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과 지혜] 악습과 싸워라!(상)

악습(악한 생각)과의 싸움은 관상 생활과 더불어 우리 영성 생활의 또 다른 축인 수행 생활의 핵심 내용이다. 이 싸움은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여러 악습을 제거하고 거기에 상응한 덕을 심기 위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치열한 투쟁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악령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주요 악한 생각을 여덟 가지로 제시했다. 곧 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아케디아, 헛된 영광, 교만이다.(프락티코스 6) 이 여덟 가지 악한 생각은 요한 카시아누스에 의해 여덟 가지 악습으로 서방교회에 소개되어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에 의해 ‘칠죄종’으로 정착됐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서는 영혼의 질병인 각 악습과의 싸움에 대한 수도 교부의 가르침을 살펴볼 것이다. 경험에서 나온 그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음을 정화하고 다스리는 데 매우 유익할 것이다. 육체의 양면성 먼저 육체에 대한 교부들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싸움의 참된 목적과 올바른 방향을 놓치지 않게 된다. 교부들은 인간 육체를 원수이자 친구로 이해했다. 즉 원죄로 인해 손상되었기에 원수이고,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영혼과 함께 성화되고 변모되어 장차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았기에 친구라는 것이다. 그들은 욕정 혹은 악습을 하느님이 우리 육체나 영혼에 심어주신 자연적 충동(본성)의 왜곡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악습과의 싸움은 본성의 억압이 아닌 변형이며, 근절이 아닌 교육이라는 것이다. 요한 클리마쿠스의 다음 말은 이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영혼의 어떤 욕정이 본성의 열매라고 주장하는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본성적 속성들을 사악한 욕정들로 바꿔 놓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본성에 따른 생식능력의 경우가 그러한데, 우리는 그것을 음욕을 위해 남용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분노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뱀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웃에게 쏟아냅니다. 경쟁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덕을 겨루다가 시기심에 빠집니다. … 식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방탕을 위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천국의 사다리 26,167) 첫 번째 악습, 탐식 사막 교부들은 ‘배는 인간의 온갖 파멸의 원인’이라 생각하여 위(胃)를 정복한 사람은 정결을 향한 도상에서 장족의 진보를 한다고 말한다. 탐식은 우리를 폭식과 미식으로 이끌며 우리 안에 잠재된 선천적 욕정들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한다. 탐식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욕정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욕정들의 극복 여부가 탐식의 극복 여부에 달려 있을 정도로 탐식을 극복하기란 좀체 쉽지 않다. 에바그리우스는 우리 영혼이 여러 다양한 음식을 갈망할 때, 빵과 물의 양을 줄이라고 권고한다.(프락티코스 16) 빵과 물은 하루 한 끼 식사했던 사막 수도승의 주식이었다. 사막의 한 원로는 말했다. “하루 한 끼 식사하면 수도승이다. 하루 두 끼 식사하면 육적인 인간이다. 하루 세 끼 식사하면 짐승이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09) 하루 세 끼에 간식도 곁들이는 우리에게 에바그리우스의 처방전은 비현실적이고 무익하게 들릴 것이다. 사막에서 점차 다음과 같은 극기의 원칙이 정착됐다. “배불리 먹으려는 욕구가 아니라 자기 체력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양을 취하는 것이다.”(담화집 2,22,1) 카시아누스는 폭식으로 이끄는 온갖 남용을 피하고 무분별한 단식 연장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매일 합리적이고 일정하게 식사하는 것이 며칠 동안 단식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지나친 배고픔은 정신의 항구성을 약화할 뿐만 아니라 육체의 피로로 인해 우리 기도의 힘과 활력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규정집 5,9) 탐식의 치료제는 절제와 극기지만, 여기에도 분별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악습, 음욕 탐식에 굴복한 영혼은 음욕에 넘겨진다. 이 둘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클리마쿠스는 “자기 배를 채우면서도 음욕의 영을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은 불에 기름을 부으면서 불을 끄려는 자와 같습니다”(천국의 사다리 14,95)라고 말한다. 카시아누스의 다음 말은 음욕에 맞선 싸움이 얼마나 힘든지 잘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싸움은 음욕의 영에 맞선 싸움입니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다른 모든 싸움보다 더 끈질기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싸움입니다. … 다른 모든 악습을 극복하기 전에는 이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규정집 6,1) 그러면서 그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천국에 대한 갈망’에 기초한 육체적이고 도덕적인 이중의 치료제를 제시한다.(규정집 6,1)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영적인 불로 육체의 불을 끄면서 육체적 사랑을 신적 사랑으로 몰아내는 사람은 순결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5,98) 정결을 위한 음욕과의 싸움은 육체의 성적 욕망을 통제하면서 시작되며, 그것들의 변형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결은 육체와 자연적 욕망의 억압이 아닌 변형을 목표로 하며, 인간적 사랑을 신적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기혼자건 미혼자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성적으로 변형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악습, 탐욕 탐욕은 이 세상 재물과 물질에 대한 마음의 집착이다.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은 긴 노년과 손노동에 있어서의 무능력, 미래의 굶주림과 질병, 궁핍의 고통 그리고 남들에게 생필품을 받는 데 따르는 수치심을 떠오르게 한다”(프락티코스 9)고 말한다. 한 마디로 탐욕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걱정에서 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걱정을 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33-34) 이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탐욕은 하느님보다는 재물을 믿고, 하느님의 섭리와 보호를 믿지 못하기에 우상숭배이자 불신앙의 자손과도 같다. 클리마쿠스는 “탐욕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그것은 미움, 도둑질과 시기, 불화와 적개심, 격분과 복수, 잔혹한 행동과 살인을 유발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7,114)라고 말한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은 탐욕에서 비롯된다. 더 가지려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는 것이다. 우리가 탐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탐욕의 치료법은 가난이다. 가난은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고 세상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적 가난의 핵심이다. 천상의 것을 맛본 사람만이 이 지상의 것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다(묵시 6,12-17)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묵시문학의 전형적 장면들이 등장한다. 큰 지진과 천체의 혼돈이 그러하다. 대개 이단들은 이러한 혼돈을 신의 심판이나 징벌로 이해하곤 한다. 더욱이 어느 나라의 지진이나 해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현실의 사건들을 묵시록의 혼돈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세상 종말의 문학적 수사를 실제 사건과 엮어내어 해석하는 일은 끔찍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빌미 삼아 묵시문학적 표현에 대한 설익은 해석을 내놓는 일은 폭력 그 자체다. 땅의 지진과 같은 묵시문학적 표현들은 구약성경 안에서도 발견된다.(아모 8,8; 9,5; 요엘 2,10) 후기 유다이즘, 그러니까 기원후 1~2세기의 묵시문학 작품들 안에서도 지진에 대한 서술은 흔하다.(2바룩 70,8)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도 묵시문학의 전형적 은유다.(이사 50,3; 요엘 3,4) 당시 사람들은 끔찍한 사건이나 자연재해를 종말의 상징으로 해석했고, 그 재해가 두려울수록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외침은 뚜렷했다. 이를테면, 묵시문학의 재앙적 서술은 암울한 현실 안에 위엄하신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신앙을 내포한다. 공포스러운 장면은 실은 하느님을 향한 한 줄기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고 산과 섬 또한 제자리를 잃어버리는 장면 역시 묵시문학적 표현이다.(느헤 1,5; 예레 4,24) 묵시문학이 서술하는 천체의 혼돈이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직접적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라면, 하늘이 사라지고 땅 위의 것들이 제자리를 잃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국한된 관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나, 하느님의 개입이 인간 세상이 원하는 행복, 기쁨, 성공 등의 장면들로 묘사되길 원하는 이들에겐 천체의 혼돈은 불편하다. 만약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라면,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는 장면에선 설레야 한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세상은 온통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창세기 1장 6절에 하느님은 물을 갈라놓아 우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창공을 만드시는데, 창공이라고 번역된 ‘라키아’(רָקִיעַ)는 ‘펼쳐진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다. 두루마리 펼치듯 생겨난 것이 창공, 곧 하늘이다. 프랑스 리옹의 성서신학자 프랑수아 마르탱은, 하늘이 두루마리 말리듯 사라져 버리는 것은 하느님께서 두루마리 펼치듯 창공을 만드시기 이전, 그러니까 창조 이전의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묵시문학의 재앙적 은유들은 이 세상을 접고 새로운 세상을 펼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재창조를 암시한다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은 주류의 해석이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 종말을 끔찍한 사건들로 도배하는 묵시문학 작품들의 의도에는 부합하는 듯하다. 끔찍한 사건 앞에 주눅 들어 죄의식과 자책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미래를 설계하고 기꺼이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섬세하게 다듬기를 바라는 의도 말이다. 요한묵시록의 서사 흐름이 천체의 혼돈 이후 7장에서 십사만사천의 구원받은 이들을 소개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천체의 혼돈은 하느님 안에 구원을 누리는 이들의 등장을 위한 사전 작업인 셈이다. 그러나 세상은 재창조를 원하지 않는다. 요한묵시록 6장 15절에 일곱 개로 분화된 사회 계층이 등장한다. 당시의 인간 사회를 총망라하는 계층 분화의 관습적 예를 보여준다. 땅의 임금, 고관, 장수, 부자, 권력가, 종, 그리고 자유인…. 힘과 재능, 그리고 노력과 우연이 뒤섞여 우리 사회는 다양한 계층으로 형성된다. 이른바 기득권은 그 계층 구조 덕에 누리는 이익이 있어 세상의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경쟁에 뒤처져 기득권으로부터 멀어진 부류는 세상의 계층을 차별과 소외로 인식하며 변화를 갈망한다. 15절과 16절은 신분과 권력,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형성되는 계층 분화의 세상을 한꺼번에 없앤다. 모든 계층은 산과 바위를 향해 숨겨달라고 아우성이다. 호세아서 10장 8절의 영향을 받은 이 아우성은 하느님께 불충한 이들이 겪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징벌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서 다만 숨기를 바라는 나약함의 아우성이다. 창세기 3장 8절의 아담과 하와도 그랬다. 하느님이 찾는대도 아담과 하와는 숨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열매 하나를 나눠 먹은 결과는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인간의 처지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그리하여 하느님을 제대로 반기지 못하는 인간의 현실은 무언가 답답하고 서글프다. 본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관계적’ 존재로 지어졌는데, 인간은 숨어있다. 인간은 그러므로 인간답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인간에게 하느님은 ‘진노’(嗔怒)의 주체일 뿐이다.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주님의 진노의 날’은 마지막 때에 등장하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예언의 말마디다.(요엘 2,11; 말라 3,2) 요한묵시록은 진노의 자리에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언급한다. 앞서 요한묵시록 5장에서 어린양은 세상 모든 사람을 속량해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했다. 세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그분과의 인연을 다시 엮어 놓아 이른바 구원이란 걸 이루신 예수님을 ‘진노’의 주체로 해석하는 인간들의 아우성은 그리 달갑지 않다. ‘주님의 진노의 날’이 마지막 시대를 가리키는 시간적 은유라면, 그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주님을 어떤 모습으로 형용하고 은유할 것인가. 그 누구도 견디어 낼 수 없는 진노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당당히 반길 기쁨의 주체로 주님을 만나길 다만 바랄 뿐이다. 인간들의 아우성 이후에 요한묵시록 7장은 구원을 노래하는 십사만사천을 등장시킨다. 참 다행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하느님의 선한 마음, 깊은 지혜, 넓은 아량을 느끼며 감사드릴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꽃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로 사랑하시기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과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각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이 다르기에 서로에게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한마음 한 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세월의 흐름 가운데 지난날을 돌아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 삶의 어느 한 순간을 돌아보며 그때 이런 결정을 했더라면, 이렇게 했더라면, 이런 사람을 만났더라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떠올리게 되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두 길을 한 번에 다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함과 미련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을 충실히 걸어가며 감사와 행복을 더욱 느낄 수 있어야겠다는 마음을 담은 시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크고 작은, 중요하고 사소한 수많은 길들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고 응답하였고, 또 그 길을 충실히 걸어왔습니다. 이런 인생 여정을 살아온 한 분 한 분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아름다운 만남과 사건들이 자리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매일 가장 의미 있는 삶을 가꾸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 삶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아닐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자녀, 가톨릭신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신앙인으로, 가톨릭신자로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가운데서도 사제직과 수도생활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을 생각하는 ‘성소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물음들 중 하나는 ‘왜 사제가 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심을 느꼈고, 또 ‘예’라고 응답할 수 있었는지의 물음입니다. 어느 호젓한 밤 앞날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가운데, 인생살이의 제한된 시간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길이고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한 가장 좋은 삶은 ‘사제의 길’이라고 마음속에서 울려왔습니다. 그래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하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의 순수한 마음이 퇴색된 듯 느껴질 땐 부끄러움과 아픔을 느끼며, 조금이나마 더 잘 살아가려고 애쓴다고 여겨질 땐 하느님께 감사와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해서 부르심과 응답의 그 순간을 되새기며 부족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 신부님들, 수녀님들, 평신도분들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의 존재가 되고 있는가?’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부르심과 응답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며,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고하십니다.(사도 13,43 참조)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묵시 7,9 참조)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여야 합니다.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성소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한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원한 악녀 헤로디아

중국사에는 3대 악녀(惡女)가 있다. 바로 한나라의 여태후(呂太后)와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이다. 이들은 높은 권력을 쥐락펴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고 나라의 근간을 크게 흔들었다. 한나라의 초대 황제,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는 유방의 소실,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인 유여의와 갈등이 심했다. 자신의 아들, 혜제가 왕위에 오르자 유여의를 독살하였고 척부인은 산 채로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약을 먹여서 귀머거리로 만든 다음에 돼지우리에 던져버렸다.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황제인 당나라 측천무후는 자신이 황후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한 공신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과 딸마저 죽였다고 하니 악녀가 맞다. 청나라의 서태후는 3명의 황제가 집권하는 동안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아들들이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했는데 아들이 성인이 되어 갈등이 생기자 황제들을 죽였다. 당시 국제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쇠퇴하고 있는 중에도 서태후의 생각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였다. 악녀들의 행동은 일종의 사이코패스 성형을 보인다. 다른 이의 고통에 전혀 공감을 못 하며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신약성경 속에서 헤로디아는 그의 딸과 함께 대표적인 악녀이다. 그는 필립보 임금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시숙 헤로데 안티파스와 결혼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여러 차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왕으로서 법도에 맞지 않다”고 계속 진정했다. 헤로데는 군중들의 여론이 두려워 일단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비판을 받은 헤로디아의 마음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마침 헤로데의 생일 축하를 위한 연회에서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솜씨를 뽐냈다. 헤로데는 기뻐서 살로메에게 “소원을 말해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헤로디아는 지체 없이 살로메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귀띔했다.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병사를 보내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경비병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피가 흐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살로메는 쟁반에 담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받아서 헤로디아에게 주었다.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면서 너무 기뻐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와 같은 인물은 정말 비정하고 무섭다. 자신을 비난한다고 해서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비정함이 끔찍하다. 인간의 악행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정말 실행에 옮기는가이다. 인간은 분노와 화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파멸할 수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8면

[말씀묵상] 부활 제3주일, 생명 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 티베리아스라고도 불리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는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때인 밤에 배를 몰고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허탕을 치고 맙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될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마치 짙은 어둠이 삼켜버린 것만 같았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부활과 참 잘 어울리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옛 교우들은 부활 새벽에 산에 올라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고, 태양이 뜨고 있음을 알리는 수탉은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호숫가에 서신 예수님께서 약 100미터쯤 떨어진 배 위의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데 사용하신 ‘얘들아’(παιδία)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합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사실 이 단어로 제자들을 부르는 것은 어색합니다. 7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실까요?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고 버린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괘씸한 죄인이 아니라 마냥 무섭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서 도망쳐 버리고만 가련한 어린아이들로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은 상서로운 방향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나 되는 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리게네스 교부에 따르면 당시 알려져 있던 물고기 종류가 153가지였다고 하니, 153마리의 물고기는 온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첫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루카 5,1-11 참조)과 흡사한 이 장면은 예수께서 비록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떠났어도 그들을 다시 불러 모든 민족을 낚는 어부로 거듭나게 하심을 보여줍니다. 제자는 스승을 버렸으나, 스승은 제자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내 예수님을 알아본 베드로는 옷을 입고 그분께로 헤엄쳐 갑니다.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죄인의 반응입니다.(창세 3,10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죄책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해 세상으로 파견하기 전 손수 한 끼 식사를 챙겨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누어 먹이시는 모습은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신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선택하신 죽음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서 늘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슬퍼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슬픔은 곧잘 깨달음의 매개체가 되곤 합니다. 베드로도 슬픔을 통하여 세 번 배반한 자신에게 세 번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심으로써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깨닫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두 번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질문하시고 마지막 질문에는 ‘필레오’(φιλέω)라는 동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번 모두 ‘필레오’라는 동사로 대답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모두 사랑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두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다. 필레오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가파오로 물으시는 첫 두 개의 질문에 필레오로 대답한 것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아직 미숙함을 고백하며 그것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과 요청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필레오로 질문하신 다음 당신 양들을 돌보라 명하십니다. 형제에게 향하는 필레오에 주님께로 향하는 아가파오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육체적 선(善)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재물, 명예, 권력을 모두 가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건강을 잃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신체의 건강보다 나은 재산은 없다’(집회 30,16)고 말한다. 또한 동양에서는 ‘5복’ 안에 건강과 치아가 모두 들어있을 정도이다. 더욱이 현대의 젊은이들은 ‘프로필 사진 촬영, 식스팩 만들기’ 등 남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자신의 ‘건강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아직 젊은이들은 건강 자체의 중요함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매우 절실한 생존의 문제가 된다. 성경의 대표적 의인 욥도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었을 때보다 온 몸에 ‘고약한 부스럼’이 덮쳤을 때 더 큰 고통을 겪은 것으로 묘사된다.(욥 2,1-10 참조) 그렇다면 건강이나 쾌락과 같은 육체적 선이야말로 최종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닐까? 육체의 선을 넘어서는 인간의 최종 목적 성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에 있어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을 능가해야 한다.(I-II,2,5) 그러나 육체의 선만이 행복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많은 동물이 인간보다 우월하다. 인간은 결코 사자의 용맹함이나 코끼리의 힘, 치타의 빠름을 능가할 수 없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조차 나약한 인간들끼리 경쟁해서 얻은 성과일 뿐이다. 더 나아가 육체적인 선에만 인간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보다 높은 목적을 향해 살아가며 인간 자체가 최고선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이 생명 유지, 즉 인간 육체의 보존일 수는 없다. 성 토마스가 존경하던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는 이미 “살아있는 것들은 존재하는 것들보다 좋고, 인식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들보다 좋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강보다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더 높은 목적이 있다. 더욱이 성 토마스에 따르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게서 육체의 존재가 영혼에 의존할지라도 인간 영혼의 존재는 육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육체 자체는 영혼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평생에 걸쳐 돈을 모은 부자들조차 중병에 걸리면,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거액의 치료비를 지불한다. 여기서 재물과 같은 외적 선들은 건강과 같은 육체의 선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 자체는 ‘지나가 버리는’ 본성을 지닌다. “삶 자체는 지나가 버리고 […] 우리는 자연적으로 [생명을] 가지기를 바라고 그 안에 영원토록 머물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치닫기 때문이다.”(I-II,5,3) 이렇게 육체적 삶의 유한성은 장수와 건강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채우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 육체적 쾌락을 능가하는 완전한 쾌락에 대한 성찰 그렇지만 육체의 선에는 건강만이 아니라, 인간을 즐겁게 해 주는 ‘쾌락’이 존재한다. 이러한 즐거움이야말로 최종 목적이 아닐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삶은 짐승들에 알맞은 삶이며,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인 삶이라고 말한다. 또한 쾌락을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그 즐거움은 단기적이어서 궁극적이거나 자족적일 수 없다. 그러나 쾌락을 이렇게 간단히 행복의 후보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발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쾌락주의’의 대표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이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무엇보다도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행복은 즐거움 즉 쾌락이다. 모든 동물의 행동과 삶은 이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고통을 피하는 것 혹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모든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욕구하고 그것을 최고선으로 즐긴다. 반면에 고통은 최고의 악으로 혐오하고 이를 가능한 한 피한다.”(키케로, 「최고선악론」) 그런데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런 주장들을 통해 오해를 많이 받았다. 그가 누명을 쓰게 된 데에는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영향도 매우 컸다. 그런데 그들의 오해와 달리 그가 생각했던 진정한 쾌락이란 결코 육체적 방탕이 아니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정념에 사로잡힌 극적인 흥분 상태가 아니라 지극히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태에서 찾았다. 따라서 쾌락은 그에게 ‘영혼의 혼란으로부터의 해방’, 즉 ‘정념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정의된다. 이런 상태를 에피쿠로스는 ‘영혼의 평온’(Ataraxia)이라 불렀다. 성 토마스는 육체적 쾌락을 인간이 누리는 대표적인 즐거움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물론 그는 육체적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삼켜버려 다른 모든 선을 경멸하게 만들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쾌락이 곧 ‘최종 목적’이 아니라 “모든 즐거움은 행복을 따라오거나 행복의 어떤 부분을 따라오는 하나의 고유한 우유(偶有)”, 즉 행복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I-II,2,6) 더욱이 그는 즐거움은 선(善) 때문에 욕구될 만한 것이며, 이런 경우 선은 즐거움의 근원이며 그것에 형상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토마스는 만일에 인간이 자기에게 적합한 어떤 ‘완전한 선’을, 실제로 혹은 희망으로 혹은 적어도 기억 안에 가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인간의 행복 자체일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에 그것이 ‘불완전한 선’이라면, 그 쾌락이란 진정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한 부분만을 가진 것(分有)이나 행복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 따르면, 완전한 선을 따라오는 즐거움 그 자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복의 본질이 아니고 우유로서 행복의 본질에 따라오는 어떤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토마스가 말하는 완전한 쾌락을 줄 수 있는 영혼의 선, 또는 정신적인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음 회에서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다섯째 봉인이 열리다(묵시 6,9-11)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린다.(9절) 제단이 등장하고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울부짖는다. 그 영혼들은 자신의 피 흘림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있다. 흔히 레위기 4장 7절을 떠올리며 이 대목을 해석한다. 레위기의 이야기는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친 동물의 피를 제단 밑바닥에 쏟는 유다의 속죄 예식을 소개한다. 동물의 피는 유다의 죄와 비례하여 희생되어야 했다. 나는 희생이라는 말마디와 우리가 읽고 있는 묵시록의 영혼들을 연계하여 해석하는 데 불편함이 있다. 제단 아래의 영혼들은 누군가의 죄를 대신하거나 자신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살해된 것이 아니다. 요한묵시록 6장의 영혼들은 ‘증거자’였다.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의 증언’ 때문에 살해된 것이다. 무엇을 증언했을지 그 내용을 묻기 전에 살해되었다는 말마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사 ‘스파조’(σφάζω·살해하다)가 사용되었는데, 요한묵시록 5장 6절 어린양의 죽음에도 사용된 동사다. 제단 아래 살해된 영혼들은 어린양의 죽음과 하나가 되었다. 이 죽음은 요한묵시록 18장에 등장하는 대탕녀 바빌론, 곧 로마 안에서 죽어간 예언자들과 성도들의 죽음이기도 하다.(묵시 18,24) 영혼들은 죽음으로써 예수와 수많은 예언자들과 헤아릴 수 없는 신앙인들을 대변하는 상징이 된다. 영혼들은 외친다.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복수를 갈망한다. 살해된 영혼들은 죽음으로 제 역할을 끝내지 않는다. 죽었어도 죽은 게 아니다. 영혼들은 복수를 향한 갈망으로 살아 있다. 요한묵시록은 19장에 가서야 복수의 결말을 이렇게 노래한다.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자기 불륜으로 땅을 파멸시킨 대탕녀를 심판하시고 그 손에 묻은 당신 종들의 피를 되갚아 주셨다.”(19,2) 그러나 대탕녀 바빌론, 그러니까 로마제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한묵시록이 쓰였을 당시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건재했고 군사적으로 위대했으며 경제적으로 화려했다. 제단의 영혼들이 갈망한 복수는 도대체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것을 무너진 것으로 해석하고 단정 짓는 그 복수는 어떤 것일까.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현실적이지 않은, 그러므로 ‘영성적인 해석’이라 단정 짓기도 한다. 그러나 살해된 영혼들의 외침은 현실적이다. 신앙을 증거하다가 죽어간 많은 영혼들은 우리 역사에 선명히 남아 있는 현실의 존재들이었기에. 증거와 대립한 객체가 아무리 건재하고 위대하며 화려할지라도, 증거의 외침은 결코 멈추지 않고 역사 속에 울려퍼져 나가고 있기에.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겠다. 죽은 영혼이 살아 외치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 말이다. 죽어서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외침으로 증언하고 있는 그 사실에 대한 질문.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요한묵시록 12장 11절을 통해 얼마간 유추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자를 이겨 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요한묵시록 12장은 그 옛날의 뱀, 그러니까 악의 본령이자 근본인 용에 대한 승리를 이야기한다. 용을 이긴 이야기는 승리를 얻어 누리는 형제들의 모습을 서술하지 않는다. 다만 목숨을 잃은 것이 곧 승리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증언을 하여 죽어가는 것이 증언의 실패와 좌절이 아니라 끝내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무척이나 낯설어 우리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렵다. 그럼에도 이 낯선 생각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살해된 영혼들의 죽음이 외침으로 살아 있는 이유를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수동적 희생이 아니라 능동적 증언의 한 형태라는 것, 죽음의 자리를 기꺼이 감내하는 그 의지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승리가 아니라 제 자신의 신앙을 끝끝내 드러내는 승리의 선포라는 것, 그리하여 요한묵시록 6장의 살해된 영혼들은 복수를 갈망하는 그 외침 안에서 이미 복수가 이루어졌다는 저들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해된 영혼에겐 살해되었으되 희고 긴 겉옷이 주어져 있다.(묵시 6,11) 천상의 영광과 기쁨, 그리고 승리를 상징하는 흰옷은 이미 주어졌다. 죽음과 승리는 부딪혀 튕겨지는 대립의 말마디가 아니다. 죽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흰옷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죽음의 길이 아직 죽어가야 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묵시 6,11) 요한묵시록 6장의 살해된 영혼들은 역사의 한 사건에 국한된 죽음과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 살해된 영혼들의 죽음은 시간이 스쳐 가는 역사의 매 순간 벌어지는 또 다른 승리의 시작이다. 마지막 시간, 종말을 가리키는 전통적 시간 개념인 ‘수가 찰 그때’는(4에즈 4,35-36 참조) 증언으로 죽어가는, 그리하여 흰옷을 입을 많은 영혼들의 숱한 시간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영원의 시간이다. 역사의 매 순간, 살해된 영혼들은 끊임없이 등장하며 끊임없이 구원의 영광과 기쁨과 그 승리를 역사 안에 새겨놓을 것이다. 역사의 매 순간은 그렇게 종말의 영원성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그러니까 앞선 네 개의 봉인이 열릴 때, 우리는 세상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죽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천상의 달콤한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세상의 지독한 현실 체험이 요한묵시록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계시였다. 그리고 다섯 번째 봉인은 그러한 세상에 신앙을 증거하다 죽어가는 이들의 외침을 선명하게 들려준다. 봉인이 열리는 것은 그러므로 절절한 상처의 단면들을 읽어내는 이들을 요청한다. 상처 깊숙이 파고들어 세상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죽음에 지지 않고 이기는 법을 신앙으로 배워나가길 요한묵시록의 봉인들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처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죽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는 건, 위선과 배신일 때가 많다. 상처 입고 죽어가는 일로 좌절하지 말자. 상처 입을지라도, 죽어갈지라도, 살아내는 이 순간, 우리는 늘 승리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사두가이들의 이해에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마태 22,29)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교리서 본문은 예수님 이전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명확하게 선포한 가르침을 제시한 이가 없었고, 예수님의 대답이 지닌 의미는 대단히 깊고 정확하다고 말한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에 상응하는 차원이고, 또 인간이 하느님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어진 몸이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신화적 신들을 부정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얻어진 세계관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전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내용들이 있음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라며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다. 즉 부활은 하느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고, 죽음을 건너 저 세상의 일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질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전형적인 질문을 자신의 고통 앞에서 했던 욥을 만나 보자. 욥은 의인이었고 큰 죄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부귀와 권세를 지녔다. 그런 그가 받은 첫 번째 시험은 자신의 소유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병을 얻은 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욥은 그의 소유였던 집과 가축 그리고 귀한 자식을 잃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하나씩 잃을 때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라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소유한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그는 병이 들었다. 이제는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몸에서 느끼는 큰 고통은 절망을 주었고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욥 3,11-12)라며 자신의 생을 원망한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고난과 불행은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이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 말한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더 이상 무릎을 꿇지도 않고 하느님께 질문한다. ‘왜 입니까?’ 병으로 인한 고통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하느님에게만 가능하고 또 그분만이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입니까? 내가 죽어 어디로 간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욥이 스스로 질문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 속에서 거침없이 말씀하신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욥 38,4이하). 이는 ‘내가 너를 만들 때 너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의미다. 지혜로운 욥은 질문의 속뜻을 알아듣고 고백한다.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뵈었습니다(보다)’는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 온몸으로 던진 질문은 존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불렀던 것이다. 불렀고, 만났고,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에서 나와 그 사랑을 향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사두가이들이 범한 오류는 성경을 자신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고,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들의 공로로 얻어진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부활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과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는 생명이신 그분과의 만남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2014년 8월 18일.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명동대성당에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마지막으로 로마로 귀국하는 사목방문의 마지막 날이었다. 미사가 끝나기 전 교황님 제의실로 가는 데 경찰 통제선 안쪽에서 한 어머니가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이 나에게 손짓했다. 가서 들어보니 어머니가 교황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꼭두새벽부터 기다렸는데 입장하실 때 교황님이 다른 쪽을 향해서 인사를 하셔서 안수를 못 받았다고 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 간절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제의실로 가서 기다렸다. 미사가 끝나고 교황님께서 복사단과 함께 들어오셨다. 한여름의 빡빡한 한국 사목방문 4박5일의 일정을 다 마친 교황님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교황님께 다가갔다. 그러자 교황님은 걸음을 멈추고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따듯한 미소를 띠시며 아이와 악수했다.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교황님은 아이를 안으시고 볼에 입맞춤하셨다. 아이가 준 편지도 받아서 직접 제의 안으로 챙기셨다. 그때 보았던 교황님의 따듯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입맞춤은 예로부터 평화와 우호의 상징으로 계약의 조인에도 사용되었다. 발이나 손에 하는 입맞춤은 겸손과 자발적 복종, 존경의 표시이다. 지금도 외국 성지순례 때 보면 성인상의 발등에 고개를 숙여 입맞춤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악인들에게 넘겨줄 때 입맞춤 장면이 언급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22,47-48) 입맞춤은 본래 애정과 헌신의 표시였지만 주님을 배반한 유다에 의해 악용돼 배반의 표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해 돈을 받고 팔아버려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예전에는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13명의 사도단은 실제로 없었다. 지금도 서양권에서 성행하는 숫자 13을 기피하는 문화는 유다가 그 시작이었다. 유다는 사도단의 살림을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뢰를 받았다. 단체에서 돈주머니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팔아넘긴 이유는 성경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승이 유다인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킬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를 실망하게 했을까?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가끔 일하다 보면 진짜 걸림돌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패튼 장군이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진격하는데 방해를 놓는 것은 독일군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편이 발목을 잡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04 제3440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처음 네 개의 봉인이 열리다(묵시 6,1-8)

봉인이 열린다. 숨겨진 진실이 혹은 감추어진 계시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 시작은 ‘오너라’(Ἔρχου)라는 명령형의 동사다. 헨리 바클레이 스위트(Henry Barclay Swete)와 같은 고전적 성서학자들은 ‘오너라’라는 동사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믿는 이들의 외침을 읽어내곤 했다. 요한묵시록은 ‘오다’라는 동사를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수차례 언급하기도 한다.(1,4.7.8; 2,5.16; 3,11; 4,8; 16,15 참조) 요한묵시록 끝자락에서는 교회 공동체를 대표하는 어린양의 ‘신부’가 예수님께 ‘오시라’고 외치기도 한다.(22,17 참조) ‘오다’라는 동사를 두고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서로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도드라진다. ‘오너라’의 외침이 들리는 처음 네 개의 봉인은 어쩌면 예수님을 향한다는 것과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봉인이 열리면서 네 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각기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1절부터 8절까지에 나타나는 병거 넉 대와 말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네 마리 말들로 인해 벌어지는 재앙들 때문에 탈출기의 열 가지 재앙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아니면 서기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을 ‘종말’의 징표로 이해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해석이 네 마리 말들로 표현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무엇이건, 마지막 시대에 주님께서 직접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구원 의지를 드러내신다는 해석으로 마무리된다. 문제는 첫 번째 말의 색깔이 하얗다는 데 있다. 대개 천상의 기쁨이나 영광을 드러내는 하얀색이 다른 말들의 색깔들, 그러니까 붉고 검고 푸르스름한 색깔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하얀색의 말을 탄 이는 ‘활’을 들고 있는데,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심판과 징벌을 이야기할 때, 활을 등장시킨다.(신명 32,41-42; 하바 3,8-9; 에제 5,16-17) 활이라는 형상은 인간 세상사 그 어떤 대목에서도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이 가득하다는, 그리하여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적하지 못한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요한묵시록은 19장에서 마지막 시대, 마지막 승리자로서 백마 탄 기사, 곧 예수님을 소개한다. 6장의 백마 탄 기사는 19장의 예수님을 미리 알리는 하나의 표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린양이 여는 봉인의 시작은 말하자면 예수님을 계시의 첫 자리로, 그 자리에서 그 어떤 것도 예수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앙을 갖추도록 독자를 이끈다. 첫 번째 말의 색이 하얗다는 건, 우리가 누릴 천상의 기쁨과 영광은 세상이 어떻든, 그 세상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든, 우리에게 유일한 승리자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바라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꽃길만이 보장된 편안하고 행복한 길이 아니다. 어린양이 두 번째 봉인을 뜯고 나서 붉은 말이 나오는데, 그 말 위에 탄 기사는 큰 칼을 들고 있다. ‘칼’의 형상은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통적 형상이다.(이사 27,1; 에녹 90,19.34; 91,12) 유다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칼’을 통해 메시아 시대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전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이 쓰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느꼈을 또 다른 마지막 시대의 징표를 로마 제국의 군사력에서 찾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시무시한 로마의 군사력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또한 비로소 마지막 시대가 도래했다는 희망의 징표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살해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 일로 파멸이 아닌 메시아 구원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신앙의 해석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함으로 맞닥뜨리는 눈물겨운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다짐일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삶의 애환과 고통은 배가된다. 세 번째 말은 기근과 결핍을 가리키는 검은 색을 지녔고 그 말 위의 기사는 저울을 가지고 있다. 네 생물 한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밀 한 되가 하루 품삯이며 보리 석 되가 하루 품삯이다.”(묵시 6,6)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가정했을 때, 어떤 목소리가 말하는 밀 한 되의 값은 1세기 당시 거래되는 가격의 여덟 배에 가깝다. 검은 말을 타고 있는 기사의 저울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허덕이는 경제적 상황을 상징하며 서민이 감당해야 할 힘겨움을 암시한다. 요한묵시록이 쓰였을 당시 로마의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였는데, 그는 포도밭을 갈아엎어 보리를 심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만큼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시기였고, 요한묵시록은 배고픈 시대의 아픔과 슬픔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고민하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유다의 전통은 마지막 메시아 시대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빵과 포도주의 결핍을 이야기한다.(요엘 1,10-11 참조) 현실이 결핍투성이라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희망과 그 신앙은 결코 하느님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봉인은 삶의 애환과 고통을 비껴가지 않는다. 그 삶을 직시하게 독자들을 이끌며, 그 속에서 각자의 신앙 자세를 다시금 다듬어 볼 여지를 살피게 한다. 네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나타나는 말은 죽음을 이야기한다. 에제키엘서 5장 12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대목은 하느님을 외면하고 그분께 불충하는 백성을 향한 심판을 가리킨다.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로 하느님을 저버리는 좌절과 포기의 삶은 죽음으로 향한다는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가 네 번째 봉인을 통해 드러난다. 비록 거칠고 투박한 경고의 메시지라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강조하고 싶은 요한묵시록의 의도는 명확하다. 어린양이 봉인을 열면서 보여주고자 한 하느님의 계시는 결코 인간 세상의 부조리나 아픔을 외면한 유토피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늘 마주하고 살아가는 인간 삶 그 안에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분명히 전하고 계신다는 것. 우리가 사는 삶은 지금 이 순간의 것이고 다른 세상 다른 시간을 꿈꾸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므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망상이라는 사실을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승리자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지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이 삶을 살아내기를 우리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할 것이다. ‘오너라’라는 그 외침을 향한 응답은 이 삶을 온전히, 열심히, 살아내는 이들의 몫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4-27 제343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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