 교구장 사목지침에 따라 52주간으로 나누어 부산교구장 손삼석(요셉) 주교를 시작으로 52명의 교회 구성원들이 매회 3~5개항을 낭독하는 영상을 올려 접근성을 높였다. 「찬미받으소서」 정기 교육은 15개 교구가 모두 진행하고 있었다. 생태환경 부서가 없는 교구들은 정규교육과정이 없거나 유관 부서에서 「찬미받으소서」 교육을 담당, 청주교구는 교리신학원을 통해 교육했고 대구대교구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와 함께하는 생태영성 40주간’ 온라인 강의를 제작해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했다. 수도회의 경우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통해 「찬미받으소서」의 의미를 알리는데 집중했다. 그리스도 교육 수녀회는 생명교육 프라이머를, 노틀담 수녀회는 생태영성교육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는 영남지역 전환학교를 운영했다. 특히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는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에 대한 교육에도 집중, 찬미받으소서 주간에 생태미술전이나 친환경생활전 등과 같은 생태문화 축제를 기획했다.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는 회헌에 ‘생태영성’에 대한 내용을 삽입했고 올리베따노 수녀회는 ’찬미받으소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실천을 위한 동력을 마련했다. 4월 23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제54회 가톨릭에코포럼에서 ‘회칙 찬미받으소서 관련 교육 실시 현황’에 대해 발표한 문점숙 수녀(마리루치아·노틀담 수녀회)는 ▲교구는 생태환경사목 담당 부서 마련과 본당 내 생태환경분과 확산 독려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 실재에 대한 심화교육 ▲ 하늘땅물벗에 대한 교구장들의 관심과 설립 의지 ▲세계청년대회에서 「찬미받으소서」의 정신을 실천하는 청년의 모습이 드러나는 활동 등을 제안했다. 문 수녀는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산업문명의 노예생활에서 생태문명의 시대로 이끄는 우리 시대 생태적 모세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각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책임 있게 실천해야 할 때이다”라고 전했다.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6면

[영적 돌봄에 힘써 온 임상사목교육(CPE) 100년(1)] 현대인의 영적인 고통을 돌보는 CPE(상)

올해는 주변의 이웃을 영적으로 돌보고 치유에 나서고 있는 임상 사목 교육(CPE, Clinical Pastoral Education)이 시작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CPE 100주년을 맞아, 본지는 한국CPE협회(협회장 정무근 다미안 신부·예수회)와 함께 CPE의 의미와 CPE의 역사, 그리고 한국CPE의 활동을 5회 걸쳐 짚어본다. 현대사회는 생산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며 뒤처지는 이들에는 무관심하고 가장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개인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그리고 고령화 사회로 인하여 노년의 외로움 속에 버림받는 이들도 늘어가고 있다. 이런 사회는 “함께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안으로 견디도록 돕지 못하는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8항)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런 영적 위기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영적 요구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삶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웰다잉(Well-dying) 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교회는 어떻게 살아있는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시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말씀만으로의 전달이 아니라 살이 있는 관계의 돌봄으로서의 실천이 필요하다. 돌봄의 정의와 개념 예수님께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고 말씀하셨듯이 ‘돌봄의 관계’는 인간 생명을 증진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이중적 정의를 포함한다.(「중증 말기 병자의 돌봄에 관한 서한 착한 사마리아인(Samaritanus Bonus)」) 교회의 돌봄 사명은 “모든 사람 일생의 ‘돌봄’”(「생명의 복음」 87항)을 통해 삶의 원천인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모든 병자가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자기 존재의 깊은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게 하는 돌봄의 과정이 수행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한 영적 돌봄에 특화된 교육이 CPE, 즉 임상사목교육이며, 이 교육 중에 이루어지는 영적 돌봄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환자의 돌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거의 주검이 되어 길가에 버려진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병자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랑에 기초한 관대함을 지니도록 초대하신다.(루카 10,29-37) 환자의 돌봄에서는 우선 환자 자신의 죽음과 신체적 통증에 의한 고통 속에서 혼자이고 버림받았다는 느낌, 기능 및 역할 상실의 여정 중에서 사회적 가치로 평가하는 시선들, 자신이 타인에게 짐이 된다고 느끼는 그들의 고통에 대한 이해를 있는 그대로 경청해 줄 돌봄이 필요하다. 특히 만성질환 환자나 생의 말기에 있는 환자의 돌봄에서는 그들의 고독과 고통 속에 함께 머물며(「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8항)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환자가 자신의 죽음 너머의 새로운 생명의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한 영적돌봄이 필요하다. 그들의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에 직면하면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만남 안에서 지지와 경청이 제공되는 영적돌봄(「착한 사마리아인」, 12항)인 것이다. 교회의 돌봄의 사명 이런 사목적 돌봄 즉 영적 돌봄은 그리스도교 덕행의 실천인 연민의 마음으로 공감하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짐으로써 위로하고 그들의 고독과 고통으로 들어가 사랑하고 환대하며 지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임상실습을 통해 이러한 영적 돌봄을 훈련하는 것이 임상사목교육(CPE)이다. 글 _ 최선경 가타리나 박사(동백 성루카병원 CPE & 호스피스교육 담당)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6면

추기경단 첫 콘클라베 투표…교황 선출은 못해

5월 7일 교황청 시스티나 경당에서 첫 콘클라베 투표가 진행됐지만 새 교황은 선출되지 않았다. 성 베드로 광장을 찾은 수많은 신자들은 아쉬움에 탄식했다. 콘클라베에 참여한 133명의 80세 미만 추기경은 이날 오전 10시 새 교황 선출을 청원하는 미사를 봉헌한 후 같은 날 오후 시스티나 경당에서 제267대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첫 콘클라베 선거를 진행했다. 선거 결과 누구도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지 못해 새 교황 선출은 실패했다. 선거 결과는 밤 9시(한국시간 8일 새벽 4시) 시스티나 경당 지붕에 설치된 굴뚝의 검은 연기로 확인됐다. 추기경들은 이날 오후 4시30분 교황청 사도궁 바오로 경당에서 새 교황 선출을 위한 묵상을 한 후 성인호칭기도를 올리며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경당에 입장했다. 추기경들은 차례로 나와 ▲만약 자신이 선출되었을 때는 성좌의 자유를 수호할 것 ▲선거의 비밀을 지킬 것 ▲투표에 대해 외부 압력을 받지 않을 것 등을 서약했다. 이어 교황청 전례원장 디에고 라벨리 대주교가 “Extra omnes”(외부인은 모두 밖으로)라고 외친 후 추기경단과 자신,교황궁내원 전 강론 담당 라니에로 칸탈라메사 추기경(90)을 제외한 모든 관계자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시스티나 경당의 문을 닫았다. 이날 첫 투표를 마친 추기경들은 숙소인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뒤, 8일 오전과 오후 각 두 차례씩 총 네 번 투표를 한다. 선거에 참가한 추기경 133명의 3분의 2인 89명의 지지를 얻은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다. 시스티나 경당 지붕 굴뚝의 흰 연기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소리로 새 교황이 선출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입력일 20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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