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기절초풍한 무덤 경비병들

교황청에 가면 중세 복장을 한 근위병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교황청을 수비하는 공식 경비대로, 바로 ‘스위스 근위대’이다. 14세기 이후부터 교황청의 경호를 맡아온 이들은, 1505년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중 신변에 위협을 느낀 율리오 2세 교황에 의해 창설되었다. 당시 교황은 이들에게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 스위스 근위대는 클레멘스 7세 교황 재위 시기인 1527년 5월 6일,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보낸 군대가 로마를 침공하고 약탈을 벌이자, 다른 용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는 수적으로 크게 열세임에도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하던 당시, 500명의 근위병 중 겨우 42명만이 살아남았다. 교황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조국 스위스로 돌아갈 것을 권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교황의 안전을 먼저 당부한 뒤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약 800미터 떨어진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으로 무사히 피신할 수 있었다. 이처럼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한 스위스 근위병들의 용맹함으로 인해 이후로도 스위스 병사들이 교황청 근위대로 계속 기용되는 전통이 이어졌다. 한편, 복음서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경비병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다음 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라고 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해 주십시오.” 이에 빌라도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가서 알아서 지키시오.” 그들은 경비병을 배치해 예수님의 무덤을 사흘 동안 지키게 했고, 무덤 입구는 큰 돌로 막았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을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번개처럼 빛나고 눈처럼 흰 옷을 입은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되살아나셨다.” 이 광경을 지켜본 경비병들은 급히 시내로 들어가 모든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며 이렇게 지시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 시체를 훔쳐 갔다고 하시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처럼 이 이야기는 유다인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결국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이야기는 초대교회에서도 다른 부활 이야기들과 함께 널리 알려졌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役事)는 참으로 신비롭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현대인은 이전 세대보다 자연재해, 궁핍과 기아, 갖가지 질병, 미신, 폭군들의 압정과 같은 많은 굴레에서 벗어나 생활하고 있다. 최근 등장한 인공지능(AI)으로 상징되는 과학과 이에 함께 급성장한 교통과 통신의 기술은 인간을 제약해 왔던 시간과 공간의 장벽마저도 허물어뜨렸다. 이처럼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편리한 수단들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향유해야 할 인간 본연의 천부적 권리, 즉 ‘자유권’의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역사적으로 큰 발전을 이룬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참으로 자신이 자유로운 만큼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의 등장과 이에 대한 비판 결정주의를 거슬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더 나아가 사르트르(J. P. Sartre)와 같은 현대의 사상가들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투신하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주목할 만한 성찰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일부 학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자유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구속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결정주의’를 절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인간이란 자유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완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신과 같은 더 높은 힘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처럼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를 인정하려는 입장은 많은 비판에 부딪혔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이 세계와 사회와 역사에 의존해 있는 상태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인간은 또한 외부적인 요인들뿐 아니라 자신의 열정이나 심리적 중압감 등으로부터도 제약을 받는다. 실제로 자신이 정말 자유롭다고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보이고 그들 중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들은 더욱 적어 보인다. 자유 개념의 다양성에 대한 성찰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이를 추구할 때 ‘불안’이나 ‘고독’을 느끼게 되고 때로 그 심리적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그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인간의 자유는 단일한 성격을 지니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을 향한 의지의 경향 자체는 필연적임(「진리론」 14,2)을 인정하면서도, 의지가 자유롭게 작용할 수 있는 경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실행(Exercitii)의 자유는 의지가 자신의 의지 행위를 실행하거나 실행하지 않을 수 있는, 곧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종별화(種別化, Specificationis)의 자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반대(Contrarietatis)의 자유는 악이 아니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진리론」 22,6) ‘실행의 자유’는 전적으로 의지의 재량에 달려 있지만, ‘종별화의 자유’는 권력, 명예, 재화 등의 가치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껏 누릴 수 있고, 외적으로 방해받지 않을 때 누리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단계에서 프롬(E. Fromm)이 ‘~로부터의 자유’(Liberty from~)라고 부른 ‘소극적 자유’, 즉 관계·강제·구속·방해 등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서 ‘~을 위한 자유’(Liberty for~)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는 ‘반대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의 측면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이런 측면에서도 자유가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현대인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고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고, 일부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하는 듯하다. 외적인 성공에만 집착해서 이기주의와 향락주의가 팽배하고 희생, 절제, 정의, 이웃에 대한 배려 등을 경멸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 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한 애순과 관식의 사랑이 전 세계를 눈물바다로 몰아넣었다. 양친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지 못한 이 청춘 남녀가 단지 부모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부산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은 원했던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단순한 벗어남, 혹은 도피만으로는 개인의 독립이 아니라 당사자와 양친들에게 더 큰 속박을 만들었을 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행위가 순수한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함을 뚜렷이 자각하고 살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결정을 통해서 엄청난 어려움들이 생겨났지만, 애순과 관식은 자유로운 결정을 통해, 새롭게 맺어진 관계를 기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확신에 찬 의식과 행동이 자신들의 결정에 반대했던 이들도 설득했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자유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양한 가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그 가치 자체를 최종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이것이 좋으니까 내가 한다’라고 말해야지 ‘내가 하니까 좋은 것이다’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며 그 가치의 기준은 행위 주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만약 인간의 의지가 나쁜 것을 결정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자유의 결함을 의미한다. 비도덕적인 결정은 그것이 비록 형식적으로 자유의 모습을 지녔지만, 자유도 아니며 자유의 한 부분도 아니다. 많은 현대인이 빠져드는 도박, 마약 등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중독이라는 부자유를 남길 뿐이다. 인간은 항상 선한 대상과 악한 대상 중, 자신의 자유를 성숙 또는 억압하는 방향 중 어느 쪽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도덕적인 욕구가 의지의 자유를 감소시킨다면, 의지가 확고히 선을 향하고 있을수록 그 자유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것만으로 참행복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외적 환경이나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또 다른 요인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섭리가 우주 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면, 과연 그 안에는 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있을까?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해 다음 호에서 진지하게 성찰해 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죽어서 사는 일, 증언(묵시 11,7-14)

증언의 끝은 불행히도 죽음이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신앙을 살아가는 일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지난한 신앙의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앙을 살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게 우리이지만 실은 세상에서 실패한 삶이 순교였고 증언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인지하고 추앙하는 우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묵시록 11장의 두 증인의 죽음은 신앙의 결과가 참혹한 실패라는 ‘사실’에 대한 복기이자 해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은 땅의 주민들을 기쁘게 하는 대상이 된다.(묵시 11,10 참조) 순교나 신앙의 증거는 세상 안에서의 실패나 참혹한 결과를 비껴가지 않는다. 두 증인은 정확히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은 세상의 조소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읽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 죽음은 악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가 아니다. 묵시록 11장의 동사 시제를 살펴보면 그렇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싸워 이기는 대목에 사용된 동사는 미래형이다. 악의 승리는 여전히 요원하다. 우리는 묵시록 12장(1~8절)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또한 만나게 된다.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권한이 주어진 짐승이지만 현실적인 전쟁이나 다툼은 묘사되지 않는다. 악의 존재는 서술하되, 그 권한이나 능력의 실행은 철저히 제한하는 묵시록의 서술 방식이다. 두 증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동사는 ‘현재형’이다. 두 증인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캐릭터는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 말하자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다른 표현으론 ‘땅의 주민들’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지금’은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해석(기뻐하고 즐거워하는)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다. 악의 세력에 의한 두 증인의 실패가 아니라 두 증인의 주검에 대한 해석과 읽기가 우리 이야기의 현재다. 악의 세력은 두렵고 짐승의 힘은 대단한듯 하나 미래에 일어날, 그래서 지금은 공허하고 허무한 힘일 뿐이다. 지금의 시간은, 증언하는 일이 실은 죽는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묻는 시간이다. 우리 이야기의 공간적 구성 역시 그러하다. 두 증인의 주검은 ‘큰 도성의 한 길’, ‘소돔과 고모라, 혹은 이집트’라고도 하는 도성에 버려져 있다.(묵시 11,8 참조) 이 도성을 해석하는 스펙트럼은 ‘영적인 눈’이다.(이 도성은 ‘영적으로(πνευματικῶς) 불린다’라고 본문은 말한다) 현실의 공간을 영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미 사라진 저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까지 죄다 불러와 현실의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투사하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소돔과 고모라,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심판과 단죄의 공간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공간’이라는 서술을 덧붙인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 안에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것. 악함의 한가운데 두 증인의 주검이 있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자리라는 역설이 묵시록이 꾸며놓는 시·공간의 묘미다. 증인들의 주검은 주님이 함께하는 구원의 공간을 가리키는 지시체다. 묵시록 서사의 전형적 특징이 매번 이렇다. 선악의 완전한 구분을 이야기하는 얄팍한 이원론이 끼어들 틈이 없다. 두 증인의 주검을 바라보고 기뻐하던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은 묵시록 5장의 어린양이 속량한 사람들이기도 하다.(묵시 5,9 참조) 우리 모두는 선하기도 하고 동시에 악하기도 하다. 선악을 무 자르듯 딱 갈라놓고 생각할 수 있는 편리함은 이 세상에 애시당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땅의 주민들이 두 증인의 주검을 두고 기뻐하고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두 증인이 선포한 예언의 말들이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이고 두 증인의 죽음으로 그 괴롭힘이 사라졌을 것이라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리라.(묵시 11,10 참조) 그러나 이 기쁨은 단지 사흘 반의 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묵시 11,11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그리고 삼 년과 반 년의 시간들과 의미를 같이 하는 ‘사흘 반’의 시간은 완전 수 ‘7’이 반토막 난, 그리하여 미완의 시간으로 남는다. 땅의 주민들이 나누는 기쁨은 한시적일 뿐이다. 우리 이야기의 읽기는 한시적인 기쁨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세심히 살펴보는 데 있다. 악에 대한 심판의 공간에서 구원의 완성 이뤄지는 역설 ‘두 증인’ 죽었다가 살아나며 하느님 향한 끝없는 여정 증언 사흘 반이 지나고 두 증인은 제 발로 일어선다. 주검이 생명을 얻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주석학자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재건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에제키엘서 37장의 ‘마른 뼈’를 떠올린다. 마른 뼈가 힘줄과 살이 붙어 다시 살아난다는 이야기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부흥케 하리라는 희망을 노래한다. 묵시록 11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땅에서의 부흥이 아니라 구름을 타고 하늘까지 올라가는 두 증인의 모습을 기록하기 때문이다.(묵시 11,12 참조) 전통적인 주석학자들은 하늘을 오르는 두 증인이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2열왕 2,11 참조)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베드로와 바오로라고 이해하는 전통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두 증인을 역사의 어느 인물로 고정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이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드리는 지표와 모범이 된 것이 역사 속 한두 명의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두 증인이 하늘로 오르는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도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고 칠천 명의 사람이 죽었다.(묵시 11,13 참조)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천재지변과 땅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서술은 ‘남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회개의 문학적 장치다. 두 증인의 죽음으로 시작한 세상 사람들의 한시적 기쁨은 하느님을 향한 회개에로 향하고 있다.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 나아가 무수히 많은 불행과 고통과 비참함이 우리 생에 닥치더라도 신앙인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의 한 대목으로 이해한다는 다소 투박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가 묵시록 11장이 전하는 두 증인의 이야기다. 증언의 끝은 세상에서 죽음으로 결판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비로소 생명의 가치를, 그 본령이신 하느님을 알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또 죽어간다, 살기 위해서!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욕망의 다양한 얼굴

인간은 자신 앞에 나타난 다른 성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만 발전시킬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성 자체가 매우 유동적(Liquid)이면서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내적 변화가 시선으로 드러나기에 먼저 자신 안에 움직이는 그 변화의 원인, 즉 욕망을 보아야 한다. 성(性)은 처음부터 방향성을 지녔지만 나의 자유와 지향에 의해 신호등처럼 바뀔 수 있다. 자신도 타자도 인격으로 바라봐야 하나 유혹에 의해 단지 성애적 필요를 만족하는 기능적인 역할로 격하시킬 수 있다. 달라지는 양방향의 변화는 바라보는 시선, 즉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을 비추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체험과 구원 과업의 맥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38과 2항)라고 한다. 사랑은 단순히 관능적 욕구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되고 경험되어 완성에 이르는 질서를 지녔으나, 욕망은 그 질서를 바꾼다. 부정적 얼굴은 인간이 욕망을 느끼는 대로 실행하여 하강으로 빠지는 상태이고, 긍정적 얼굴은 성 충동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자신의 최종 목적에 비추어 충동을 조절하여 긍정적 힘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다. 욕망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서 선택하게 되는 지향성이다. 감정은 파도처럼 우리를 높이 올라가게도 내려가게도 하지만, 지향성에 의해 움직인다면 감정의 강도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욕망이 최종 목적을 바라보고 정화를 거쳐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은 삶에서 윤리가 크게 두 가지로 흔들리는 체험을 한다. 신앙과 행위를 분리시키고, 진리와 자유를 분리시켜 왜곡되게 한다. 마태오 복음 5장 27절과 28절은 바로 이 부분을 다시 보게 한다. 인간의 마음과 행위라는 윤리적인 부분을 각 상황마다 규칙을 적용하는 결의론적 방법에서 탈피해, 윤리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을 양성해야 한다. 윤리의 기초적 문제를 해석하는 인식 체계를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계명을 다 지키고도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이 지니고 있던 마음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마태 19,16-22) 예수께 어떤 사람이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질문한다. 그의 질문에서 그가 최종 목적을 알고 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7절)라며 ‘선한 일’로 물었는데, ‘선하신 분’ 즉 존재로 응답한다. 행위와 존재가 분리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젊은이가 지킨 율법 조항들은 외적인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21절 참조) 주는 것으로 대변되는 사랑과 별개로 행하는 계명 준수는 ‘슬픔’을 가져온다.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하는 이 슬픔은 ‘참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슬픔(“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과는 분명 달라 보인다. 회칙 「진리의 광채」는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근본적 의지의 존재를 언급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블롱델(Blondel, Maurice Édouard, 1861~1949)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 젊은이의 질문을 해석한다. 그것은 “삶의 충만한 의미”에 관한 것으로, “모든 결정과 행위의 핵심에 자리잡은 열망이요, 자유를 움직이는 은밀한 추구이며 내적 충동”의 발로이다. “우리를 끌어당기며 부르는 절대선을 향한 간구”인 동시에, “인간 생명의 원천이자 목적인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의 반향”이다.(7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64항은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소원을, 곧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하는 우리의 내적 지향을 새롭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 교리는 ‘몸에 관한’ 신학일 뿐 아니라 인간학과 신학의 새로운 체계를 호소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학적 방법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하느님의 가르침, 계명, 율법은 그분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의 뜻에 맞을까,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선물이 주어지는 순간, 역설적인 부담이 함께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구원과 생명의 책임이 우리에게로 넘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살고 계명을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가 이제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 가르침이 쉽고, 직접적이고, 오해의 여지가 없을수록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의 가르침을 주신 후에 나오는 신명기의 말씀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 또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이제 너희의 입과 마음에 쉽게, 가까이 주어졌으니, 그것을 실천할지 말지는 온전히 너희에게 달렸다”(신명 30, 14 참조)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의 반문입니다. “자, 여기 있다. 이제 너는 어쩔래?” 오늘 복음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 두 부분은 공통으로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1. 숨겨진 의도를 가진 율법 교사의 질문, 2. 예수님의 응답: (비유)+반문, 3. 율법 교사의 대답, 4. 예수님의 긍정적 대답과 명령(파견). 첫 번째 질문은 정답이 나와 있는 질문입니다. 율법 교사는 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그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반문하십니다. 그 반문에는 “너는 율법을 모르느냐? 왜 모두가 아는 것을 묻느냐?”라는 반격의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계명에 대한 율법 교사의 대답과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잘 알고 있네? 그럼 묻지 말고 그렇게 실천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답으로 반격은 완성됩니다. 깔끔한 판정승입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는 두 번째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정당함을, 첫 번째 질문이 의미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이라는 접속사는 뭔가 토를 달 때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에 토를 다는 것입니다. 아직 그것을 실천하기에는 그 가르침이 충분히 쉽거나 명확하지 못하다는 응답입니다. 사실 이것이 율법 학자들의 일이었습니다. 이에 답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몰랐지만 강도를 만난 이에게 가엾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나 사회적 통념,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그저 그 마음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선한 이방인을 사제나 레위인과 비교함으로써 윤리적 딜레마나 긴장을 일으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이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이웃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이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가장 기본으로 삼을 수 있는 기준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구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초에 이 사랑의 계명은 이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고, 율법 교사는 그의 답에서 자비를 베푼 이를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칭함으로써 예수님의 의도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두 번째 파견 말씀은 첫 번째의 것보다 부드럽게 느껴지며, 마치 제자를 파견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에 부담을 갖고 결단을 주저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실 듯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고만 해라. 그 이상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영화 <타짜>, 마태 5,37 참조) 주님 사랑의 계명은 강요가 아니라 모범으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무감이 아니라 마음의 감동과 응답으로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만이 가득하기를 성령께 기도합니다.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거짓과 중상모략으로 권력욕을 채우려 했던 디오트레페스

오래전 본당에서 사목할 때 주일학교 교사 한 명이 찾아와 “신부님, 제가 이번에 결혼하는데 신부님이 한번 만나주시겠어요?” 하고 요청했다. “왜?”라고 물어보니, 그는 “친척에게 소개 받은 배우자가 흠잡을 것은 없는데, 또 한편으로는 아주 마음이 끌리지도 않아서요”라고 답했다. “대학병원 의사인데 6개월째라 바쁘고 시간이 없어 병원에 찾아가서 몇 번 본 것이 다였어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마음이 조금 개운치가 않아요”라면서. 사목 경험이 많이 없던 나는 쉽게 조언을 내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더 깊이 상의해 보라고 다독여 보냈는데, 지금도 후회가 되는 일이다. 그 교사는 마지막 끈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결혼할 남편은 아무 직장도 없는 사기꾼이었다. 여자 쪽으로부터 돈만 갈취하려는 목적으로 벌써 여러 번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결혼 전 탄로가 나서 집안에 난리가 났지만, 결혼식을 안 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교회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지상의 공동체인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지닐 수밖에 없다. 교회는 지금도 구원을 향해 나가며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는 공동체이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크고 작은 인간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초대교회 때부터 성경을 잘못 해석해 신자들을 오류로 이끈 이단자들이 문제였다. 지역 교회의 책임자가 자신이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거나, 원로가 보낸 서간을 무시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요한의 세 번째 편지 안에는 특히 교회 내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디오트레페스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디오트레페스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정통적인 교회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신자들을 현혹해서 분열을 일으키고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공동체든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공동체를 위하는 척하지만, 구성원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권력욕이 강한 사람은 전통적이고 상식적인 규율조차도 무시하고 조직 내 파벌을 조성한다. 그러면 자연히 공동체는 분열되어 반목과 대치를 일삼는다. 권력이라고 하면 정치인들을 떠올리지만, 우리의 모든 삶 속에 권력욕이 깊이 작용한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 공동체, 특히 교회는 더 치명적이다. 권력 지향의 사목자는 교회와 신자들을 지배욕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치는 본질이고 생명과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한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기도했던 이유를 묵상해 보자.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8면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덕을 채집하라!

‘덕을 채집하라!’ 이 주제어가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이 말은 ‘덕을 쌓다’, ‘덕을 획득하다’, ‘덕을 닦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채집하다’란 표현은 ‘지혜로운 꿀벌’ 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덕(德)을 라틴어로 ‘비르투스’(virtus)라 하는데, 이는 선을 행하는 ‘힘’ 또는 ‘용기’를 뜻한다. ‘나쁜 습관’을 뜻하는 ‘악습’(vitio)의 상대어로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겠다. 수행 생활은 악습을 제거하고 덕을 심는 과정이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과 동시에 덕의 획득을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악습에 대한 승리는 그에 상응하는 덕의 획득을 가져온다. 카시아누스는 인간 안에 악습과 그 반대 덕이 동시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에 따라 악마나 그리스도 중 누구에게 주도권을 부여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는 것이다.(담화집 1,13-14) 지혜로운 꿀벌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안토니우스를 지혜로운 꿀벌에 비유하며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초기에 안토니우스도 자기 마을 근방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열정으로 가득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듣자마자 그는 지혜로운 꿀벌처럼(칠십인역 시편 6,8 참조) 그를 찾아갔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보고 덕의 길을 가기 위한 일종의 양식을 얻기 전에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안토니우스의 생애」 3,4) 꿀벌이 여러 꽃에서 꿀을 채집하듯 안토니우스는 다양한 사람에게서 덕을 채집하려고 노력했다. 어떤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서 각각의 고유한 덕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꿀벌이 꿀을 찾아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니듯 능동적으로 덕을 찾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시아누스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다. “누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한 사람에게 모든 덕의 모범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어떤 이는 인식의 꽃으로 장식되고, 또 어떤 이는 분별의 기술을 더 잘 갖추고 있으며, 어떤 이는 인내의 무게를 기초로 하고, 어떤 이는 겸손의 덕으로 승리하며, 어떤 이는 극기의 덕으로 승리합니다. 또 다른 이는 단순성의 은총으로 장식됩니다. 이 사람은 관대함, 저 사람은 자비나 철야, 또는 침묵이나 노동에 전념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능가합니다. 이 때문에 영적인 꿀을 채집하려는 수도승은 매우 지혜로운 벌처럼 어떤 덕에 더 나아간 사람들에게서 각각의 덕을 채취하여 자기 마음의 그릇에 정성껏 모아야 합니다. 상대에게 부족한 덕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그에게 있는 덕을 얻는 데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서 모든 덕을 얻으려 한다면 본받을 모델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규정집 5,4,1-2) 참으로 일리 있고 유익한 가르침이다. 우리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모든 덕을 갖추고 있을 수 없다. 사람마다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지혜로운 꿀벌처럼 타인의 장점을 찾아 본받으려 노력할 때 영성 생활이 더욱 진보하게 될 것이다. 덕을 위한 노력 사막 수도승들은 덕을 얻으려 분투했다. 압바 이시도루스는 그 이유를 말한다. “악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서로 갈라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빨리 악에서 돌아서서 덕을 추구해야 합니다. 덕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고 서로 일치시켜 줍니다.”(이시도루스 4) 악습이 여럿이듯 그 상대 덕도 여럿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덕을 얻으려 노력했다. 압바 포이멘의 다음 두 금언은 이를 잘 말해준다. “한 형제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사람이 오직 한 가지 행위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압바 요한 콜로부스가 말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모든 덕을 조금씩 갖고 싶습니다.’”(포이멘 46) “누가 집을 지으려고 준비할 때, 그는 집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한데 모읍니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재들을 수집하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온갖 덕을 조금씩 얻읍시다.”(포이멘 130) 압바 요한 콜로부스도 “사람은 모든 덕을 조금씩은 가져야 합니다”(요한 콜로부스 34)라고 말한다. 사막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화목하게 생활한 두 형제의 일화는 그들이 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인내와 겸손에서 경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한 형제의 눈에 다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 형제는 다른 형제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그 순간부터 그를 형제가 아니라 사부로 부르며 자기 원로로 대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6) 여기서 우리는 영적 경쟁에서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나 시기심이 아닌 지극한 겸손을 보게 된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질투와 분노, 교만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 사막 교부들은 덕을 닦는 데 있어서 교만과 허영심을 가장 큰 걸림돌로 보았다. 교만은 영혼이 소유한 모든 덕을 무자비하게 약탈한다. 카시아누스는 말한다. “교만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하고 심각합니까! 세상의 본성과 법칙까지도 바꿀 만큼 그렇듯 많은 정의와 덕, 그렇듯 위대한 신앙과 헌신이 한 번의 허영심으로 파괴되어, 그 모든 덕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규정집 11,10,3) 그리고 “교만의 악만큼 모든 덕을 제거하고 인간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을 빼앗아 발가벗기는 악습은 없습니다. 교만은 온몸에 널리 퍼진 전염성 있는 질병과 같아서 단지 한 지체만을 오염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온몸을 해치며, 이미 덕의 정상에 도달한 이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분쇄하려 합니다.”(규정집 12,3,1) 그래서 그들은 교만을 가장 경계했다. 어떤 원로는 덕행이 뛰어난 세속인이 있다는 계시를 받는다. 완덕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원로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느님은 종종 그들을 교만에서 보호하시기 위해 그들 못지않게 덕스러운 평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어떤 독 수도승은 천사를 통해 자신이 평신도 농사꾼보다 거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를 만나 그의 말에 감명을 받는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288-9) 모든 덕의 으뜸은 겸손이다. 겸손이야말로 사막 수도승들에게 일상생활의 본질이었다. 그들은 모든 덕에 나아가고 온갖 악습을 없애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규정집 6,6)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완덕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완덕에 오른 사람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며(마태 11,29 참조), 늘 한결같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온유와 겸손, 평정심은 바로 덕스러운 사람의 표지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회·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예언의 힘(묵시 11,1-6)

요한묵시록 10장에서 예언자 소명을 받은 요한은 11장에 들어서면서 지팡이 같은 하나의 잣대를 받는다. 그 잣대로 성전과 제단,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들의 수를 측량하라는 말씀을 요한은 듣는다. 에제키엘서(40~43장)에서도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빌론에 유배간 유다 민족을 위해 이미 사라졌으나 여전히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성전을 이상적으로 소개하는 이야기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에제키엘서와 요한묵시록 11장을 함께 열거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예언자적 소명을 짚어내곤 한다. 에제키엘이든 요한이든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의 보호로 굳건히 살아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예언자적 소명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란 형상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고 어렵고 힘든 시간,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위로와 희망이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11장은 에제키엘서의 성전 측량과 다르다. 측량의 수치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측량의 행위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분리를 만들어낸다. 요한은 성전을 측량함으로써 성전 바깥뜰, 그러니까 이민족들의 공간을 분리해낸다.(묵시 11,2) 성전 바깥뜰의 이민족은 폭력적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묵시 11,2) 폭력과 분리된 듯 서술되어야 할 거룩한 도성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다. 불행히도 거룩한 공간이 폭력의 공간이 된다. 성전과 성전 바깥뜰로 구분된 두 공간은 폭력으로 점철된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요한묵시록의 공간적 배치는 늘 이렇다. 천상이 지상 속에 스며들고 지상이 천상의 공간으로 확대되며, 선과 악이 하나의 공간 안에 뒤엉켜 각각의 의미를 더욱 섬세히 살펴보게 독자를 이끈다. 세상의 일이란 게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논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의 경험칙에서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지혜다. 요한묵시록은 거룩함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악의 세력 안으로 밀쳐 넣는다. 거룩함은 천상에서 홀로 빛나지 않는다. 성전은 홀로 거룩해서 세상을 등진 공간이 아니다. 세상 속, 그 어두움 속에서 성전은 반드시 세워지고 꾸며져야 한다. 이민족의 폭력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마흔두 달과 관련해서 요한묵시록은 1260일(묵시 12,6 참조)과 3년 그리고 반년(묵시 11,3; 12,14 참조)의 시간으로 다시 소개한다. 같은 시간을 다른 표현으로 곱씹는 이유와 관련해서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다니엘서 7장 25절이 암시하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임금(기원전 175~163년)의 박해 시절을 떠올린다. 역사의 한 사건은 그것이 폭력적이고 참담할수록 깊고 묵직한 슬픔과 상처를 남긴다. 기원전 2세기의 그 박해는 요한묵시록이 쓰인 기원후 1세기 말엽에까지 이어져 어렵고 힘든 모든 시절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마흔두 달은 거룩한 도성, 거룩한 백성이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의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상처의 시간은 절망과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 예언의 시간이어야 한다.(묵시 11,3)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로 상징화된 두 증인이 나타난다. 유다 전통에서 두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두 영웅, 그러니까 대사제 여호수아와 세상의 지도자 즈루빠벨을 암시한다.(즈카 4,1-14 참조)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아우르는 두 영웅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리는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묵시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종말론적 영웅으로 재해석되었다. 구원 상징하는 ‘두 증인’ 등장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 함께하신다는 위로 전달 강력한 하느님 권능 재확인 역사의 두 영웅은 구원과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났고 두 증인을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은 폭력의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을 터. 좌절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두 증인을 통해 희망을 견지하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을 소개하는 서사는 역사 속 하느님의 권능을 배경으로 더욱 힘찬 형식을 빌어 진행된다. 희망은 분명하게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 마냥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단단하고 선명하다. 먼저 두 증인 입에서 나오는 불이다.(묵시 11,5 참조) 원수를 삼킬 정도로 강력한 불은 하느님의 분노를 가리키는 전형적 은유다.(2열왕 1,10 이하; 루카 9,54 참조)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모든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전통적 믿음이 불이라는 형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두 증인은 하늘을 닫는 권한도 지닌다. 하늘을 닫는 권능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참조한 듯하다.(1열왕 17,1)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힘찬 권능에 대한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그분을 향한 믿음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루카 4,25; 야고 5,17 참조) 물을 핏빛으로 만드는 모세의 이야기도 첨가된다.(탈출 7,17 참조) 모세는 그야말로 민족의 영웅이고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셨다. 두 증인이 모세처럼 꾸며지는 건,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리라.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11장 6절 후반부에 이르러 절정에 치닫는다.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닌, 특정 민족이나 공간에 치우치지 않는, 그리하여 온 세상 위로 권능을 떨치는 두 증인의 모습은 경이롭다. 그 누구도 대적 못 할 두 증인이기에 그들이 존재하는 한, 예언의 힘은 맹위를 떨칠 것이다. 그런데, 두 증인은 자루 옷을 입고 있었다.(묵시 11,3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 옷은 두 증인을 감싸고 있었다. 자루 옷은 고통과 회개의 은유로 사용된다.(이사 22,12; 예레 4,8; 마태 11,21) 요한묵시록은 천상의 기쁨, 영광 혹은 권능을 드러낼 때 ‘흰 겉옷’을 사용한다. 자루 옷은 아니다. 두 증인의 옷차림에서 요한묵시록 서사의 긴장이 진하게 느껴진다. 예언자의 운명은 그리 영광스럽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것. 그들은 고통과 회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인가. 11장 7절에 다다를 때, 두 증인은 죽음을 맞닥뜨리고 만다. 그들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밝혀야 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 34,9 참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소유하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더해가면 갈수록, 자신의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행복, 하느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 행복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하십니다. 곧 일흔두 명의 제자를 ‘주님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견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3)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롯이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시선을 두고, 하느님께만 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한 제자들은 그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라고 인사를 건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8)고도 말씀하십니다. 행복의 기초가 되는 평화의 인사와 음식을 서로 나누며, 한 식탁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걸어갈 이 모든 여정을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간의 체험을 말씀드리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 기뻐해야 할 일은 그들이 이룬 놀라운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20 참조) 이렇게 일흔두 제자는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인생살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에 대한 체험을 예수님께 보고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히 여길만한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의 특별한 하느님 체험은 이렇습니다. 사제 수품을 준비하며 가진 30일 피정이 그 첫 번째입니다. 한 달이라는 긴 여정을, 그것도 성 이냐시오 영성에 따라 처음 걷게 되는 피정이었기에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피정을 마치며, 제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자리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본당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의 사제 생활 가운데의 체험이, 체험을 더욱 키워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또한 하느님의 체험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연수 봉사자들과 연수를 준비하면서, 연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수생들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연수 여정 안에서 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성숙하고 미성장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치유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손길을 펼쳐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손길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간음, 표징의 왜곡과 인격적 계약의 파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간음은 구약을 ‘능가하는 의로움’(마태 5,20)이다. 몸과 마음 모두에 기초를 둔 인간학에서 간음을 바라본 복음적 에토스다. 그리고 간음을 명백히 ‘몸의 죄’라 한 것은 참된 몸의 결합이 아니기에 그렇다. 표징을 왜곡하고 인격적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배우자와 계약으로 갖게 된 ‘너에게만’ 하는 배타적 권리를 침해했고, ‘하나’, ‘한 몸’을 말하는 표징을 허위로 만들었고, 상호 조건을 지닌 인격적 관계로 맺어진 계약을 크게 훼손한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은 첫 번째로 혼인의 순수한 ‘내적 진리’, 곧 ‘한 몸’을 허위로 만드는 ‘몸의 죄’다. 두 번째로 계약에 의한 배타적 관계로 사랑에서 나온 서약이 몸의 표현을 통해 이뤄지는 선(善)에서 정반대인 탈선, 윤리악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한 몸을 이루는 일치가 혼인 서약의 정상적 표징이라면, 인간의 몸은 그 본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영의 표현이 되고 창조의 신비에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인격체들의 친교 가운데 실존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32과 1항)에 더 깊이 다가갔다. 복음의 에토스는 ‘몸의 복음’을 살라는 초대이고, 창조의 신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자연적 갈망이 초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돼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에토스는 구성상 이미 완성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실현했고, 그래서 과거도 현재도 영원히 그분은 살아 있고 인격적인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말씀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긴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과 죄의 관계다. 예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보호하면서도 간음과 죄를 동일시한다.(요한 8,7-11 참조) 율법의 조항을 들어 여인을 고발하러 온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이 아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며 당신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어디에 호소하셨는가? 각자의 양심이다. 바로 한처음 상태의 양심에 호소하신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 회복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죄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땅인 인간의 마음에 말한다. 마음이 구원받는 것, 그것이 회복이다. 즉 원순수를 회복하기 위한 내적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과 악에 대한 식별은 어떤 법규범보다 더 바르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에토스를 향하는 길은 창조의 에토스, 즉 사람이 누구인지 재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약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에토스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시간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첫 질문, “무엇을 찾고 있느냐?”에는 인간의 길이 포함되어 있기에 삶의 본질을 묻고 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을 찾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다.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 이는 죽어가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러 ‘무엇’은 ‘누구’로 바뀐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받은 곳은 그분의 빈 무덤 앞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간 것은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그리움, 즉 그분이었던 것이다. 참된 신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찾는 인간’에서 ‘누구를 찾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 내 안에 그분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것이요, 발견한 그 참된 보화를 사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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