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맞선 국민, 침묵에 빠진 교회…예언자적 소명 실천 아쉬워
반공주의라는 이념적 목표를 공유하며 연대했던 이승만 정권과 한국 천주교회는 6.25 전쟁 이후 점차 사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장기 독재에 대한 야욕이었습니다. 장면 총리가 이승만 대통령의 대안으로 부상하자, 그는 곧 이승만의 정적으로 간주되었고, 장면을 지지하던 천주교회 역시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회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은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적인 부정 투개표로 점철된 이 선거에서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고, 장면은 낙선했습니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4·19 민주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몰락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고조되던 중, 마산 해변가에서 16세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최루탄에 맞아 처참한 모습이 된 어린 학생의 주검을 본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의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4월 15일, 마산 시위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며 폭력과 억압을 통한 통치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사태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 “장면과 그를 지지하는 천주교 세력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4월 19일, 서울에서는 약 3만 명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수천 명은 경무대로 몰려들었습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고, 같은 시각 전국 주요 도시에서도 수천 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가세했으며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연일 이어진 전국적인 시위 끝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몰락했고, 하야한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노기남(바오로) 주교는 서둘러 교황사절 람베르티니 주교를 찾아가 당시 상황을 설명했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폐간됐던 경향신문을 즉시 복간시켰습니다. 이승만의 하야 발표 이후, 시민들은 경향신문 깃발이 나부끼는 노기남 주교의 자동차를 향해 ‘경향신문 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소극적인 천주교회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진 4·19 민주혁명의 과정에서, 천주교회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상황과 관련한 가톨릭시보의 보도는 1960년 5월 1일, 8일, 15일자 등 총 세 차례 게재되었습니다. 4월 19일 서울의 시위와 유혈 사태에 대해, 5월 1일자 가톨릭시보는 4면 톱기사로 「조국과 동포에 (대한) 참사랑은 이런 때에...」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4월 19일, 서울 거리를 휩쓴 ‘학생 의거’ 사건이 벌어지자, 학생회 지도신부인 아오스딩 나(羅相朝) 신부와 동성중학 지도신부였던 바오로 최(崔爽浩) 신부, 그리고 가톨릭대학 지도신부이며 전 학생회 지도신부였던 방지거 박(朴稿安) 신부는 학생들의 뜻하지 않은 변사를 염려하여 그들의 임종을 돕고 영혼을 구하고자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종횡무진으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약하여, 많은 영혼들에게 마지막 위로를 주는 한편 천국으로 인도하였다.”
가톨릭시보는 이어 “노 시몬 군의 장례미사 거행”이라는 제목으로, 시위 도중 사망한 동국대 노두희(시몬) 군의 장례미사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미사는 4월 23일 명동성당에서 노기남 주교 집전으로 거행됐습니다.
단편적이나마 가톨릭시보의 보도 내용을 통해 미뤄볼 때,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가톨릭학생회가 시위에 동참하고, 각 학교의 지도신부들이 이들을 돌보며 지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노기남 주교가 시위 도중 희생된 학생의 장례미사를 직접 집전한 것은 4·19 민주혁명에 대한 일종의 지지 입장을 드러낸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일선 본당의 신자들과 수도회 등에서는 부상자를 위문하고 모금 활동을 벌이는 등 여러 방식으로 지원에 나섰습니다.
이처럼 교회 내 활동들이 가톨릭시보를 통해 일부 보도되었지만, 교회 당국이 당시 정치 상황과 다수의 희생자를 낳은 불의하고 참담한 현실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4월 한 달 내내 독재 정권의 광기로 온 나라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교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가톨릭시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정교 분리’를 내세운 침묵
교회의 소극적 자세는 5월 8일자 가톨릭시보 1면 사설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근본원칙 – 국가는 공동선을 통한 인간완성의 수단이다’라는 제목의 이 사설은 해묵은 정교분리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첫째, 모든 국가는 적어도 교회에 반항하는 정치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도우며 상호 협조해야 한다. 둘째, 모든 국법은 신법인 자연법에 거역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셋째, 신자인 국민에 대하여 국가 명령과 교회 명령이 서로 상충될 경우, 교회 명령이 국가 명령에 우선한다. 넷째, 국가는 교회의 초자연적인 복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정치에 있어서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언뜻 보면 국가는 교회에 간섭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지만, 특히 네 번째 항목은 교회가 국가와 사회의 중요한 사안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사설은 이 네 가지 원칙에 앞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는 백성의 구령 문제가 국가의 침해를 받을 경우, ‘예외적’으로 정치에 간섭할 권한을 가진다. 물론 이 간섭은 ‘교회적인 방법’에 의한 ‘간접적인 간섭’을 의미한다.”
결국 이 사설은 교회의 생존과 확장이 최우선적인 가치이며, 국가가 이러한 교회의 권익을 보장하는 한 교회는 기존 체제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변명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수용하고 체득하면서 독재 정권과의 지난한 싸움에 나섰고, 사회 정의와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실천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정교분리 원칙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4·19 민주혁명은 교회가 자신의 예언자적 소명을 자각하기 시작한 첫 발걸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