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로 보내신 아기

모든 아기는 정말 신기한 존재다. 인간 근원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찬미와 순수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아기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내가 미국에 머물 때였다. 당시는 시민권 획득을 위한 원정 출산이 한창 유행하던 때라, 아이를 낳고 귀국할 수 있겠다며 주위의 부러운 눈길을 받기도 했다. 특히 남자아이일 경우, 병역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덤으로 주어지니 당연한 선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나는 가족이 없는 땅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내가, 나의 엄마인 할머니의 사랑과 지혜 없이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더욱이 편법은 싫고, 군대도 필요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곧 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귀한 생명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매콤한 낙지볶음도 먹고, 모국어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동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으니 더욱 편안했다. 그런데 아기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서둘러 세상에 왔다. 아직 폐가 완성되지 않았을 시기라 급히 종합병원으로 옮겼고, 나는 열이 40도까지 오른 상태로 꼬박 하루를 진통한 끝에 첫 아이를 만났다. 의사들의 염려와 달리, 아기는 다행히 숨도 잘 쉬었고 크고 건강했다. 위험할 만큼 출혈이 심했다지만 그런 상황은 이미 흘러갔고, 그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가 내 품 안에 놓여 있다는 것만 보였다. 아기는 젖을 빨 힘이 부족해 마냥 울기도 했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에 놀라 깨기도 했다. 그러던 아기는 어느새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하더니, 바람을 쌩쌩 가르며 두발자전거를 탔다. 품 안의 아기는 아이가 되었다. 마구 달리는 아이를 따라가기 위해 자전거를 배웠고, 아이의 말 속에서 “아하!”를 외치며 순간의 진리를 발견했다. 엄마에게 첫 아이는 세상에서 최고로 예쁘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슈퍼 천재’다. 그리고 둘째 아이를 낳고 보니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아기가 또 존재할 수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 그런 아기도 성장 과정을 거치며 때론 깨어지고 또 빛난다. 동시에 엄마를 깨우치고 깨지게도 한다. 세상 모든 아이의 소중함을 알게 하고, 독립심을 키우며 엄마의 틀을 깨고 나간다. 사춘기 아이를 걱정하던 나에게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엄마처럼밖에 더 되겠어?”라고 하시던 내 스승의 말이 떠오른다. 엄마의 부조리함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해 온 아이는, 어리숙하고 무딘 엄마가 꼰대가 되지 않도록 날카롭게 지적하고 반항하며, 새로운 세대의 원리를 알려주고, 세상을 배우는 동시에 또 바꾸어간다. 그런 나의 첫 아이가 훌쩍 커서 군대에 갔다. 입대하고 딱 1년이 지난 지금,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대했던 만큼 평화롭지 않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다시 전쟁이 난무하고, 난 내 아이와 세상의 모든 아이를 걱정한다. 노인이 된 나의 엄마가 그렇듯이, 엄마에게 자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이 구유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요람 속의 아기는 결국 우리의 스승이 된다. 주님은 가장 가까이서 서로를 돌보고 배울 존재로, 우리에게 새로이 고유한 아기를 보내신다. 그 순리의 과정에서 결국 구원으로 닿으리라 믿으며, 세상의 모든 아이를 위해 기도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22면

처음으로, ‘스승’을 만나다

학창 시절, 매해 다가오는 스승의 날이면 뭔가 학급에서 행사를 기획하거나 선물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스승의 날에 특별히 챙기고 싶은 선생님이 없었다. 딱 한 명 평생 찾아뵐 교사로 여겼던 초등학교 때 담임은 당시 무슨 행동인지 인식도 못 하던 어린 나에게 성추행을 했었고, 내가 경험한 대한민국의 학교는 위계로 가득했다. 주어진 지식을 넘어선 질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질문이 닿지 않으니 진정한 소통과 존중이 생겨날 틈도 없었다. 그렇기에 안정된 직업으로 교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그 시절에도, 난 교사가 될 꿈은 단 한 번도 꾸지 않았다. 그렇게 ‘스승’이란 그저 사전 속에 묻혀있던 단어이던 그때, 내가 당연하다고 믿던 평화가 깨어졌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인지. 내가 어릴 때부터 믿어 온 하느님은 뭘 하는 건지. 이런 세상과 개인의 우여곡절을 통해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가슴이 미어터지도록 답답함과 궁금함이 끓어올랐다. 그렇게 나는 평화를 찾아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던 교회로 갔다. 불합리한 삶에 관해 물으러, 아니 하느님에게 따지러 갔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매일미사에 가는 것이었다. 나의 절실함과 세상의 불합리함을 따지러 간 곳은, 집에서 15분 남짓 개천을 따라 걸으면 닿는 자그마한 동네 성당이었다. 마침 막 부임한 새 신부님은 첫 본당 사제 소임에 열정이 가득했다. 직접 잼을 만들어 이웃들과 나누었고, 신자들에게 매일 묵상 글을 문자로 나누어 주며 홀로 하루에 3번씩 미사를 집전하셨다. 그 덕분에 젖먹이를 키우던 나는 온갖 불규칙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매일미사를 거르지 않을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에는 담요로 꽁꽁 싸맨 아이를 노오란 유모차에 태워 눈발을 헤치며 성전에 들어섰고, 유아실에서 젖을 먹이면서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단어 하나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열중했다. 보통 30분이면 끝나는 평일 미사에서 강론은 10분도 채 되지 않지만, 무한한 깊이의 의미를 찾으려 열중하다 보면 3시간 강의를 들은 것보다 더 큰 피로감이 밀려오곤 했다. 차곡차곡 쌓인 나날은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고, 매일미사는 아이와 소풍 가는 행복한 일상이 되었다. 신자들에게 보내주던 신부님의 묵상 글은 어떤 날은 너무 어려워 빙빙 돌기만 할 때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영혼이 깊이 꿰뚫리는 배움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나에게 첫 스승이 생겼다. 교회 안의 아버지였던 신부님을 첫 스승으로 만났고, 처음으로 스승의 날에 드릴 양말을 샀다. 그런데 첫 스승을 발견하자, 스승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마을버스 안 중년 부부의 수다 속에서,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말에서도 가르침이 들렸다. 어느 순간, 지난 삶의 단편 속에 나누었던 말 한마디에 담긴 의미, 상념을 통해 문득 다가온 섭리, 무심코 지나쳤고 몇십 년 동안 묵혀 있던 파편들이 진리로 연결되었다. 정말, 스승은 준비된 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의 깨어짐이 스승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고, 그 통로에서 만난 모든 스승은 주님의 원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안간힘을 다해 답을 찾아보겠다는 간절한 질문이 내가 그토록 되지 않으려던 선생님의 위치에도 놓이게 했고, 유일한 스승이신 주님을 온 세상 안에서 발견하게 했다. 그렇게 오늘도 난 매일의 스승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12 제3499호 22면

땅에 계시는 ‘최고 멋진 울 아빠’

나에게는 세 아버지가 계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교회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땅에서 나를 낳으신 아버지이다. 세 분 모두 나에게 엄청난 사랑을 쏟아부어 주시고, 그 덕분에 지금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아빠’라고 처음 부른 존재, 나의 휴대전화에 ‘최고 멋진 울 아빠’로 저장된 내 아빠는 나에게 더욱 특별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상 특별하고 애잔한 존재이겠지만, 나에게 내 아빠가 더욱 최고인 데는 이유가 있다. 아빠의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는 동생을 낳고 돌아가셨다. 곧이어 갓난아기였던 동생마저 죽음을 맞았다. 당신 어머니의 장례식인 줄도 모르고 손님들 사이에서 놀던 5살의 아빠에게 곧 새어머니가 생겼다. 그 아래 6명의 이복동생이 태어났고, 장남이던 아빠는 단 한 번도 한국 사회의 큰아들이 받던 혜택을 누릴 새도 없이 콩쥐처럼 학대받았다. 학창 시절에는 온 식구가 먹은 아침밥 설거지를 하고 등교하느라 항상 지각 대장으로 불리었고, 대학 입학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과 학업을 병행하셨다. 80세가 넘으신 아빠는 지금도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있다. 몽둥이를 들고 문을 열어젖히는 새어머니의 서슬 퍼런 호통과 눈초리가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동 학대와 가정폭력에 사회가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한 아이의 소중한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폭력은 결국 눈덩이처럼 확대되면서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폭력에 시달린 아이는 그토록 싫어하던 폭력을 답습해 스스로 학대하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빠는 다행히 사랑 가득한 아내인 나의 엄마를 만났고, 부정적인 성장 기억은 반면교사가 되어 딸 셋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특히 맏딸인 나는 더욱 애틋한 기억이 많다. 집에 가면 만날 딸에게 학교로 편지를 보냈던 아빠,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뒤늦게 평화를 공부하러 멀리 떠나겠다는 딸을 흔쾌히 응원했던 단 한 사람, 먼 나라에서 인턴 근무를 하는 딸을 위해 스스로 설거지 기계가 되길 청하였고, 본인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내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기막히게 알아차리고 동생들 몰래 용돈을 보내주던 아빠의 모습, 셀 수 없이 기쁘고 가슴 찡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으로 와서 우리를 구원한 기적처럼, 이 땅에 사는 ‘최고 멋진 울 아빠’를 통해 사랑의 결핍을 극복하고 확장한 기적을 본다. 그 기적의 접점은 개인의 노력도 있겠지만, 결국 사랑이다. 한국전쟁 참전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조차 몰랐던 두 살 엄마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집성촌의 따스함 속에서 자랐다. 그 사랑은 아빠를 치유했고, 곧 나에게로 이어졌다. 이는 또 나의 아이와 주변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에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쩌면 나를 살리는 유일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땅에 계신 우리 아빠와 언젠가는 다 같이 만나겠지만, 최고 멋진 울 아빠가 이 땅에서 좀 더 오래 건강하게 제 곁에 머무르게 해 주세요! 제가 배우고 갚아 나갈 사랑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거든요….”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22면

신앙의 빚을, 신앙의 빛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지 어느덧 30년이 되어간다. 문득 ‘나는 어떻게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신앙의 길이라 말할 수 있는, 나의 첫 시작은 언제였을까? 내가 생각하던 평화가 산산이 깨진 덕분에, 바닥부터 다시 돌이켜 내 삶을 전환한 15년 전이었을까? 아니면 예측조차 못 한 사건을 처음 맞닥뜨린 타국에서의 청춘 시절이었을까? 잘 알아듣지도 못하던 영어 미사에서, 할아버지 신부님이 끊임없이 절박하게 반복하던 한 마디 “Hang in there(조금만 더 버텨)!”라는 구절에 매달려 겨우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그 20대 끝자락이었을까? 아니면 유럽 배낭여행 이후 개종한 시점이었을까? 그렇게 거슬러 오르다 보니, 결국 가닿은 곳은 사람이었다. 6살쯤 만났던 가무잡잡한 동네 친구, 간식을 준다며 나를 이끌던 그 친구를 따라 개신교회에 갔다. 그리고 나 혼자 가던 교회에 온 가족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맛있는 간식에 이끌린 나의 응답이 우리 가족을 교회로 인도한 계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무렵 아빠가 사랑하던 이복동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 일이 부모님을 교회로 이끈 더 깊은 계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였던 나는 ‘만나’처럼 내려오는 간식을 따라 교회에 갔다. 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을 계속해서 캐묻던 어린 나의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음을 이미 그 시절에 감지했음에도, 친구를 만나러 교회에 갔고 열심히 활동했다. 그런데 한 달 남짓의 배낭여행은 그리 길지도 않았건만, 유럽의 성당과 바티칸 먼발치에서 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케토의 영향이었을까? 나는 물 흐르듯 가톨릭교회에서 다시 세례를 받았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교회 친구들과는 연락이 뜸해졌고, 나를 처음 교회로 데려간 그 친구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기도 중에, 꼬마였던 그 친구가 떠올랐다.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은 그렇게 가볍고 즐겁게 그 친구를 통해서 나를 부르셨구나. 그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찾았다. 그들 중 몇몇은 목사가 되었고, 몇몇은 서로 사랑해서 부부가 되었고, 몇몇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아름다운 제주에서 가장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좋은 버스 기사도 되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면서 종교와 종파를 넘어선 하나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일치를 느꼈다. 종교 간의 대화와 원리는 그리 멀리 있지도 어려운 데 있지도 않았다. 우리가 만나는 매일의 일상 속에 섞여 사는 사람들, 그저 옆에 있기에 서로를 돌보고 사랑했던 날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매일 빚을 지며 살아간다. 결국 신앙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이자,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되어 갈 것이기에…. 이미 시작된 2026년 이 뜨거운 여름, 두 달 동안 내가 진 신앙의 빚을 작은 빛으로 나아가도록 이끈 사람들을 기억하며 이 여름을 보내볼까 한다. 글 _ 손서정 베아트릭스(삶을 살리는 평화 교육 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2면

모든 것이 그분의 성실한 초대였습니다

지난 두 달간 가톨릭신문에 글을 연재하며 내 삶의 파편들 속에 숨어 계시던 주님의 손길을 기록할 수 있었던 시간은 참으로 복된 축복이었다. 마지막을 정리하는 오늘,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진 단어는 바로 ‘초대’다. 주님께서는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언제나 당신을 향해 걸어오라며 새로운 선택의 길로 이끄셨다. 세상의 잣대와 시선 속에서 ‘쓸모’를 증명하려다 지독한 우울증이라는 삶의 바닥을 쳤을 때, 주님은 나를 가장 먼저 ‘치유와 회복’의 자리로 초대해 주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태 3,17 참조) 이 말씀은 나의 영적 이름표이고 정체성이다. 문화선교로의 초대, 내가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탈렌트를 온전히 주님을 위해 쓰고 싶다고 바쳤던 청원기도를 들어주신 주님은, 이후 10년 동안 나를 교회 안의 문화선교로 이끄셨다. 광야로의 초대, 수없이 포기하려던 배우의 삶을 아주 가는 빛으로 이어가 주시며, 그 끈을 잡고 깜깜한 앞길을 더듬거리며 따라오라고 하신 광야로 나를 초대하셨다. 내 길을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 거친 길에서도 돌보셨고, 만나를 먹이시며 언제나 내 곁을 함께 걸어가 주셨다. 희망으로의 초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공원을 달리며 절망하던 2024년 가을, 1년 6개월간의 영적 면담을 통해 희망의 문을 열어주신, 내 삶에 기쁨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신 희망으로의 초대였다. 허접함에서 완성으로의 초대, 저를 이끌어주던 영적 스승이 머나먼 아일랜드로 떠나고 찾아온 마음의 빈자리, 주님께서는 지체 없이 나를 ‘매일 새벽 미사’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영적 심연으로 초대하셨다. 고요한 새벽어둠을 뚫고 제대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내 마음을 한없이 낮고 가난하게 만들고, 게다가 미사가 끝난 후 교우들과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누며 가감 없이 삶을 고백하는 시간은, 내 개인의 신앙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시고 ‘참된 공동체로의 초대’로 완성해 가시는 주님의 세밀한 손길이었다. 그 모든 초대의 순간들이 늘 평탄하고 명쾌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답답했고, 때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막연함과 두려움에 떨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모든 막막함이 실은 나를 더 좋은 길로 이끄시려는 하느님의 훈육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성실하시고 완전하신 분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 확신이 자리 잡았다. 내 뜻대로 되지 않던 순간조차도 주님은 당신의 선을 향해 나를 이끌고 계셨다. 과거를 거룩하게 기억하기에 오늘을 기쁘게 걸을 수 있고, 또다시 펼쳐질 미래를 희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그 성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도의 청원조차도 조급한 집착이 아니라 설레는 희망으로 기대한다. 돌이켜보면 무언가에 집착했다는 것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불신이 내 안에 믿음처럼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동안 늘 집착했고, 초대에 거부했으며, 내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이루려다 뜻대로 안 되면 좌절하고 무너졌다. 스스로 무너지니 타인을 쉽게 비판했고, 종국에는 내 존재 자체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주님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내게 주어진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은총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집착이 올라오면 바로 주님께 봉헌하며 내 약함을 고백한다. “주님 저라는 자 여전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은총을 입고, 여전히 깨지기 쉽고 허접한 질그릇과도 같은 나 자신을 봉헌하며, 이 볼품없는 질그릇 안에 주님의 은총이 또다시 가득히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 “그동안 부족하고 서툰 저의 신앙 여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읽어주신 모든 교우분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마다 주님의 평화가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6-28 제3497호 22면

또 다른 차원의 초대로, 새벽을 깨우는 말씀의 미사

인간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느님이 정교하게 짜 놓으신 거룩한 타임라인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 지난 1년 6개월간 내 절망의 밭을 희망으로 일궈주셨던 영적 지도신부님께서 아일랜드로 떠나셨다. 이제 홀로 직면해야 할 큰 파도 앞에 선 듯한 막막함이 밀려왔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 주 토요일 성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고해를 보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나의 고해 내용을 가만히 들으시던 본당 주임신부님께서, 미사가 끝난 후 사무실 앞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신앙생활을 하며 이런 일은 처음이었기에, 미사를 봉헌하는 내내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마주 앉은 신부님 집무실에서의 면담 시간. 신부님께서는 내 교적까지 미리 받아놓으신 채 한 시간가량 깊은 대화를 나눠 주셨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건네셨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매일 새벽미사를 나오면 좋겠어.” 사실 나는 이미 매일 오전 10시 미사에 참례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에는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다. 가끔 본당에 갈 때마다 새벽미사를 강조하시던 주임신부님의 말씀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면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속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다는 잔잔한 울림이 일었다. 나를 이끌어주시던 신부님이 외국으로 떠나시자마자, 주님께서는 지체 없이 또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내 영적인 과정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보는 말씀 카드에도 ‘허접한 그릇’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혔다. ‘이쯤 하면 됐지’ 하는 나의 허접함을 주님께서 복된 그릇으로 바꿔주시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제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기에 나를 준비시켜 주시는 느낌이 들었다. 신부님께서는 매일 봉헌할 미사의 독서와 복음을 미리 10번씩 읽고 오라는 영적 숙제를 주셨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치고 5시30분까지 성당에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에, 전날 밤 미리 말씀을 10번씩 읽고 묵상한 뒤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먹고 실천에 옮겼고 그런 힘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렸다. 그전에는 부담스러운 10번 읽기가 며칠 만에 10번을 넘어 그 이상을 읽고 또 읽는 나를 보면서 그 능력도 함께 주시는 주님께 감사했다. 그날의 말씀 중 내 마음에 온 일부 말씀이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2베드 3,12-17 참조)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를 봉헌할 때, 전날 읽었던 말씀들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꿈틀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을 앞당기는 것은 나보다 주님께서 더욱 기다리신다는 마음과 그러기 위해서 오류에 휩쓸리지 말고 흠 없고 티 없이 평화로이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정진하라고 이 새벽 주님은 오늘도 나를 깨우신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6-14 제3495호 22면

움막의 거리 30미터

나의 유년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미움과 분노가 뒤섞인 차가운 관계였다. 할머니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밥상을 엎으시던 할아버지의 서슬 퍼런 모습, 할아버지 보란 듯 작은 실수만 있어도 매를 들고 화를 내며 때리시던 아버지. 부자는 상대에게 소리치며 싸우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그리도 화를 내며 지내셨다. 결국 할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집에서 불과 30미터 떨어진 곳에 작은 움막을 지어 스스로를 유배시키셨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차마 한 울타리 안에 머물지 못했던 그 30미터의 거리는, 우리 가족이 대대로 짊어져 온 상처의 깊이와도 같았다. 늘 소화가 안 되던 할아버지는 손자인 나에게 약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움막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황도 통조림을 꺼내어 내게 건네주셨다. 폭군 같은 노인이 건네는 황도의 달콤함은, 가족에게 표현이 어색한 할아버지에겐 최선의 사랑 표현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미워하며 지냈지만, 세월이 흘러 마주한 아버지는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닮았다. 결혼 전, 나의 가장 간절한 기도 제목은 이 상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지금까지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 살며 마주한 현실은 시렸다. 아버지의 호통과 그 뒤에 숨겨진 손주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아이들은 늘 혼란스러워했다. 할아버지의 서툰 다정함조차 위협으로 느낀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피해 방으로 숨어들었고, 아버지는 그런 손주들이 피하는 모습을 보며 화를 내곤 하셨다. 그런 이후엔 아이들은 더욱 할아버지를 마음에서 더 멀게 피하곤 했다. 꼭 우리 할아버지가 물리적인 30미터 움막의 거리에서 사신 것과 같이 아버지와 아이들은 심리적 30미터 움막의 거리를 두고 사는 듯했다. 주님께서는 ‘수술’이라는 예기치 못한 도구로 이 낡은 움막의 문을 두드리셨다. 한 달 전 쓸개 제거 수술에 이어 담석 제거를 위해 다시 입원하신 아버지는, 더는 호령하던 호랑이가 아니셨다. 아버지는 왜 왔냐고 하시면서도 몸 상태와 지난 수술 얘기 등을 하셨다. 떠나기 전, 어머니의 기도 권유로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기도가 시작되자 아버지는 어색해하며 피하시기는커녕 제 손을 더 꼭 맞잡으셨다. 곁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드는 동안, 투박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며 그 시간을 감사했다. “주님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 바오로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주님과 화해하고 이 수술을 통해 회복하게 도와주소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주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섬세한지 느꼈다. 육신의 수술을 통해 주님은 아버지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셨다. 할아버지의 움막에서 느꼈던 그 황도의 사랑 표현처럼, 아버지와 내가 서로에게 기도로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주셨다고 본다. 이제 남은 수술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린다. 아버지가 회복되어 돌아오시는 날, 이번에는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손을 먼저 잡을 수 있는 용기를 내어주길 소망한다. 그 심리적 30미터, 움막의 거리가 이제는 더 가까워져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22면

집착을 넘어 희망으로,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2024년 가을의 초입,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공원을 달리던 그날의 절박함을 기억한다. 너무 답답해서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달렸다. 긴 광야의 삶, 보이지 않는 안개를 걷는 듯 희망이라곤 없는, 어디론가 숨고 싶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어 뛰고 또 뛰었다. 탈출구를 찾으려 무작정 다이얼을 누르고 지도 신부님과 한 통화는 내 삶의 밭을 새롭게 일구는 시작점이 되었다. 그날 이후 6개월 동안 매주 이어온 신부님과의 면담은, 내 마음에 자리 잡았던 절망의 밭에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은총의 과정이었다. 신부님께서는 이 모든 만남이 내가 간절히 희망했기에 이루어진 선물이라 말씀하셨고, 나는 그 가르침을 등불 삼아 성실히 걸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매달렸던 희망의 이면에 사실은 무서운 집착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집착이 주인이었던 내 마음에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라는 두려운 신념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난 비로소 손에 쥔 힘을 빼고 주님 앞에 고백했다. “주님, 저는 희망합니다. 하지만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께서는 언제나 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음 뒤에 찾아온 평화 속에서 어느 날 성당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예수님의 음성이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그 말씀은 지금도 내 삶을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희망은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믿음은 다시 나를 흔들림 없이 걷게 했다. 그러던 중, 작년 우리 가족은 ICPE 공동체 40주년 행사를 위해 폴란드로 향했다. 평생 서약을 앞둔 우리 부부와 아이들이 함께한 그 여정은 주님의 세심한 안배 그 자체였다. 큰아이의 기말고사 일정 때문에 서둘러 귀국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의 배려 덕분에 우리 부부만 따로 평생 서약 미사를 하게 된 것이다. 미사가 시작되고 신부님께서 향을 치시는 순간, 내 영혼을 관통하는 강렬한 울림이 있었습니다. “이제 광야는 끝났다.” 제대 뒷벽에 그려진 광야의 천막과 숫자 ‘40’ 로고를 바라보며, 나는 신부님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지난 세월 걸어온 고단한 광야의 길이 떠올랐다. ‘아, 정말 끝났구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감사와 충만함이 차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평생 서약의 자리가, 실은 내 인생의 긴 광야를 마감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입성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나를 지도해주셨던 신부님께서 5월이면 아일랜드로 먼 길을 떠나신다. 신부님도 희망을 이루신 것처럼, 나 또한 주님 안에서 새로운 희망의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이 희망은 나를 더욱 가난한 마음으로 이끈다. 무언가에 집착하던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하루하루를 선물로 여기는 감사가 채워졌다. 더는 초조해하거나 떼쓰지 않는다.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때가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집착을 버리고 희망으로 채워진 이 가벼운 마음, 하루를 온전히 감사로 봉헌할 수 있는 지금 이 삶이야말로 주님께서 제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고 희망이다.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걷는 이 걸음걸음마다,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하시리라 나는 믿는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5-31 제3493호 22면

엔트로피를 역행하는 용기: 자기 주도적 신앙의 길

세상의 모든 만물은 가만히 두면 무질서한 상태로 흘러간다. 뜨거운 차는 식어가고, 가지런히 정리된 방은 시간이 지나면 어질러진다. 과학은 이를 ‘엔트로피 법칙’이라 부른다. 신앙의 세계에도 이 법칙은 존재한다. 우리의 영혼 또한 가만히 내버려두면 가장 편한 길, 내 자아가 만족하는 길, 즉 ‘나’를 우선순위에 두는 무질서의 상태로 급격히 기울어진다. 나도 그렇다. 그렇게 무질서로 빠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됐다. “신앙은 불편함이다.” ICPE 선교 공동체에 속해 있고, 지금은 리더를 맡고 있다. 이 리더란 자리는 나의 자아를 불편함으로 초대하는 자리다. 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MBTI가 I로 시작하는 성향인데 이런 나에게 리더는 참 맞지 않는 옷 같다. 그런 내가 선교회 회원들을 위해 자기 주도적인 신앙을 요구하고 제안하는 건 내 삶을 역행하는 투쟁이다. 그들의 영적 성장과 리더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살기 위해 독려하는 것. 자아가 귀찮아하고 거부하는 그 지점을 향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는 영적 투쟁을 해보자는 것. 쉽지는 않다. 현실의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가.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누가 뭐라 해도 싫고, 내 눈앞의 이득이 주님의 일보다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데, ‘주님의 뜻’을 묻기보다 ‘나의 형편’을 먼저 살피는 것이 우리의 욕구인데 그것을 거스르자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이 선교사들을 다시 뜨거운 신앙의 자리로 이끌 수 있을까?” 성체조배를 하는데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그러신 듯 느껴졌다. “그건 나의 일이다.” 그렇지. 주님의 일이지. 그건 주님의 일인데, 나의 노력으로 힘으로 애쓰고 있으니. 오직 그 일은 ‘주님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내가 무엇이라고 주님의 자녀들을 판단하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던가. 그들은 내가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장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이다. 나 또한 그들과 똑같이 넘어지고 흔들리는 연약한 죄인일 뿐임을 고백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두신 그 작은 사랑의 불꽃을 다시 지펴주시길 기도하며, 나 스스로가 먼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기 주도적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것뿐이다. “내가 뭐라고… 주님께서 아끼시는 당신의 자녀들을… 주님께서 잘 이끄시겠지.” 그렇게 의탁 드린다. 이건 포기가 아니다. 리더로서의 조급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때를 기다린다. 누구나 사계절이 있다면, 누군 뜨거운 여름이고 누군 찬 겨울이라면, 여름인 내가 겨울인 상대를 기다려주고 인내해 주는 것이야말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내 안의 게으른 자아를 깨우며 불편함을 선택한다. 기도가 귀찮을 때 무릎을 꿇고, 내 일이 바쁠 때 주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며 영적 엔트로피를 역행하려 애쓴다. 그 좁고 불편한 길 끝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참된 평화와 성장이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이끄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품으로 이끌고 계심을 신뢰하며 나는 오늘도 그분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22면

두려움의 파도를 넘어 영원한 미소로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얇은 유리 벽 같았다. 췌장암 3기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1년 6개월의 시간을 버텨오신 마르코 고모부님. 항암치료의 고통 속에서도 회복의 끈을 놓지 않으려 직접 운전대를 잡고 한의원을 다니시던 그 간절한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끔 우리 집에 오셔서 함께 식사를 나누실 때면, 젓가락을 움직이는 그 평범한 손길조차 우리에겐 회복을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이 되어 버린 식사를 하고 나가실 때 고모부님은 고백하셨다. “무섭다, 참 무서워.” 떨리는 목소리로 남기신 그 말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본원적인 두려움이었다. 그 후 며칠 뒤 간 기능의 저하와 함께 찾아온 쇼크는 순식간에 고모부님을 의식 없는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병원에서 마주한 초점 없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이별’을 직감했다. 매일 묵주기도로 고모부의 영혼을 보호해 주십사 청했고, 미사 때마다 그의 영혼을 주님 손에 맡겨드렸다. 그러던 중 기적처럼 의식을 회복해 식사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 달려간 병실에서 식사를 마치시고 해맑게 웃으시는 고모부. 부은 손을 잡고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기도하며 눈시울이 자꾸 붉어졌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주님께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주님, 이렇게 고모부와 함께 기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신 후, 아내와 함께 찾아간 마지막 면회 날. 그날의 기억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장면으로 가슴에 새겨졌다. 침대에 누워 계신 고모부님. 황달로 눈은 색이 변했고 여기저기 터진 실핏줄과 부은 손. 그 모습에 마음이 무너지면서도 우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뵙지 못했던,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해맑은 웃음을 봤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은 아이처럼, 근심 하나 없는 천진난만한 그 미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그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 오히려 위로를 드려야 할 우리 부부가 깊은 위로를 받았다. 그 미소는 “무섭다”던 한 인간의 두려움이 주님의 평화에 완전히 잠겼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인간의 의술이 멈춘 곳에서 주님의 자비가 완성되었다. 고모부님은 당신의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며 죽음이라는 파도를 넘어서고 계셨다. 그리고 며칠 후 주님께 가셨다. 이제 고모부님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정거장을 지나 영원한 안식에 드셨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음에도 내 마음이 이토록 잔잔한 것은, 고모부님이 보여주신 그 해맑은 미소가 주님의 약속임을 믿기 때문이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절벽이 아니라, 주님의 손을 잡고 영원한 빛의 나라로 건너가는 아름다운 과정임을 고모부님은 온몸으로 가르쳐 주셨다. “주님, 저 또한 제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고모부님처럼 해맑은 미소로 장식하게 하소서.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으며, 주님의 품에서 다시 만날 그날을 소망하게 하소서.” 부활의 햇살 속에 마르코 고모부님을 주님께 돌려보내 드렸다. 이제는 두려움도, 통증도 없는 그곳에서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영원히 미소 짓고 계실 고모부님을 위해, 남겨진 우리는 다시금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글 _ 우기홍 미카엘(연극배우, 가톨릭 세계복음화 ICPE 선교회 한국지부장)

발행일 2026-05-17 제349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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