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②

열 가지 재앙과 과월절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가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마음은 완고하기만 합니다. 파라오의 완고함은 재앙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 열 차례에 걸친 재앙을 통해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고(탈출 7,5.17; 8,6), 온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십니다.(탈출 9,16)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을 구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탈출 10,2; 11,7) 거듭되는 재앙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던 파라오는 이집트의 맏배를 치신 열 번째 재앙을 맞게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양의 피로 표시를 합니다. 이윽고 열 번째 재앙이 닥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맏배의 생명을 보존하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권능에 굴복하게 된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합니다.(탈출 12,31) 과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했던 하느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중요한 종교 축제입니다.(탈출 12,1-14.21-28.43-51) 종살이의 억압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구원 체험을 기념하는 과월절은 ‘건너감’을 뜻하는 파스카라 불리기도 합니다. 구약의 과월절은 신약에 이르러 하느님의 인간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십자가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감)를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긴 여정을 가게 됩니다. 갈대 바다와 만나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바다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병거부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이 변한 이집트 파라오가 추격해온 것입니다.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탈출 14,13) 하느님께서는 바닷물을 밀어내어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갈대 바다를 건너가게 됩니다.(탈출 14,15-31)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다시금 체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벅찬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탈출 15장) 갈대 바다 너머 시나이 반도로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막과 같이 척박한 광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마라(탈출 15,23-25)와 르비딤(탈출 17,6)에서는 백성들이 물을 마시게 해 주시고, 신 광야에서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 주십니다.(탈출 16,13) 특히 하느님께서 매일 내려주신 만나는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는데(탈출 16,31) 약속의 땅에 이를 때까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양식이 됩니다.(탈출 16,35 참조; 시편 78,24-25; 105,40) 이스라엘 백성은 힘든 광야 여정 가운데 하느님을 더 절실하게 찾았고,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척박한 광야가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교회상식 더하기] 보목(寶木)을 다 모으면 배 한 척 분량이 된다?

‘보목(寶木)’이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실 때 사용됐다고 전해지는 십자가 나무를 일컫는 말로 ‘성 십자가’라고도 합니다. 보목은 세계 여러 성당에 안치돼있는데요. 세계 각지의 보목을 다 모으면 커다란 배 한 척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나무가 모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짜 보목이 많다는 말인데요. 정말일까요? 전설에 따르면 보목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성인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골고타 언덕에서 여러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그중 한 십자가에서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 십자가가 보목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목은 조각으로 나뉘어 분배됐는데요. 그러다 보니 보목 조각을 안치하고 있는 성당의 수가 점차 많아졌습니다. 이 점을 들어 장 칼뱅은 「성유물에 관한 논고」에서 보목 조각을 다 모으면 배 한 척 분량이 나올 것이라 주장합니다. 성유물 공경을 비판하면서 그 양을 볼 때 상당수가 가짜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칼뱅만이 아니라 당시 개신교 신학자나 계몽주의자들이 보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주장에 반대되는 연구가 발표됐습니다. 1870년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샤를 로제 드 플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도구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요. 그는 당시 알려진 보목 조각들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그 부피를 계산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크기를 가정해 계산한 결과, 확인된 보목 조각들의 부피를 모두 합쳐도 십자가 전체의 약 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가 보목의 진위까지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양이 넘쳐서 가짜가 많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교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한 희생 제사를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고 “십자가 이외에 하늘에 오르는 다른 사다리는 없다”고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항) 우리가 보목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목을 바라보지만, 실은 그를 통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목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광주대교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대성전(교황 직속)과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일은 꼭 보목 앞이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9월 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 성당이나 집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중)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20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오디세이아」: 환대

낯선 여행객을 집안에 받아들이고 돌보는 환대의 문화는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교통수단이나 안전망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여행은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쉬어 갈 수 있는 방법은 전적으로 집주인의 친절함에 달려있었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지은 「오디세이아」는 인류 최고의 영웅 서사시로 여겨진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10년 동안의 여정과 모험을 그리고 있다. 물리적 여정을 통하여 내적 성장으로 나아가는 휴먼 스토리다. 그리고 환대라는 주제가 그러한 과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환대는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일단 환영한다. 그리고 자리를 권하고 음료와 음식을 제공하며,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다. 오디세우스의 귀향 여정·모험… 작품 이루는 핵심 주제 ‘환대’ 현존하시는 하느님 맞이하듯 낯선 이 환영하며 극진히 대접 서로의 존엄·정체성 회복하고 신앙 안에 함께 성장할 수 있어 제3권에서 텔레마쿠스는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생사를 알기 위해 필로스 섬의 현자 네스토르왕을 방문한다. 텔레마쿠스 일행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이들을 보자 “주위로 몰려들어 손을 맞잡으며 왕 앞으로 인도했다.” 네스토르왕의 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맞이한 뒤, 부드러운 양털 가죽 위에 그들을 앉혔다.” 그런 다음 “고기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황금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충분히 먹고 마신 후에 네스토르왕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손님들께서 식사를 마치셨으니, 그분들이 누구인지 여쭈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 이방인 여러분, 여러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매우 흥미로운 점은 환대의 순서이다. 어떤 낯선 이가 찾아왔을 때, 일반적으로 제일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환대는 손님의 정체성을 알아내기 전에, 먼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대접한다. 그러고 나서 손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사람이 해를 끼칠지 혹은 친구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손님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감을 보여준다. 즉, 손님의 정체성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서 돌봄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설사 손님이 주인의 적 혹은 원수일지라도, 그 전에 손님은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보호받아야 한다. 제우스 신은 손님들의 보호자로서, 환대는 신성한 의무이다. 제8권에서 알키노오스왕은 “손님을 자신의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손님은 가족과도 같은 신성한 관계로 여겨진다. 그리스도교에서도 환대는 그저 예의를 지키거나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핵심 가치이다. 환대란 소외당한 사람, 가난한 사람, 낯선 사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을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존엄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실천이다. 환대는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관계성 안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받아들이고 환영한다. 창조, 용서, 계약, 구원을 통하여 죄인과 이방인, 길을 잃은 이들을 사랑 안으로 받아들이신다. 동시에 인간이 되신 강생을 통하여 인간의 환대를 기대하신다. 강생을 통하여 인간의 취약함과 의존성이라는 조건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한 아기로, 나그네로, 손님으로, 마침내 죄인으로 고난받는 이로 우리에게 오신다. 「오디세이아」에서 환대는 문명, 사회 그리고 한 가정의 도덕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손님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베푸는 환대는 주인의 윤리적 깊이를 드러낸다. 오디세우스와 여러 등장인물은 자신들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숨긴 채 자주 손님으로 나타난다. 에우마이오스는 가난한 모습으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환대한다. 반면 폴리페모스는 환대의 의례를 거부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들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특히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거지 노인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자신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주인공 가족의 환대를 악용하고 있던 구혼자들에게 음식을 구걸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발로 차이고 비웃음을 당하지만, 분노를 참아낸다. 넘치도록 환대를 받고 있던 그들의 오만함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마므레의 참나무 아래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누구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평범한 나그네인 줄 알고, 이 세 명의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한다. 이들은 바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긴 천사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환대를 받고 나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감추어진 정체성과 환대에 대해 언급한다.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를 가르는 이야기다.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고 말한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환대를 베푼 것과 같다.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나그네 안에 현존하신다. 제14권에서 에우마이오스도 제우스 신에 대한 신앙심에 기반하여 나그네를 대접한다. 오디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한 자신을 극진히 대접해 주는 에우마이오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나그네여, 설령 이곳에 당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오. 모든 나그네와 거지는 제우스에게서 오는 이들이기 때문이오.” 에우마이오스가 보여준 환대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가난한 사람이 베푸는 친절이다. 돼지치기(swineherd)로 일하고 있는 그는 거지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환대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 아낌없이 베풀어 준다. 고급 침대는 아니지만, 자신이 사용한 가죽과 나뭇잎을 모아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어 준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제공한다. 즉, 환대는 단지 물질적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나 부유한 이들의 과시적인 환대와 달리, 돼지치기의 환대는 손님에 대한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부자들이 풍족한 재산 중에서 큰돈을 헌금하는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전 재산 렙톤 두 닢이 훨씬 더 크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더욱이 에우마이오스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나서, 손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정서적 교감으로까지 나아간다. 손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주인 오디세우스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다. 이름 모를 거지를 환대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인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환대는 정서적 친밀감을 통하여 완성된다. 환대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환대를 통하여 나그네는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정체성을 공동체 안에서 회복하고, 주인은 집안에서의 도덕적 품격을 더욱 높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환대는 나그네와 주인 모두를 성장시킨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 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24주일

예전 신학생 때 만난 한 아이 생각이 납니다. 이 아이는 마치 껌딱지처럼 부모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 나중에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아?”라고 묻자, 자기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어떨까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배우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자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친절하고 늘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시댁 식구들도 자기를 한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당연히 행복한 삶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함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충만함과 완전함의 숫자 ‘7’을 쓴 것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77번까지 용서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예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끌려옵니다. 한 탈렌트를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한다면, 만 탈렌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일일 노동자가 자그마치 16만 년 이상 일해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저 같으면 “그래, 꼭 갚아라”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유예도 아니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탕감해 줍니다. 이렇게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종은 문을 나서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지요. 그의 동료가 똑같이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 18,29)라고 말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감옥에 가둡니다. 같은 종의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갑자기 임금, 심판관의 모습을 취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로 계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비를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정의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저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수 없어.”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께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속 계산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자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받은 자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첫 번째 종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망하게 된 것은 용서받은 뒤의 태도입니다. 결국 심각하게 경고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끝까지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잡고 있는 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글 _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발행일 2026-09-13 제3507호 18면

[말씀묵상] 연중 제23주일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형제적 교정’입니다. 오늘날은 충고나 조언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는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 앞에서 쉽게 두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난하고 험담하거나 아예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를 단죄하기보다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바라십니다. 사람을 포기하기는 의외로 쉽습니다. 많은 경우 ‘괜히 말했다가 관계만 더 나빠질 텐데’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침묵하거나, ‘어쩔 수 없어’ 하며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침묵이 사랑이라고 여기지만, 기다림에서 비롯된 침묵은 사랑일 수 있어도 두려움과 무관심에서 나온 침묵은 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면 형제를 잃고 맙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해, 악한 길을 가는 이에게 그 잘못을 일러 주어 생명의 길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 책임을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바로잡는 일도 바로 이러한 사랑의 책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때로 충고하고 권고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과 함께 만나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알리며,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그를 망신 주거나 처벌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그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심지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도 그를 단죄하고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방인 가나안 여인과 세리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때 우리는 그 형제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얻는 것”(마태 18,15 참조)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 못지않게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바로 ‘듣는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들은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삶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는 악인이 경고의 말을 들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화답송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라”(시편 95,7-8 참조)고 노래합니다. 사랑은 무딘 마음에서 자라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형제를 향한 사랑도 싹틉니다. 복음에서 ‘듣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형제를 바로잡는 일이 일방적인 판단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듣고 마음을 여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형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시는(마태 18,14 참조) 사랑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허물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비로소 잘못한 형제를 품을 수 있습니다. 형제를 얻으려는 사랑은 먼저 우리를 품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무뎌지면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잘못한 형제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잘못한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그의 회개와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8면

[본당에서 온 편지 - 오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 탈출기①

이번 편지부터 탈출기의 말씀을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탈출기는 창세기와 더불어 하느님 구원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탈출기는 왜 구약성경의 복음서라 불릴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구원하심으로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되고, 약속의 땅을 향한 40년 광야 여정 가운데 하느님의 돌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나이산에 이르러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이처럼 탈출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했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복음서라 불립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체험 야곱 집안(이스라엘)은 이집트 이주 후 자손이 번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혹독한 시련이 찾아옵니다. 과거 요셉의 업적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로운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핍박하였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으로 삼아 강제 노역을 시킵니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탈출 1,14) 파라오는 심지어 이스라엘 집안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강에 던져 죽이도록 합니다. 파라오의 핍박이 극심하던 때 레위 가문에 한 아들이 태어납니다. 모세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갓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왕골 상자에 넣어 강기슭에 숨깁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 의해 발견되어 그녀의 양자가 되고 왕궁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성인이 된 모세는 어느 날 노역장에서 이스라엘 사람을 채찍질하는 이집트 감독관을 해치게 되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파라오의 위협을 피해 미디안 지방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모세의 소명(탈출 3-4장; 6,2-7,7)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새로운 파라오의 핍박으로 종살이를 하며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고역에 짓눌려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도움을 간절히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를 굽어 살펴보시고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십니다.(탈출 2,23-25 참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구하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여 부르십니다. 당시 모세는 미디안 지역에서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호렙산(시나이산)에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10)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약속의 땅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는 사명을 부여하십니다.(탈출 6,8 참조) 그런데 모세는 주저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탈출 3,11; 4,10.13 참조) 그러한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친히 함께하실 것임을 약속하시고(탈출 3,12 참조), 아론을 협력자로 주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집트로 돌아가게 됩니다. 글 _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대교구 구미 도량본당 주임)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악습의 극복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참사랑의 질서

현대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연결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영적, 윤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며 느끼는 극심한 박탈감과 질투, 익명성 뒤에 숨어 특정 대상을 향해 쏟아내는 무차별적인 증오와 비난, 그리고 모든 가치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무기력증과 우울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타인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 영적인 가치보다 감각적 쾌락에 침잠하며, 나와 의견이 다른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과 악습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참사랑의 질서(ordo caritatis)’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이기주의와 맹목적인 자기희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정교한 지혜의 체계다. 미움·나태·질투·불화·스캔들 등 악습… 참행복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질서’ 세우고 참사랑 실천해야 일치 이룰 수 있어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 질서 토마스는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 이 세 가지 사랑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하면서도 본질적으로 하나의 덕임을 강조한다.(II-II,23,5; 25,1) 참사랑은 하느님을 참행복의 원리로 사랑하고, 이웃은 그 행복에 함께 참여하는 동료로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사랑은 흔히 비난받는 이기심이 아니라, 하느님과 결합된 자신의 영혼을 긍정하고 보존하려는 우정의 성격도 지닌다. 토마스는 자신과 하나임이 타인과 하나가 됨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보았기에, 올바른 자기 긍정이 곧 이웃 사랑의 원초적인 본보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웃 사랑 역시 상대의 매력이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참행복을 나눌 동료이자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근거 위에서 성립한다.(II-II,25,12) 그런데 참사랑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부모나 가족같이 더 가까운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며, 점차 모든 이웃으로 사랑의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 이런 유기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인간은 비로소 사랑의 가장 어려운 단계인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나를 해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는 불가능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토마스에게 이는 참사랑이 지닌 신적 탁월함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는 원수를 ‘원수로서’ 사랑하는 것, 즉 그가 지닌 악의와 적대감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악한 일이라고 엄격히 선을 긋는다. 그러나 원수가 비록 나에게 해를 끼치는 자일지라도, 그가 여전히 인간이며 하느님의 참행복으로 부름받은 존재라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II-II,25,8) 감정적으로 친밀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에 부합하는 선한 일이지만, 오직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훨씬 더 강인한 참사랑의 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원수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결단의 산물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더 강한 참사랑의 힘을 증명하기에 더 뛰어난 탁월함을 지닌다.(II-II,27,7) 그러나 이러한 참사랑의 고결한 운동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다양한 악습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참사랑을 거스르는 악습들 참사랑의 내적·외적 효과를 거스르는 악습들은 인간의 참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토마스는 미움, 나태, 질투, 불화, 걸림돌과 같은 다양한 악습을 통해 사랑의 결핍이 가져오는 실존적 비극을 분석한다. ‘미움(odium)’은 최고선인 하느님과 이웃의 존재 자체를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무질서이며, 이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거부하기에 가장 중대한 죄가 된다.(II-II,34,2) ‘나태(acedia)’는 신적인 선에 대해 슬픔이나 권태를 느끼는 행위를 말한다.(II-II,35,3) 이는 현대인의 번아웃이나 영적 무기력과 맞닿아 있는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며 오히려 그 선함을 짐으로 여겨 슬퍼하는 치명적인 게으름이다. ‘질투(invidia)’는 타인의 선을 자신의 열등함이나 손해로 여겨 슬퍼하는 이기적 성향으로, 토마스는 질투가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고 성공을 괴로워하게 만듦으로써 인간관계를 파괴한다고 경고한다.(II-II,36,1) 이는 SNS 등 현대적 공간에서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불화(discordia)’는 마땅히 동의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의 선에 의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지의 분열이다.(II-II,37,1) 선을 온전하게 식별하지 못하는 인간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로 인한 불화가 있게 되지만, 동일한 목표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스캔들(scandalum)’은 타인을 죄와 영적 몰락으로 이끄는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스는 스캔들을 올바르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써 타인이 영적으로 넘어지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로 규정한다.(II-II,43,1) 이는 오늘날 영향력을 지닌 자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통찰이 된다. 현대 사회의 병폐로 지적된 다양한 악습들은 결국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세속적인 선에 집착할 때 발생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악습들이 단순히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완성인 참행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임을 밝혀냈다. 단적으로 말해,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질투와 증오의 시대에도 참행복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한편으로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선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회복할 때만 얻을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자만이 타인에 대한 시기와 미움을 멈추고 영적인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다스려질 수 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올바로 사랑하며, 그 사랑의 넘침으로 이웃과 원수까지도 품는 것이 그 길이다.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을 향해 우리의 의지를 정렬할 때, 인간의 내면은 비로소 질서 잡힌 평온함에 도달하며 타인과의 진정한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시복시성에 가경자 단계는 없다?

교회사에 관심을 둔 분이라면 ‘가경자(可敬者)’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부르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시복시성 절차에는 ‘가경자가 되는 별도의 단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가경자는 ‘공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 베네라빌리스(venerabili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과거에는 시복 안건이 교황청에 접수된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었지만, 이는 현재의 공식 절차와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시복 안건이 교황청에 올라갔다고 해서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도,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132위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도 교황청 시성부에 시복 안건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경자 호칭의 사용이 변화한 것은 1913년 성 비오 10세 교황이 가경자 칭호 사용에 관한 규정을 변경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에는 가경자라고 부르는 관행 때문에 신자들이 마치 교회가 그 하느님의 종의 성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경을 허락한 것처럼 오해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성 비오 10세 교황은 가경자 칭호에 관한 교령을 통해 “사도좌가 영웅적 성덕 또는 순교에 관한 교령을 발표한 이후가 아니면 하느님의 종들에게 가경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즉, 하느님의 종이 교황청에 시복 안건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가경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적 성덕이나 순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뒤에야 가경자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83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을 통해 시복시성 절차를 전면 개편했습니다. 이때 과거처럼 ‘가경자가 되는 절차’는 사라지고, 영웅적 성덕 또는 순교를 인정하는 교령 발표 여부가 가경자 칭호 사용의 기준이 됐습니다. 예를 들어 순교자의 경우 순교 사실이 인정되면 시복되기 때문에 가경자라고 불릴 별도의 과정 없이 바로 복자가 됩니다. 다만 순교하지 않고 영웅적 성덕으로 시복 절차를 밟는 ‘증거자’의 경우에는 여전히 가경자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영웅적 성덕이 인정되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도 2016년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교령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하느님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시복재판을 통해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가경자는 기적 심사를 통해 복자로 선포됩니다. 가경자의 전구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의학적·신학적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인정되면 시복이 이뤄집니다. 올해 3월 26일 교황청 시성부 의학자문위원회 심사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전구로 이뤄진 치유 사례가 기적적 치유임이 인정됐습니다. 이는 기적 심사의 첫 단계를 통과한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성인과 복자들은 모두 순교자였기 때문에 한국교회 시복시성 역사에서 교황청의 기적 심사 통과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은 심사들도 무사히 통과돼 최양업 신부님을 ‘복자’로 부를 수 있는 날이 빨리 다가오길 기도해 봅니다.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0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인간은 누구나 믿으면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믿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 커피를 마신다. 만약 그 커피에 독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면, 마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믿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만약에 ‘이스라엘에 가는 비행기에 어떤 테러범이 시한폭탄을 그 비행기에 장착해 놓았다’라고 믿는다면, 그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서 살아간다. 약이나 의사를 불신하면 할수록 약의 효과나 치유는 더뎌지지만, 약이나 의사를 신뢰하면 할수록 약의 효과나 치유의 속도는 빨라진다. 우리가 사람이나 인간에 대해 믿으면 믿을수록 점차 그 대상에게 가까워지지만, 불신하면 할수록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 이렇게 믿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의 삶에 깊숙한 바탕을 이루며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의 기본행위이며(W.카스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신앙」 참조), 사람은 누구나 믿음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이 말에 어떤 이들은 ‘실제로 세상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존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도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믿음 없이도 살 수 있다’라며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 삶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의 지평을 넓혀서 잘 살펴보면 비신자들도, 공산주의자들도 실제로는 저마다의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비신자들은 ‘믿음이란 허황된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행위’라는 점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비신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도 결국은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믿음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으며, 결국 그들의 강한 신앙 거부가 그들도 믿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비신자가 존재하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니체의 ‘신의 죽음’ 선언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는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점차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우리 신앙인들이 깊이 각성하고 반성해야 할 점이 많다. 이 모든 것은 신앙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삶의 행동과 실천으로 세상에 증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이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이 믿는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믿게 되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말만의 신앙에서 벗어나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삶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증거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20면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아주 힘든 고백을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환영이 아닌 조롱과 모욕이었습니다.”(예레 20,7-8 참조) 그는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침묵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대로 오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과 주님이 이끄시는 길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내 생각보다 하느님의 생각을 선택할 수 있는가?”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말씀을 시대 앞에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언제나 환영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말인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뒤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인간적으로 보면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놀라울 정도로 강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마태 16,23) 베드로는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메시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애정이 하느님의 뜻보다 앞선 것입니다. 이 지점이 한국교회가 넘어야 할 커다란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사명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고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자녀가 가야 할 길을 대신 정해 주기도 합니다. 자녀 역시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기 생각을 교회의 뜻처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여라.”(마태 16,23 참조)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아주 정확한 해답을 줍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분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감정적인 열심만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요구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로칼리아」(사막 교부들의 내적 고요 생활 발췌 글)의 ‘마음지킴(깨어있음)’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마음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들어옵니다. 문제는 그 생각에 동의해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분노와 욕심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내가 하나가 되거나,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의 자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지킴은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세상의 생각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생각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지킴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내 뜻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내 뜻을 하느님의 뜻 안에 봉헌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듣게 해주십시오.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세요.” 그때 조금씩 알게 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때로 어려워도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하며, 겸손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8-30 제3505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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