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구약의 복음서’ 탈출기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토대를 마련해준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에 흔히 ‘구약의 복음서’라 부릅니다. 탈출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탄생시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노아와 관계를 맺으시고, 이어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에 반해 탈출기에서는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그들과 관계를 이어가십니다. 이렇게 볼 때 탈출기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태어나게 하는 책입니다. 물론 탈출기는 앞서 나오는 창세기와도, 또한 뒤따르는 레위기나 민수기와 신명기와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에 이들 다섯 권의 책을 오경이라 부릅니다. 유다교에서 이집트 탈출 사건과 그에 얽힌 체험은 이스라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 가정에서 해마다 되풀이하여 거행하는 파스카 축제 예식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념하고 재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또한 이집트 탈출 사건을 파스카 전례와 연결합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사건의 완성으로 봅니다. 묵시록은 수난당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집트 탈출 기념, 곧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서 제물이 되는 어린양으로 묘사합니다.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묵시 5,6)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정체성, 주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사건 두 가지를 꼽자면 이집트 탈출 사건과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사건을 차츰 주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친히 주도하신 사건으로 가르치고 또 받아들이게 됩니다. “뒷날, 너희 아들이…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이집트에서, 곧 종살이하던 집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때 파라오가… 고집을 부렸으므로, 주님께서 사람의 맏아들부터 짐승의 맏배까지 이집트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셨다.’”(탈출 13,14-15) 이집트 탈출 사건은 차츰 유다인들의 신앙고백으로 자리 잡습니다. “너희는 주 하느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큰 공포와 표징과 기적으로 저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저희에게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신명 26,5-9) 탈출기는 이집트에서 짓눌려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을 담은 이야기로, 탈출기에 나오는 하느님은 억압받아 고생하는 이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또한 이집트 탈출의 목표는 억압에서 풀려나 ‘맘껏 주 하느님을 예배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탈출 7,26; 8,16; 9,1; 9,13 등) 이같이 탈출기는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태어나게 해주고, 훗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어줍니다. 주님 말씀을 읽을 적마다 저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교회상식 더하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를 받는다?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분이 본당 공동체와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기도를 바치면 전대사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전대사라고 하면, 희년에 지정된 순례지를 순례하거나 11월 위령성월 첫 주간에 묘지 등을 방문해 얻는 것을 떠올립니다. 올해도 프란치스코 성인 선종 800주년을 맞아 특별 희년인 ‘성 프란치스코의 해’가 선포되면서 성인과 관련된 성당을 방문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지요. 이렇게 전대사라고 하면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장소를 방문하는,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해야만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평소 다니는 성당은 물론, 어느 성당·성지에서도 가능하고, 심지어 사순 시기뿐 아니라 1년 중 모든 날에, 하루에 한 번 받을 수 있습니다. 교황청 내사원이 발행한 「대사 편람(Enchiridion Indulgentiarum)」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할 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고, 또 하나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로 전대사를 받으려면 우선 성당이나 성지 등에 합법적으로 설치된 14개의 십자가, 즉 14처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처에서 처로 이동하면서 바쳐야 합니다. 공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하는 경우라면 인도자만 이동해도 괜찮습니다. 또 교황님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실 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로 경건하게 참여해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건강 등으로 여건이 되지 않아 이마저도 어렵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경건한 독서와 묵상으로도 십자가의 길 기도와 같은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십자가의 길 기도만 바친다고 저절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반 조건이 전제돼야 합니다. 일단 전대사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의 지향을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에 대한 집착이 없는 상태여야 하지요.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부분 대사를 얻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판공이 있으니 이 일반 조건을 채우기도 좋지요. 그래서 ‘전대사 받기가 이렇게 쉬워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대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성인의 공로, 무엇보다 예수님의 공로를 통해 거저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고, 그분의 상처로 우리가 낫게 됐습니다. 성인들도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의 수난을 따르려 노력해 공로를 쌓았습니다. 전대사가 쉽게 남용돼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를 위해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일은 전대사를 위한 다른 어떤 활동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꼭 전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사순 시기를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0면

[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41절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를 고치신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전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병 고침을 넘어, 예수님이 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고통 속에 있던 사람이 믿음을 고백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시선과 그 시선에 마음을 연 한 인간의 변화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을 때 대개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거나, 자기 관심에 따라 선택적으로 보고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은 이러한 우리의 시선과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요한 9,1) 여기서 ‘보셨다’는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아닙니다. 본문의 그리스어 동사 호라오(ὁράω)는 기본적으로 ‘보다, 인식하다, 깨닫다’는 의미로, 그 사람의 고통과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시선을 뜻합니다. 이 시선은 예수님의 구원 행위가 시작되는 첫 순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의 신체적 조건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그 안에 깃든 고통과 외로움을 보셨습니다. 이 시선은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들으시고, 살펴보시고, 알게 되셨다’(탈출 2,24-25 참조)라는 하느님의 시선과 이어집니다. 약자 위에 머무는 예수님의 시선은 곧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이 사람의 고통 앞에서 그 원인을 찾으며 죄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그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는 단죄도, 그 원인을 따지는 판단도 없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오직 연민과 구원의 의지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는 행위는 창세기 2장에서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던 창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치유는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이 아니라, 한 인간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창조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에게 ‘파견된 이’라는 뜻의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게 하십니다. 이는 이 치유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이는 육안의 문제가 아니라, 겸손과 교만의 문제입니다. 눈먼 이는 겸손으로 마음의 눈을 떠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우리는 잘 본다”(요한 9,41)라고 확신한 바리사이들은 교만으로 그 눈을 감았습니다. 자기 확신에 갇힌 시선은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를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는 본다고 여기지만,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제1독서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겉모습을 넘어 그 사람의 중심과 가능성, 상처까지 함께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눈먼 이를 바라보신 방식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고 선언합니다. 빛은 마음의 눈이 열릴 때, 곧 사랑과 겸손 안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눈이 열리면 시선도 달라집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사람의 내면을 헤아리는 마음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은 눈먼 이의 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열어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시선을 닮아갈 때 사람을 살리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사순 시기 한가운데서 맞이하는 기쁨의 라에타레(Laetare) 주일은, 바로 이런 시선의 전환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보는 눈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의 깊이를 존중하는 마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글 _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신앙·희망·참사랑을 통해 찾는 신앙인의 행복한 직장 생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긴 제목을 가진 드라마가 많은 직장인을 울컥하게 했다. 이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들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렸다. 치열한 성과 경쟁과 구조조정의 불안, 회사 정책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직장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실적 압박 속에서 승진을 앞두고 동료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구조조정 소문에 마음이 무너졌다가 다시 버티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주인공 김 부장은 겉으로는 성공한 중간관리자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무엇이 정말 옳은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내 인생의 마지막 기준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사람이다. 거의 손에 잡은 듯했던, 자신의 성공을 놓치고 좌절하는 김 부장을 바라보며,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진 능력과 강점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對神德)’, 곧 신앙(fides), 희망(spes), 참사랑(caritas)에 대한 설명이다. 토마스 성인은 좌절하고 방황하는 김 부장과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조언해 줄 수 있을까? 자연적인 덕과 구별되는 초자연적인 대신덕 토마스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의 자연적 상태에 적합한 덕들과,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덕들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토마스는 “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도덕적 덕 외에도, 초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다른 덕들”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이 덕들을 ‘대신덕(virtus theologiae)’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향주덕(向主德) 또는 ‘신학적 덕’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덕들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I-II,62,1) 여기에는 지성에 있어서 ‘신앙’, 의지에 있어서 하느님을 향하는 ‘희망’ 그리고 그분과 일치하게 해주는 ‘참사랑’이 속한다.(I-II,62,3) 이 덕들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하느님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를 인간의 반복된 행위로 얻어지는 ‘획득된 덕’(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성적 덕이나 도덕적 덕)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주입(注入)된 덕’이라고 불렀다.(I-II,62,1; II-II,24,12) 신앙·희망·참사랑 뜻하는 ‘대신덕’…하느님이 신앙인에게 부여하는 은총 성공과 실패 앞에 항상 방황하며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직장인들 자만·절망 대신 신앙의 덕 갖추고 초자연적 행복 향한 여정 떠나길 ‘획득된 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사와 지상의 행복에 적합하게 만들어주지만, ‘주입된 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준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이 덕이 주입되면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자연 본성을 넘어서는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대신덕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자유로운 선물이다. 대신덕으로서의 믿음(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영역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김 부장이 잘 보여주듯이, 인간적인 영역에서 믿음과 희망에는 통찰력 부족, 무력함 등의 결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확실한 믿음과 희망을 진정한 덕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덕인 희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바람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란 덕의 대상은 참된 행복인데, 이는 “획득하기 어렵지만 가능한 미래의 선”(II-II,17,7)이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참사랑이라는 다른 대신덕도 하느님의 결함 없는 권위와 전능한 능력으로 지탱되기 때문에 인간 행위가 지닌 불확실함과 무력함이 없다. 대신덕을 통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 좌절했던 김 부장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선 둘째 덕인 ‘희망’을 집중해서 살펴보자. 토마스는 희망을 자만(praesumptio)과 절망(desperatio) 사이의 중용이라고 분석한다.(I-II,64,4). 실제 직장 생활에서 이 중용을 찾기 어려운 것은 대기업 문화로 대표되는 경쟁 사회가 이 두 극단으로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의 김 부장처럼 승진에 성공하고 인정받을 때 우리는 “내 능력과 인맥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흐르기 쉽다. 중반 이후의 김 부장처럼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 김 부장은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고 느끼는 절망으로 기울고 만다. 만일에 김 부장에게 희망의 덕이 주입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최종 목적이 “이 회사,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희망을 통해서 하느님을 우리 자신을 위한 행복의 원천으로 사랑하게 된다. 희망이라는 덕은 성과주의와 번아웃 사이에서 김 부장이 절망과 냉소에 빠지지 않도록, 최종 목적을 향한 긴 호흡을 제공한다. 신앙이 없는 김 부장들은 실적 압박과 보고서 조작의 유혹, 상사의 눈치와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신앙이라는 덕을 갖추게 된다면, 사내의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고, 양심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 열정적으로 노력하던 김 부장은 팀을 위해 희생하고 부하 직원을 감싸는 모습에서 ‘좋은 상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가 팀원의 선과 공동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평판·이미지·승진이라면, 토마스의 기준에서 이는 “참되지만 불완전한 덕” 혹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일 뿐이다.(II-II,23,7). 그가 참사랑을 갖추게 된다면, 그의 모든 덕과 선택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공동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에 맞게 재정렬하여, 팀 운영과 회사 정치 속에서도 타인을 수단이 아닌 친구이자 이웃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은 좌절하는 수많은 김 부장을 단지 ‘생존·승진·몰락’의 서사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정자’로서, 대신덕 안에서 자연적인 덕을 구체적 상황에서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I-II,62,4; 63,3) 대신덕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현대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를, 하느님과의 우정에 의해 통합된 인격의 드라마로 변형시키는 놀라운 힘으로 작용한다. 직장을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회사를 무대로, 신앙·희망·참사랑이라는 은총의 습성을 따라 자신의 직장 생활을 초자연적 행복을 향한 여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19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학과 철학의 차이

“하느님이라는 말마디는 ‘믿는 사람’(신학자)이 사용하는 말마디이고 ‘부동의 제일동자’라는 말마디는 ‘생각하는 사람’(철학자)의 말마디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사람의 말마디와 믿는 사람의 말마디는 서로 다르지만, 그 말마디들은 서로 상대편의 말마디들을 잘 조명해 준다”(정달용 「그리스도교 철학」 참조)는 글은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암시한다. 신학과 철학은 공통성도 지니지만 차이점도 지닌다. 한마디로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며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스스로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며, 그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익을 경멸하고 포기하여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진짜 금화’(지혜, 정의 등)를 얻기 위해 다른 모든 선을 맞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예수님은 마태오복음에서 값비싼 진주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산다고 하였다.(마태 13,46 참조) 이렇게 어떤 가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신학과 철학이 같지만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은 그 사랑하는 사물의 내용에 있다. 즉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신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리하르트 셰플러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앙(II)」 참조) 철학에서도 신을 논하지만, 최고의 존재요 존재의 근거로서 신의 본체나 속성을 이성으로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을 추구한다. 쉽게 말해서 철학은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신학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신학과 철학은 현실 전체를 대상으로 연구한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는 학문인 신학은 계시와 신앙에서 출발하고, 어원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인 철학은 자연과 이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신학은 계시를 통한 신앙의 학문이고, 철학은 이성을 통한 진리의 학문이다. 철학이 질문을 통해 솟아 나온 사색의 학문이라면, 신학은 철학이 질문한 것에 답을 제공하면서 신앙으로 응답하는 실행의 학문 즉 구원의 학문이다. 유한의 체험을 말하는 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이 존재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단지 이 존재를 생각하고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해석한다. 한편 무한의 체험을 말하는 신학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이 존재를 확실히 인정한 뒤, 이 존재를 받아들이고 대화하면서 존재의 신비로 들어간다. 철학이 이 존재의 문지방에 서성거린다면, 신학은 이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 그 신비를 향유한다. “철학 없이 신학 없다”라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추기경의 말처럼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을 해야 한다. 인간의 궁극적 의미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은 신학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신학은 철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계시와 신앙을 설명한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노는 플라톤의 철학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현대에서 칼 라너 신부는 하이데거 철학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글 _ 김석태 베드로 신부(대전교구 도룡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15 제3482호 20면

[말씀묵상] 사순 제3주일

예수님께서는 길을 걷느라 지쳐서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요한 4,6 참조) 인간을 찾아오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겸손을 느끼듯이, 주님께서 한낮에 우물가에 계셨던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온 죄 많은 여인을 만나기 위한 치밀한 자비로 보입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요한 4,8)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하고 반문하지만, 사실 그녀에게 물을 청하신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목말라하신 것입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5,2)라는 제1독서처럼, 주님은 갈증을 해소하려 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여인 안에 오히려 생명의 물을 부어주기 위해 대화를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성령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신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3-14)라는 것은 우물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성령의 은총은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예지력을 발휘해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요한 4,16)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솔직하게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함께 사는 남편이 남편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가 아직 참된 신랑이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헛된 우상이나 집착 속에 살고 있음을 직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인의 수치를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참회로 이끌기 위해 그녀의 과거를 비추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바라보며 저희 조상들은 산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선생님네는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4)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예배의 장소 ‘그리짐 산’에 집착했고, 유다인은 전통 곧 ‘예루살렘’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함을 선언하십니다. 영 안에서라는 것은 성령의 비추심을 뜻하며, ‘진리 안에서’라는 것은 그림자인 구약의 제사를 넘어 실체 그리스도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그리스도라는 메시아의 오심을 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바로 모세가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탈출 17,6) 했던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주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요한 4,27-30 참조)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그 여인이 이제 육체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물동이를 버린 것은 더 소중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복음의 기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만 구원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즉시 주님의 소식을 전하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요한 4,31)하고 권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몸의 음식을 걱정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한 ‘영혼의 구원’에 굶주려 계셨습니다. 주님께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바로 길 잃고 지친 영혼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영성은 ‘목마름의 전환’입니다. 세상의 우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우물물이지만, 주님의 우물은 나의 내면에서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며 우리도 참된 생명수를 맛본 사람이 됩시다. 과거의 물동이(집착)를 미련 없이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기쁨을 전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모두 주님과 영적으로 대화하는 새로운 사마리아 여인 곧 사도들 중의 사도가 될 것입니다. 글 _ 곽승룡 비오 신부(대전교구 태안본당 주임)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8면

[말씀의 우물] 속죄에 대하여

레위기의 핵심 내용은 16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직 개별 고해성사가 시작되기 훨씬 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속죄일(贖罪日, 히브리어 욤 키푸르), 속죄 예식 이야기입니다. 알게 모르게 저질러진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부정은 물론, 백성 전체의 부정을 씻어주는 정화 예식의 날이 거행됩니다. 이 속죄일 대정화 전례는 에즈라의 개혁 이후(기원전 40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해마다 한 번씩 욤 키푸르를 지내게 되는데 차츰 그날을 더욱 중요한 날로 여기게 되어 욤 키푸르 대신에 그냥 ‘날(욤)’이라고만 부르게 됩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산모의 정결례, 악성 피부병과 환자의 정결례 등 정결과 부정에 대한 긴 가르침(레위기 11~16장 참조) 끝에 가서 이스라엘의 대축일, 속죄의 날 예식이 나오며, 이 속죄일은 이스라엘 해방의 날이자 대정화의 날, 곧 대축일로 자리 잡습니다. 부정한 이가 정화되어 성소에, 나아가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는 부정에서 풀려나, 다시금 영원하신 분께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속죄의 전례는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대축제로 굳건히 자리 잡습니다. 특히 ‘속죄 염소’에 관한 전례 의식은 오늘날 우리 눈에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론은 그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는데, 제비 하나는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제비는 아자젤(불모지를 떠도는 귀신)을 위한 것이다.”(레위 16,8) 주님을 위한 제비(염소)는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데 쓰입니다.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될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와서, 황소 피를 뿌릴 때와 마찬가지로 속죄판 위와 속죄판 앞에 뿌린다.”(레위 16,15) 다음은 불모지를 휘젓고 다니는 귀신 아자젤을 위한 예식의 주요 장면입니다. “아론은 살려둔 그 숫염소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곧 그들의 허물과 잘못을 고백하여 그것들을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서는,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의 손에 맡겨 광야로 내보낸다. 그러면 그 염소는 그들의 모든 죄를 불모지로 날라 간다.”(레위 16,21-22) 사실 이와 비슷한 의식은 이스라엘 외에 다른 문화권에서도 나타납니다. 흔히 죄와 부정을 어떤 생명체나 물건 위에 전가하거나 아니면 그 생명체나 물건에 뒤집어씌워서 아예 없애버리는 방식입니다. 이는 우리 모든 인간 내면에 들어있는 죄의식에서 생겨난 정화 예식, 또는 속죄 예식으로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 내면 한쪽에 서려 있는 죄의식 또는 미안하고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늘 치유와 화해를 목말라합니다. 속죄일 대정화 전례의 주요 예식은 산 채로 대기시켜 둔 염소에 두 손을 얹음으로써 백성의 죄를 그 희생 염소에게 온전히 전이시켜, 이 희생 염소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멀리 광야로 가져다 버리도록 하는 예식입니다. 바오로의 의화론(로마 3,21-26 참조) 안에 레위기 16장의 속죄 예식이 깊이 뿌리 박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로마 3,25) 글 _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성사전담, 성서주석학 박사)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8면

[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폭풍의 언덕」 : 사랑과 폭력

사랑의 가치는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순수성, 진실성, 열정, 헌신, 자유 등.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열정적인 사랑의 대명사이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린 사랑의 강렬함은 독자들의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1847년 출판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당시 고딕 소설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명확한 도덕적 시각이 없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흔하지 않은 깊은 사랑이 복수와 폭력을 감싸고 있어서, 빛과 어둠이 혼재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교회사 안에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었던 경우들이 있다. “신이 원하신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약 200년간 비극적 폭력을 낳았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 믿었다. 또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학살 등의 사건들이 있다. 교회는 과거 그리스도교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는 규범과 예의를 강조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회였다. 남녀의 사랑은 절제되고 예의범절에 맞는 형식 안에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규범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그리고 죽음도 멈출 수 없는 강렬한 열정의 힘 자체였다. 캐서린의 “나는 히스클리프이다”라는 말과, 히스클리프가 “자신의 영혼(캐서린)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서로를 자기 존재 그 자체로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규범적이고 문명화된 사랑은 이들의 결합을 담아낼 수 없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을 “영원한 바위층과 같다”는 유명한 표현을 한다. 자신의 사랑이 달콤하고 낭만적이기보다, 거칠며 변하지 않는, 뭔가 근원적임을 보여준다. 이 사랑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거친 들판과 격렬한 날씨, 즉 폭풍의 언덕 같은 것으로 형상화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길들지 않는 원초적인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캐서린의 죽음 앞에서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미치게 만들어도’ 좋으니, ‘어떤 모습’이라도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절규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유령이 되어서 자신을 괴롭혀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심연에 홀로 사는 것보다, 유령에게 시달리기를 스스로 자청하며, 사랑이 무덤의 문턱을 넘어선다. 고통과 죽음조차도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이 사랑의 열정을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캐서린의 신체적, 심리적 무너짐과 히스클리프의 평생에 걸친 고뇌와 잔혹한 복수의 주된 원인으로서 파괴적이며 광적인 집착이다. 캐서린이 에드거와 결혼해 버리자, 사랑은 복수로 변한다. 3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사법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 담보, 부채, 결혼 계약을 이용해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해 버린다. 결국 힌들리는 과거에 어린 히스클리프가 그랬던 것처럼, 하인처럼 전락해서 완전히 파멸한 채 절망 속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연인에 향한 히스클리프의 집착…복수를 ‘사랑’으로 정당화해 절망·파멸 자초 평화로 충만한 사랑 이루려면 폭력 멈추고 끊임없이 이해하고 용서해야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복수를 폭력이나 죄로 생각하지 않고, 근원적 질서를 바로 잡는 행위로 간주한다. 그와 캐서린은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 엮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캐서린이 에드거를 선택한 일은 사회의 계급과 재산 구조가 강요한 부당함으로 느끼기 때문에, 복수의 폭력과 잔혹함은 캐서린의 결혼이 무너뜨린 존재론적 사랑의 질서와 균형을 회복하는 정의로 포장된다. 히스클리프에게 사랑과 복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복수는 사랑의 연장선이다. 복수는 상대방에게 고통 자체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받은 고통을 드러내고 알리기 위함이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의 “심장을 부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를 버림으로써 그녀의 심장을 부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의 심장도 부서졌다”고 말한다. 즉 복수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파괴는 바로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다. 캐서린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복수에 의해 겪는 고통을 통해, 그의 고통을 깨닫도록 기대된다. 복수는 과거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말한다, “나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어. 내가 그녀에게 가기 전에 내 영혼은 저 언덕 꼭대기에 있을 거야.”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길이 결국 그녀에게 돌아가기 위한 여정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복수를 사랑의 행위로 정당화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히스클리프는 계획했던 복수를 거의 다 이루었음에도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소진되어 버리고, 만족과 평화를 얻지 못한다. 이제 그는 ‘기와 한 장 들어 올릴’ 힘도 없고, “그들을 파괴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털어놓는다. 복수가 그의 존재를 충만케 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집어삼켜 버렸다.” 자기 기만적이며 파괴적 집착으로 포장된 그의 사랑은 결국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해 버렸다. 구약시대 모세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태복수법이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구약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심지어 이런 형태의 복수는 부모들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히스클리프는 과거에 힌들리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헤어튼의 교육을 박탈해 버리고, 캐시에게 자신의 병약한 아들과 결혼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히스클리프가 뉘우치는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끝 무렵 캐시와 헤어튼에게서 캐서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사람이 관계를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놓아둔다. 언쇼 가문과 린튼 가문을 상징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복수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용서와 치유를 향해 나아간다. 두 사람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태도 변화는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점이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열정적인 사랑의 깊이는 예의범절과 사회계급이 중요했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분명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동시에 사랑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히스클리프의 폭력은, 19세기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잔인함과 폭력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와 자기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적 신분과 물질적 욕망 때문에 에드거와 결혼해 버린 캐서린을 용서하지 못한 완고한 마음 때문이다. 죽음조차 멈출 수 없었던 사랑이었지만, 그 안에 용서가 없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결국 집착과 복수와 자기파괴의 결과를 낳았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의 사랑은 실망과 상처를 피해 갈 수 없다. 사랑으로 포장된 폭력적인 관계의 지속이 아니라, 평화와 충만감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단어가 지겨워지지 않아야 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19면

[교회상식 더하기] 전대사는 ‘면죄부’다?

‘면죄부(免罪符)’라는 말은 ‘책임이나 죄를 없애 주는 조치나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로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사실 ‘대사(大赦, indulgentia)’가 잘못 번역된 말이라는 것 알고 계신가요? 대사는 교회가 정한 조건을 채우면 잠벌을 면해 주는 것(교회법 제992조 참조)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어도 죄에 따른 벌, 곧 잠벌(暫罰)은 여전히 남는데요. 잠벌은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 소죄와 용서를 받은 죄에 대한 보속을 다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받는 벌입니다. 이 잠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벌을 전부 없애 주는 것을 ‘전대사’, 일부를 없애 주는 것을 ‘부분 대사’라고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데 왜 벌이 남아있는 걸까요? 죄는 두 가지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먼저 대죄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친교를 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을 ‘영벌’이라고 합니다. 영벌은 고해성사를 통해 벗어나게 되지요. 반면 모든 죄는 “피조물들에 대한 불건전한 집착”도 가져오는데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3항) 교회는 이를 생전에, 혹은 죽은 뒤 연옥을 통해 정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정화를 통해 잠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고통과 시련을 인내로 견디고, 또 자비와 자선의 행위, 기도와 속죄 행위들로 잠벌을 정화해 나갑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잠벌을 정화하는데 예수님의 공로와 성인들의 공로를 통해 도움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마태 16,19)를 받은 교회는 대사를 통해 그 길을 열어줍니다. 이처럼 대사는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에 대한 증서를 표현하자면 ‘대사부’가 바른 번역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면죄부’라는 오역이 생긴 것일까요? 대사가 남용됐던 역사에서 비롯한 오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 반박문」에서 “연옥 영혼에게 벌의 면제를 전구의 방식으로 베푸는 것은 옳은 행위”라고 대사의 중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져 짤랑 소리를 내는 즉시 영혼이 (연옥에서) 날아오른다”고 설교하며 대사를 파는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잘못된 설교와 증서 발부로 인해 신자들이 대사의 의미를 잊고 ‘돈을 내면 죄가 사라진다’고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사가 ‘면죄부’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고자 최근에는 역사학계나 교과서 등에 ‘면벌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후 교회는 대사의 남용을 바로잡고자 트리엔트공의회 「대사에 대한 교령」을 통해 “대사를 얻기 위한 모든 부적절한 돈벌이들을 전적으로 철폐”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는 전대사의 수를 줄이고 신자들이 전대사를 위한 합당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규범을 수정했습니다. 대사는 ‘면벌’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신심과 참회와 사랑의 행위, 특히 신앙의 성장과 공동선을 증진하는 행위”를 북돋는 역할도 합니다. 또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봉헌하는 것은 “탁월한 사랑의 실천이자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성 바오로 6세 교황 교황령 「대사 교리」 8항)

발행일 2026-03-08 제3481호 20면

[말씀묵상] 사순 제2주일

오늘 마태오복음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 이때 복음에 갑자기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베드로가 보니, 모세와 엘리야가 눈부시게 빛나는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마태 17,3 참조)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에게서 주님의 거룩한 신성이 발현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모세와 엘리야는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요? 그들과 예수님의 변모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걸까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건 단지 그들이 구약을 대표하는 위대한 예언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모세를 참 예언자로(신명 18,15 참조), 엘리야를 다시 올 예언자로(말라 3,23 참조)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실존적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깊은 시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을 체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들 삶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갖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인을 죽인 일로 파라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자 미디안 땅으로 피신하였고, 그 광야에서 양 떼를 치다가 호렙산으로 올라가게 되지요. 그리고 그곳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탈출 3,1-6 참조)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들을 죽인 일로 이제벨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자 광야로 나갔고, 거기에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하느님께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던 그 역시 호렙산으로 가게 되고, 그곳 동굴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1열왕 19,1-18 참조) 모세와 엘리야 모두 쫓기는 신세였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어디론가 피신하려 하였을 때, 다시 말해, 극한 두려움과 비참함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야 비로소 하느님을 만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컨대 두 사람은 모두 절망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이었고, 그들 응답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극적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삶을 향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야말로 몸소 삶의 초월적 변화를 체험한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변모’란 꼭 예수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거룩한 신성과 마주하는 한, 우리의 삶도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증거하는 인물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인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비참한 인간 존재를 변화시켜 주는, 실존적 변모의 원천임을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에게 그러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비참함 속에서 거룩한 자기 현존을 드러내심으로써 인간을 새로운 소명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초대하십니다. 절망에 빠진 우리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어, 쓰러진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를 이끄시는 능력이며, 새로운 삶을 향해 오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 초대와 부르심에 온 존재를 던져 응답할 때야 비로소 참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이 ‘변모’라는 의미로 사용한 ‘메타모르포오(μεταμορφόω)’는 단순한 ‘변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월적(메타) 존재가 인간 실존을 변화하게(모르포오) 한다는 뜻입니다. 하얗게 빛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해 주는 주님의 ‘현존’ 그 자체입니다. 빛나는 그분의 현존 안에서 우리도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그분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 새로움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변모했다면, 그건 분명히 그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글_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발행일 2026-03-01 제3480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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