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욕망의 다양한 얼굴

인간은 자신 앞에 나타난 다른 성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만 발전시킬 수 있을 만큼 완전한 존재는 아니다. 성 자체가 매우 유동적(Liquid)이면서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내적 변화가 시선으로 드러나기에 먼저 자신 안에 움직이는 그 변화의 원인, 즉 욕망을 보아야 한다. 성(性)은 처음부터 방향성을 지녔지만 나의 자유와 지향에 의해 신호등처럼 바뀔 수 있다. 자신도 타자도 인격으로 바라봐야 하나 유혹에 의해 단지 성애적 필요를 만족하는 기능적인 역할로 격하시킬 수 있다. 달라지는 양방향의 변화는 바라보는 시선, 즉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을 비추는 이유다. 이러한 맥락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체험과 구원 과업의 맥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38과 2항)라고 한다. 사랑은 단순히 관능적 욕구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갈망으로 발전되고 경험되어 완성에 이르는 질서를 지녔으나, 욕망은 그 질서를 바꾼다. 부정적 얼굴은 인간이 욕망을 느끼는 대로 실행하여 하강으로 빠지는 상태이고, 긍정적 얼굴은 성 충동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자신의 최종 목적에 비추어 충동을 조절하여 긍정적 힘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다. 욕망의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서 선택하게 되는 지향성이다. 감정은 파도처럼 우리를 높이 올라가게도 내려가게도 하지만, 지향성에 의해 움직인다면 감정의 강도에 자신을 버려두지 않고, 욕망이 최종 목적을 바라보고 정화를 거쳐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된다. 오늘날 현대인은 삶에서 윤리가 크게 두 가지로 흔들리는 체험을 한다. 신앙과 행위를 분리시키고, 진리와 자유를 분리시켜 왜곡되게 한다. 마태오 복음 5장 27절과 28절은 바로 이 부분을 다시 보게 한다. 인간의 마음과 행위라는 윤리적인 부분을 각 상황마다 규칙을 적용하는 결의론적 방법에서 탈피해, 윤리 주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을 양성해야 한다. 윤리의 기초적 문제를 해석하는 인식 체계를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계명을 다 지키고도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이 지니고 있던 마음의 진실이 여기에 있다.(마태 19,16-22) 예수께 어떤 사람이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질문한다. 그의 질문에서 그가 최종 목적을 알고 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17절)라며 ‘선한 일’로 물었는데, ‘선하신 분’ 즉 존재로 응답한다. 행위와 존재가 분리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 젊은이가 지킨 율법 조항들은 외적인 것이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21절 참조) 주는 것으로 대변되는 사랑과 별개로 행하는 계명 준수는 ‘슬픔’을 가져온다.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하는 이 슬픔은 ‘참행복 선언’에서 말하는 슬픔(“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과는 분명 달라 보인다. 회칙 「진리의 광채」는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근본적 의지의 존재를 언급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블롱델(Blondel, Maurice Édouard, 1861~1949)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 젊은이의 질문을 해석한다. 그것은 “삶의 충만한 의미”에 관한 것으로, “모든 결정과 행위의 핵심에 자리잡은 열망이요, 자유를 움직이는 은밀한 추구이며 내적 충동”의 발로이다. “우리를 끌어당기며 부르는 절대선을 향한 간구”인 동시에, “인간 생명의 원천이자 목적인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의 반향”이다.(7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2764항은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소원을, 곧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하는 우리의 내적 지향을 새롭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 교리는 ‘몸에 관한’ 신학일 뿐 아니라 인간학과 신학의 새로운 체계를 호소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현상학적 방법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간음, 표징의 왜곡과 인격적 계약의 파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간음은 구약을 ‘능가하는 의로움’(마태 5,20)이다. 몸과 마음 모두에 기초를 둔 인간학에서 간음을 바라본 복음적 에토스다. 그리고 간음을 명백히 ‘몸의 죄’라 한 것은 참된 몸의 결합이 아니기에 그렇다. 표징을 왜곡하고 인격적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배우자와 계약으로 갖게 된 ‘너에게만’ 하는 배타적 권리를 침해했고, ‘하나’, ‘한 몸’을 말하는 표징을 허위로 만들었고, 상호 조건을 지닌 인격적 관계로 맺어진 계약을 크게 훼손한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은 첫 번째로 혼인의 순수한 ‘내적 진리’, 곧 ‘한 몸’을 허위로 만드는 ‘몸의 죄’다. 두 번째로 계약에 의한 배타적 관계로 사랑에서 나온 서약이 몸의 표현을 통해 이뤄지는 선(善)에서 정반대인 탈선, 윤리악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한 몸을 이루는 일치가 혼인 서약의 정상적 표징이라면, 인간의 몸은 그 본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영의 표현이 되고 창조의 신비에서부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인격체들의 친교 가운데 실존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32과 1항)에 더 깊이 다가갔다. 복음의 에토스는 ‘몸의 복음’을 살라는 초대이고, 창조의 신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자연적 갈망이 초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돼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에토스는 구성상 이미 완성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실현했고, 그래서 과거도 현재도 영원히 그분은 살아 있고 인격적인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말씀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긴 요한복음 8장은 간음한 여인과 죄의 관계다. 예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보호하면서도 간음과 죄를 동일시한다.(요한 8,7-11 참조) 율법의 조항을 들어 여인을 고발하러 온 바리사이들에게 율법이 아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며 당신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어디에 호소하셨는가? 각자의 양심이다. 바로 한처음 상태의 양심에 호소하신 것이다. 이는 어디에서 회복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왜냐하면 죄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땅인 인간의 마음에 말한다. 마음이 구원받는 것, 그것이 회복이다. 즉 원순수를 회복하기 위한 내적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의 양심에 새겨진 선과 악에 대한 식별은 어떤 법규범보다 더 바르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에토스를 향하는 길은 창조의 에토스, 즉 사람이 누구인지 재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약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에토스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할 시간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첫 질문, “무엇을 찾고 있느냐?”에는 인간의 길이 포함되어 있기에 삶의 본질을 묻고 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을 찾기 위해 예수를 찾아왔다.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어떤 이는 죽어가는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또 어떤 이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요한복음 마지막에 이르러 ‘무엇’은 ‘누구’로 바뀐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으로부터 “누구를 찾느냐?”고 질문받은 곳은 그분의 빈 무덤 앞이었다. 그녀가 그곳에 간 것은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한 그리움, 즉 그분이었던 것이다. 참된 신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찾는 인간’에서 ‘누구를 찾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 내 안에 그분의 모습을 형성시키는 것이요, 발견한 그 참된 보화를 사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율법과 예언서에서의 간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마태 5,28)며 이어지는 예수님의 선포는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원래의 의미를 율법과 예언서들을 통해 회복하면서 행위의 전환점을 ‘마음’이라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이 지켰던 구약의 에토스는 외적인 면에 치중하여 율법을 경직되게 해석했고, 그 결과 과정의 중요성이 소홀히 됐으며, 또한 선과 악에 대한 올바른 의미가 가진 자의 기준에 따라 그 저울의 추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계명 자체가 음욕에 싸인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는지에 있기에 율법 실행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음이라 하신 것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창세 16,2), 라헬과 야곱(창세 30,3)은 혼인의 본질적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생각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타협해 일부일처제로부터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탈하고 합리화했는지를 보여준다. 타협된 율법의 실천이다. 이들은 당시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기득권에 속한다. 지키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욕망을 왜곡하는 자신의 약점, 결핍, 의지적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율법을 하느님의 정의에서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 정의 안에서 타협된 율법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성조들의 시대와 이스라엘 왕, 특히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는 일부다처제가 그들의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그들이 마음에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힘에 의해 타협된 율법은 이미 마음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 본래의 정신을 선포하신 것이다. 종교, 정치, 사회, 지도권에 있던 남자인 그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아내를 소유권의 의미로 해석했고, 이 소유권에는 아내의 몸에 대한 ‘권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간음을 소유권의 침해로 해석하여 일부다처제를 허용, 합법화했다. 스스로 하느님 백성이라 말하는 이들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내용을 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 호세아(1~3장)와 에제키엘(16장) 예언자는 계명의 참 내용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하느님께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간음한 아내로, 부부간 혼인적 사랑으로 유비 해석했다. 간음의 추악함과 윤리적 악을 드러내는 비유로 신부인 이스라엘의 간음, 배반으로 표현했다. 이사야는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랑의 사랑으로 표현했다. 예언자들의 탁월한 비유와 상징으로 불충실한 신부 이스라엘이 하느님 편에서 맺는 영원한 계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한다. 계약에 의해 이들은 서로에게 ‘나의’가 성립되지만, 이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배타적 의미다. ‘나의’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상호성을 뜻하며, 선물의 균형을 표현한다(33과 4항).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속함의 의미로 사랑이 원인이 되어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는 특별한 차원의 ‘나의’이다. 그래서 ‘나의 자동차, 나의 열쇠’ 등 소유를 말할 때와 ‘나의 주님, 나의 남편, 나의 아내, 나의 자녀’와 같이 인격을 가리킬 때의 ‘나의’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자는 나의 소유를 말하지만, 후자는 서로 상호성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즉 타자가 ‘나의 아내’, ‘나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수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가 스스로 그에게 속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에제 11,19) 창조의 에토스에서 벗어나 닫혀 버린 내적 주체, 즉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8.21-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의 의미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서로 간 인격적 바라봄에서 서로 지배하려는 상태로 변화됨을 표현한 말씀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에 근본적 결핍이 발생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힘의 논리로 변화됐음을 성의 다름으로 말한다. 한처음 좋음에서 분출됐던 인간의 긍정적 욕망이 무엇 때문에 부정적 욕망으로 변했는지, 남자와 여자로 하지 않고, ‘남편’이라 말하였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부끄러움의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내고 있는 이 말씀은 역사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겪는 심리적 현상과 비슷하여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남편의 의미는 단순히 남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처럼 남편은 다른 표징을 의미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한처음 충만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으로 결핍 상태에서 느끼는 욕구를 말한다. 한몸이 될 수 있는 관계는 표징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관계, 실제적으론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즉 혼인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다.(에페 5,31-32 참조) 그런데 그의 욕망들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한몸이 되어야 할 남편의 자리에 욕망이 들어와 그와 한몸처럼 된 것이다. 이제 욕망이 주인이 되어 나를 조종하는 상태가 됐다. 내가 갈망하는 그 욕망들 즉 재물, 권력, 명예, 여러 소유욕 등이 주인으로 들어와 견고한 벽돌을 쌓게 됨을 말한다. 그다음으로 볼 것은 갈망으로 드러난 목마름(결핍)이다. 이는 여자의 결함이나 무능력, 차별을 의미하지 않고, 남편과 이루게 될 결합의 광범위한 정황에서 여자가 느끼게 될 충만한 일치의 결핍을 가리킨다. 땅의 속성에 묶이게 된 인간의 욕망은 내어줌에서 얻어지는 충만이 아니라 너를 지배하고 소유함에서 부유해지려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두 주체의 충만한 영적 일치가 이루어지는 인격들의 친교 대신에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욕망, 갈망의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는 소유 관계가 발생합니다.”(31과 3항) 욕망과 결합된 부끄러움은 남자로 하여금 ‘지배’ 충동에 빠지게 한다. 여자는 상대가 나를 지배한다고 느끼면 일치가 불가능해지나 일치를 향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 서로를 지배 혹은 통제, 소유하고자 하는 관계에 처하게 된다. 행복은 소유에서 오지 않고 영원과 묶어주는 희망에서 얻는다는 진리를 덮고자 한 것이다.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남자가 ‘남편’이라 불리는 첫 문장으로 친교-공동체의 근본적 상실을 의미한다. 성의 다름에서 인격의 우수한 점을 직감했고, 서로에게 순응하는 감수성으로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열리고 또 노출되도록 창조됐음을, 또 그들이 체험한 사랑은 서로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향한다는 의미에 눈 감은 것이다.(48과 4항) 즉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름은 이미 창조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인간이 계획하지 않은 어떤 질서가 존재함을, 상호 보완성 안에서 그 빛이 드러남을 외면한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도 타자의 몸에 대해서도 혼란을 가져왔다. 선물의 논리가 지배의 논리로, ‘한몸’의 관계가 아니라 소유 논리가 되어 높고 높은 벽이 그들 안에 들어왔다. 만약 성적 다름을 인격의 완성이라는 지평 안에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쾌락의 감각적 선(善)과 인격 상호 간의 좋은 삶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아마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성에 대한 진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 현존에 관한 질문을 안겨 준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성적으로 느끼는 부끄러움의 의미

“인간성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부끄러움은 내재적인 동시에 상대적입니다.”(28과 1항) 부끄러움은 자신의 욕망과 직결되어 양심이 불안한 상태임을, 인격 형성에 근본이 되는 자기 다스림을 위협하는 신호이다. 동양 사상에서도 수오지심을 의(義)의 발단이며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중 하나로 보았다. 지난 주(22회)는 영육의 내적 불균형으로 자기 다스림이 어려운 부분을 살폈고, 오늘은 상대적 의미로 ‘성적’ 특성 부분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부끄러움의 직접적 내용은 성적 가치이지만 간접적 대상은 한 인격, 즉 타자의 인격에 대한 한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 인간의 성은 욕망, 특히 ‘육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불균형이 잘 드러나고, 수치심의 현상으로 느껴진다. 이는 추구하는 가치가 충족되지 못한 상황에서 한편으론 가치에 대한 위협이고, 또 다른 편으론 그 가치를 보존하려는 것에서 느낀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의 본질적 특징은 성적 가치를 숨기려는 경향을 띤다. 특히 개인의 마음속에서 성적 가치가 타자에게 ‘잠재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비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랑이 부끄러움을 흡수한다’라는 사실에 의하면, 참된 부끄러움은 성숙한 사랑으로 성장할 긍정적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적 부끄러움은 사랑의 교육에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이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뱀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창세3,1-5).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는 분명 다른데, 뱀은 인간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차이점을 헷갈리게 말한다. 그들에게 금지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규명하는 하느님의 독자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열매를 따 먹었다는 것은 원래의 근원에서 생명의 물을 끌어 올리지 않고 스스로 샘이 되고자 한 것이다. 뱀의 말을 듣고 사람이 잘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더하는 말이 있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에서 ‘만지지도 마라’를 덧붙여 자신들의 말로 강조했지만 사실은 선물에 대한 의심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의 자기 증여로 창조한 그 사실에 대한 의심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안에 있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그 인간성을 의심하기에 선물과 사랑에 대한 의심이 들어왔다.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는 결핍이 무화과나무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게 했고, 인간 본성에 새로운 상태가 더해지게 된다. ‘가림’, ‘숨김’은 그들이 세상에서 온 욕망을 알게 됐음을 말한다.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다스리기 어렵고, 자신을 가림으로써 너에게서 고립된다. 다 가질 것 같았는데 자신마저도 갖지 못하는 상태다. 교리서는 이 관계에서 특히 성적 부끄러움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성의 다름을 통해 더 넓게 이루어졌던 친교가 어려워졌고, 가리고 숨김으로써 상호 소통 능력의 상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제 서로 다름을 탓하며, 책임이 ‘너’에게 있다면서 자신은 빠져나가려 한다. 상호 친교 안에서 충만함을 가능케 했던 단순함, 원체험의 순수, 아낌없는 자기 증여 능력은 포장되어 버렸다. 마치 흙 위를 아스팔트로 포장한 것처럼. 그러자 인간과 땅의 관계에도 변화가 왔다(창세 3,17-19). 그러나 완전한 절망의 상태는 아니다. 인간의 자유는 그대로 두셨고, 동물과 같이 본능에만 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사실 몸은 가시적인 세상을 초월하는 요소로, 인격으로서 인간은 이 초월에 힘입어 다른 생물들의 가시적 세상을 뛰어넘습니다.”(27과 3항)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15 제344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원초적 알몸이 지닌 의미 변화

지난 6주 동안 우리는 전례 시기에 맞춰 교리서 제3부 ‘육의 부활’ 편을 공부하면서 부활의 개념을 좀 더 선명하고 새롭게 정립했다. 이제 멈추었던 제2부 ‘마음의 구원’편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하신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가자.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한처음’과 더불어 ‘몸 신학’을 푸는 열쇠다. 간결한 문장 같지만 이 말씀의 정황과 의미는 매우 폭넓고 깊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리사이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이혼으로 우리를 ‘한처음’, 즉 창세기 1장과 2장에 옮겨 줬듯이, 이 말씀도 창세기 3장까지 올라가야만 말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한처음 인간은 기뻐하며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10)라고 고백한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다. 이는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처음으로 보인 자신들의 내적(마음) 상태와 거기에서 변화된 마음 상태를 행위로 드러낸 표현이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지각하는 마음은 도덕의 안내자로 내적 진리를 말하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고백은 두려움 때문에 두 가지를 잃어버렸음을 드러낸다. 하나는, ‘하느님 모상’에 대한 원초적 확신을 잃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왔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느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연결할 수 없게 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대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적 시각의 참여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에 장애가 들어왔고, 그로 말미암아 심오한 평화와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의 존재요 선물이 아님을, 창조된 선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 모습 그대로임을 볼 수 없게 됐다. 이는 인간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변화됐다는 뜻이다. 타자는 나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관계로 변하게 됐음을 말한다. 이는 원고독에서 타자에게 향했던 몸-인격의 통합체로서의 유일한 존엄성이 위협받는 상황이다.(28과 2항) 결국 마음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자신의 인격이 갖는 가치의 존엄성도 타자의 존엄성도 위협한다. 몸으로 표현되는 하느님 모상인 그의 초월적 조직의 ‘일부’가 명백히 땅의 지배에 놓이게 된 것이다.(27과 4항) 이 사실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품위, 피조물임에도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게 그분의 상대인 ‘너’로, 곧 책임 있는 주체이자 당신과 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반자로 부르신 그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절대성에 참여하도록 인도한 그것을 땅에 묶어버린 것이다. 언뜻 보면 부끄러움은 어떤 외적인 사실이나 마음과 감정의 상태를 감추려는 경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분명 인격과 관계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은 인격의 존재가 내적이라는 사실, 인격은 자기 고유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격과 결부되어 있는 부끄러움은 인격의 성장과 그 궤를 함께한다. “제가 알몸이기에 두려워 숨었습니다”라는 원초적 부끄럼은 그 자체 내에서 몸이 일으킨 구체적 굴욕의 표징들, 즉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 상황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내 자신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고 말했다.(「고백록」 VIII, X, 22)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08 제3445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부활에 관한 주님 말씀은 몸의 계시를 완성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부활을 믿었던 바리사이적 해석 유형을 완전히 넘어선 새로운 ‘몸의 계시’를 완성했다. 죽음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생 굽이굽이를 거치면서 ‘잘 살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할 뿐이다. 가끔씩 마주치는 이 고민이 죽음의 진리에 자신을 놓는 성숙한 주체성을 갖게 한다. 그리고 복된 전망을 향해 신성한 진리를 갈망하고 엿보게 된다. 결국 해결되지 않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도전처럼 하늘을 향한 문을 여는, 즉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해 열리고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인식,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STh.,II-II,q.1,a.6)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인간이 일시적이고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하느님을 말함)에 일치하기를 갈망하는 것에서 드러나고, 현실에서 인간을 상승시키는 단계로 작용하여 사물의 해방을 넘어설 수 있는 경향을 얻게 한다. 여기에서 얻어진 체험은 지상 삶에서 그 어떤 일치보다 앞에 둔다. “오라”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네, 갑니다”라는 인간의 적극적 응답이 삶에서 드라마틱하게 일어나고, 그러한 삶은 자신의 모든 것에 중심이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진리를 매일 타자를 향해 전달하려 한다. 그것이 곧 사랑(Amor)에 응답하는 삶이다. 이런 사랑의 전달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역사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희망을 낳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타자의 삶에 주체로 들어가는 변화를 겪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희망과 선은 미래에만 유효하고, 오로지 희망을 품고 있는 그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제한적으로 보았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희망을 사랑이라는 덕행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사랑의 보편성에서 희망의 보편성을 끌어낸 것이다. 부활은 삶과 죽음의 주관자인 하느님의 개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부활’에 관한 답은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틈은 사라졌고, 죽음과 삶, 허무와 존재가 새롭게 연결됐다. 그래서 종말론은 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격에서 시작된다. 구원을 개인의 이기주의 충족이 아닌 인격적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그분을 향해 돌아서야 하는 이유요, 오늘 내 삶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한은 끊임없이 무한을 알려고 한다. 유한이 무한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무한이 품고 있는 속성, 곧 ‘사랑’으로 가능하다. 사랑은 유한에서나 무한에서나 같은 속성이고,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 저곳에서 열매로 드러난다. 이 땅에서 유한인 우리는 불완전할 수 있지만, 그날을 맞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몸의 혼인성은 무한을 향해 열려 있고, 그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어떠한 성소의 길을 가든 예외는 없다. 모든 이가 전 생애를 통해 부활 상태의 몸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응답의 삶이요 아름다운 파스카적 삶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기능이 다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로 부르심이요, 완성을 위한 전 존재의 부름이다.(「사목헌장」 18항 참조) 인간은 두 가지 차원, 즉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존재와 실존 모두를 하느님께 기원을 두며, 하느님께서 존재하길 원하시고 유지하고자 하시기에 존재할 수 있으며, 부활로 부르시는 그날 자녀로서 되돌아간다. 영원하고 유일무이한 ‘오늘’로 들어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천사들과 같아져서…”의 의미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6)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천사의 본성으로 변화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부활 후 인간의 본성이 천사처럼 된다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다. 반육화되거나 비인간화된다면 그것도 부활은 아니다. 이 말씀 전후에서 드러나는 부활의 진리는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만의 상태가 아님을 명확히 하며,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인간 본질을 회복함을 뜻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고, 고통과 시련을 거치면서 하느님과 같은 신성(영)이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영의 힘은 인간의 본성을 영화(靈化)로 이끈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영에 대한 몸의 새로운 순종을 의미한다. 영화는 주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울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부활은 세속적인 시간 안에서 죽음에 종속되었던 인간의 육체성이 참된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66과 5항) 교리서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순간 일어나는 영화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들여다봐야 막연한 부활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내는 선택과 결정을 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육에서 오는 것과 영에서 오는 것의 대립을 어둠에서 빛이 들어올 때까지 수없이 체험하지만, 영의 영향권에 있는 곧 ‘종말의 인간’은 그 대립에서 자유로워진다. “‘영화’란 단순히 영이 몸을 다스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는 영화를 영이 몸에 완전히 스며들어, 영의 힘이 몸의 에너지로 스며드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67과 1항) 스며들어 생명의 힘이 확장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한다. 영이 받은 사명이다.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상 삶에서 일어나는 대립과는 다른, 몸에 대한 영의 결정적 승리를 말한다. 완전한 참여로 이루어지는 영화다. 교황은 부활한 이들이 갖는 ‘몸의 영광’을 ‘신화된 영화’의 종말론적 결실이라 말한다. 교황은 이 상태가 ‘한처음’과는 다른 차원이라 한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 한처음의 상태를 회복하는 정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완성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의 상태를 넘어 신화(神化)의 상태에 이른다. 그 모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만날 수 있다. 제자들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르기 전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부르자 바로 ‘주님’이라 고백했다. 이어지는 부분과 변화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신이지만 인간은 영에 의해 영화됨으로서 신화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 1136항) 영은 성령을 말하고, 종말론적 인간은 성령의 힘이 몸에 스며들어 삼위일체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영이 그 반대되는 세력들과 대립을 거치면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영적 앎이 진·선·미로 성장된다. 결국 신화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특징을 가진 친교로 이루어진다. 교리서 66과 6항은 이렇게 정리한다. “사실 부활의 진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은 몸으로부터 분리된(플라톤에 따르면 ‘해방된’) 영혼만의 상태로 이해할 수 없고, 결정적이고 완전한 통합을 특징으로 하는 몸과 영혼의 일치를 통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통합된’ 인간 상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글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마르 12,25)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를 불러올 말씀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는 말씀이 이어진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인간에 대해 깊고 일관된 내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 내적 진리가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이성과 체험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지성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빛을 받는다면 초본성적인 힘에 의해 그것을 관조할 수 있다. 물론 육체를 지닌 인간 상태로서 그 한계를 넘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이 세상에서 체험되는 몸의 경험은 하늘나라에서 체험할 몸의 경험을 알기 위한 토대와 기초를 제공받는다. 즉 한처음이 현재와 관련 있듯이 미래 또한 현재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됐고(창세 1,27 참조), 서로 다름 안에서 “한 몸이 되리라”(창세 2,24)는 섭리가 있었다. 저 세상에서 새롭게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완성에 속한다. 이 세상에서 상호 자기 증여를 표현하는 부부 행위는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열림을 가져온다. 이 행위는 신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다. 그래서 번식 능력이 주어졌고, 출산의 축복을 통해 충만을 이룬다. 그러나 저 세상은 이미 축복과 충만의 상태임으로 출산을 통한 충만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그 스스로에 관한 진리가 무엇인지 다루고 있다는 사실, 즉 남자와 여자의 진리를 출산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 역사가 구원의 신비로 가득하고, 그 신비가 완성되는 부활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몸이 지닌 혼인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의 진리에서 ‘혼인적’ 혹은 ‘혼인성’의 의미는 혼인과 출산 그 자체에만 결정적 의미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몸의 혼인성은 직접적인 혼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내어주는 인격성의 관계로 여러 종교에서나 사회 안에서 여러 형태의 영적 낳음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세상에서는 몸의 혼인성이 완성됐기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리서 69과 4항 본문 마무리 부분에서는 혼인성의 아름다움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곧 부활한 미래의 삶에서 몸이 지닌 ‘혼인적’ 의미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격이라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들 간의 친교에서 실현된 그 이미지에 완전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존재하는 것의 그 ‘혼인적’ 의미는 완벽하게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인 의미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의 뜻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지는 문턱에서 몸의 영화가 이루어짐에 더 머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변화하는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인격인 인간 존재와 남자와 여자의 몸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분명히 하는 통합된 인간 진리의 새로운 문턱을 넘기 위해서다. 에페소 서간 5장 30절과 31절에서 “한 몸이 된다”가 다시 소환됐고, 그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선명히 계시됐다. 땅에서 유한한 존재였던 인간은 몸에 쓰인 혼인성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영원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없어지거나 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하느님은 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밝히고 소통한다. 모세에게도 그랬다. 모세는 호렙산의 타오르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 존재를 인식하고, 더욱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적극적인 자세) 이때 하느님은 모세를 불렀고, 모세는 응답했다.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어떤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큰 타자에 의해 부름 받고 응답하는 주체이다. 그리고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듯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망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 건너간다. 모세는 하느님께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는 사명과 파견을 듣는다. ‘내가 어떻게?’라는 질문에 하느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라 계시한다. 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는 분명 죽었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산 자, 즉 죽음의 문을 통해 살아있는 하느님께 들어감으로써 산 자가 됐음을 뜻한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께 닿았고, 그들을 위해 모세가 해야 할 사명과 파견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을 불러오고,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 밖에 있지 않았고, 모세는 역사적 상황 안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세 측면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살아있으며 직간접으로 소통하는 형상이다. 예수님에 의해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다시 불러오고 확인된다. 그리고 덧붙이길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죽음은 그 사람의 존재 안에 부활한 생명이 있음을, 그 생명이 하느님 안에서 변화하는 구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죄로 인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죽음에 두지 않고 인간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생명의 실재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워진 계약은 인간이 죽음으로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두가이들에게 한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 죽음 이전 상황이었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거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부활에 대한 통합적 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물질적인 몸으로ᅠ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 우리 모두 죽지ᅠ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44) 부활은 인간에게 역사의 차원을 벗어난 저 세상의 이야기고, 하느님 편에서 주도하는 일이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으론 수용이 다 되진 않는다.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는 생물학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음을, 죽은 이가 무(無)로 추락하지 않고 본래적 실재인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지혜 2,3: 16,13 참조) 누구도 이름을 붙여 소유할 수 없는 그분인데, 누구도 언급할 자격이 없는 그분인데,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라 다가오셨다. 해방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온전히 신뢰하고 그 신비에 들어갈 때 선물이 된다. 매년 부활초에 ‘알파요 오메가’를 쓰고 듣고 찬양하는 이유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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